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망친 여자>의 포스터 


짖어라, 나는 영화를 만들 테니까. 


홍상수 감독이 신작 <도망친 여자>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감독상)>을 받았다. 쾌거임에 분명하지만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아니 오히려 차갑다. 코로나 바이러스 탓도 있지만 그를 둘러싼 스캔들이 영향을 미쳤다. 내게 의견을 묻는다면 노코멘트다. 영화에만 집중해보자.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감희’는 세 명의 친구를 만난다. 두 명은 그녀가 그들의 집들을 방문한 것이고, 세 번째 친구는 극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우정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언제나처럼, 바다 수면 위와 아래로 여러 물결들이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있다(출처: 네이버 영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시놉만으로도 어떤 영화일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그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간단한 메모만 주고 현장에서 즉흥 연기를 주문한다. 물론 감독의 머릿속에는 다른 계산이 있겠지만 관객은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게 잘 만든 영화인가, 아니면 아마추어의 객기인가? 한 가지 분명한 건 독창적이다. 그는 현대사회의 지리멸렬함을 잔인할 정도로 후벼 파는데, 늘 자신의 그림자가 짙게 그려져있다. 한국사회에서 거의 매장당하다시피한 상황에서도 감추지 않고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영상으로 옮겨낸 용기(?)에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짖어라, 나는 영화를 만든다.


덧붙이는 말


그의 수상소식을 듣고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홍상수 감독이 청와대에 초청되는.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카데미만 대단한 게 아니니까. 감독은 수락을 하면서 조건을 내건다. 출연한 배우들과 함께라면. 이것 또한 당연하다. 봉준호 감독도 연기자들과 같이 대통령을 만났다. 오케이. 자, 그렇다면 정작 만남의 자리에서 홍상수는 어떤 퍼포먼스를 벌일까? 봉 감독처럼 짜파구리를 함께 나누어 먹으며 파안대소를 할 일은 없을 테고. 내 생각에는 백남준에 버금가는 행위예술을 보여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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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의 한 장면 


코리안 마스터피스 


영국의 일간신문지 더 가디언은 <현대 한국영화 베스트 20>이라는 기획기사를 실었다. 기생충으로 주가가 오른 우리 영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폭넓게 퍼진다는 증거다. 참고로 더 가디언은 좌파신문으로 우리 식으로 하면 한겨레나 경향과 같다. 반대편에는 더 타임스가 있는데 영국판 조선일보라고 보면 된다. 


더 가디언은 2000년 이후 현대 한국영화 가운데 볼만한 작품들을 선정했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영화가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것들도 섞여 있어 흥미를 유발한다. 예를 들면 <낮술>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는데 내용을 읽어보니 찾아서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강원도로 놀러간 젊은이들이 낮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는데. 기회가 되면 감상하고 싶어 벼르고 있는 영화도 있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가 그것이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품백화점이 붕괴한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성장영화다. 


1위부터 5위까지 순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위 아가씨

2위 기생충

3위 올드보이

4위 시

5위 봄, 여름, 가을, 겨울


나름 납득이 간다. 물론 김기덕 감독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논란이 많지만. 짬나시는 분들은 기사에 실린 영화를 찾아보는 재미도 느껴보시기 바란다.


기사 출처 : https://www.theguardian.com/film/2020/feb/13/classics-of-modern-south-korean-cinema-ranked


사진 출처 : https://www.theguardian.com/film/2020/feb/13/classics-of-modern-south-korean-cinema-rank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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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가 도리어 봉 감독에게 고마워해야


소설 <태백산맥>이 출간되고 대히트를 치자 출판사는 신문광고를 실었다. 문안은 "한국문학 여기까지 왔다." 그 문장이 하도 생생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카피에 걸맞은 책으로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던 주제였던 남한의 좌익 활동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영화 <기생충>이 92회 아카데미상에서 각본, 국제영화상. 감독, 작품의 4개 부문을 수상했다. 모든 상이 귀하지만 사실 작품상을 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주 목표를 높게 잡아 감독상까지는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예상은 했지만. 세상에나 작품상이라니, 그야말로 대상인데. 


물론 운도 따랐다. 올해 경쟁작들은 상대적으로 허점을 하나이상 다 가지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1917>은 지나치게 영미중심 이야기였으며, <조커>는 주인공이 너무 두드러져 작품 전체의 균형이 무너졌으며, <아이리시맨>은 공로상은 줄 수 있지만 최고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회고적이었다. 무엇보다 작년 가장 유력한 작품상 후보였던 <로마>가 감독상만 받아 구설에 오르면서 반사이득을 본 효과도 컸다. 


그렇다고 <기생충>의 수상을 폄하할 수는 없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영화가 미국 주류무대에서 이렇게 대접받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오스카로서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절실한 시기에 <기생충>이 구세주처럼 등장한 셈이다. 다시 말해 아카데미가 도리어 봉 감독에게 고마워해야 마땅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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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가 체질에 맞지 않더라도 플로랜스 퓨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버티고 볼만한 영화. 과연 그*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을 수 있을까?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주류 영화계로 편입한 퓨가 이런 류(?)의 영화에는 다시 출연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더욱 놓쳐서는 안 된다.


성聖과 속俗, 생로병사의 순환 고리


부처는 말했다.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게 고통이다. 만약 이 말이 맞다면 인류는 영원한 불행의 수레바퀴를 굴려야만 한다. 근원에는 성과 속이 있다. 성은 성스러움을 속은 생식기의 결합을 뜻한다. 속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사람이 다른 점은 이 속을 문명으로 포장하는 거다. 만약 인류가 지금처럼 진화하지 않았다면 곧 다른 동물처럼 생을 이어나갔다면 가장 밑바닥에 위치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순식간에 퇴화할지도 모른다. 속과의 힘겨루기에서 성이 버티기 어려워지면.


<미드소마>는 낯선 공포영화다. 흔히 등장하는 밤 씬은 초반에 전채요리처럼 나오고 내내 한낮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밤이 되어도 환한 하지이지만. 가족문제로 정신 병력이 있는 대니는 남자친구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여간다. 언제가 자기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어느 날 부모와 동생이 동시에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남친은 별 생각 없이 위로차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는데 덜컥 받아들인다. 다른 세 명의 친구와 함께 이들은 스웨덴으로 향한다. 한창 하지축제가 열리는 스웨덴의 공동체 마을에 도착한 그들은 기괴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어리 에스터 감독은 <유전>이 한국의 곡성과 비교되며 유명세를 치렀다. 기분 나쁘지만 계속 보게 만드는 매력이 비슷하다는 이유다. 그러나 <미드소마>에서는 긴장감을 잃고 헤매고 말았다. 공동체라면 어느 곳에서나 있는 배타성과 통과의례를 극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물론 살만큼 산 노인들이 절벽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5월의 여왕을 뽑아 산채로 바칠 재물을 고르게 하는 엽기적인 설정이 눈길을 끌지만 무섭다기보다는 헛웃음이 나온다. 공동체 마을의 주민들로 나오는 인물들이 개성 없이 기계적으로 연기를 한 탓이다. 방가방가 춤은 코미디였고, 과장된 섹스 장면에 호응하는 장면도 흥분되기 보다 썩소를 날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장점을 꼽자면 대니 역을 연기한 풀로렌스 퓨다. 그는 초반 강박에 시달리던 불안한 모습에서 공동체에 서서히 그리고 처절하게 적응하며 진정한 해방을 만끽하는 장면에 이르는 과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묘사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리틀 드리머걸>에서도 당차면서도 혼란스러운 스파이 역으로 나와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최근에는 방향을 확 틀어 <작은 아씨들>에서 에이미 마치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한마디로 연기 천재다.


한편 이 영화를 페미니즘 계열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단지 여성이 남자를 씨받이 대상으로 이용하고 죽여 버려서 통쾌한 면은 있지만 오랜 인류 역사를 보면 여성은 남성에 비해 훨씬 압도적인 존재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쟁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남자가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를 낳는 건 여성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남자가 그저 정자 제공자에 불과한 시험관 아기를 떠올려 보라. 남자가 여자에게 군림하는 시기는 긴 역사를 보면 찰라에 불과하다. 


* 여성임에도 그녀가 아닌 그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녀가 일본식 한자 표현이기 때문이다. 남자건 여자건 그로 통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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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 너머에는 어떤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나는 왜 태어났지? 캐롤라인 아니 코렐라인?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는 사건사고의 연속이었다. 지금이라면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가 심장을 뒤흔들었다. 친구와의 사소한 다툼, 티브이에서 본 귀신 때문에 밤 잠 설치기, 놀다 잊어버린 실내화.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사변은 이사였다. 정든 집과 이웃, 학교 선생님과 동무들과 떨어져야 한다는 상실감은 마치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코렐라인>의 시작도 새 집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제각각 일에 바쁘지만 코렐라인은 모든 것이 낯설다. 새로 만난 또래 아이도 괴상망측하고 한 집에 세 들어 사는 인간들도 괴팍하다. 어딘가 자신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진짜 부모나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는 친구가 있을 것만 같은데 현실은 낡아빠진 자기를 닮은 인형하나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발견하고 또 다른 엄마 아빠가 있다는 걸 발견하는데. 

 

아이 때 받았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언젠가 서서히 드러난다. 곪아터진 자국이 덧나지 않게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다행히 코렐라인은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택한다. 이런 저런 괴로움에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순간 적어도 한가지만은 떠올려보기를 바란다. 나는 왜 태어났지? 그냥 세상에 나왔으니까 살아 온 건가? 아니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 건가? <코렐라인>을 보고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면 다시보기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나는 이 영화를 극강공포라고 소개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위안을 받았다, 가 더 적확한 내 소감이다. 꽤 잔인한 장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핵심은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이들의 심정을 다시 깨듣는 계기도 되었다. 인생 끝장낼 듯이 울어재끼다가도 금세 울음을 뚝 그치고 생글거린다.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영화를 보고 알았다. 아이들은 순간을 살기에 감정 또한 그 때 그 때 상황에 적응한다. 곧 아무리 낯선 상황에 부딪쳐서도 과거는 금세 잊어버리고 새로운 처지에 금세 적응한다. 참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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