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헤아림의 조각들
임지은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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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그대로 나와 준 책이다.
‘쉽게 확언하지 말고 비겁하지 않으면서 끝내 솔직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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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훼손은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할 때 생기는 일이 아닐까요. 세상은 잔인하고, 그런 세상에서 사람은 사람을 외면하고 버리고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도망칩니다. 사람은 남은 사람을 돕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위해 꺼리는 일도 합니다. 사람은 아파하면서도 버텨냅니다. 사람은 최악을 면하고도 훼손됩니다. 사람은 훼손되고도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그것은 어딘가가 영영 망가진 대신, 무언가를 조금 더 이해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밝고 구김살 없이 자랐다, 티 없이 맑다, 같은 말들이 여성에게 칭찬으로 쓰일 때마다 칭찬은 비난을 포함하고 있다는 오래된 진실을 감지합니다. 그 칭찬엔 훼손된 여성에 대한 멸시가 들어 있어서, 

이미 생겨버린 흉터를 개선하려면 거기에 다시 상처를 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럼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어도 새로운 피부를 갖게 되니까요.


  나는 훼손되는 동시에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똑돌이들은 동시대 한국 소설이 세계 고전에 비해 열등하다는 식의 확언을 즐겼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이 최근 한국 문학 내 흐름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오래전 수능을 준비할 즈음 읽었을 단편, 혹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 소설이 자기가 가진 예시의 끝이라는 사실은 은폐했고……) 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끊임없이 의견을 내고 싶어 했지만, 자기 시야의 한계와 당사자의 언어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했다. (대한민국에 대해 다 아는 듯 굴면서 여성인 내 현실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그들과 미술관이라도 함께 가는 날이면, 미술사적 개념이나 연보는 들을 수 있었지만, 해당 작품이 지금 여기, 그 자신 혹은 우리에게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선 들을 수 없었다. 

학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조금 알 것 같아지는 순간들로 말미암아, 나는 각자 살면서 느끼고 간직해온 장면이 사람을 꽤 똑똑하게 만들어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색색의 슬픔이나 길냥이의 울음, 영화의 장면같이 모호한 것들을 알고자 할 때 필요한 건 꼭 들어맞는 논리보다는 빈틈이 생기더라도 빗대고 포개어 볼 수 있는 각자의 기억이었다. 그런 기억을 가지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 다른 존재의 시야를 수용해보려는 시도, 몰라서 치솟는 감정과 그로 인해 행동하게 되는 찰나, 그리고 때론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도무지 타당하지 않을 순간에서야 잊지 못할 자기 기억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한번은 한 배운 남자가 페미니즘을 운운하는 내 말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감하는 겁니다. 그는 남자들의 폭력성을 다독이거나 키워주는 사회에 대해, 그 폭력성이 망가뜨리는 것들에 대해, 아니 그것들이 증명하는 이미 망가져 있는 남자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니까 남자인 네가 뭘 알아,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나는 아닌 척 가자미눈으로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윤리를 선취하려 드는 남자 중 도무지 믿음이 가는 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가 오래전 외국의 으슥한 골목에서 남자 여럿에게 성폭력을 당할 뻔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는 무력(無力)함과 무력(武力)을 이해한 사람 특유의 얼굴로 말했고, 그 얼굴은 나같이 의심이 많은 사람조차 단번에 설득해버렸습니다. 그게 아니면 그의 불행이 나를 설득했는지도 모르죠.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듣고 보니 그가 썩 달라 보이더군요. 어떤 일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조금 뭉클하게 연대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선 참으로 무시무시했는데, 그 후 종종 나는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 남자들을 전부 그 골목으로 보내고 싶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다 놀란 나머지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던 것입니다. 서로의 말을 이해한다는 건 정말 뭣 같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차라리 피해자가 되어버리길 바라는 마음과 나도 그 누구도 그딴 걸 모르면 좋겠는 마음, 피해자에 그만 이입하고 싶은 마음과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도 나서주길 바라는 마음, 그러면서도 피해 사실에 설득되는 마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그러진 마음들이죠.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던 내 마음과 싸우던 나는 이제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는 내 마음과 싸웁니다. 이상적인 여성상은 달라졌을 뿐 여전히 존재하고, 어떤 화장품과 옷을 고를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표정을 지을지 내 몸이 숱하게 훈련해온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내면화하려 듭니다. 가끔은 다정하게, 가끔은 뾰족하게, 가끔은 불행하게, 가끔은 있어 보이게. 

인정하긴 싫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선한 의지란 정작 더 나은 삶으로 가고 싶어 하는 개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하니까요. 정말이지, 매번 화를 내지만 동시에 영원히 지속될 거 같은 분노는 내 안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패배도 그만하고 싶은데요. 가끔은 아예 그 마음들을 모른 척하고 싶은데요. 실은 내 삶이 혹사당하질 않길 바라고 있을 뿐이었는데요. 강남에 살아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지만 강남, 살아보고 싶은데요. 근데 그러면서도 막상 강남 사는 놈이 그 따뜻하지만 힘없는 사람들의 모임 따위에 있었다면, 나나 기오성이나 술김에 외쳤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자격이 있느냐고, 너같이 배부른 놈에게 자격 같은 게, 씨발, 있느냐고.


  이런 걸 생각하면 아무 데나 왁 소리 지르고 싶어지고 그걸 못 하니 으악거리며 웃는 거지요. 교육이 다 뭐랍니까. 정의감과 열패감이 원래 저들끼리 자주 엉킨다는 걸 내가 만난 선생 중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요. 좀 정의로워 보려고만 하면 자꾸 내 안의 열패감이 고개를 들어서. 얼굴이 화끈거려 급기야 가지고 있는 정의감을 통째로 내다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곤 합니다. 무겁긴 얼마나 무거운지 내다 버리지도 못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게 나쁜가요. 나를 포함해 내게 의미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곤궁함의 항상성에 대한 불만, 울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계속 울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 그런 걸 결코 누군가의 정체성으로 삼지 않겠다는 결기, 이 모든 걸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내 무능 같은 게 반복되고 뒤섞일 때면 진절머리가 나는 걸 어떡합니까. 

더도 덜도 아닌 적당한 선을 맞추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 자신을 초과해볼 요량으로 장전해둔 최선을 억눌러야 했는데, 거기에는 인터넷쇼핑 중 최저가를 찾아 헤매다 오는 공허함 비슷한 게 있었다. 최저가 물건을 찾는 데 드는 시간처럼, 최선의 노력을 계량하는 데에도 품이 들었다. 할 만큼만 하는 데 드는 에너지는 꾸준히 그리고 놀랄 만큼 의욕을 빼앗아갔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사수는 가끔 참 잘한다고 격려해주었다. 큰 감흥은 없었다. 그 칭찬은 내가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을지와는 무관했다. 오해를 살까 말하자면 사수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고, 그가 내게 한 지적은 전혀 부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서 일하는 내내, 나의 최선이 저지른 실수는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뭘 하나 해도 최선을 다하렴. 항상 그게 중요한 거란다…….


  그 시기 나는 피곤에 절은 엄마가 아침마다 최선을 다해 나를 격려할 때마다 정색을 일삼았다. 옛날 얘기 그만해. 평범한 이에게 함부로 최선을 요구하지 마.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최선은 그저 나를 소모하거나 바보로 만드는 일이야. 냉소적이고 재수 없게 인생의 진실을 꿰뚫고 있다는 듯 굴었다.


  퇴근 후엔 엄마에게 한 말을 뉘우치며 언젠가 숨어들어 울었던 산책로를 찾아갔다. 산책로는 경사가 심한 대신 정상에서 뻥 뚫린 시야로 일몰을 볼 수 있었다. 퇴근 후 헉헉대면서 경사를 올랐다. 지친 몸을 쥐어짜 매일의 일몰에라도 온 힘을 다하면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아졌기 때문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엄마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했다. 최선을 다하는 일이 있다는 건 중요했다.


  그러므로 실수가 내 안에 오래오래 남아 있는 건 단순히 내가 옹졸하거나 창피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실수로 인해 나는 평범한 이의 최선보다는 비범한 이의 평범한 방식이 중요한 사회의 원리를, 대체 가능한 일을 주어진 선만큼만 하면 되는 이의 슬픔을 깊게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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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죽음이 평등하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은 추위 같은 걸지도 몰랐다. 바꾸지는 못해도 조금 더 견디게 해주는 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얼마 전에는 나조차 아침에 할머니에게 온 전화를 보고도 저녁에야 다시 걸었다. 이제는 부재중 전화가 할머니에게서 와 있어도 곧바로 전화하지 않는다. 몇 년째 입어온 코트가 너무 얇고 춥다고 느낀 날에, 잘 차려입고 나가야 하는데 옷장에 마땅한 겨울옷이 없다고 느낀 날에,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 어느 날에, 나는 할머니에게 보낼 생필품을 주문하며 잠깐 생각했다.


  할머니, 언제 가?


  


  혹시 할머니가 정말 죽으면, 나는 내가 했던 생각들을 뉘우치며 많이 울까. 할머니가 정말 죽으면, 할머니의 영혼은 내가 했던 생각들을 알아채고 많이 슬퍼할까. 무심코 삼켰던 말조차 이제는 돌이킬 수 없기에, 장례식장의 사람들은 그렇게 우나.


  잘 모르겠다. 다만 비로소 주변 어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너무 거듭 각오하다 보면, 차라리 무언가가 그 각오를 끝내주길 바라게 되기도 한다는 것. 이제 나는 그들이 할머니가 죽기를 기다린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이해할 수 없던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서, 조금 더 어른이 된 것도 같다. 

그러나 나른한 내 하루는 무척 튼튼해서 잘 무너지지 않는 것 같고, 어쩌면 그렇게 착각하는 방식으로만 이어질 만큼 연약한 것 같다. 그도 아니라면 일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픔을 몰래몰래 몰아서 잘 해치워온 것일 수도 있다. 설거지를 하다가, 아무도 없는 산책로를 걷다가, 빈 화면 앞에 앉아 있다가, 내게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다가, 나는 몰아서 하늘을 보고, 몰아서 눈물을 쏟고, 몰아서 유감스러워하고, 몰아서 활짝 웃는다.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을 즈음 잠에 든다. 미리 해봤자 어차피 언제나 모자랄 것이다. 

다만 수신되지 않는 전화를 아침저녁으로 걸었던 날들이 무색하리만큼, 요즈음엔 길에서 잘 울지 않는다. 거울에 얼핏 비친 내 얼굴은 영영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빚 앞의 채무자처럼 덤덤해 보였다. 

늘 내가 속하고자 하는 세상에 잘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한 태도는 청소년기 우정에서는 비교적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에게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하라고, 사랑받는 존재이자 기쁨이 되라고 강권하는 사회에서는 충분히 문제적이다. 그럼에도 자기 안에 새겨진 관성을 처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 무렵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던 친구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시부모에게 잘해야 하는 것보다도, 사랑하는 이와 그가 속한 세계에 잘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내가 밥을 차려주고 싶으면 어떡하지? 그의 집에 갔는데 내가 나서서 과일을 깎으면 어떡하지? 아이를 낳았는데 당연하다는 듯 내가 애를 떠맡으면 어떡하지? 걔를 사랑하느라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이의 세상에서 이 일이 반복되면 어떡하지?


  나와 내 주변 여자들에게 고민의 공유는 중요했다. 그건 우리가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자꾸 스스로를 잃을 만큼 타인을 헤아리려 들었던 것이다.


  반면 남자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들이 내 말을 이해하긴커녕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초조하게 혹은 거칠게 물어왔다. 그래서 너는 명절에 너희 집부터 갈 거야? 우리 집에서 설거지 안 하고 과일 안 깎을 거야? 진짜 집안일 안 할 거야? 밥 안 차려줄 거야? 너 할 일 하겠다고 이기적으로 애를 버릴 거야? 

이 산 이후로 나도 모르게 동거인의 밥을 챙기거나 집안일을 해치우려 든다. 동거인이 선을 그어줘도 동거인의 가족에게 무심코 다가가고야 만다. 거기엔 애정하는 이에게 환심을 사려드는 나의 버릇이, 타인의 기쁨이 되는 기쁨을 일찌감치 깨우친 나의 성향이, 무엇보다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있다. 동시에 거기에는 옆집 할머니의 말이, 나를 통과한 숱한 맥락들이 겹겹이 존재한다. 동거인을 사랑하는 나의 방식엔 나를 훈련시킨 세상의 흔적들이 묻어 있다. 그것들은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 내게 언제나 가장 큰 의미라는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나를 괴롭혀왔다. 여전히 타인의 기쁨이 되어야만 하는 슬픔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나의 충동과 버릇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오염시키고, 타인을 너무 헤아리다 못해 나를 잃어버릴 거 같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타인의 기쁨이 되는 기쁨을, 내게 중요한 이에게 사랑받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오늘날 내가 원하는 여성상과 실제 나 사이에서 이렇듯 다툼이 벌어진다. 그럴 땐 여름날 시원찮은 에어컨을 바라보듯 거울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느끼는 게 과로인지 슬픔인지 혼동하면서. 그저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 이 느낌이 또렷한 신호라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필요하다는, 그리고 중요하다는 신호. 

그 후로도 이따금 그의 계정을 들여다봅니다. 올라오는 게시물의 무게에 이전처럼 망설이다가, 어떤 이야기든 그 이야기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국 ‘좋아요’를 누르면서요. 그럴 때마다 시간은 순간 느려지고 나는 느릿느릿 생각합니다. 언젠가 그와 고인이 남긴 기록에 이유 없이 흐뭇했던 마음이 이제는 저려오는 일에 대해서. 화면 너머 먼 거리의 나에게까지 묻어날 정도인 슬픔의 규모, 그로 인해 그가 보내고 있을 무한히 느린 시간에 대해서. 눈 한 번 마주친 적 없고 몸짓 한 번 본 적 없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어느새 영향을 받고야 마는 일에 대해서.


  거기엔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생겨난 무언가가 분명히 있고. 그게 작동하지 않을 때, 과연 나는 무엇일 수 있을지…….


  나는 그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멀리에서나마 거기 답해보려 애쓰는 일이 관계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하는 것도요. 

펜을 잡으면 쓸 것을 찾고, 청소기를 들고 있으면 청소를 하게 된다. 그때는 뾰족한 문장들,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는 말들을 쥐고 다녔다. 처음엔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20대 내내 나는 여성을 둘러싼 사회의 억압이나 나를 과녁으로 삼는 남자들로 인해 자주 취약해졌고, 그러면서 타인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궁금해하며 나 자신을 집요하게 밀어붙이곤 했다. 그러나 반대로 가끔은, 타인이 나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상대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런 것이야말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지 않을까?


  타인에게서 나 자신의 밑바닥을 보는 걸로 더는 즐거워하지 않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그 사실이 놀랍다. 나는 지금의 기준에 맞추어 과거의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왜곡해버린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들에 맞추어 거기 걸맞지 않은 나의 부분을 망각해버린다. 

임신중절한 여자에게, 누군가는 다그치듯 죄책감과 모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보아도 내 마음은 빈방 마냥 깨끗합니다. 그 방엔 어렴풋한 먼지만이 내려앉아 있고, 나로선 그게 조금 쓸쓸하게 느껴져요. 가끔은 스스로가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변에선 분명 내가 잘 무너지고 휩쓸리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나도 아이를 원했다면 품고 낳고 기르지 않았을까요. 그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 아이가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나는 원하지 않았던 것을 곧장 사랑하는 방법은 모릅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일 역시 묘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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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람의 피부를 나무껍질 같다고 말한 이들은 오래된 사람을 만져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내 손 안에 놓인 부드러운 손. 그날 내내 쥐고 있었던 명재의 손은 꼭 봄날의 목련잎 같았다.  

**


나는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느라 승강장 주변을 오랫동안 서성이는 노인들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앱으로 택시를 부르게 된 다음부터, 아파트 앞 택시 승강장은 자주 비어 있었다.


  늦어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죄송해요. 더 지체했다가는 아르바이트에 늦을 게 분명해 결국 나는 할머니의 손을 조심스럽게 뗀 채 인사를 하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코너를 돌면서 힐끗 보니 할머니와 경비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달렸다. 공터도, 파란불이 꺼지기 직전 횡단보도도 단번에 건넜다. 속력을 낼수록, 골목과 탄천을 지나 번화가와 역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그들은 작아져 점이 되다가 끝내 지워졌다.


  볕 좋은 날 동네의 풍경 앞에 서면 그날의 달음박질이 떠오른다. 하루하루 축소되는 어떤 세상이 작아지고 점이 되고 그렇게 지워져버릴까 봐 겁이 난다. 몸이 불편하고 오래된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어쩔 땐 안도하고 어쩔 땐 숨이 찬다. 명재의 손도 내가 떼어낸 할머니의 손도 꽃같이 부드러워서, 그것이 내 안에서 흐드러질 때마다 나는 그 위로 미끄러진다. 

고백하자면 나는 웃음을 참느라 살짝 끝이 떨리던 네 목소리가 좋았어. 네 고요를 좋아하던 만큼이나 내가 그 고요에 작은 파도를 낼 수 있어서 좋았어. 

남은 게 희미할수록 기억은 더 자세히 말하려 드니까. 윤아, 나는 내가 남기길 원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고, 늘 그런 생각을 해. 

뜬금없지만 나이가 더해주는 축복은 유한함을 배운다는 것 같아. 정리정돈과는 영 거리가 멀었던 내가 이제는 공간을 자주 정리한다. 집에 뭘 들일 때마다 영원히 곁에 둘 것을 고르듯 신중을 거듭해. 주어진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무엇을 어떻게 놓을지 선택하고 정리하지 않으면 삶은 순식간에 비좁아지니까. 그렇다고 유용한 물건만 두진 않아. 이를테면 저쪽 구석에 세워둔 LP는 오래전 돌아가신 동거인의 할아버지 것이지. 이제 누구도 그걸 듣지 않아. 그렇지만 굳이 남겨둔 과거를 볼 때마다, 나는 나로선 알지 못할 그의 할아버지를 생각해. 동거인은 자신의 방식으로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고, 자그마한 이 공간을 좀더 아름답게 하는 건 그런 거라고. 

미디어 속 주체적이고 세련된 할머니에 열광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얼마나 드문 일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때, 다수의 노인은 소외되는 게 아닐까. 혼자서도 꼿꼿한 개인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세상은, 그렇지 못한 노인을 세상으로부터 끊어내는 게 아닐까. 늙음에 주체 같은 단어를 붙여가며 내가 보지 않고 미뤄오던 것들은 무엇인가. 늙음을 혐오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말하면서도, 늙음에 바라고 요구하고 지워내려던 것들은 또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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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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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적, 단언적 정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어떤 관념(사랑도 관념이라고 전제한다면)에 이토록 촘촘하고 깊은 고찰을 해냈다는 점에는 박수. 다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 종종 들었고 어딘가 종교적인 구도자의 느낌을 풍기는 묘사는 작품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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