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서재 이혼 시키기
이화열 지음 / 앤의서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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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만 세 권 정도 내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럴 만 하다. 자신만의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재능이 있는 분이고 필체도 구축했다. 다만 이번 책은 온통 가족 이야기라서 가족 예능프로그램을 볼 때면 느끼는 불편한 마음이 종종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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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기막힌 속임수다. 선택은 또 하나의 자신이다.

파리에서 두 시간이면 비행기로 날아갈 수 있는 프라하 여행이 꿈이었던 시어머니, 남편 없이 혼자 여행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그녀는 탁자 위에 슬쩍 프라하 여행 팸플릿을 올려놓아 보기도 했지만, 시큰둥한 남편의 반응을 보고 팸플릿도 꿈도 접었다.


진정한 독립은 자기 욕망과 행복을 타인이 결정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비행기를 타는 일조차 영원히 불가능해진 재활병원에서 그녀는 후회로 변해버린 꿈을 다시 꺼내본다. 하지만 늙음은 후회조차 빛바래게 만든다. 

암이라는 병은 삶과 죽음의 차이가 백지 한 장보다 가볍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나의 남은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삶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한시적이라는 각성, 일상과의 미적 거리가 필요하다.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죽음이야말로 헛것을 분별하는 눈을 열어준다. 삶의 중력에 휩쓸리지 않는 곳은 자기 안의 심연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때때로 고통 없이 숨 쉬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하게 느껴진다. 이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편안한 행복감이다.


세상은 우리 시선으로 존재한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심하고 집중하는 것, 일상의 작은 움직임, 햇빛 한줄기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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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맡겨놨던 무거운 짐을 챙겨가는 알렉스는 자동차로 데려다준다 해도 한사코 마다한다. 타인의 시간을 빼앗는 것보다 무거운 짐을 옮기는 것이 마음 가벼운 일이라는 걸 알아채지만, 혹시나 하고 다시 한번 제의한다. 그는 단호하게 다시 한번 거절한다. 지나친 호의는 자기도 모르게 타인을 길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한다. 

자식을 곁에 묶어두고 싶어 하는 부모의 잘못된 권력은 사랑, 희생, 가족주의라는 가면을 쓴다. 최고의 부모는 자식을 곁에 묶어두지 않는다. 자식을 키우는 순수한 목적은 자식에게 더 이상 부모가 필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현비가 학교에서 어떤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탐탁지 않은 결과를 듣고 실망한 내 표정을 읽은 현비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왜 엄마 인생인 것처럼 반응해?”


나는 갑자기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실망도 현비 몫이므로 함부로 가로채서는 안 된다는, 그건 깨달음 이상의 각성이었다. 

“어제 밤에 현비를 픽업해줬는데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세 번 했어. 진심으로 감동했어.”


올비가 말한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다 아는 걸 가지고.”


내가 대꾸한다.


“다 아는 데서 새삼스러운 의미를 찾는 것, 미덕에 무심해지지 않는 것. 바로 그게 내 행복론이야.”


우리는 행운을 통제할 수 없지만 작은 요령은 부릴 수 있다. 이를테면, 다 아는 데서 새삼스러운 기쁨을 추출하고, 작고 사소한 즐거움에 무뎌지지 않는 능력을 키우는 기술, 우리에게 허락된 작은 기쁨과 행운을 발견해서 어쩔 수 없는 작고 큰 불행에 물 타기 하는 전략이 그것이다.

“너 아니? 사람들은 부탁하는 것만 해주라고 말해. 먼저 해줄 필요가 없다고. 한국말로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오지랖’이라고 해. 그런데 살면서 기분 좋은 사건은 말이지. 대부분 누군가의 오지랖 넘치는 행동 덕분이야.” 

“근데 너희 부모님은 1년에 동생과 올케한테 손주 학비로 엄청난 돈을 부쳐준다며? 올케한테 시어머니 참견 받기 싫으면 돈도 받지 말라고 해. 세상에 나가서 그 돈 번다고 생각해봐. 아마 상사 눈치 열배도 더 봐야 할걸.”


생각난 김에 덧붙인다.


“부모가 대주는 결혼 비용, 시부모님이 장만해주는 아파트 챙기면서 정신적 자유까지 누릴 수 있는 데 있으면 나한테도 좀 알려줘 봐.”

도움 주는 습관과 의존하는 습관은 한쌍으로 자란다. 본인이 스스로 산소호흡기를 착용해야 하는 규칙은 비행기 추락할 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물귀신처럼 같이 물에 빠져죽는 형국이지만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생각하는 혈연주의는 한국 부모의 유전자에 코딩이 된 것 같다.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면 부모로서 과업은 완성한 셈이다. 타인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생에서 배웠다. 부채 의식 없는 관계가 무릇 신성하다는 것도 말이다.

나는 시간을 쪼개는 것보다 시간을 보태는 것이 좋다. 친구와 시간을 보낼 때는 느긋하게 대화에 집중하고, 좋아하는 요리를 할 때는 색깔과 냄새, 요리하는 시간에 집중한다. 맛은 거기서 나온다. 인생도 비슷하다. 집중한다는 건, 현재의 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습관이다. 

“미셸 투르니에는 『외면 일기』에서 세 가지 질문에 대답했어.”


1. 나는 금주할 능력이 있는가? 있다.


2. 금주를 하기가 힘든가? 그렇다.


3. 금주를 해서 얻은 이득이 무엇인가? 없다.


올비는 나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미간에 힘주고 말한다.


“그래도 마시고 싶다는 생각과 싸워야 해.”


“근데 말이지. 내가 오늘, 이 한 잔을 안 마시고 잠자다가 죽으면 얼마나 후회할까?”


“아마 죽느라 후회할 틈이 없을 거야.”


“내가 아니라 이렇게 간절하게 마시고 싶은 한 잔 못 마시게 한 너 말이야. 너.”


내가 먼저 죽으면 와인 없는 소시송 신세가 될 남자는 뭐가 웃긴지 낄낄대며 웃는다. 

고장 날 염려 없고, 사용할 때마다 선물한 사람을 떠올리고, 가진 것을 계속 욕망하게 만든다면 성공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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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침으로 훈련하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진짜 요리사는 레시피를 만드는 사람이다. 정보와 지침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대충’ 즉, ‘직관’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완전히 길을 잃고 만다. 직관은 본능적으로 경험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뿐이다. 

추락 사고를 몇 번 겪고 난 뒤, 노인들이 조심스럽게 걷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계단을 내려갈 때, 길을 걸을 때 나도 모르게 올비 팔짱을 낀다. 슬픈 건지 다행스러운 건지 세월이 속도를 조절해준다.


노부부가 손잡고 걷는 뒷모습이 세월의 풍파에 살아남은 사랑의 어떤 증거인 듯 잔잔한 감동을 받은 적도 있지만, 이젠 서로 지팡이가 되어줄 수밖에 없는 울적한 세월 때문이라는 것을 깨우친다. 

 세상 어딜 가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묵살하고 사는 것이 제일 힘들다. 

“왜라니? 길거리에서 억지로 음악을 듣는 것이 고통스러워 나라를 바꾼 사람이야. 남편 바꾸는 게 어려울 것 같아?” 

“드디어 은퇴 이후 완벽한 프로젝트를 찾았어. 이런 조그만 책방 주인이 되어 와인 마시며 책을 읽는 거야.”


“집에서 마셔. 책방 주인 되면, 와인도 마실 수 없고 책도 읽을 수 없어.” 

사람은 고쳐 못 쓴다 해도 바람 없는 관계는 종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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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석양을 향해 가고, 밤은 새벽을 향해 가고, 음은 양의 씨앗이고, 양은 생성 중인 음이며, 우리는 이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들 가운데 갇혀 있다. 이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헛된 일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며, 때로는 그것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모든 순간은 지나가고 절정은 쇠락을, 패배는 미래의 승리를 예고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데 도움이 된다. 삶이 우리에게 미소 지을 때 곧 이것이 우리를 사정없이 후려 패리라는 점을, 또 우리가 어둠 속을 헤맬 때 곧 빛이 나타나리라는 점을 아는 일은 유익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중함을 부여하며 자신감을 준다. 또 순간의 우울한 감정들을 상대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적어도 그래야 할 것이다. 

약 15분 동안 윌리엄 허트는 자신은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어리고 경박했던 나는 이런 고결한 척하는 말들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친구처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왜 그렇게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것에 집착하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우리가 만난 이후로, 아니 영화 프로모션을 위한 이날 하루 동안 처음으로 진정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나를 정말로 쳐다보는 거였다. 파란색 눈의 동공이 확장된 그는 내게로 지그시 몸을 기울이더니 내 귀에 대듯이 하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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