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홍정욱 에세이
홍정욱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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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 쓴 책은 일단 패스가 기본이다. 본인이 썼던 대리로 부탁했던 자화자찬이기 십상이다. 사실 책 내용은 상관없다. 목적은 후원금 모집이니까. 홍정욱이 책을 냈다. 그는 한 때 젊은 사장으로 큰 위세를 누렸고, 그 위세를 몰아 국회의원까지 했다. 유명 영화배우의 아들에 하버드 대학 출신이라는 아우라도 한몫했다. 그러나 그가 돌연 의원출마를 포기했다. 모두가 의아했다. 그대로 정치권에 머물렀더라면 탄탄대로를 걸었을 텐데. 최근 홍정욱이 다시 검색어에 올랐다. 딸 문제 때문이다. 마약 소지 혐의였다. 지지자들은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저 그런 자서전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끝까지 다 읽었다. 홍정욱은 보기 드물게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헤럴드를 인수하여 겪은 갖은 고초, 낯선 동네에서 출마하여 당선된 국회의원의 비하인드, 그리고 딸에 관련된 이야기까지. 만약 그가 쓴 내용이 사실이라면 홍종욱은 한국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정직한 정치인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게 부담된다고 하지만 이미 그가 살아온 삶 자체가 정치다. 곧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삶이다. 언젠가 귀하게 쓰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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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고쿠 쿄주로, 나는 나의 책무를 완수한다. 마음을 불태워라 


일본 문화의 원형


귀멸의 칼날 전 시리즈를 몰아서 다 보았다. 극장 판을 먼저 봤기 때문인지 살짝 위화감이 들었다. 특히 귀살대 맴버중 한 명인 렌고쿠의 비중이 확연히 달라져 놀랐다. 극장에서 볼 때는 거의 주인공급이었는데 정작 본편에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어서다. 마치 영화 개봉을 위해 숨겨둔 카드라고나 할까?


여하튼 중요한 건 만화에도 일본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공전의 히트를 친 슬램덩크나 원피스, 혹은 에반게리온이 자기 영역을 고수했다면 귀멸의 칼날은 대놓고 니뽄을 선전한다. 여기서 니뽄은 제국주의의 첫발을 내딛던 시기를 말한다. 흔히 말하는 현대일본의 특징은 이 때 비로소 정립되었다. 곧 사무라이를 고유의 정신으로 계승하여 군국주의 색채를 입힌 것이다. 귀멸의 칼날 귀살대가 초기에는 정통 의복을 입다가 본격적으로 귀신 토벌에 나서면서 군복으로 갈아입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 군복은 우리에게도 익숙한데, 그 이유는 한동안 교복으로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포일러에 해당되지만 적진을 향해 뛰어들어 죽음을 불사하는 렌고쿠는 가미가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탄지로 귀걸이의 욱일기 문양은 말할 것도 없다.


문화는 생각보다 끈질기다. 사실은 누군가의 의도로 정착된 것이라고 해도 바꾸려고 하거나 문제를 지적하면 거부감이 심하다. 원형을 따져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하게 제정된 것임에도. 귀멸의 칼날은 일본의 전통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낡고 어이없는 것인지 잘 보여준다. 개인은 없고 집단만이 세상의 중심이며 한번 충성을 맹세했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따라야 한다는 야마도 정신이 백년 정도의 역사밖에 안 된다는 걸 일본인들은 알고 있는지? 문제는 그 정신이 대중문화의 형태로 반복 재생산된다는 사실이다.


정직하게 말해 우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소위 한국전통이라고 하는 것들 대부분은 조선시대 성리학에 기반한 유교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제사문화는 대표적인 예이다. 가문을 중심으로 한 파벌은 오늘날까지 사회 온갖 구석에서 이어지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다. 고위 공직자뿐만 아니라 연예인들에게까지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것도 바로 유교문화의 잔존물이다. 원래 남의 눈 티는 잘 보이는 법이다. 렌고쿠와 탄지로의 멋진 모습을 보고 반해 그 정신마저 숭배하게 되는 걸 걱정하면서 우리의 치부에는 눈감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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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신을 맞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부 부작용이 있더라도 얻는 이득이 훨씬 크다. 그러나 아스트라제네카 접종 이후 부작용이 잇따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게다가 같은 방식의 얀센마저 동일한 증상, 곧 혈전이 발생하면서 마음을 굳혔다. 


에이지(AZ) 백신은 맞지 않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치명적인 하자가 있기 때문이다. 곧 사소한 부작용이 아니라 심각한 질병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 이득의 크기도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코로나 19가 병으로 연결될 가능성과 만에 하나 에이지 백신을 접종하고 나타날 문제 사이에는 등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 다 확률 문제지만 분명한 건 하나는 대비가 가능하지만 다른 하나는 불가능하다. 곧 코로나는 예방할 수 있지만 접종후 부작용은 피하지 못한다. 일종의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 상황이 된다. 


가장 좋은 대안은 아스트라제네카를 보류하고 화이자나 모더나로 접종할 수 있을 때까지 예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과연 정부가 그 기간동안 충분한 백신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지만. 이 글을 쓰는 오늘(2021년 4월 15일) 덴마크 정부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영구 접종 중단을 선언했다. 보건 담당자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매우 드물지만 중대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으로 혈전이 생길 가능성은 4만 명 중 1명꼴이다” 


그동안 우리는 강압적인 거리두기와 과학적 확신으로 국민들을 길들여왔다. K 방역 운운하던 정부의 정책은 그렇다 쳐도 과연 의사를 포함한 과학자들이 제대로 된 의견을 내고 있는지도 의심이다. 이제 진짜 전문가들이 답할 차례다.


기사 출처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3&oid=584&aid=0000013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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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얘기는 자신만 재밌다. 본인이 아무리 흥미 있다고 해도 듣는 이 모두가 공감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잘 모르는 이들은 왕따를 당한다. 혼자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는 욕을 먹는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드러내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의 진심을 안다. 아, 진짜 불행한 상태구나. 도와줘야겠다. 라는 마음이 절로 드는.


이빨이 계속 말썽이다. 부러진 앞니를 완전히 제거하고 임시로 의치를 끼워 넣었는데 빠졌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 사과를 요령껏 돌려먹다 그만. 다 내 탓이다. 억지로 다시 맞추었지만 계속 빠진다. 다음 치료까지 두서너 달은 버텨야 한다고 했는데 난감하다. 울적한 기분을 풀어보려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하필 왜 지금? 오늘 일기예보를 어제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사람 마음이란 간사해서 지금은 화가 난다. 바깥이라도 나가 햇살을 쬐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간절해진다.


글을 쓴다. 최악은 아니지만 최선도 아니다. 어차피 넋두리리가 될게 뻔하고 혹시 이 글을 읽는다면 기분이 처질 테니까. 마치 코미디 프로에서 가족사를 떠올리며 질질 짜는 꼴이랄까? 안다. 나도,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이렇게라도 기록해두지 않으면 우울한 느낌이 거머리처럼 계속 들러붙을 것 같아 글 속에 가둬두는 것이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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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직업병이다. 잘못된 문장을 보면 바로 잡고 싶어진다. 딱히 비문은 아니지만 읽는 내내 거슬릴 때도 있다. 원인은 부사다. 곧 꾸밈말을 자주 쓰는 글을 보면 기름진 음식을 먹고 소화가 되지 않는 것처럼 속이 부대낀다. 정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그리고 살짝 미소지었다,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부사는 수동태보다 더한 비겁한 말이다.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말할 자신이 없을 때 대충 둘러대는 표현이다, 유독 일본 작가들이 부사를 많이 구사하는데 우리나라 작가들도 못지않다. 직업적으로 혹은 전문적으로 글을 쓰고 싶으신 분들은 부사부터 줄여야 한다. 그 말을 대신할 다른 단어나 수사를 개발하다보면 글은 저절로 는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헤밍웨이가 늘 하던 발언이다.


예로 든 두 문장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것이다, 나는 늘 그가 과장된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노벨문학상 위원회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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