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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뇌엔 잡음이 너무 많군

 

 

다시 한 번만 봐주세요.”

아니 이상이 없다는데 왜 자꾸 그러세요.”

아니에요. 귓속이 윙윙거린단 말 이예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귀에는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신경이 예민한 것뿐이니 마음을 편하게 먹으세요.”

벌써 세 번째다. 아무 이상이 없단다. 다행 아니냐구? 아니다. 귀속이 계속 윙윙거린다.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해.

자리에 누우면 윙윙거림은 더욱 심해진다. “하는 전파음 같기도 하고, 벌레가 버석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내 주위를 맴돈다. 두 귀를 힘껏 손으로 막아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러다 문득 문제는 귀가 아니라 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맞아. 뇌의 문제야. 귀는 그저 전달기관일 뿐 인거야.

자네 뇌엔 잡음이 너무 많군.”

? 무슨 말씀이신지?”

쓸데없는 생각이 꽉 차 있어. 뇌가 그 생각들을 다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구.”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 한번 말해줄까? 생각이 너무 많단 말이야. 생각을 줄여.”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약을 일주일동안만 먹어보게.”

신기한 일이다. 귀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뇌의 울림이 전해지지 않는다. 물론 잠자리에 누우면 아직도 약간의 잡음이 나기는 하지만.

하지만 무지 졸린다. 약을 먹은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눈이 감긴다. 당연히 무기력증이 따른다. 깜빡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세 시간을 소파에 누워 있던 적도 있다. 생각하기도 귀찮아진다. 그저 졸린 채 늘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을 점점 잃어간다. 잃어간다. 잃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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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에잇, 이따위 회사 더 이상 다니나 봐라.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결심의 순간은 언제나 빠르다. 그런데 사표가 한자로 뭐지? 한글로 쓴 사표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아니 회사를 그만두는데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냐? 그냥 한글로 쓰자.

사표. 앗차 사포로 쓸 뻔 했다. 축의금 봉투처럼 아예 사표라는 한자를 써놓은 편지봉투를 팔아도 장사가 되지 않을까? 참 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마당에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을?

내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이유를 쓴다.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자 하오니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쓰면 이렇다. 나 관둠. 더 이상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알간?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 회사도 이젠 빠이빠이다. 그놈의 부장 얼굴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그런지 약간은 아쉽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날 내가 아니다. 양복 윗도리를 챙겨 입은 나는 그대로 돌진이다.

자네, 이게 뭐야?”

사푭니다.”

아니, 그걸 누가 모르나? 이유가 도대체 뭔데?”

일신상의 이유 때문입니다. 몸이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몸은 자네만 안 좋나? 어디 물려받은 유산이라도 있나보지? 베짱이야.”

이런. 울화가 치민다. 언제나 저런 식이다.’

아닙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받아주십시오.”

그래 알았어. 그럼 내용이나 보지.”

“... ... ”

자네 지금 장난치나?”

아니 왜 그게 거기?”

나한테 뇌물이라도 주는 건가?”부장의 손에는 도서상품권이 들려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드린 것 같습니다. 잠깐만요.” 나는 허둥댄다.

앗 여기 있군. 다시 받아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기가 막혀서. 지금 뭐하는 짓이야?”부장은 봉투를 찢으려고 한다.

찢지 마십시오. 사인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정 그렇다면 ... 헉 이건 또 뭐야? 이사할인쿠폰이잖아. 자네 지금 죽을라고 환장했나?”

뭐가 잘못된 거지?’나는 본격적으로 초조해진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여기저기 손에 잡히는 봉투는 무조건 윗저고리에 넣어두는 습관 때문이라고 마음을 다 잡아 먹는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안주머니에 또 다른 봉투가 있다. 겉봉에 사표라는 글자도 보인다. 약간 삐뚤어진 정겨운 내 필체. 휴우 다행이다.

이번에 진짭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경황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봐주십시오.”나는 자신 있게 봉투를 꺼내어 부장의 책상 앞에 놓는다.

자네 더위 먹었나? 아니면 나랑 놀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긴장했나 봅니다. 그러지 말고 결제해 주십시오.”

한번만 더 이상한 게 나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꼴깍, 이상하다. 분명히 그 봉투 안에는 일신상의 사유 어쩌구 저쩌구가 쓰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또 요술을 부릴 것 같다. 손에 땀이 나고 침이 마른다. 부장도 긴장했는지 서서히 봉투 안에 들어있는 종이를 끄집어낸다. 부장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제대로 된 사표가 맞다는 얘기다.

알았네. 이젠 가봐. 자세한 내용은 밥 먹고 얘기함세.”

, 알겠습니다. 여러가지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나도 겨우 제정신이 돌아온다. 어쨌든 처리됐다.

 

요즘 직원들은 맹랑해.”

왜 그러는데?”

식당에서 마주한 부장과 동료는 오늘도 부하직원들 씹는 재미에 한창이다.

아니 글쎄 사표랍시고 들고 왔는데 봉투 안에 도서상품권이니 이사할인권이 들어있지 뭔가?”

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친구군. 약간 돈 애 아냐?”

뭐 약간 그런 면도 있지. 그런데 또 봉투를 디밀지 뭔가?”

뭐라구? 그러고 또 봉투를 내밀었다는 거야. 그래 그건 진짜 사표였나?”

사표는 무슨 사표? 그냥 백지더라구.”

그래서 어떻게 했나?”

처음에는 이 친구가 장난하는 줄 알았는데, 그걸 보고는 미쳤다는 걸 알게 됐지. 조용히 돌려보냈지.”

그런 그 직원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아마 병원에 있을 거야. 바로 회사에 보고하니까 우선 119로 전화하라고 하더라구. 야근 며칠하고 술 먹으며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도무지 견디지를 못 하더라구. 회사 이미지도 있고 하니까, 자진사표를 낸 것으로 처리해 두었어. 어쨌든 본인은 사표를 냈다고 하니까 말이야.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아니, 내가 지금 왜 병원에 있는 거야. 간호사, 간호사 나는 그저 사표를 제출했을 뿐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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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폭탄을 안고 사는 사나이

 

 

가슴에 살며시 손을 얹어본다. 미세한 울림이 전해진다. 휴우 오늘은 그래도 컨디션이 괜찮군. 아침에 일어나면 늘 하는 버릇이다. 아직도 내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한다.

아침밥을 먹고 일터로 나간다. 하늘은 뿌옇다. 다 공해 탓이다. 언제까지 저런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지. 그래도 오늘 아침은 기분이 좋다. 앞으로 조심하셔야 하겠지만 위험한 고비는 넘었습니다. 항상 체크하시는 것 잊으시면 안 됩니다. 심한 운동은 절대 금물입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한 달 전 나는 사경을 헤매지 않았냐? 막말로 죽다 살아 난거다. 태어나면서부터 심장이 약한 나는 가슴에 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몇 번인가의 수술 끝에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삶이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의사말처럼 조심은 해야 되겠지만.

버스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는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갈아 탈 때이다. 출근길이다.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할 수 없다. 정글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이 많다. 다 불황 탓이다. 너도 나도 차를 집에 두고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 것이다.

그 덕에 예전에는 앉아갈 수 있던 지하철도 서서가는 신세가 되었다. 힘들다. 오늘따라 직통도 오지 않는다. 계속 연착이더니 급기야 불통이다. 완행을 타야한다. 이미 출근시간에 맞추기는 틀렸다. 휴대폰을 찾는 내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다. 어디선가 약하지만 강력한 울림이 들린다.

완행전철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사람들이 내뿜는 독한 말이 오염물질이 되어 서로의 가슴을 파고든다. 숨이 찬다. 내리고 싶다. 하지만 내릴 수가 없다. 이리저리 밀리는 와중에 겨우 자리가 하나 생겼다. 나는 앉는다.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다.

가만히 고개를 수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어본다. 들린다. 내 심장소리가. 그것도 힘차게. 위험하다. 탈출하라. 계속 SOS를 친다. 순간 딱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 머리에서 나는 소리다. 이런 고얀놈 노인네가 앞에 서있는데 조는 척 하다니. 할아버지 그게 아니고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는 봉변을 당할 판이다. ...앉으...세요. 나는 일어선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쇼하고 있네. 옆에 있던 젊은 아가씨가 내뱉는다. 대항할 기운도 없다.

어디 손잡이라도 잡아야 할 텐데. 쿵쾅쿵쾅 가슴은 계속 요동친다. 어디선가 째깍째깍 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내 가슴에 폭탄이 있단 말이에요. 다들 피하세요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미 나는 말을 잃었다. 구역질만 나올 뿐이다.

헉헉헉 여기가 어디지? 지옥의 문 앞인가? 의식이 흐려진다. 내가 이렇게 죽다니? 말도 안돼. 주변 사람들은 이제 아예 대놓고 미친놈 취급이다. 저 아저씨 왜 그래? 아니 뭐야, 저리 안가? 헉헉헉 그게 아니구요? 제발 좀 나가게 해주세요. 죽겠어요. 헉헉헉 내 심장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5. 4. 3. 2. ~~~ 1

아침 83542초 시청역에서 숨을 거둔다. 지금 나는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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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의 왕

 

이 햄버거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맛만 좋구만.”

좀 시큼한 게 상한 것 같은데.”

그거야, 양파 맛이지. 오늘따라 왜 그래, 예민하게. 잘 먹어왔으면서?”

아니 그냥 ...”

나는 그날도 동료와 점심으로 햄버거 세트를 먹고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였다.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원하지 않는 메뉴를 먹는 게 싫었다. 찌개를 모구 함께 숟가락으로 퍼 먹는 것도 질색이었다. 물론 신입 때는 억지로 참석했지만 이젠 짬도 얼마만큼 됐고, 또 영업으로 보직을 바꾸면서 유도리가 생겼다.

혼자만의 즐거운 고독을 즐기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들어왔다. 경력직으로 들어와 동기는 아니지만 나이가 같아 서로 말은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게다가 과는 다르지만 대학교도 같았다. 학교 다닐 무렵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풍채도 있고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남들과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 의외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햄버거 마니아였다. 이태원에서 자란 터라 김치보다 햄버거 빵이 훨씬 더 익숙하다고 말했다. 나처럼 홀로 먹어도 눈치 보지 않는 곳이 좋아 들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마 프렌차이즈치고는 이곳이 그중 낫다구. 뭐 이왕이면 수제 버거 집이 있으면 좋겠지만 이런 변두리에 그런 게 있을 리는 없구. 하는 수 없지.”

그는 마치 교수처럼 각종 햄버거에 대한 장황한 평을 늘어놓으며 콜라를 쪽쪽 빨았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 말도 일리가 있었다. 물론 그만큼은 아니지만 여기 저기 체인점을 돌아다녀보았지만 여기처럼 그릴 맛이 강하고 감자튀김이 두툼하게 나오는 곳은 없었다. 특히 치즈버거는 풍미가 남달랐다. 한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치즈향이 났다.

맞아, 제대로 본 거야. 여기는 치즈를 직접 본사에서 관리한다구. 어떤 사람은 느끼하다고 싫어하는데 그건 뭘 모르는 소리지. 아주 비싼 건 아니지만 퀴퀴하고 큼큼한 게 아주 그만이라니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연신 맞장구를 쳐대며 언제나 더블치즈버거를 시켰다. 상한 듯한 느낌이 나는 게 진짜 치즈지, 하면서.

그날 저녁 나는 결국 심하게 설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가 없었다. 설사는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결국 복통으로 병원에까지 갔고 의사는 상한 음식이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치즈에 문제가 있든 아니면 내가 몸에 맞지 않든 앞으로는 햄버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동료는 그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면 말했다.

나이 드는 증거라구, 나이드는. 햄버거 먹고 배탈이 났다니 그런 밥하고 김치는 괜찮아? 온통 매운 것 투성이가 더 안 좋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어떡하나? 어쩔 수 없이 구내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시간이 겹치지 않게 조금 일찍 혹은 늦게 가곤 했다. 그래도 누군가를 만나면 최대한 빨리 식사를 마쳤다. 그는 여전히 햄버거 가게를 돌아다녔다. 호기심에 몇 번 따라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점식식사로는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는데 처음 한두 번에 그쳤다. 햄버거를 끊은 지도 석달 째 내 몸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늘 감기나 두통처럼 달고 다니던 설사도 사라지고 장도 편안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 나였다. 역시 햄버거가 원인이었어, 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부터 그가 보이지 않았다. 부서가 달라 직장 내에서 볼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은 얼굴을 보던 사이였다. 소문이란 공기와 같아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다 순식간에 퍼지게 마련이다. 병가를 냈다고 한다. 덩치가 있기는 하지만 늘 활동적이었기에 의외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소송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상대는 햄버거 회사였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고 간도 많이 상한 이유가 햄버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연히 본사는 과학적으로 입증 불가능하다고 발뺌했다. 영화 <패스트제국>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군. 그런데 과연 소송에 승리할 수 있을까? 혼자라면 힘들 텐데. 마음같아서는 복통으로 입원한 병원의 진단서를 보내주고 싶어졌다. 그 친구가 한 잘못이라고는 어릴 때부터 햄버거를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결국 그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병문안을 가려고도 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장기능이 극도로 악화되어 얼굴이 많이 상했기도 했지만 그에게 모멸감을 주고 싶지 않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 때 그렇게 모멸감을 주더니 꼴 좋다.

, 점심이나 하러 가지.”

, 저는 고객과 약속이 잡혀서요, 먼저 가세요.”

그래, 그럼 오후에 보자구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혼자 밖으로 나왔다. 식사시간이라 거리는 사람들도 붐볐다. 오직 하나뿐인 중심지니 그럴 만도 했다. 생수병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돌아다녔다. 배는 고프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홀로 편하게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이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게 안은 초등학생들로 만원이었다. 이곳이 방학동안 초딩의 아지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라면, 햄버거, 핫바 따위를 들고 전자레인지 앞에 줄지어 서있었다. 이미 플라스틱 그릇 째 들고 들이키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짜고 맵고 느끼한 냄새가 온 천지에 진동했다. 배가 살살 아파왔다. 뭔가가 하고 안쪽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이내 속이 미슥미슥해지더니 토하기 직전상황까지 다다랐다.

잠깐, 잠깐... 얘들아, 아저씨 좀 나가게 길 좀 비켜줄래.”

나는 배를 움켜쥐고 미친 듯이 손을 휘저으며 그곳을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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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특급

 

자 다들 타셨죠. 그럼 출발합니다.” 오랜만의 나들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탈출하는 순간. 다들 즐거운 표정이다. 비록 경품행사에 당첨되어 가는 여행이지만 어쨌든 여행은 여행이다. 피곤하다며 가지 않으려던 아내도 행복한 표정이다. ‘그럼 그렇지.’

고속철도는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아니 기차 안에 있는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그저 모니터에 표시되어 있는 속도표시를 보고 알 뿐이다.

이제 우리 기차는 터널을 통과할 예정입니다. 약간의 소음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약간이라구? 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내 귀청을 때린다. “으으윽신음소리가 가늘게 배어나온다. “헉헉헉땀이 흥건하게 젖은 내 얼굴을 아내는 의아스럽게 바라본다.

왜 그래요?”

왜 그래요라니 지금 이 소리 들리지 않아?”

아니,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객실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제 우리 열차는 광명을 지나 대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최고속도를 낼 예정이오니 심장이 약하신 분들은 창밖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슈유우응” “어어엇내 뒷자리의 할아버지가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 ... .”

말은 문장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역무원, 역무원

역무원은 다급한 기색 없이 다가와 할아버지의 안색을 살핀다. 역무원과 함께 온 의사인 듯한 사람이 혈압과 심장박동수를 체크한다.

이상 없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듯합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화가 버럭 난다.

침착하십시오. 제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객차 내에서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승객들을 보십시오. 다들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 흥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다들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다. 아내도 나를 꾸짖는다.

가만히 있어요? 왜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래요.”

아니 이게 왜 별일이 아니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뻔 했는데.”

대전을 지난 우리 열차는 발전소를 지나갈 예정입니다. 강력한 자기장이 발생할 예정이오니 자리에서 이탈하지 마시고 조용히 앉아 계시기 바랍니다.”

찌리리릿강력한 자기장이 열차 안을 휘감는다. 마치 배멀미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속이 울렁거린다. 아까부터 얼굴색이 좋지 않던 앞자리의 아주머니가 드디어 바닥에 토를 하기 시작한다. “우웩 우웨엑어느새 의사가 달려와 아주머니의 얼굴을 살피고 체온을 재고 음식물을 수거해 간다.

이제 나는 소리칠 기운도 없다. 침묵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나를 압박한다. ‘도대체 이게 뭐야?’ 고개를 돌려 아내를 본다. 그저 창밖만 내다볼 뿐 내 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는다.

잠시 후 저희 열차는 초고속으로 건널목을 통과할 예정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는 소리가 열차를 흔든다. 순간 창밖으로 무엇인가가 튀어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자동찬가? 아니면 동물? 혹시 사람?’

이제 저희 열차는 종착역인 부산역에 들어설 예정입니다.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돌아가라구?'

그리고 저희가 준비한 기념품을 전해드릴 예정이니 도착 후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기이이익드디어 열차가 선다. 안도의 한숨을 쉰다. 승무원이 선물상자를 꺼내 하나씩 나누어 준다. 비누와 볼펜이 들어있다. 기념품으로 준 것이겠지. 박스 안 구석에 종이가  접혀있는 것이 보인다.

 

당신의 건강상태

 

장과 신장이 좋지 않음

특히 신장이 매우 약해져 있어 가벼운 이명(귀울림)증세가 있음

완치 불가능

히스테리 질환도 있음

디스크 증세 발견, 완치 불가능

치아 또한 세균에 감염된 상태임

고속열차를 탈 수는 있지만 연 10회 이상은 탈 수 없음

 

이 개자식들 이게 뭐야? 나를 실험대상으로 이용한 거 아냐? 아니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 안 그래 여보?”

내내 말이 없던 마누라에게 내 시선이 꽂힌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말을.”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아내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눈물이 번져나가는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산한 상태에서 고속열차 탑승, 향후 6개월간 고속열차 탑승 금지

 

나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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