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격보다 우위에 자기를 놓는 태도.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사랑 앞에서 자기 몸을 한껏 낮추면서 동시에 (그 겸손의 몸짓으로) 사랑을 한낱 자격의 문제로 끌어내린다. 자격은 ‘지금’ 없을지라도, ‘언제든’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얻거나 잃을 수 있다. 잃거나 얻을 수 있다. 언제든 잃을 수 있으므로 얻었다고 우쭐할 것이 아니고 언제든 얻을 수 있으므로 잃었다고 아쉬워할 것도 아니다. 그런 속셈을 추측할 수 있다. 더 위악적으로 해석하자면, 그까짓 자격, 일부러 갖추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 것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격을 얻을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그러지 않는다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그 자격을 깎아내리고 자기를 높이는 방법. 자격보다 우위에 자기를 놓는 태도. 못해서가 아니라 하기 싫어서라는 포즈. 

- 경멸과 연민

경멸보다 연민이 낫다는 건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경멸은 대처할 수 있고 견딜 수 있다. 경멸은 일종의 공격이므로, 공격에 대해 방위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경멸하는 상대를 똑같이 경멸하거나 그럴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무시함으로써 이겨낼 수 있다. 형배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경멸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멸이 연민보다 쉬웠을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지만 연민은 공격이 아니고, 비유하자면 부드럽게 껴안는 포옹과 같아서, 일종의 베풂, 심지어 은혜라고까지 할 수 있으므로 방어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민은 피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어떻게, 무엇으로 은혜에 대항한단 말인가. 대항한다 하더라도 은혜에 어떻게, 어떤 손상을 입힌단 말인가. 덧붙이자면 이렇다. 행위자의 행위에 목적이나 계산이 없을 때는 손상을 입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손상은 그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의 목적이나 계산을 향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럴 때만 손상이 이루어지니까.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의 목적이나 계산을 조준하고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 공격이니까. 그런데 은혜는 목적이나 계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고, 무조건적으로 주고 그냥 손을 내미는 거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해도, 어떤 타격을 가해도 손상을 입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손상되지 않는 것을 손상시킬 수단은 없다. 치명타를 날릴 수 없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꿈을 꿀’ 수 없다.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능동태의 동사(‘꿈꾸다’)를 쓸 수 없다. 꿈은 꾸어진다. 꿈꾸는 사람은 자기가 꾸는 꿈에 대해 무력하다. 자기가 꾸는 꿈속 인물들과 이야기에 대한 권한이 없다. 꿈꾸는 사람은 자기가 꿀 꿈, 꿈속의 인물이나 에피소드를 선택할 수 없다. 꿈은 잠자는 사람의 뇌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허락을 구하지 않고 허락을 할 수도 없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이 꾸어지는 것을 겪을 뿐이다. 사랑은 덮친다. 덮치는 것이 사건의 속성이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물론 허락을 구하지 않고) 어떤 사람, 즉 사랑을 속수무책으로 겪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의 말은 불가피하게 우회하는 말이다. 사랑의 말은 직선을 모른다. 아니, 모르지는 않지만 쓰지 못한다. 쓰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두근거림과 조심스러움, 즉 수줍음이 쓰지 못하게 한다. 직선의 언어는 빠르지만 날카로워서 발화자든 청자든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쉽다. 자기든 남이든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시작되는 현장에서 직선의 언어는 여간해서는 채택되지 않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사랑에 대해 더 진지하다. 더 진지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함부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다.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함으로써 모독하느니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려움은 멸시가 아니라 공경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싫기 때문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기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다가가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는 비극이 그래서 생겨난다. 탈옥도 하지 못하고 개조하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태. 

가령 고슴도치는 누군가를 안으려 하는 순간 몸에 난 가시로 상대방을 아프게 하고 만다. 문제는 ‘사랑한다’는 말이 고슴도치의 몸에 난 가시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가시가 아닌 말, 가시 돋친 말이 아닌 사랑의 말이 가시가 되어 누군가를 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생각을 뒤집어야 한다. 말에는 가시가 없지만, 말해지는 순간 가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일까. 가시 돋친 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는 특정 맥락 속에서 어떤 말은 가시 돋친 말이 되는 것이 아닐까. 맥락이 감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한다’는 말은 그럴 가능성이 유난히 높은 말이다. 아름답고 황홀한 말이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말이기도 하다. ‘사랑한다’는 아무 말도 아닌 말일 수 없다. 그저 그런 말, 하나 마나 한 말일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우주가 흔들리는 전율을 느끼지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온몸을 움직여 떨쳐버리고 싶은 이물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종류의 말이다. 

사랑을 내세워서 무엇을, 그것이 무엇이든, 요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자기 사랑을 얼마나 대단하고 절실한 것으로 표현하든,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권력이 아니고 권력이 될 수 없고 권력이 되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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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취향은 설명할 수 없다”라는 말은 아주 지당하지만, “취향을 세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곰브리치가 말하는 ‘취향을 세련하기’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이 책의 맥락에서 말하면 ‘취미를 서술하는 표현’에 관한 문제이다. 예를 들면, 와인 테이스팅에서는 특정 미각에 대응하는 다양한 어휘들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미묘한 감각의 차이와 관계, 동일성, 연상 작용 등을 조금씩 깨우치게 된다. 하지만 와인의 미각을 설명하는 어휘를 ‘무겁다/가볍다’, ‘쓰다/달다’ 정도만 알고 있는 나란 사람은 언제까지나 ‘취미를 세련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개개의 경험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각각의 인상으로 뿔뿔이 흩어진 채로, 서로 뚜렷한 연관이 있는 지식 체계로 발전해나가지를 못한다. 예술(음악) 체험에서도 감각적 인상과 말의 관계는 이와 아주 비슷할 것이다. 

‘듣는 형식’이라고 하면 풍부한 청취 체험을 특정 패턴에 욱여넣는 불편한 거푸집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형식’이 지닌 공동체 형성의 힘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이런 게 오면, 그건 이런 거지’ 하는 약속이 있기에, 비로소 음악은 모차르트가 묘사하는 콩세르 스피리튀엘처럼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묶기도 하고, 암묵적인 룰을 확실히 벗어난 것을 보여줌으로써 큰 갈채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은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특정 역사/사회로부터 만들어지고, 특정 역사/사회 속에서 들려진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 마음대로 음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상은 반드시 어떤 문화의 문맥에 의해 규정된 방식으로 듣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음악은 잘 모르겠다’라는 사례의 대부분은 대상 음악과 청자의 ‘듣기 구조’의 차이에 기인하는 듯하다. 우리가 모두 특정 역사/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음악을 듣는 방식 또한 그로부터 영향받은 편견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어떤 선입관도 없이 자유롭게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음악을 어쩐지 도중에 끊으면 안 된다고 느낄 수 있는가, 어떤가? 이것을 가장 중시하고 싶다. 

음악은 문학과 같이 개념을 통한 정보 전달 방식이 아니다. 조형예술과 같이 객관적인 인식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공기의 진동을 통해서 고막을 애무하는 기술이다. 

일반적으로 행동거지의 페이스가 자신과 비슷하거나 설사 다르더라도 그것이 좋은 보완관계(이른바 ‘보케와 쓰코미’ 같은) (만담에서 주고-받는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을 일본에서는 보케와 쓰코미라고 한다_역자)를 이루는 사람과 어울리는 게 편안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서로의 리듬이 하나하나 상쇄되는 듯 느껴지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몹시 피곤하거나 짜증이 난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음악의 관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종종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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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3-12-22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이 책 어때??

치니 2023-12-22 12:17   좋아요 0 | URL
지금은 너무 초반이긴 한데 술술 읽혀서 재밌을 거 같아요. 클래식에 이제야 관심 생긴 저같은 사람에게는 딱임 ㅎㅎ
 














- 오메....축구장이요오? 허파에 바람 들면 진짜 큰일이겠구나!

우리의 몸에는 3백 개의 관절이 있다. 혈액 순환은 총 9만 6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동맥과 정맥 등의 혈관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경망의 총 길이는 1만 6천 킬로미터이다. 허파는 다 펼치면 축구장 하나만큼의 면적이 된다. 

즉 함께 매어 놓았지만 각기 다른 쪽으로 가려고 하는 말 두 마리를 인도하듯이 말이다. 두 마리의 말, 혹은 두 마리의 물소를 하나의 멍에로 함께 매어 놓는 것, 이게 바로 〈요가〉라는 말의 원뜻이기도 하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갔다가, 저쪽에서 이쪽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뭐여 그럼 그 누구도 소위 실상을 알지 못한다는 단순한 .... 말을 그럴싸하게 한 건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는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것을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특별한 것을 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심지어는 어렵기까지 한 일이다. 

- 오 재밌겠다

 지하철을 타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중앙 수직봉 가까이에 서 있지만 그것을 잡지는 않고 두 팔을 늘어뜨린 채로 균형을 잡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지하철은 움직인다. 좌우로 흔들리고 부르르 떨리는데, 커브를 돌거나 가속 혹은 감속하거나 갑자기 제동할 때마다 불규칙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요동친다. 이런 끊임없는 사건들을 예견할 수는 없지만 오는 그대로 함께하고, 발바닥과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와 골반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다른 승객들이 눈치 못 채게 하고, 두 팔을 풍차처럼 빙빙 돌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마치 불꽃처럼 몸을 뒤튼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두 정거장 사이에서 적어도 한 번쯤은 균형을 잃고 중앙 수직봉을 붙잡게 된다. 하지만 이따끔, 일반적으로는 우리를 당황하게 할 세찬 요동을 흡수해 버리기도 한다. 휘청거리다가 다시 몸을 바로잡고, 균형을 잃었다가 다시 잡는 것이다. 주위의 누구도 당신이 이런 로데오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너무나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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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쇼팽 연습곡 작품 10의 1번이나 2번, 또는 쇼팽 폴로네이즈 작품 53이나 리스트의 장송곡(Les Funérailles)」에 나오는 긴 옥타브패시지를 연주하면 당연히 팔이 아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은 이 피로감의 원인이 그들의 약한 근육에 있으며, 따라서 이 근육들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만에 말씀이다! 섬세하고 작은 앞팔의 근육들은 손가락을 움직이고, 손가락으로 하여금 아주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보다 훨씬 강한 위팔, 어깨, 몸통의 근육들을 제대로 움직여 주면 이들이 약한 앞팔의 움직임을 도와주기 때문에 통증의 원인을 모두 제거해 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몸 전체의 근육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강한 근육들을 근육 협동/조정 작용을 통해 이용하느냐를 익히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습관화하여 피아노를 칠 때 언제든지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연습의 목표는 이처럼 올바른 연습 습관을 터득하는 것이어야지,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워밍업 연습에 낭비하자는 것이 아니다. 테크닉은 우리의 근육의 강도나 지구력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 되고, 근육들의 최적의 협동/조정 기능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피아노 연주에 필요한 신체 여러 부분들이 움직여질 때이들 각각의 위치가 어디인지, 어떤 종류의 근육군을 움직여야 하는지, 테크닉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 근육들이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가장적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가장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 내는 것이다. 우리는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강도 높은 음악적 열정과 연주에 필요한 근육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지속적인 긴장감을 혼동해서는 안 되며, 또한 건반을 마구 짓누르는 동작을 통해 얻어지는 느낌을 통해 마치 마음속에 음악적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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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 어차피 착취당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면, 섬유상인 바스케스에게 착취당하는 편이 허영심과 명예, 경멸과 질투 혹은 불가능에게 착취당하는 것보다 덜 비참하지 않겠느냐고.


  심지어는 신에게 착취당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이 세계라는 공허 속에서 사는 예언자들과 성자들이다. 

내 영혼에는 마치 성가신 아이와 같은 짐스러운 조급함이 달라붙어 있다. 그것은 쉬지 않고 자라나는 동일한 성질의 불안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란 모든 이에게 일어나거나, 혹은 우리에게만 일어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첫 번째 경우라면 새로울 것이 없고, 두 번째 경우라면 타인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다. 

우리는 일생 동안 하나의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그 길에 맞서서 행동한다. 우리 아닌 어떤 것, 우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에 우리 자신을 맞춘다. 또한 우리의 실체라고 결코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것을 참조하면서, 우리의 몸짓과 태도를 선택한다.


  읽지 않을 책을 산다. 음악을 들으려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나오는 누군가를 보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콘서트에 간다. 걷는 것이 피곤할 때, 우리는 긴 산책을 나선다. 우리는 시골로 휴가를 떠난다. 다름아닌 전원생활이 지루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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