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로 역 광시곡 마호로 역 시리즈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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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역광시곡 (2013, 2021) by #미우라시온 


“난 아무도 기억해주길 바라지 않아. 아무리 예쁜 여자라도. 미안.” (91)

아무도 기억해주길 바라지 않는 남자, 교텐 하루히코.

“나는 너를 가능한 한 기억할 거다. 네가 죽더라도. 내가 죽을 때까지.“ (470)

끝까지 기억해주겠다는 남자, 다다 게이스케.

마호로역 다다심부름집의 콤비 다다와 교텐은 그런 사이다.

두 사람의 티격태격 동거가 어느덧 2년이 흐르고, 3부 ‘마호로역 광시곡’이 시작된다.

3부는 2부의 복선 회수라고 보면 된다. 2부와 합본해도 될 만큼 연장선에 있다. 2부에 나온 인물 대부분이 재등장한다.

마약상 일명 ‘사탕장수’ 호시, 매춘부 루루와 하이시, 요코하마 중앙 버스 노선 시간표를 의심하는 노인 오카, ‘키친 마호로’의 미모의 여사장 아사코, 교텐의 전처 나기코, 당돌한 초등생 유라 도련님 등.

작가는 이미 설정된 인물들 사이에 굵직한 에피소드 하나를 던지는데, 바로 2부 말미에 소개된 ‘가정과건강식품협회 (HHFA)’이다.

이들은 남쪽 출구 로터리에서 어린 자녀들과 함께 밭에서 직접 재배한 유기농 채소를 팔고 있다.

아이들을 동원한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수효가 급증하는 가운데 호시를 비롯한 뒷골목 패거리들은 이들의 자리 점거를 못마땅해하면서 야쿠자와 손잡기 시작한 정황을 포착해 방해 공작을 펼친다.

여기에 우리 다다 심부름집도 끼게 되고, 거기에 오카 노인도 끼고, 유라 도련님과 그 친구 유야도 끼고.

이 작품에서 미우라 시온은 등장인물들이 무의미하게 소비되지 않게 이런 큰 골자에 치밀하게 엮어 둔다.

거기에 교텐까지 엮은 채로.

겉보기엔 건강한 유기농 채소 판매 단체 같지만 옛날부터 이어진 어떤 사이비 종교의 잔재였음이 밝혀지고, 교텐의 암울했던 어린 시절도 드러난다.

3부의 큰 줄기는 아마 두 개일 것이다.

유기농 채소 단체 HHFA와 교텐.

하지만 전자는 오직 후자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미우라 작가가 준비해둔 포석이라 봐도 될 것 같다.

나는 그런 것들이 이 작가의 특별한 재능이라고 여겨졌다.

공들여 정교한 큰 그림을 그린 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방향이 적확하다는 것이다.

사실 에피소드 자체는 생각보다 신선하거나 현실적인 생생함은 없었다.

마지막 장면은 부성애의 어떤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김이 빠지기도 했다.

명랑만화적인 설정에다 일본 소설 특유의 교훈적이고 긍정적인 희망을 말하는 것,

즉 곱게 발린 말을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듯해서, 비록 내가 그런 것을 좋아하긴 해도, 이 소설에서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교텐의 행동이나 언동에서 보이는 모습은 상당히 사이코패스적이라고 전에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변하는 모습은 의미 있고 기쁜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작가가 묘사한, 혹은 가장 애정을 쏟으며 만들어낸 히어로 교텐은 여러 의문점을 남긴다.

교텐은 아이를 '그것‘ 혹은 ’애새끼‘로 부를 만큼 혐오한다.

하지만 자신의 정자를 레즈 커플에게 주는 것에는 관대했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 대한 기대감도 보인 것으로 묘사된다.

작가는 교텐의 내면을 꺼내는 데에 굉장히 신중한 흐름을 따른다.

따라서, 그의 변화 혹은 성장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만 집중되어 있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아이를 통해서만으로 결정적으로 입증된 것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애정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는 눈에 비친 세계가 전혀 다르니까. 확실히 사랑이 갖는 위력은 잔혹하다.” (144)

교텐이 결국 그토록 혐오하던 ‘아이’ 그것도 자신의 ‘아이’를 통해 구원받게 된다는 설정은 작가가 쳐둔 미덕의 전철을 밟는다.

그럼에도 (내게는 상당히 부담스럽게 읽혔던), 원하는 남자의 정자를 받기 위해 계약 결혼 후 곧바로 이혼한 레즈, 씨 그까짓 것 줄게 하는 남자 등은 ‘미덕’의 탈선을 보이기도 한다.

깊은 것을 얕게, 얕은 것을 깊게, 이런 균형의 모호함이 내게는 장벽이었다.

대개, 해결을 제시하려는 소설은 여러 모순을 안고 있고, 누가 정의라 단언할 수 있을까마는,

미우라 작가의 미덕과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서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마무리로 말하자면 산뜻하고 깔끔한 3부다.

작가의 에피소드 엮는 재능은 정말 기막히다.

이런 매력 때문에 작가의 책들을 줄줄이 구입했다.

애정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는 눈에 비친 세계가 전혀 다르니까. 확실히 사랑이 갖는 위력은 잔혹하다. (144)

나는 선의만으로 하루를 맡기로 결심한 게 아니다. 사실은 마음 한편으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시 아이를 대하며 나도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가슴에 둥지를 튼 두려움과 절망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희미한 기대를 안고 있다. (204)

매달 임대료를 고박꼬박 내기만 하면 이상이고 이념이고 채소고 아무 상관 없다. (49)

이번에는 내가 말할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하루를 봐. 저렇게 작고 우리를 의심할 줄도 모르는 존재를 너는 정말로 멍투성이로 만들 수 있을까? (259)

나를 심심하게 하면 곤란한 일이 생겨요.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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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역 번지 없는 땅 마호로 역 시리즈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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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인간을 한 번 더 되살리는 빛과 열은 어디에 있는 걸까.” (282)

내가 묻고 싶다.

미우라 시온 작가여, 2편에서 얼어 붙은 내 마음은 어떻게 하죠.

마호로 역 시리즈 2편 ‘마호로역번지없는땅’은 평하기 어려웠다.

먼저 총평하자면,

1편에 비해 재기 발랄함이나 스토리텔링의 부재, 매력 없는 문체들에 아쉬움이 크다.

내 추측인데, 작가가 처음부터 시리즈를 노리고 이 작품을 시작한 것 같진 않다.

노렸다면 2편이 이런 빈약한 구성을 취했을 리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작의 성공에 힘입어 3년 뒤 출간한 2편은, 전작에 소개된 인물들이 다시 등장해 독립된 에피소드를 갖거나,

다다와 교텐을 관찰하는 누군가의 3인칭 관찰자 시점, 다다가 3인칭 관찰자가 되어 교텐을 관찰하는 시점 등이 섞여 있다.

근데 스토리가 별로 재미가 없다. 따라서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가독성과 흥미가 줄어든다.

무엇보다 각 에피소드가 진부하고 표면적인 데다 교텐의 소시오패스적인 기행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과하다는 것도 장벽이었다.

1편에선 나름의 기행도 정의롭게 보였던 교텐이었는데.

1편에서 내가 높이 샀던 것은 미우라 시온 스타일의 재기 발랄함과 세련되게 가공한 엔터테이닝 요소였다. 그래서 가벼운 대중소설임에도 작가의 저력을 믿었다.

2편에서는 그런 요소를 찾기 어려웠다.

공감대 상관없이 제멋대로 혼자 춤추는 분홍신의 질주랄까.

먼저 첫 에피소드 ‘반짝거리는 돌’은 한마디로 이해 불가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자기 친구에 대해 갖는 질투심이 그 정도인가 할 만큼 (차라리 살인이 낫지) 놀랐고, 거기다 교텐의 상식 밖의 행동은 웃어넘기기 힘들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전통적인 방식의 ‘피카레스크’다.

1편에서 초딩을 상대로 마약 거래를 시켰던 일명 ‘사탕장수’ 호시가 주인공이 되어 꽤나 낭만적이고 상식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것도 내 선에선 이해 불가.

“나쁜 사람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 호시가 착한 것은 엄마가 소중히 키워주었기 때문이야.” (86)

그 외에도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두 개의 세계에서 미묘한 줄다라기를 하는데, 작가가 ‘선’이라고 믿는 것이 내게는 ‘선’이랄 수 없다는 것,

작가가 상식의 선을 흐리면서 납득시키려는 것들이 내게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이, 이러한 충돌이, 결국 이 소설과 나를 분리시킨 것 같다.

1편에선 작가가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2편에선 1편의 성공에 자신이 생겨서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압박을 느껴 고민을 했던 것인지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깊이 없는 야쿠자 얘기에 무게를 둔다든지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정도의 야쿠자 얘기가 아니면 성에 안 참;) 진부한 연애담을 위해 전쟁 시대를 가져온다든지.

아무래도 이 소설의 비장의 카드는 개성 넘치는 남자 ‘교텐’일 텐데, 그마저도 시원찮다.

작가가 특별한 애정을 쏟는 남자, 교텐.

소위 ‘상처남’인데, 다다가 백색의 우울함을 지녔다면 교텐의 우울함은 아주 어두운 흑색이다.

그런 심연을 품은 채 태연하게 웃고 떠들다가 돌변하는 그는 ‘사이코패스’의 전형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이 교텐을 관찰하는 부분에선 늘 측은함과 연민 등이 묻어난다.

“오랜 고생 끝에 어른이 된 그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나는 편이 좋다. 현실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괴로움이 그를 들볶을 일이 이제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157)

이런 교텐을, 마호로 심부름 센터를 어떻게 수습할지, 3편에서 작가의 저력을 기대한다.

책을 덮고 나는, 이런 명랑 만화 같은 소재에 완성도 높은 작품을 써낸 요시다 슈이치나 오츠이치 등의 작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런 류의 글에 더욱 빛을 발하는 남자 작가들의 천장에, 미우라 작가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점일 게다.

궤도에 올라 성실히.

“심부름센터 일이 궤도에 오르지 않으면 이 사람은 어딘가로 가겠구나 하고 느낀 탓이다. 그렇다고 동정한 것도, 자선을 베풀 생각으로 의뢰한 것도 아니다. 남편을 비롯하여 오카 부인의 아들도 아버지도 친척도 모두 단순명료한 남자들뿐이어서 복잡한 그늘을 드리운 다다에게 흥미가 생긴 생긴 것이 주된 동기였다.” (148)



p.s.


작가가 교텐이 과거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아직도 벗어나지 못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 복선으로 암시하나, 내겐 소시오패스의 기질로써 뚜렷이 보여 이해가 쉽지 않았다. 교텐의 행동들은 미치광이와 다를 바 없는데 평범한 듯 살아가니 더 문제로 느껴진다. 전문적인 치료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바, 교텐의 시점이 전혀 나오지 않은 채 그에 대한 전적인 연민과 측은함을 독자에게 요구하니 2편은 구성면이나 설득력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얼어붙은 인간을 한 번 더 되살리는 빛과 열은 어디에 있는 걸까. (282)

오랜 고생 끝에 어른이 된 그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나는 편이 좋다. 현실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괴로움이 그를 들볶을 일이 이제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157)

심부름센터 일이 궤도에 오르지 않으면 이 사람은 어딘가로 가겠구나 하고 느낀 탓이다. 그렇다고 동정한 것도, 자선을 베풀 생각으로 의뢰한 것도 아니다. 남편을 비롯하여 오카 부인의 아들도 아버지도 친척도 모두 단순명료한 남자들뿐이어서 복잡한 그늘을 드리운 다다에게 흥미가 생긴 생긴 것이 주된 동기였다.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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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마호로 역 시리즈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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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년에 분명히 바빠질 게야.” (7)

공교롭다.

다 읽고 나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설 내용과 지금 내 상태가 미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할 말은 많지만, 꾹 참고 작업에 임하는’ 심부름센터를 운영한다거나, 불쑥 내 생업에 끼어든 동창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과 나의 연결성을 세 가지로 찾아봤다.

1. 연말.

소설의 배경은 사계절이지만 가장 의미 있는 계절은 (가도마쓰가 상징처럼 등장하는) 겨울이다.

눈이 내리고 한 해의 끝에 맞이하는 새해는 인물들의 정신적인 성장과 더불어 미래의 시간과 사건을 기대케 한다.

“잃어버린 것은 완전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에는 기억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야 다다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행복은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행복은 모양을 바꾸어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살며시 찾아온다고.“ (338)

2. 인물 중 하나가 손가락을 다침.

올해 삼일절에 손가락을 크게 벴는데 한 번도 아프지 않던 손가락이 오늘 매우 찌릿거리고 욱신거렸다.

통증이 느껴지자 나는 나의 손가락이 두려워졌다.

“한 번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꿰매어 붙이고 살면 대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무리 열원을 갖다 대도 늘 온도가 낮은 부위를 지니고 사는 것은.......” (44)

3. 반려견 주인 찾기.

한 달 반 전 시골 친정집에서 길렀던 유기견 ‘마루’가 6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전부 키울 여건이 되지 않아 한 마리씩 좋은 주인에게 보내지고 있는데, 오늘 또 한 마리가 새 주인을 만났다고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 아가씨한텐 치와와가 희망이야. 누군가한테 필요한 존재라는 건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의미야.“ (101)

이렇게만 얘기하면 도대체 이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 궁금하기 마련이다.

주인공 다다 게이스케는, 마호로 역 (도쿄지만 카나가와로 종종 오해받는 해안가 국경도시)에서 작은 심부름집을 운영한다.

“마호로 시민은 두 개의 나라로 마음이 갈린 사람들이다.” (58)

외부에서 유입된 이들, 토착민들이 섞여 자력으로 견고한 도시를 구축한 마호로는 복지와 간병 제도, 교육, 문화 시설 등의 윤택한 겉모습 이면에 창녀들, 마약 거래가 성행하는 어둠도 함께한다.

과거의 상처를 가슴에 묻은 채 열심히 일하는 다다에게 어느날 고등학교 동창생 교텐이 나타나면서 두 사람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교텐은 특이한 남자다. 고등학교 때도 입을 연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괴짜지만, 어른이 되어 마주친 그는 다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기인이었다.

교텐의 기행을 일일이 열거하진 않겠다. 여자처럼 섬세한 다다와 무신경하면서도 남자다운 교텐은 티격태격하면서도 맡겨진 심부름들에는 독특한 파트너쉽을 발휘한다.

플롯은 주로 그들이 맡게 되는 몇 개의 심부름을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집청소, 반려견 주인 찾기 등) 그 안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여러 세계와 인간 군상들은 따뜻함을 전하고,

무엇보다 주인공 다다가 교텐과 함께 살아가면서 보다 깊이 자신을, 타인을 이해하게 되어가는 과정은 치유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이 소설의 백미는 두 남자의 티키타카 대화일 것이다. 남자답게 툭툭 던지는 교텐의 화법은 마치 BL의 공을 연상시킨다.

가독성도 좋고, 작가의 직관적인 서술 방식도 시원스럽다. 특히 미우라 시온 특유의 비유법은 기발하고 생생해서 읽으면서도 그림을 보듯 눈앞에 펼쳐진다.

“정글에 서식하는 도마뱀이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앵무새를 포획한 모습이었다.”

(매춘부 루루의 옷차림을 묘사한 부분, 73)

이 소설은 한마디로 ‘엔터테이닝’ 장르소설이다. 그만큼 재미와 가독성은 보장한다.

연신 담배를 뻑뻑 피우고, 상반된 성격으로 명확히 나누어지는 다다와 교텐은 동명의 만화책 표지에서처럼 BL 작품을 연상시키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혹시라도 소설 뒤편에서 커밍아웃이라도 할까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미우라 시온은 그런 폭넓은 장르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쓰되, 거기에 완전히 편승하지 않고 나름의 엄격함과 균형을 갖추는 작품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런 열정으로 다양한 직업과 경험에 관심을 둔 전문성을 갖춘 소설들도 쓰고 있어 팬층이 넓을 것으로 보인다.

첫 입문작이 순조롭다.

누군가한테 필요한 존재라는 건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의미야. (101)

난 버릇없는 애새끼들이 싫어. 학원 보내고, 학원 끝나면 교통체증 일으키며 데리러 가고. 그런 지극정성 쏟기 전에 저 애새끼한테 먼저 가르쳐야 할 게 있다고 봐. (109)

교텐은 다다와 비슷한 공허를 안고 있다. 언제나 마음속에서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 얻을 수 없었던 것, 잃어버린 것을 되살려내 폭력의 이빨을 드러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나기코가 말해줬다. 가서는 안 된다고.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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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 지음, 강방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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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우에노스테이션 (2021, 개정판) by #유미리 #JRuenoekikoenguchi (2014)


“JR 우에노역 공원 출구 개찰구를 나와 횡단보도 건너편 은행나무를 둘러싼 돌담에는 늘상 노숙자들이 앉아 있다.” (13)


도쿄예대, 국립 박물관, 동물원, 미술관, 동조궁 신사....... 인간답게 살기 위한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들 속에 밉고 보기 흉한 것들이 함께 있다.


우에노 역에는 노숙자들이 있다. 골판지, 천막으로 지은 위태로운 지붕 밑에서 그들은 내일 없는 하루하루를 산다. 


그들은 이 비싼 도시가 그러지 못했을 시절부터 함께해왔다. 어쩌면 이 도시의 진짜 주인은 그들인지 모른다.


소설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은 화려하고 고상한 도시가 숨긴 처절한 민낯, 아니 처절하게 외면받은 진짜 주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소설의 화자는 1933년생의 모리 가즈. 그는 전쟁 중에 태어났고 전쟁이 끝난 폐허와 복구의 시대를 살았다. 


“전쟁에 져서 슬프거나 비참한 느낌보다 먹고살고 먹이고 살리는 일을 생각해야 했다.” (26)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항구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함박조개를 캐고, 농사를 짓고, 64년 도쿄 올림픽을 위해 육상 경기장, 야구장 등을 건설하는 막노동을 하는 동안 그는 가족과 함께 산 시간이 전부 합쳐도 일 년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사와 일밖에 모르는 착한 아내 세쓰코, 장녀 요코와 차남 고이치와 함께 제대로 나들이 한 번 한 적 없었던 남자는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서, 혹은 모든 회한을 가슴에 품은 망령이 되어서야 기억 속 슬픔을 희미하게 더듬는다.


“태워주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후회가 남았다. 그 후회는 10년 뒤 그날, 화살이 되어 내 마음을 뚫고, 지금도 꽂힌 채 빠지지 않는다.” (22)


남자의 인생, 그러니까 우에노 노숙자 누구라도 좋았을 아무개의 불행한 인생을 조명하는 유미리는 수십 년의 시간들을 교차시키며 풀어낸다.


1933년 남자가 태어난 해, 1945년 도쿄대공습, 1960년 친왕의 탄생과, 아들 고이치의 탄생, 81년 상실의 해, 2006년, 2012년……. 


우에노 선에 기대어 산 남자의 인생은 행복이라는 역을 비껴간다.


“출구야말로 내가 보고 싶은 것인데, 어둠이 내리지 않고 빛도 비치지 않는다....... 끝났는데, 끝이나지 않는다....... 끝없는 불안...... 슬픔...... 외로움....... (23)


우에노 공원은, 전쟁, 간토대지진 등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천황이 공원으로 지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고, 경제 고도성장기엔 북쪽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역을 오가다 결국엔 그들의 집이 되어 버린 장소다.


노숙자들은 실은 일본의 번영을 위해 희생당한 이들이고, 결국 그 대가는 우에노 역의 노숙이었다. 


언제든 청소라는 명목으로 ‘강제 퇴거’의 불안을 떠안은 그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이 소설은 사회파 소설이다. 그러나 단단한 문체라기보단 몽환적이고 시적인 문체, 연극적인 요소, 그리고 교차하면서 오버랩되는 행인들의 대화들, 시대 표기 없이 상념처럼 불쑥 끼어드는 에피소드들이 난해하게 읽히는 편이다.


작가 유미리는 재일교포이지만, 문학적 토양은 일본이다. 


일본의 어둠을 고발함과 동시에 그 땅에서 피어날 희망도 기대한다.


그녀는 전미도서상 소감에서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다고 매스컴은 말하지만,


한국 국적을 소유하고 한국인 부모를 둔 재일교포 유미리는 한국인이고, 그녀의 한국인 정체성이 두 나라의 가교가 되어주길 나는 바란다.


일본에서 ‘재일’로 살아가는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큰지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소설에 드리워진 아픔이 그녀의 몸에 흐르는 피의 잉크로 찍어져 보이는 듯하다.


“구덩이었다면 기어 올라올 수도 있겠지만 절벽에서 발이 미끄러지면 두 번 다시 인생이라는 땅에 디딜 수 없다.

추락을 멈출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다.“ (92)


유미리를 일본인으로, 혹은 한국인으로 제한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유미리는 한국에도, 일본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인도주의자인 것을.


그녀이기에 이런 글도 쓸 수 있다. 화려하지 못하고 보기 불편한 루저들의 이야기들을.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근사한 외형에 방해가 되는 찌그러진 인간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답고 쓸쓸하게 기록해줄 이는,


역시 그녀뿐이다.


#일본소설

JR 우에노역 공원 출구 개찰구를 나와 횡단보도 건너편 은행나무를 둘러싼 돌담에는 늘상 노숙자들이 앉아 있다. (13)

전쟁에 져서 슬프거나 비참한 느낌보다 먹고살고 먹이고 살리는 일을 생각해야 했다. (26)


출구야말로 내가 보고 싶은 것인데, 어둠이 내리지 않고 빛도 비치지 않는다....... 끝났는데, 끝이나지 않는다....... 끝없는 불안...... 슬픔...... 외로움....... (23)

구덩이었다면 기어 올라올 수도 있겠지만 절벽에서 발이 미끄러지면 두 번 다시 인생이라는 땅에 디딜 수 없다.

추락을 멈출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다. (92)

옛날에는 가족이 있었다. 집도 있었다. 처음부터 골판지와 비닐로 만든 천막집에 살던 사람은 없었고 자진해서 노숙자가 된 사람도 없다. (91)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터널을 지난 탓에 얼굴은 증기기관차의 매연으로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그것이 부끄러워 승강장을 걸어가면서 열차 창문에 몇 번이나 얼굴을 비추며 모자의 챙을 올렸다 내렸다 한 기억이 있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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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 자매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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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버너자매 by #이디스워튼 #bunnersisters (1892, 2008)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걸 바라면 어쩐지 우리가 갖고 있던 것마저 빼앗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33)

이디스 워튼이 1892년 집필한 ‘버너 자매’는, 남북전쟁 이후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며 번영을 꾀하던 뉴욕에서 쇠락한 변두리 가게를 꾸리는 앤 앨리자와 에블리나 자매의 이야기다.

자매가 운영하는 가게는 옷이나 모자 등을 재단하거나 재봉, 수선하는 곳으로, 활달한 에블리나는 주로 밖을 다니며 물품 구매 및 배달을 하고, 정적인 성격의 앤 엘리자는 가게를 지키며 일감을 처리한다.

적은 돈벌이지만 자매에겐 빚 없이 살 수 있는 평온하고도 단조로운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그녀들의 희망과 야망을 담보한 것 다름없었다.

"버너 자매는 그 깔끔한 가게가 자랑스러웠고 소소한 돈벌이에 만족했다. 처음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 데다 일찍이 품었던 야망보다 훨씬 볼품없는 모양새였지만, 적어도 가게 수입으로 임대료를 내고 빚 없이 먹고 살아갈 수 있었다. 높이 솟구치던 희망은 꺾인 지 이미 오래됐다.“ (11)

현실의 유토피아를 아예 포기하고 자신의 내면의 이상을 택한 언니 앤 엘리자와, 금같이 반짝이는 행복을 기대하는 에블리나 앞에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허먼 래미. 건너편의 낡은 시계 가게를 운영하는 독일 출신의 남자다.

남자의 등장은 자매의 삶, 관계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오랫동안 여성 특유의 사소한 의혹과 고민이 가득하던 가게 분위기는 과묵한 남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곧 안도감과 평화 같은 것이 감돌았다.... 그의 판결이 내려지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숙명처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모든 책임감에서 벗어났다.” (44)

소설은 언니 앤 엘리자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동생 에블리나에 대해 다양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면서 그녀 안의 고독과 외로움도 함께 파문한다.

그러나 동생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애정은 그 어떤 감정보다 진실하고 견고하다.

“그녀는 에블리나에 대한 사랑에서 모성애 같은 열정을 없애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매로서 느끼는 애정의 온도를 낮출 수는 없었다.” (79)

선하고 고귀한 마음은 행복을 빙자한 파멸 앞에 무력해지고, 희망은 불행과 가난을 동반해 연쇄적으로 삶을 붕괴시키기에 이른다.

버너 자매는 참혹하다.

감히 ‘행복’을 한 번 곁눈질한 대가는 비참했다.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기회’의 초침을 누른 그 순간부터 인생은 나락으로 향했다.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에게 현실은 기만을 숨긴 채 광채를 내고 있었다.

‘혈연’이라는, 내가 아닌 둘이 함께 맞선 현실도 절망으로부터 구원해주지 못했다.

오페라로 말하면 ‘베리스모’. 지독한 현실의 리얼리즘이었다.

버너자매를 읽고 나니, 우리 언니가 무척 보고 싶었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설 얘기를 들려주었다.

수화기 너머로 간간이 들리는 여덟 살, 여섯 살 조카들의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를 배경 삼으면서 이야기를 잇던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전하다가 목이 멨다.

‘불쌍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보다 묵직하고 경건한 무언가가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워튼이 이토록 잔인하게 여성들을 몰아붙이면서까지 전하고 싶어 했을 간절한 외침.

“(아내가 될 사람이라면)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해.
나는 언니의 삶이 한여름 구름처럼 속박 없고 평온하길 바라. 그건 내 운명은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안에 순응하고 기도하는 영혼이 있기를.“ (91)

워튼의 역설을.

그리고 안도했다.

우리 자매는 함께 있다.

*

‘버너자매’의 시퍼런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징구’ 와 ‘로마열’이라는 단편이 이어진다.

서사의 주인공들은 모두 상류층 여성이다.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감정들 또 여성 간에 작용하는 허영심과 허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재미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만듦새는 대개 비슷한 것 같다.

그런 고상한 귀부인들이 쌓아놓은 자기애의 바벨탑에 순식간에 일격을 가하는 워튼에게 통쾌함을 느끼며,

버너자매에서 느낀 비감을 상쇄해 본다.

“제가 보기엔, 읽어야 할 책이 너무나 많은데 재미로만 책을 읽을 시간이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네요.” (152)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영미소설 #세계문학 #문학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걸 바라면 어쩐지 우리가 갖고 있던 것마저 빼앗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33)

에블리나는 여태껏 ‘기회’라는 것에 속아 왔다. (26)

"결혼하고 싶어요." 그가 되풀이해 말했다. "져 너무 외로워요. 사람이 혼자 산다는 게 좋은 게 아니죠. 그리고 매일 찬 음식만 먹는 것도요."(66)

그녀는 다시 가게에 홀로 남자 매우 안도했다. 그녀는 자기 삶에서 결정적 순간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 기뻤다.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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