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비
미야시타 나츠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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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을 그만둔 다음날 아침 나는 관악산에 올랐다. 이런 저럼 상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산에 올라 후회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해 온몸이 흠뻑 젖기도 하고, 생각보다 험한 한라산에 하산 내내 욕만 늘었고, 길을 잘못 들어 조난을 당할 뻔 하기도 했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살아있음을 느꼈다. 


문제는 산을 다녀오고 난 저녁이었다. 애써 잊었던 고민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다른 일을 구할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간다고 할까? 당장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지? 그 중 가장 큰 고민은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습관이란 무서워서 마치 군대 기상나팔처럼 오전 6시 무렵이면 눈이 번쩍번쩍 뜨이는데 내가 갈 직장이 없다니? 


<조용한 비>를 읽으면 한동안 잊었던 그 때 감정이 떠올랐다. 웬일로 아침부터 대표가 오더니 전 직원을 모아놓고 한마디 한다. 올해를 끝으로 회사를 정리하겠다. 유키스케는 퇴근길에 붕어빵을 사먹는다. 한 입 먹고 어라하고 멈춘다. 이거 멋있잖아. 그렇다. 회사가 망해도 지구가 멸망해도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배주변이 근질근질하니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그의 방황은 뜻밖에 손쉽게 직장을 얻는 바람에 끝이 나지만 붕어빵 여주인과의 사랑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덧붙이는 말


일본인들만큼 조용하다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국민이 있을까? 어느 글에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하루키도 종종 사용한다. 심지어 이 책의 제목은 조용한 비静かなあめ 다. 일본사람들은 시즈카나라는 말만 들어도 왠지 감상에 젖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선호하지 않는다. 매우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곧 조용한 상황을 다르게 표현할 줄 알아야 장인이다. 예를 들어 조용한 비는 빗소리 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빈 방이라는 식으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아무리 문학적 표현이라고 해도 조용한 비는 세상에 없다. 비가 내리는데 어떻게 소리가 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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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는 거 아닌가? - 장기하 산문
장기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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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학과 졸업이 장기하 음악인생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장기하를 처음 티브이에서 봤을 때 충격이었다. 텁수룩한 마리에 까칠한 수염, 주절거리듯 노래하는 그를 보고 뭥미? 이른바 88만원세대를 대변하는 듯했던 그의 정체는 금세 탄로났다. 서울대 출신에 번듯한 구체적으로 강남 태생. 그럼 싸구려 커피는 거짓말이었나? 그건 군대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아, 위대한 대한민국, 군은 절대평등사회구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릴 것 같았던 그의 인기는 어느 순간 다시 활활 타올랐는데. 열애설 덕분이다. 상대는 무려 아이유. 와우 에스대 사회학과는 괜한 백이 아니었구나. 그런 그가 책을 냈다. 당연히 호사가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는데 결과는 맹탕. 마치 진한 술을 기대했는데 맹물을 잔뜩 부어 술인지 물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듯하다. 굳이 열애 이야기를 해달라는 건 아니다. 왜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가? 아무리 연재물을 모은 책이라 해도 록 스피릿은 살아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웬 뜬금없이 라면에 냉장고에 피아노 제대로 배우지 못한걸 후회하는가? 잘 못 쳐서 좋다는 건 또 뭔가? 


그러다 깨달았다. 이 사람은 음악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엘리트주의가 더 강하구나. 어리석은 자신을 드래내기 보다 자기합리화의 귀재구나. 스물한 살 이후 음악 외에 하고 싶은 게 별로 없었다면서 꾸역꾸역 대학을 졸업한 이유는? 그가 직접 말한 것처럼 간판도 중요하니까? 그러나 이건 이율배반이다. 한창 기타를 배울 때라 학교 가는 시간이 아까워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때려치웠다는 서태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심지어 더 일찍 그만두었다면 더욱 음악에 매진했을텐데라고 아쉬워하는, 혹은 마왕이라 불리며 미루고 미루다 겨우 서강대 철학과를 마친 신해철은 아니더라도. 다음에 혹시 책을 또 낼 생각이 있다면 그 때는 진짜 솔직히 이야기해보자.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이 장기하씨의 음악인생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음악외적인 건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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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게 범죄 - 트레버 노아의 블랙 코미디 인생
트레버 노아 지음, 김준수 옮김 / 부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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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게는 어떤 악한 의도도 없었다


습관처럼 그래미상 시상식 티브이 중계를 보고 있었다. 배철수, 임진모의 티카타가가 재미있어서다. 비티에스가 수상하지 못했다는 소식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음악 쇼다. 진행자는 쉼 없이 떠들고 있었다. 미국식 유머가 재미있을 턱이 없다. 아무리 번역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코미디 빅리그를 보며 박장대소할 미국인이 있을까? 그런데 배씨 아저씨가 특이한 소리를 한다. 저 친구 되게 웃겨요. 책까지 냈다던데. 태어난 게 범죄라 뭐라나? 그 말을 새겨들은 나도 대단하다. 방송이 끝나고 물어물어 찾아냈다. 그리곤 잊어버렸다.


오늘 처음 들쳐보았다. 재미있었다.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는지도 바로 알았다. 트레버 노아는 진짜 태어난 게 범죄였다. 남아공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결혼하면 감옥에 간다. 남자는 5년, 여자는 4년. 정말 엿 같은 세상이었겠다. 다행히 지금은 아니지만. 이 책은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훈계조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를 들면 강아지. 애지중지 키우던 개가 어느 날 울타리를 넘어 다른 집으로 갔다. 우여곡절 끝에 개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그 집 아이는 자기 개라고 우긴다. 이런 X같은 일이. 급기야 어머니까지 출동하여 사진과 증명서까지 내밀고 경찰을 부르겠다고 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다. 사태는 희한하게 풀렸다. “좋아요. 그럼 100랜드(우리 돈으로 8000원 정도)를 줄게요.” “그럽시다” 그 아줌마도 동의했다.


트레버는 안도감과 함께 배신감이 들었다. 자신을 찾아온 주인에게 반갑다며 당장 달려올 것 같던 강아지가 태연하게 잘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피가 나를 두고 다른 아이와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 이 일은 트레버에게 가치 있는 교훈을 남겼다. 푸피는 밖에 나가 자신의 삶을 즐겼을 뿐이다. 개에게는 어떤 악한 의도도 없었다. 나는 푸피가 내 개라고 믿었지만,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푸피는 그냥 한 마리의 개였다. 우연히 우리 집에 살 게 되었을 뿐이다.


이 글을 읽고 깊이 감동했다. 가슴 속에 있던 응어리가 풀린 기분이었다. 3년 가까이 어머니 집에는 강아지가 있었다.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는데 원래 주인이 가져갔다. 그렇다면 차라리 맡기지 말지. 한동안 어머니는 그 개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는 아무 말도 안 하신다. 걱정이 되어 개가 잘 있냐고 물어도 그 집에서 편안하게 지낸다고 앙칼지게 대답하신다. 우리 집 개가, 정확하게 였던, 다른 곳에서도 행복하게 산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였다. 이제 알았다. 그 개는 그저 개였으며, 우연히 우리와 함께 했을 뿐이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모두는 주어진 상황에서 맺어졌을 뿐이다. 상대도 나와 같은 마음일 꺼라고 생각하는 순간 상처 입는 사람은 본인이다.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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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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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의 오랜 팬이다. 단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훨씬 더 좋아한다. 그의 소설은 여전히 내게 거북하다. 그나마 조금 친근하게 다가온 건 IQ84이후였다. 그 전까지는 실험성이 너무 강했다. 반면 수필은 처음부터 좋았다. 이른바 어깨에서 힘을 빼고 독자와 밀당하듯 하는 글 솜씨가 탁월했다. 일인칭 단수는 초기 하루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부드러운 섹스 신을 넣어 남자는 물론 여성층까지 사로잡는 기술이나 특기인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하여 은근히 자기 지식을 자랑하거나 자신이 나고 자란 동네의 풍경, 곧 항구너머 바다가 보였다 사라지는 고갯길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반가운 건 진구구장. 무라카미가 하도 많이 언급해서 언젠가 가본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다. 이 책은 그가 별 볼일 없을 때부터(?) 팬이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소중한 선물이다. 거장이 되었다고 몸에 힘 빡주고 거드름 피우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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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단편전집, 개정판 카프카 전집 1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주동 옮김 / 솔출판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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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홍씨 친형 관련 뉴스를 보고 불현듯 변신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해 있었다라는 충격적인 첫 문장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결말은 어땠는지는 아리송하다. 벌레로 살다 죽었나 아니면 가족들이 살려주었나? 제대로 된 번역본을 보기 위해 솔 출판사에서 낸 변신 단편 전집을 골랐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추 비슷하다. 찬찬히 읽어나갈수록 내 기억과 달라 몹시 당황했다. 지금껏 나는 변신을 부조리한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글로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가족 간 불화와 소외를 다루고 있었다. 곧 모든 생계를 잠자에게 맡긴 식구들이 그가 벌레로 변해 필요 없어지자 서서히 돌변한다. 이윽고 남은 식구들은 잠자를 버리고 또 다른 삶을 찾아 나선다.


아직은 내가 여기 있고, 식구를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명작이란 이런 것이다. 읽을 때마다 달리 읽힌다. 계속해서 곱씹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이번에는 잠자 스스로 벌레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새벽이면 출근하는 그에게 빨리 일어나라고 닦달이나 해대고 조금 늦었을 뿐인데 회사 지배인이 집까지 찾아와 신의성실을 내세운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꽉 막힌 상황에서,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해도 시원치 않을 가족이 잠자에게 도움을 받는 걸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환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살림은 점차 줄어들었다


부디 박수홍씨가 지금이라도 자신의 길을 갔으면 좋겠다. 물론 어려운 일임은 잘 안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미 이 사건이 터진 순간 아니 훨씬 오래전부터 당신을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배신자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가족을 저버린. 그깟 돈 몇 푼 번다고 유세하냐? 다시 한 번 제발 벌레로 변하지 말고 소설에서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마시기 바란다. 그리고 변신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 다음 그들은 함께 집을 나섰다


식구들에 대해서 그는 감동과 사랑으로 돌이켜보았다.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아마도 여동생의 생각보다 더 확고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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