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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고이네. 한강은 처음이에요.”

‘그런가?’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라 그런지 딱히 감흥은 없는데. 게다가 집에서 걸어서 한강을 갈 수 있으니 신기할 것도 없다. 그러나 외국에서 온 사람에게는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 지방에서 온 사람들도 한강유람선은 꼭 타본다고 하잖아. 서울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우리 둘은 강둑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평일 해질 무렵이지만 날씨가 좋아서인지 인파가 좀 있었다. 그렇다고 북적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딱 좋다는 느낌이었다. 바람결에 혜자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찰랑거리는 물결 사이로. 걸음을 멈추었다.

“왜요?”

혜자는 주춤하더니 내게 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3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때마침 해가 떨어지고 있었고, 강물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뭐라고 해야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혜자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가볍게 잡고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가 되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댔다. 혜자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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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결혼하자마자 임신한 채로 일본에 왔어요. 일종의 도피였지요. 두 집안 모두 반대가 심했거든요. 아버지는 재일교포였고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었어요. 두 분 다 운동선수였어요, 아빠는 유도, 엄마는 양궁. 불같은 사랑을 했다고 해요. 그러나 결혼은 현실이잖아요. 선수를 그만두고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고물상을 물려받았는데 한 때는 장사가 잘되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어요. 결국 가게를 접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벌였지만 죄다 망했어요. 술주정만 늘고 부부싸움은 더 잦아졌죠. 결국 엄마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집을 나가버렸어요. 제가 세 살 때였어요. 아빠는 제가 중2, 그러니까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어요. 저는 처음엔 큰아빠네 살다가 나중에는 이 집 저 집 전전했어요. 한국에는 엄마를 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사실 어디 계신지는 몰라요. 일본에 있는지 한국에 살고 계신지 아니면 미국으로 이민 갔는지도. 그냥 일본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장학금을 준다는 말에 고민 없이 바로 왔어요.


답답했다. 말없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펴도 되지?”

“네, 피세요.”

사실 끊은 지 석 달 만이었다.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재미없죠?”

“아니, 그건 아닌데 ......”

“저, 사실 이런 말 한국 와서 처음 하는 거예요.”

나는 자세를 바로 잡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주었다.

“부담 드리고 싶지는 않은데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선배한테는.”

‘날 언제 봤다고?’

“저 도와준 거 기억 안 나세요? 입학실 날”

“입학실 날?”

전혀 모르는 일이다. 혜자를 본 적도 없었다.

“그날 나 마스크 쓰고 있었잖아요. 신입생 교재 어디서 나눠주는지 몰라 당황할 때 데리고 가 주셨어요.”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런데 여러 명이었던 것 같은데. 복학신청을 하러 과사무실에 들렀을 때 한 무리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뭔 책을 받으러 왔다는데. 마침 과조교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신입생들 교재는 늘 과방에 쟁겨놓고 있었으니까. 별 생각 없이 따라오라고 하고 같이 갔다. 과방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헤어졌다.

“혜자가 그 중에 한 명이었나?”

“네”

나는 피식 웃었다.

“왜요?”

“아니, 그냥”

일본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에서 오래 산 한국 사람이지만. 별 거 아닌 도움을 기억했다가 반드시 갚고자 하는 마음이 말이다.

“큰 도움도 아닌데 기억하고 있다고 하니 말이야.”

“그런가요? 전 엄청 고마웠는데.”

“그럼 됐고”

혜자도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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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블리즈 수정을 닮은 동그란 얼굴. 머리카락은 어깨를 덮을 정도로 길었고, 날씬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뚱뚱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 한 눈에 확 뜨이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매력은 있었다. 생뚱맞은 느낌도 있었지만 어깨에 날개가 달린 세라복 옷차림도 꽤 근사해보였다. 작은 쌕을 어깨에 메고 두 손으로 가슴 쪽으로 책을 든 모습은 마치 나는 대학 새내기라는 광고를 찍는 것처럼 보였다.


“복사하려구요?”

나는 당연한 질문을 했다. 

“네”

“얼마나 할 거예요. 급한 거면 학교 안에서 해도 되요, 도서관 지하에 복사점이 있거든요. 그런데 약간 비싸요. 많이 할 거면 학교 앞 복사가게로 가도 되고, 거긴 좀 싸니까”

“아니에요. 다섯 장만 하면 되요.”

“그럼, 도서관에 가면 되겠네요. 어딘지 알지요?”

혜자는 잠시 우물거리더니, “저, 죄송한데요 .... 제가 잘 몰라서요.”

‘뭘 모른다는 거지?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 아니면 복사 부탁하는 걸?’

내가 머뭇거리자 혜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주 바쁘지 않으시면 ... 아노 .... 아니 저 ... 도서관까지 같이 가주지 않으실래요?”

당황스러웠지만 뭐 별일 있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뭔가 사정이 있어 보였다. 말투를 보니 우리말이 서툰 외국 유학생 같아 보이는데. 딱히 바쁠 것도 없었다. 

“그래요, 가죠. 따라오세요.”


혜자는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뭐든 서툴러서. 덕분에 감사해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낯설었겠지. 모든 게. 모국이라고 왔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때는 몰랐지만 혜자 가족은 한국에 연고가 없다고 한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지만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궁금증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왜 한국에 혼자 왔는지, 그리고 왜 이 학교를 선택했는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혜자는 “너무 뜻밖이죠. 이런 말 하는 게?”라고 혼잣말하듯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저도 좀 낯설어서, 이곳이”

“알아요. 선배가 군대 다녀오셨다는 거.”

“네?”

‘아니 그럼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학교 다시 온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누가 알려준 건가, 아니면’

“아,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냥 신입생들끼리 선배들 이야기하다 나온 거예요. 저도 더 이상은 잘 몰라요.”

혜자는 당황한 내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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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거지같은 학교야.’


경호는 처음부터 내게 호감을 보였다. 자신의 말로는 지방출신의 서울선호 때문이라고 하는데. 표준말을 또박또박 쓰는 게 너무 신기해보였단다. 아무튼 한 달 남짓 대학생활하는 동안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서서히 친해지려던 순간 매몰차게 돌아선 게 여전히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재수를 할 때도 연락을 했지만 내가 받지 않았다. 이미 다리는 불태워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냥, 나와”

“내가 왜 거기 가냐? 죄다 2, 3학년들 아니야?”

“뭔 상관이야, 다들 동기인데”

“그래도 ...”

“아무튼 오는 걸로 알게. 7시다. 7시. 학교 앞 베어스 타운 알지?”


미안하고 고마웠다. 경호는 예나 지금이나 내게 잘해줬다. 말로는 쪽수만 채우면 된다고 했지만 세심하게 배려했음이 틀림없다.


그 자식은 변함이 없었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경호를 꼬나보더니 대뜸, “야, 어디 1학년이 4학년 미팅하는데 나오냐”라고 말했다. 차라리 나에게 직접 이야기했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내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야,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무슨 소리야, 이건 내가 주선한 거야. 숙대 무용과 애들 만나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군대도 빠진 주제에’

무슨 빽을 썼는지 그는 군에 가지 않았다. 심지어 방위조차. 부모덕으로 부정입학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뭘 그렇게 빡빡하게”

경호는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그를 달랬다. 그리고는 내게 고개를 돌려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성훈아, 미안, 내가 조금 있다 다시 연락할게.”


별 일 아니었다. 그깟 미팅 나가서 뭐하냐. 복학생 주제에. 다시 이 학교에 환멸감이 몰려왔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혼자만 왕따가 된 것 같았다. 정문을 통과해 경사진 보도를 터덜터덜 걸으며 다시 입학시험을 볼까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 노 여기 근처에 복사하는 데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3초쯤 아무 말 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나한테 묻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긍정의 미소를 보내주었다. 아직은 쌀쌀한 3월의 초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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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아침은 매우 어수선했다. 마치 내 마음을 반영하듯이. 이 학교로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한 달인가를 다니다 다시 재수를 선택했다.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말은 변명이고, 사실은 내 수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나은 대학교로 가고 싶었다. 그 땐 몰랐다.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었는지를. 결과는 단 10점 올랐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원래 원했던 학교에 원서를 썼다. 혹시 아나, 행운이 내 편이 되어줄지. 


“자네는 잠바 지퍼를 다 채우는 게 낫지 않나?”


딱 봐도 교수 인듯 싶은 심사관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보자마자 꺼낸 문장이 고작 그거라니? 그 때 이미 체감했다. 아, 떨어졌구나. 정문까지 이어진 기나긴 길을 걸어 나오자마자 병무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게 낯설었다. 아는 얼굴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강의실에서 3년 전 나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막타워 앞에 선 기분이었다. 분명한건 난 뛰어내려야했다. 그 장소국 혜자도 있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야, 어때 복학한 소감은?”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 이제 2학년이 된 동기였다.


“글쎄 ...”

“너 이번에 도망치지 마라. 그럼 나한테 죽어.”


휴학계를 내겠다고 했을 때 나를 응원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고맙다, 너 밖에 없다.’ 속으로 주절거렸다. 

“뭘 멍하게 있어? 가자, 제대 기념으로 선배가 술 한 잔 살게”

“선배는 무슨?”

“너 임마, 이게 선배한테 게기네. 그럼 니가 사든지”

“알았어, 가자구 자”


결국 우리는 필름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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