※ 주의 : 스포 가득.



#2 우리는 자기도 자기의 마음을 모른다

종수는 해미를 정말 사랑했을까.
그렇다면 경찰에게 해미를 찾아달라고 했을 것이다. 살해된 것 같다고, 저 사람이 수상하다고 신고했을 것이다.

종수가 벤에게 "해미를 사랑한다구요"라고 말했던 것은 ㅡ어쩌면 자신의 적의가 정당한 분노라고 믿고 싶어서ㅡ 사실인듯 조작된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종수(유아인)와 벤(스티븐 연)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 벤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유하게 살고 있고, 제러너스하고 젠틀하기까지 하다. 종수 같은 청년이 꿈꾸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종수는 자신의 삶의 조건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다.(이창동)]

ㅡ> 오히려 벤에게 느낀 위화감, 부러움, 시기, 질투심, 열등감, 알 수 없는 분노, 그러니까 원한- 과도 같은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그를 조종했던 것은 아닐까.

[종수의 눈에 관객이 좀 더 이입이 된다면 조금은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종수는 무슨 글을 쓸까?'라는 질문이 나올 텐데 (이창동)]

ㅡ> 종수의 눈에 벤이 <좋은 사람으로> 보였을까

말하자면 벤이 해미를 죽인 범인이다, 그는 사이코패스다, 연쇄살인마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 각자의 주관적인 <신념>이다. 종수가 확신하며 집착한 의심들은 실은 자신의 망상일 수 있다.

이를테면 영화 <버닝>에는 각기 상이한 수 많은 스토리가 존재한다. 만약 현실적인 영화보다 선악의 이분법적인 스토리를 더 선호하는 관객이라면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그것이 현실이든, 종수의 소설에서 구현된 상상이든) 폭력에 대해서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아픔이나 슬픔, 연민, 그런 감각이 없다).

'살인'을 보면서도 오히려 <대리만족>을 느끼며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닌 어떤 것으로 이미 대상화 되었기 때문이다.

#3 그것에는 그것이 없다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는 것과 우리가 세상을 이미지로 보는 것은 다르지 않다.
현대인은 미디어로 세상을 이해한다.
손바닥에 스마트폰을 놓고 틈만 나면 뉴스를 검색하고 자신이 사는 모습을 과시하거나 한편으로는 남들의 가십에 탐닉한다. 그런데 방송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남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언론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전해들은 <소문>이다.

선하다고, 또는 악하다고 믿는 것에는 믿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 내가 늘 이 세계에서 느끼는 실감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다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툼이 있는 곳에서는 ㅡ> 어디서든 예외없이 자기는 선하다고, 상대는 악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것에는 그것이 없다.

해미는 일곱살 때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종수가 구해줬다고. 종수는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어렸을 때 일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나보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해미의 가족들에게도 물어보고 오래된 마을의 어르신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런 우물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6년 만에 만난 종수의 엄마는 우물이 분명 있었다고 말한다.

누구 말이 사실일까. 누구의 기억이 진실일까.

[난 '버닝'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현실에서 일탈하기도 하지 않나. 그럼에도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는 텅 비어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크린에 빛을 쏘면 형상이 나오지만, 그건 빛이 만드는 환상일 수도 있다. 실제 영화 매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비닐하우스'처럼 뭔가 형상이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아무것도 없다. 농사를 짓고 있을 때는 뭔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비어있지 않나.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기보다는 이런 속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관객은 이런 것(내 의도)까지는 몰라도 상관없다. 느끼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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