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
나, 다이엘 블레이크
연대와 투쟁만이 살 길이다
켄 로치처럼 일관되게 자기 작품 세계를 이어간 영화 감독도 드물다. 어쩌면 지나친 반복 혹은 천편일률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회적 약자가 주인공이다. 그에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긴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마찬가지다.
심장질환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다니엘. 그에게는 아무도 없다. 부인은 치매로 사망했고 슬하에 자녀도 없다.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구직활동을 해야 함은 물론 증명까지 해야 한다. 당장 이 짓거리를 그만두고 의료지원을 받고 싶은데 담당관은 직장을 구하는게 우선이라고 다그친다. 그는 실업자의 삶을 살면서 돈도 돈이지만 자존심이 점점 깎이고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하루를 견뎌내는게 더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애 둘 딸린 미혼모를 만나 도와주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난다고 했던가? 둘은 친아빠와 딸처럼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지만 경제적 파국앞에서는 더이상 견뎌내기 힘들다. 결국 여자는 몸을 팔기까지 한다. 방송대를 다니며 다시 재기하겠다는 다짐은 어느새 헛소리가 되고 다이엘은 무력감에 눈물을 훔친다.
로치는 참 잔인하다. 희망의 여운을 살짝 비치고는 당장 거두어들인다. 관객들이 원하는 따뜻한 결말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망치로 내려찍는다. 영화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임을 격렬하게 보여준다. 단 한번의 스트라이크로 주목을 받게 된 다이엘이 드디어 의료신청자 자격을 받게 되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 같던 그 순간에도 그를 심장마비로 쓰러뜨린다.
아마도 이 작품은 켄 로치의 최후의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 칸에서도 이 사실을 미리 감지하고 일종의 공로상 자격으로 작품상을 안겨주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 영화는 과거 연출과 달리 다소 밋밋하며 상투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사회성 영화가 반드시 관객의 피를 끓게 할 필요는 없다. 현실과 공감하게 하는게 우선이다.
<나 다이엘 블레이크>는 켄의 경험이 잘 담겨있다. 그는 감독이라는 자유로운 직업때문에 실업수당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노조의 파업으로 직접 구직신청을 하러 다닌 적이 있다. 그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 듯 싶다. 마치 패잔병들의 집합소 같았던 그곳에서 실업자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심사관 앞에서 굽실거려야한다. 쥐꼬리만한 돈을 받는 동안에도 2주에 한번씩 나와 이런 저런 구직활동의 증거를 들이밀어야 한다. 만약 취업이 안되었다면 왜 그런지도 취조(?)받는다.
물론 제도를 악용하여 돈을 타먹는 사람도 있다. 영화속에서 다이넬도 면접을 보라는 연락을 받지만 질환때문에 갈 수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다니엘처럼 피치못할 사정이 있다. 정말 실업수당을 타며 평생 놀고먹겠다는 사람은 단연코 단 한 명도 없다. 왜 그렇게 잘 아느냐고요? 내가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정확하게 말하면 잘리고 직업안정센터를 찾아 그곳에서 요구하는 온갖 굴욕을 견딘 대가는 두 달 합쳐 오십 만원 남짓 되는 수당이었다. 언제가 이 경험을 기필코 글로 쓰겠다고 다짐했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인생은 리그제가 아니다. 노력한다고 승격하거나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누구라도, 그 어느 기관이라도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돈 몇 푼 쥐어주며 인격을 짓밟고 '너는 게으름뱅이 쓰레기야'라고 말할 자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