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더믹 상황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 1947년에 쓰인 이 소설은 의사, 페스트에 걸린 아들을 둔 판사, 목회자, 잠시 취재하러 왔다가 발이 묶인 신문기자, 고양이를 좋아하는 노인 등 다양한 군상들이 나온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사회가 아니여서 모든 연락도 차단되고, 전보 정도만 칠수 있다.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연락에 관한 상황을 제외하면 지금의 상황과 매우 비슷한 점이 많다. 이런 전염병으로 더 힘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고, 행정을 보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정보를 어떻게 구성해 전달해야할지 고심한다. 어차피 사람은 죽는데,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 아이가 이런 병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 성직자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무조건 신의 뜻을 믿으라고 되풀이 할 뿐. 여기 증정하는 의사는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고 고군분투한다. 자신의 직업 윤리에 투철한 인간을 영웅화시키지 않고 담백하게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탈코르셋을 해본 작가의 경험담이다. 복싱장에서 만난 여성도 자신과 같이 탈코를 한 사람인것 같아 친해지고 싶어하는 장면이 웃겼다. 무엇보다 자신의 친한 친구와 탈코에 대해 논쟁을 벌이면서 생기는 작가의 마음속 갈등이 잘 들어난 점이 참 좋았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꾸미기라는 말이 공허한 거짓이라 깨우쳐도, 거기서 쉽게 벗어나기 힘든 점이 그려진 것도 매우 공감이 되었다. 이 끈질기고 지독한 코르셋과 꾸밈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렇게 여성의 경험과 내면을 다룬 텍스트가 많이 나와 주면 좋겠다.
우울증에서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하지만, 두고두고 실천하면 좋을 지침들이 많이 써져있다.
몸은 치열한 전쟁터이고 나는 이미 시선의 포로다. 이걸뚫고 나가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안다. 그래도 내인생의 주인까지는 탐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몸의주인으로 살아보고 싶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살아보고싶다. 그 지난한 여정을 여드름에 꽂혔던 시선이 나에게는 상처였다는 걸 자신에게 고백하면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