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불은 몸으로 링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토냐 하딩의 사진을 본 순간 언젠가 분명히 그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최고의 피겨 선수가 나락으로 떨어져 나갔는데 어떤 제작자가 달라붙지 않겠는가?
오직 피겨밖에 몰랐던 토냐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아이 토냐>를 보며 몇 몇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스케이팅 김보름 선수부터 피겨의 아사다 마오까지. 누구보다 빼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정상에 서지 못했거나 혹은 국민 밉상으로 찍힌. 토냐 하딩은 이 둘을 겸비하고 있었다. 미국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액셀을 성공하며 실력만큼은 최고라고 인정받았지만 불같은 성격과 거친 언사로 늘 주류로부터는 외면을 받아왔다.
반면 그녀의 라이벌 낸시 캘리건은 누구나 좋아할만한 매력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예쁜 얼굴과 우아한 매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낸시의 무릎을 박살내버리리라고는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그것도 토냐 남편의 사주로.
결과적으로 둘은 올림픽에 출전하고 낸시는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토냐는 8위에 그쳤다. 이후 토냐는 피계계에서 영구제명되고 그렇게 서서히 잊혀져가는줄 알았는데 어느날 뜻밖에 권투선수로 등장하여 또다시 국민악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말았다.
영화는 다큐 형식을 취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블랙 코미디로 이끌어간다. 마냥 토냐를 응원하거나 그렇다고 낸시를 의심하지 않고 담담히 하딩의 내면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실적으로 쫓아가고 있다. 오직 피계밖에 몰랐던 토냐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라는 화두를 남긴채.
온 나라를 떠들석하게 했던 평창 동계올림픽도 어느덧 가물가물한 기억이 되고 말았다. 한국팀이 몇개의 금메달을 땄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팀추월을 둘러싼 장면은 각인처럼 남아 있다. 과연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수들 사이에는 어떤 감정들이 오고갔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야기의 소재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덧붙이는 말
<아이 토냐>를 보며 새삼 영화, 더 넓게는 문화분야에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술은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나 소외자에 조명을 맞추기 마련이다. 토냐 하딩도 그렇다. 이름 자체가 혐오감과 동일시된 그녀가 이렇게나마 부활(?)할 수 있는건 문화의 힘 덕이다. 예술은 도덕적 잣대에는 관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