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이제 베르타를 괴롭히는 의문은 자신이 왜 이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이렇게 해서 뭐가 만족스러운 건가, 베르타는 신음하듯 생각했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말을 떠들어대면서 도대체 어떤 기쁨을 느끼는 걸까. 가만히 듣는 것보다 열심히 말하는 게 그래도 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그게 더 살아 있는 것 같아서?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엄마 진짜 귀신같지 않냐?


  혜진이 말했고 혜영은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진짜 귀신같은 게, 내가 언제 약간 행복해지고 내가 언제 약간 기분좋아지는지를 딱 노리고 있다가, 딱 재 뿌리는 시점을 엄마는 귀신같이 아는 것 같아.


  엄마가 무슨…… 뭘 그렇게 노리고 뿌리고…… 그러다 혜영은 쿡 웃었다. 그럴 만큼 남의 일에 부지런한 분 아니야.


  그러니까 귀신같다는 거지. 의도가 없는데도 딱 그렇게 하니까.


  근데 이모는 오셨다는 건지 뭔지.


  거봐! 이모가 왔다 어쨌다 말이 없잖아? 그냥 이모가 또 자기 속을 썩였대. 세상에 전부 자기 속 썩이는 사람들 천지야. 우리가 삼십 분이나 일찍 와도 소용이 없어. 자기 못 본 게 대역죄야. 엄마는 귀신처럼 내가 약간이라도, 효도까지는 아니야 언니, 효도까지는 절대 아니고, 그 뭐야 그냥 불효라도 좀 덜 해보려고 하는 순간에 그 기회를 딱 빼앗는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나한테도 엄마한테도, 아주 평생 이렇게 한없이 불우하고 찌질한 모양일 거라고!


  혜진의 속사포 같은 날 선 말을 듣고 있자니 혜영은 이상하게 불안하면서도 위로가 됐다. 그래서 코뚜레를 꿰듯 해서라도 얘를 데려왔나…… 나 대신 들이받으라고. 

자신이 알아챘다면 간과했겠는가. 마찬가지로 오익은 오숙이 얼마만한 분노가 있었기에 자신을 ‘너’라고 부르며 의절을 통보하는 문자를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차라리 자신이 딸이었다면, 모든 걸 희생하고 차별받고 살아온 그런 존재였다면 오숙처럼 무섭게 돌변할 기회라도 있었으련만, 그는 한없이 억울했고 뭔지 모를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내 속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발사된 것은.


  지금의 내 생각에 그건 아마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정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네 살의 삶이 품을 수밖에 없던 경쾌한 반짝임 사이에서 빚어진 어떤 비틀림 같은 것, 그 와중에 발사되는 우스꽝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턱없이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목으로 지탱하는 듯한 그런 기형적인 삶의 고갯짓이 자아내는 경련적인 유머가 때때로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사된 건 아니었을까.

문제는 내가 지키는 줄도 모르고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무내용이다. 아무것도 없는 개미굴 같은 폐광을 절대 굴착당하지 않으려고 철통같이 지켜내려 했던 그때의 내 헛된 결사성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끔찍한 모순이며 기망인가. 나는 경서를 존중하지도 예의를 지키지도 않았다. 그러니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비열하고 무심한 인간이라는 걸 명민한 그가 읽어낼까봐. 내가 집요하게 수박을 원할 때 경서는 수박을 사주는 대신 등을 돌리고 모른 척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박을 사준 데 대한 내 감사의 눈길을 그렇게 한사코 피했던 건 어쩌면 잘못 엮인 노끈처럼 나와 엮이는 것이 그도 무섭고 불안해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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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를 대변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실로 감탄했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의젓한 말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가부좌라도 튼 듯한 점잖은 자세로. 그런데 나의 상상과 달리 정원의 말에 따르면 방에 있던 사슴벌레는 몸이 뒤집힌 채 계속 버둥거리며 빠른 속도로 움직여 다녔다고 했다.


  약을 쳐서 그랬나봐. 정원이 사슴벌레에 빙의된 듯 양 손가락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그렇다면, 하고 내가 말했다. 사슴벌레의 등에 작은 휴지를 대고 양쪽 다리에 빗자루 싸리를 몇 개씩 매달아 너 대신 청소를 시켰으면 어땠을까.


  정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정원이 씩 웃으며 해보자는 건가, 했고 우리는 해보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정원과 나는 이런 대화법을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뒤집힌 채 버둥거리며 빙빙 도는 구슬픈 사슴벌레의 모습은 살짝 괄호에 넣어두고 저 흐르는 강처럼 의연한 사슴벌레의 말투만을 물려받기로 말이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말하는 사슴벌레의 대답이 나는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문답 속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경애는 그렇다 치고, 부영이는 왜 내 전화도 받지 않는 거니? 내가 묻는다.


  부영이는 왜든 네 전화도 받지 않아. 정원이 답한다.


  어떻게 네 추모 모임에도 안 오니?


  어떻게든 내 추모 모임에도 안 와.


  부영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부영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든.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떻든 시기가 언제든 우리는 이렇게 됐어. 삼십 년 동안 갖은 수를 써서 이렇게 되었어. 뭐 어쩔 건데?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아……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나는 주문을 외우듯 다시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돌아간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너 어떻게 이러냐? 니가 어떻게 이래?


  나 어떻게든 이래. 내가 어떻게든 이래.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다는 말은 미안할 방법이 없다는, 돌이킬 도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나온 행로 속에 존재했던 불가해한 구멍, 그 뼈아픈 결락에 대한 무지와 무력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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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격보다 우위에 자기를 놓는 태도.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사랑 앞에서 자기 몸을 한껏 낮추면서 동시에 (그 겸손의 몸짓으로) 사랑을 한낱 자격의 문제로 끌어내린다. 자격은 ‘지금’ 없을지라도, ‘언제든’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얻거나 잃을 수 있다. 잃거나 얻을 수 있다. 언제든 잃을 수 있으므로 얻었다고 우쭐할 것이 아니고 언제든 얻을 수 있으므로 잃었다고 아쉬워할 것도 아니다. 그런 속셈을 추측할 수 있다. 더 위악적으로 해석하자면, 그까짓 자격, 일부러 갖추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 것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격을 얻을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그러지 않는다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그 자격을 깎아내리고 자기를 높이는 방법. 자격보다 우위에 자기를 놓는 태도. 못해서가 아니라 하기 싫어서라는 포즈. 

- 경멸과 연민

경멸보다 연민이 낫다는 건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경멸은 대처할 수 있고 견딜 수 있다. 경멸은 일종의 공격이므로, 공격에 대해 방위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경멸하는 상대를 똑같이 경멸하거나 그럴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무시함으로써 이겨낼 수 있다. 형배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경멸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멸이 연민보다 쉬웠을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지만 연민은 공격이 아니고, 비유하자면 부드럽게 껴안는 포옹과 같아서, 일종의 베풂, 심지어 은혜라고까지 할 수 있으므로 방어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민은 피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어떻게, 무엇으로 은혜에 대항한단 말인가. 대항한다 하더라도 은혜에 어떻게, 어떤 손상을 입힌단 말인가. 덧붙이자면 이렇다. 행위자의 행위에 목적이나 계산이 없을 때는 손상을 입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손상은 그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의 목적이나 계산을 향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럴 때만 손상이 이루어지니까.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의 목적이나 계산을 조준하고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 공격이니까. 그런데 은혜는 목적이나 계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고, 무조건적으로 주고 그냥 손을 내미는 거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해도, 어떤 타격을 가해도 손상을 입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손상되지 않는 것을 손상시킬 수단은 없다. 치명타를 날릴 수 없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꿈을 꿀’ 수 없다.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능동태의 동사(‘꿈꾸다’)를 쓸 수 없다. 꿈은 꾸어진다. 꿈꾸는 사람은 자기가 꾸는 꿈에 대해 무력하다. 자기가 꾸는 꿈속 인물들과 이야기에 대한 권한이 없다. 꿈꾸는 사람은 자기가 꿀 꿈, 꿈속의 인물이나 에피소드를 선택할 수 없다. 꿈은 잠자는 사람의 뇌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허락을 구하지 않고 허락을 할 수도 없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이 꾸어지는 것을 겪을 뿐이다. 사랑은 덮친다. 덮치는 것이 사건의 속성이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물론 허락을 구하지 않고) 어떤 사람, 즉 사랑을 속수무책으로 겪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의 말은 불가피하게 우회하는 말이다. 사랑의 말은 직선을 모른다. 아니, 모르지는 않지만 쓰지 못한다. 쓰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두근거림과 조심스러움, 즉 수줍음이 쓰지 못하게 한다. 직선의 언어는 빠르지만 날카로워서 발화자든 청자든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쉽다. 자기든 남이든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시작되는 현장에서 직선의 언어는 여간해서는 채택되지 않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사랑에 대해 더 진지하다. 더 진지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함부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다.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함으로써 모독하느니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려움은 멸시가 아니라 공경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싫기 때문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기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다가가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는 비극이 그래서 생겨난다. 탈옥도 하지 못하고 개조하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태. 

가령 고슴도치는 누군가를 안으려 하는 순간 몸에 난 가시로 상대방을 아프게 하고 만다. 문제는 ‘사랑한다’는 말이 고슴도치의 몸에 난 가시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가시가 아닌 말, 가시 돋친 말이 아닌 사랑의 말이 가시가 되어 누군가를 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생각을 뒤집어야 한다. 말에는 가시가 없지만, 말해지는 순간 가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일까. 가시 돋친 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는 특정 맥락 속에서 어떤 말은 가시 돋친 말이 되는 것이 아닐까. 맥락이 감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한다’는 말은 그럴 가능성이 유난히 높은 말이다. 아름답고 황홀한 말이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말이기도 하다. ‘사랑한다’는 아무 말도 아닌 말일 수 없다. 그저 그런 말, 하나 마나 한 말일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우주가 흔들리는 전율을 느끼지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온몸을 움직여 떨쳐버리고 싶은 이물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종류의 말이다. 

사랑을 내세워서 무엇을, 그것이 무엇이든, 요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자기 사랑을 얼마나 대단하고 절실한 것으로 표현하든,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권력이 아니고 권력이 될 수 없고 권력이 되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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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취향은 설명할 수 없다”라는 말은 아주 지당하지만, “취향을 세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곰브리치가 말하는 ‘취향을 세련하기’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이 책의 맥락에서 말하면 ‘취미를 서술하는 표현’에 관한 문제이다. 예를 들면, 와인 테이스팅에서는 특정 미각에 대응하는 다양한 어휘들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미묘한 감각의 차이와 관계, 동일성, 연상 작용 등을 조금씩 깨우치게 된다. 하지만 와인의 미각을 설명하는 어휘를 ‘무겁다/가볍다’, ‘쓰다/달다’ 정도만 알고 있는 나란 사람은 언제까지나 ‘취미를 세련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개개의 경험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각각의 인상으로 뿔뿔이 흩어진 채로, 서로 뚜렷한 연관이 있는 지식 체계로 발전해나가지를 못한다. 예술(음악) 체험에서도 감각적 인상과 말의 관계는 이와 아주 비슷할 것이다. 

‘듣는 형식’이라고 하면 풍부한 청취 체험을 특정 패턴에 욱여넣는 불편한 거푸집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형식’이 지닌 공동체 형성의 힘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이런 게 오면, 그건 이런 거지’ 하는 약속이 있기에, 비로소 음악은 모차르트가 묘사하는 콩세르 스피리튀엘처럼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묶기도 하고, 암묵적인 룰을 확실히 벗어난 것을 보여줌으로써 큰 갈채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은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특정 역사/사회로부터 만들어지고, 특정 역사/사회 속에서 들려진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 마음대로 음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상은 반드시 어떤 문화의 문맥에 의해 규정된 방식으로 듣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음악은 잘 모르겠다’라는 사례의 대부분은 대상 음악과 청자의 ‘듣기 구조’의 차이에 기인하는 듯하다. 우리가 모두 특정 역사/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음악을 듣는 방식 또한 그로부터 영향받은 편견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어떤 선입관도 없이 자유롭게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음악을 어쩐지 도중에 끊으면 안 된다고 느낄 수 있는가, 어떤가? 이것을 가장 중시하고 싶다. 

음악은 문학과 같이 개념을 통한 정보 전달 방식이 아니다. 조형예술과 같이 객관적인 인식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공기의 진동을 통해서 고막을 애무하는 기술이다. 

일반적으로 행동거지의 페이스가 자신과 비슷하거나 설사 다르더라도 그것이 좋은 보완관계(이른바 ‘보케와 쓰코미’ 같은) (만담에서 주고-받는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을 일본에서는 보케와 쓰코미라고 한다_역자)를 이루는 사람과 어울리는 게 편안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서로의 리듬이 하나하나 상쇄되는 듯 느껴지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몹시 피곤하거나 짜증이 난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음악의 관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종종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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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3-12-22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이 책 어때??

치니 2023-12-22 12:17   좋아요 0 | URL
지금은 너무 초반이긴 한데 술술 읽혀서 재밌을 거 같아요. 클래식에 이제야 관심 생긴 저같은 사람에게는 딱임 ㅎㅎ
 














- 오메....축구장이요오? 허파에 바람 들면 진짜 큰일이겠구나!

우리의 몸에는 3백 개의 관절이 있다. 혈액 순환은 총 9만 6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동맥과 정맥 등의 혈관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경망의 총 길이는 1만 6천 킬로미터이다. 허파는 다 펼치면 축구장 하나만큼의 면적이 된다. 

즉 함께 매어 놓았지만 각기 다른 쪽으로 가려고 하는 말 두 마리를 인도하듯이 말이다. 두 마리의 말, 혹은 두 마리의 물소를 하나의 멍에로 함께 매어 놓는 것, 이게 바로 〈요가〉라는 말의 원뜻이기도 하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갔다가, 저쪽에서 이쪽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뭐여 그럼 그 누구도 소위 실상을 알지 못한다는 단순한 .... 말을 그럴싸하게 한 건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는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것을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특별한 것을 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심지어는 어렵기까지 한 일이다. 

- 오 재밌겠다

 지하철을 타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중앙 수직봉 가까이에 서 있지만 그것을 잡지는 않고 두 팔을 늘어뜨린 채로 균형을 잡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지하철은 움직인다. 좌우로 흔들리고 부르르 떨리는데, 커브를 돌거나 가속 혹은 감속하거나 갑자기 제동할 때마다 불규칙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요동친다. 이런 끊임없는 사건들을 예견할 수는 없지만 오는 그대로 함께하고, 발바닥과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와 골반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다른 승객들이 눈치 못 채게 하고, 두 팔을 풍차처럼 빙빙 돌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마치 불꽃처럼 몸을 뒤튼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두 정거장 사이에서 적어도 한 번쯤은 균형을 잃고 중앙 수직봉을 붙잡게 된다. 하지만 이따끔, 일반적으로는 우리를 당황하게 할 세찬 요동을 흡수해 버리기도 한다. 휘청거리다가 다시 몸을 바로잡고, 균형을 잃었다가 다시 잡는 것이다. 주위의 누구도 당신이 이런 로데오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너무나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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