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의 모 님 서재에서 며칠 전 (남들처럼) 나도 당할 뻔 하다가 '극적으로' 걸리지 않은 메신저 피싱 사기에 대한 수다를 떨다가, 혹시라도 아직 모르시는 알라디너도 있지 않을까 하는 오지랍 우려 때문에 알려드리고자, 혹은 토요일 오전 당직의 심심함을 달래고자, 몇 자 끄적여봅니다. :) 

S양과 저는 고교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라, 며칠 연락이 안되거나 하면 걱정을 할 정도로 연락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좀 과장하면 서로 집 부엌에 무슨 무슨 과일이 있고 숟가락은 몇 개이고, 이런 자잘한 것들까지 아는 관계랄까요. 그래서, 웬만하면 쪽 팔려서 안할 것 같은 금전적인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꺼리낌 없이 해왔죠.  

이런 관계에 있는 S양이, 그날도 오전에 메신저로 몇 마디 나눈 차에, 오후가 되자 갑자기 급하게 돈 부칠 일이 생겼는데 그만 집에 usb도 두고 오고 회사에서 나갈 시간은 없고 하니, 저더러 대신 부쳐달라, 낼 바로 돌려주겠다 하는 것입니다? 

살갑게 'ㅇㅇ 야' 라고 이름도 먼저 불렀고, 웃음 이모티콘도 날리면서, 평상시 제가 아는 S양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어요.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하는 걸 보니, '음 역시 뭔가 되게 급한 일이 있구나' 싶었지 이것이 그녀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해킹하느라 겹 로그인(즉, 진짜 S양도 로그인 되어있고 그분들도 로그인 되어 있으니 S양이 에이 메신저 왜 이래 하고 로그아웃 하지 않는 이상, 자꾸 왔다갔다 할 수 밖에 없었던)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녀가 서두르니 저도 마음이 괜시리 덩달아 급해져서 '왜' , 그리고 '누구'에게 부치는 것이냐는 질문은 하지도 않았어요. 우리 사이에 그런 걸 일일히 따지고 부쳐주면, 너무 야박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건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 해 줄테니 그 때 들으면 되는 거죠. 

그리하여 일은 1분 안에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침 usb가 있었고 그녀에게서 구좌번호와 이름을 받았고. 금액은 지금 '니 잔고에 있는 만큼 전부' 일단 부쳐달라고 하더군요. 모자라는 것은 자신이 채울테니 그것만이라도, '급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부치려고 하다보니, 이거 제 이름으로 부칠 게 아니라 그녀의 이름으로 바꿔 부쳐야 하지 않나 싶어서, 재차 물어본 거죠. 혹시 돈을 받은 상대가 이름 때문에 못 받았다 하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물은 것인데, 이 때부터 그녀는 '응 알았어' 라는 답 밖에 할 줄을 모르는, 평소와 달리 무척 천치 같은 태도입니다? (평소 S양은 언어의 마술사죠. 아무렇게나 말하는 법은 없습니다, 급하면 말이 더 정확해지는 사람이에요) 

그때서야, 언젠가 다른 블로그에서 읽은 피싱 이야기가 후다닥 떠오르고, 전화를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전화를 안 받아서 그녀가 다니는 회사에 연락하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군요. 당연히 메신저를 하고있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제 통장 비밀번호나 주민번호 등을 알려주지 않아서 통장에서 잔고가 빠져버리진 않았지만, 은행에서는 범죄 예방을 위해 상대방이 알려준 계좌를 신고해달라더군요. 음, 하지만 저는 이미 창을 닫아버려서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요. 

일련의 사건은 이랬습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당할 때는 어이없고 가슴이 덜컹 했다가 휴 다행이네 정도의 감정만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보니 므흣해지는 구석이 있는 사건이지 뭡니까. 저와 S양의 믿음과 신뢰가 확인되었달까요. (그 방법이 비록 안타까운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지만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그녀가 필요할 때 SOS를 청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피싱을 당할 지라도 참 든든한 일이 아닐까 해서 솔직히 약간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기를 당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무조건 멍청한 일만은 아니지 않나, 에이 사람 사는 세상 사기도 당할 수도 있지 뭐, (이건 이미 안 당했기 때문에 ㅋㅋ) 대범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란 말이죠. 역시 사람, 참, 간사해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이 생각이 확장되어서,  

그렇다면 저와 S양과 같은 관계 말고 다른 관계들은 어떤 반응들이 나왔을까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인데 잊지 못해서 메신저 삭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런데 그/그녀가 갑자기 예전처럼 다정하게 'ㅇㅇ 야' 하면서 안부를 묻는다면, 그런데 안부를 묻자마자 급하다면서 돈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렇다면...그 메시지를 받은 그/그녀의 마음은 어떨까. 이거 이거 글 잘 쓰는 사람이면 꽁트 정도의 소재는 되지 않을까요? ^-^; 

건조한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리 친해도 비밀번호는 갈쳐주지말자, 로 이 글을 마무리하지만, 상상력이 보다 풍부하고 맛갈나는 글솜씨를 가진 알라디너분들이 이와 관련해서 재미난 글 하나 써주시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헐거운 토요일 아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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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9-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게요. 저도 메신저들 비밀번호좀 바꿔놔야겠어요. 이니나양도 후배가 말을 걸어서 전화해봤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은근 리얼하더라며. ㄷㄷ

치니 2009-09-13 16:07   좋아요 0 | URL
네, 안그래도 니나님도 당한 거 보면서 이거 아주 대유행이구나 싶더라구요.
허허 참, 살벌한 세상입니다.

마노아 2009-09-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찔함과 훈훈함을 동시에 보여준 에피소드군요. 그런데 정말 사기당했으면 훈훈함으로 안타까움을 못 덮었을 것 같아요ㅠ.ㅠ 아무튼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치니 2009-09-13 16:08   좋아요 0 | URL
그러게말여요, 훈훈함은 안 당해서 겨우 챙긴 거구, 당했다면 돈도 돈이지만 그 번거로움을 어쩔 뻔 했나 싶습니다. ^-^

마늘빵 2009-09-1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익후. 저도 연락 끊긴 친구가 갑자기 돈 부쳐달래서 - 메신저로 - 이상하다 생각해서 일단 전화를 했더니 피싱이더라고요. 지금도 그 친구 메신저 제목은 "네이트온 사기 조심하세요"입니다. -_-

치니 2009-09-13 16:09   좋아요 0 | URL
역시, 아프락사스님은 저보다 야무지시네요. 일단 전화를 해보는 생각을 하셨으니. ^_^ 제 친구 메신저 제목도 같은 거에요. ㅋㅋ(거기에 더해서 '저 돈 빌릴 일 없습니다'도 써놨죠. ㅋㅋ)

동탄남자 2009-09-1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 얼마 전 제가 마누라 아이디 해킹에 당할뻔한 수법과 비슷하군요.
오래도록 외국 생활을 하고 돌아오는 주재원이나 교환 교수처럼 나름대로 똑똑하고 경제적인 문제도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입국과 동시에 보이스 피싱의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아예 금액이 노골적으로 크고, 신용카드 발급과 비밀번호 노출 등을 이유로 접근하는데, 금액도 수 천만원씩 빼가버리더군요. 그런 걸 직간접적으로 지켜봤는데, 당할 땐 정말 모두 바보가 되는 기분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V

치니 2009-09-14 09:1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사실무근님, 제 서재에서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어휴, 저 말고도 이래저래 당하신 분들이 많았군요.
평이한 일상에서도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조심 살아야 한다는게, 절대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조심해야해요. 흑.

또치 2009-09-1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네요.

치니 2009-09-14 13:25   좋아요 0 | URL
가슴도 쓸어내렸지만,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속는구나 생각하니 허탈하기도. ^-^;;
 

새로 이사한 곳에서는 거의 티비를 보지 않는다. 요며칠 인터넷도 거의 하지 않았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니 참 좋더라만, 이런 기사를 보고는 또 울컥. 월요일이다, 힘 내야 하는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07164&CMPT_CD=P0000 

엄기영 사장님, 네, 아무튼 결코 물러나지 마십시오. 그렇게만 하신다면 길이 있을거라 믿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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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01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텔레비전을 아예 보지 않는데(언젠가 방송 끊겼음) 정말 갈수록 괴상망측한 일 뿐이어요.

치니 2009-09-01 13:58   좋아요 0 | URL
아예 보지 않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네요. -_ㅠ
갈수록 태산이죠. 휴.
 
음악, 그 번쩍하는 순간

 지난번에 <비밀의 숲>을 점심시간 마다 야곰야곰 읽는 재미를 잠깐 페이퍼에 끄적인 뒤로, 일주일이면 3-4번 가던 그 커피전문점에 한 2주 뜸하게 안갔더니 다 읽지도 못했는데 그예 책장에서 사라져 있더라. 

그래서 다른 책은 없나 하고 빈곤한 - 잡지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소설은 두 권, 미술이나 디자인 관련 책 두 권이 꼴랑 꽂혀 있다 - 책장을 들여다보자니 소설 두 권 중에 한 권은 역시 하루키다. (이 쯤에서 이 집 주인이 하루키를 꽤 좋아하는군, 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고보니 갈 때마다 음악도 일본인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흘러나오는 것이, 한 마디로 왜색이 짙군, 하면서 주인이 들으면 살짝 황당할 결론을 내림) 

아무튼 그래서 집어든 책은 이 책. 

 

 

 

 

 

 

 

이 책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최근의 하루키 사진을 봤는데, 엄허, 이 사람이 그 사람인지 몰라볼 정도! 하루키도 늙는구나. 



<출처: 알라딘 '렉싱턴의 유령' 책 소개 중 '저자 및 역자 소개'>  

이 따위 저질 사진 비교는 그만하고, 책 이야기를 하자면, 오! 하루키는 역시 단편 체질인가 싶게 읽는 재미가 완전 삼삼하다. 최근 이렇게 가독성이 좋은 단편은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짧은 길이 내에서 인간의 깊은 어딘가를 탐구하는 동시에 세계나 인류, 사회적인 문제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공력이라니, 하루키는 역시 대단하구나 싶다. 

훔, 그런데 그런 하루키를 왜 자꾸 유부초밥이나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면서 점심시간에만 살짝 만나는데 만족하는지, 그러니까 왜 맘 잡고 진지한 독서를 하는 대상이 안되는지 생각해봤더니, 아유 여러번 읽어도 도무지 적응 안되는 그의 영어 사용 문체가 가장 큰 문제다. 그리고 고상한 취미들, 재즈나 클래식을 알아야만 그가 글 속에서 표현하는 그 느낌을 온전히 알 것 같은, 그러나 끝끝내 다 알지 못할 거 같다는 예감 속 소외감으로 인해, 에이 하면서 그가 섬세하게 골라서 치밀하게 문장에 삽입했을 것이 분명한 브랜드 명들은 건너 뛰고 읽고 말아버리게 된단 말이다. 그렇다고 이걸 스노비즘이라고 치부하기에도 석연치 않다. 아 하루키씨, 이거 참, 이래저래 당신 작품에는 무념무상으로 올인하기 힘든 저 같은 독자들의 심정을 아실랑가요. 

사족: 며칠 전 KBS 1 FM에서 클래식 방송을 듣던 중, 하루키의 최근작 IQ84에 나오는 (지금은 당연히 이름을 잊은) 모모 음악가를 국내 초빙, 콘서트를 연다며, 실제로 일본에서는 그 모모 음악가의 씨디 판매량이 급증하여, 그의 일생을 거쳐 판매한 양을 단 한 달만에 훌쩍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소설 혹은 작가의 음악에 대한 영향력을 언급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자면, 하루키씨는 자신이 책 속에 소개한 모든 음악들의 저작권자들에게 약간의 수수료를 받아야 할 지도. (헤 - 농담입니다. 저 요새 삐뚤어져서 이래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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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2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렉싱턴의 유령] 정말 좋지요? 저는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 중 [일곱번째 남자]를 가장 좋아해요. 그 단편을 읽고 하루키 작품을 다 읽어버리기로 마음먹게 됐었어요. 왜 그 소년일 때 친구가 태풍에 휩쓸려 죽는 걸 목격하고 다시는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다가 아주아주 어른이 되어서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는데 그 장소의 파도를 보면서 자신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상처가 치유된다는 식의 글이었는데요, 와, 제가 다 가슴이 뻥- 뚫리는 거에요. 어엇, 이게 뭐지, 이 사람 정말 좋잖아, 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치니 2009-08-30 12:07   좋아요 0 | URL
무서운 영화 절대 못보는 저로서는 '유령'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괜히 쳐다도 안봤던책인가봐요. 그런데 막상 첫 단편 렉싱턴의 유령을 읽고보니, 오 하루키 책들 중 이 책이 유난히 좋구나, 그런 생각이 들대요.
다락방님이 왜 그렇게 열렬히 좋아했나도 알겠구요. ^-^
[일곱번째 남자]까지는 아직 진도 못 나갔지만 가슴이 뻥 - 뚫렸다는 거, 짐작 갑니다.하루키의 재능이에요, 분명.
지금까지는 저는 [침묵]이 제일 좋았어요.

니나 2009-08-2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결국 아주 많이 하루끼를 사랑하게 되었거든요. 긴시간에 걸쳐.
렉싱턴의 유령에서 아직 토니 타키타니 밖에 안 읽었는데
언능 다 읽고 이번에 나온 신간도 봐야겠어용 ㅎ

치니 2009-08-30 12:09   좋아요 0 | URL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 - 뭔지 알 것 같아요.
전에 어떤 분이 하루키는 애증의 대상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에도 공감이 되구요.
결국 사랑하게 될 만큼 깊은 여운을 남기다가 갑자기 그저 그런 글을 써버리는 하루키, 저에게도 애증까지는 아니지만 아리송한 분으로 계속 남아 있었어요.
하지만 니나님처럼 결국, 그렇게 될 지도. ㅎㅎ

토니 2009-09-07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하루 휴간데.. 책 사러 갈까합니다. 언니 덕분에 또 좋은 책 한권 알게 되었네요. 감사해요! 꾸벅 ^^

늘 저에겐 휴식같은 이 공간이 오늘은 더 친숙하게 더 편안하게 느껴지네요. 언니 신경숙 씨의 엄마를 부탁해 읽어보셨어요? 언니 생각은 어떤지 좀 알고 싶네요. 읽으셨다면...

치니 2009-09-08 09:11   좋아요 0 | URL
앗, 휴가군요. ^-^ 휴가에 책을 사러 가는 건강한 토니님.

전 신경숙의 책을 읽지 않은 지 좀 오래 되었는데, '엄마를 부탁해'는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인 것 같아서 안 읽었어요. ^-^;;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요즘 출퇴근 길에 BECK의 음반 Odelay를 듣고있다. 이 음반은 최근에 나온 Modern Guilt보다 쎄고 난해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 곡은 강한 드럼 비트로 시작하는데 듣자마자 누가 뭐래지도 않았는데 깜짝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이어지는 곡들은 그야말로 카오스. 이 사람 뭐야, 천재야 장난꾸러기야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야?!  

곡들은 자유롭다. 어떤 쟝르에도 포함되지 않으며, 어떤 의도들은 깊이 파고들며 들어오다가 어떤 의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쑤욱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노래를 하는 젊고 잘 생긴 남자 BECK은 난장을 펼치면서 신나게 놀다가 갑자기 숙연해지는 처량한 음색으로 익숙한 멜로디의 샘플링을 삽입하기도 하고 클래시컬한 작곡의 정수를 보여주다가 쌩뚱맞게 카우보이 모자를 쓴 서부 영화 주인공처럼 컨츄리 리듬을 쿵짝 거린다. 

아, 정신없어. 아, 그런데 나 이미 이 정신없음에 빠져버렸네, 씨디를 뺄 수 없다. 아무리 들어도 더 들어봐야겠다는 생각만 들지, 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에. 

사샤 스타니시치, 이 사람도 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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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2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며칠전에 다 읽었어요 치니님.
정신없지만 매력있는 맞아요, 그런 소설이에요.

치니 2009-08-21 13:4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리뷰도 궁금해요, 써주세요 ~ ^-^

nada 2009-08-2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생각할수록 절묘해요.
사샤와 벡의 비교.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잖아요.
정신없는 난해함 속에 피할 수 없는 매력.^^
전 둘 다 미치게 좋아해요. 히.
벡은 어쩜 그렇게 들을 때마다 새로울까요.
저도 오랜 만에 주섬주섬 꺼내봐야겠어요.

치니 2009-08-23 11:19   좋아요 0 | URL
솔직히, 이 글을 쓸 때 독고다이님을 은근 떠올리고 있었는데 으흐 댓글까지 달아주시니, 이거 완전 낚은 기분 ~ (나 혼자 ㅋㅋ) 좋습니다.
들을 때마다 새로운 혹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건, 휴, 정말 대단해요.

네꼬 2009-08-2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 이런 진짜 최고 멋진 이런 정말 이런 리뷰를 보았나!

치니 2009-08-25 11:10   좋아요 0 | URL
크하 어떤 고양이가 쓴 진짜 최고 멋진 구매 40자평 때문에 이 책을 읽은 수많은 알라딘 독자들을 생각해보삼!

삶은계란 2009-08-3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벡을 백뮤직으로 깔고 읽을 걸 그랬군요. ㅜㅡ

치니 2009-08-31 11:40   좋아요 0 | URL
^-^ 삶은계란님, 처음 뵙습니다. 반가워요.

무해한모리군 2009-08-31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선물로 받고 아직 읽지 못했는데 삶은계란님 말씀처럼 배경음악으로 벡을 깔고 읽어야겠네요 ^^

치니 2009-08-31 14:51   좋아요 0 | URL
^-^;; 정신없는 벡을 깔고 정신없는(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따라가기 힘든) 이 소설을 읽는 건 매운데 또 매운 걸 먹는 것 같을걸요.
편안한 음악 들으면서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
 
모짜르트와 고래
페테르 내스 감독, 조쉬 하트넷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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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뱃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큰 소리로 그녀가 웃는다. 시니컬하고 차가운 그 웃음 뒤에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하! 첫눈에 반해버린 그녀가 자신을 조롱하고 배척하는 척 하는데도 그가 그녀를 따라 웃는다. 그 웃음 뒤에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그의 불안이 역시,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불안한데다가 천재들이다. 아니, 적어도 남들보다 똑똑하다. 아니, 똑똑해서 불안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들은 불안한데다가 바보다. 아니, 적어도 남들에게 바보 소리를 들을 거다. 바보라서 불안해졌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불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모짜르트가 되거나 동물인 고래가 되어서야 겨우 약간이나마 잠잠해질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사랑, 씩이나 하겠다고? 오오, 노우. 영화는 덩달아 걱정이 잔뜩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시작된 사랑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가 떼로 달려들어 말린대도 멈춰지지 않을 것을. 계속 지켜보는 수 밖에.

아니나 다를까, 일인칭으로 살던 이들에게 이인칭의 존재는 그 자체가 부담이다. 폭죽같이 눈이 부시던 소통은 이해보다는 오해 쪽으로 치닫기 십상이고, 죽도록 사랑한다고 해도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차라리 죽고 말지.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비정상인들은 그걸 모르는 비정상인들에 비하자면, 조금 더 불행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소위 정신과 같은데서 나누는 정상/비정상의 구분 기준에 따른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구분이 궁극적으로 필요한 건지도 가능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이들이 그렇다. 어차피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자신들이 하는 사랑에, 단 1%의 미래도 걸 수 없다. 한 치 앞을 모르는게 인간사라는 점을, 이들보다 수없이 체득한 사람들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체념이다. 그러니 아무리 옆에서 사랑이 곧 미래인 것은 아니지 않겠냐고 말해주어도, 이들에겐 소용 없다. 나 아닌 누군가가 내 삶의 한 부분을 결정해주는 것 만큼은 견딜 수 없다. 이제껏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에 경기가 일어나도 잘 참아왔고 새들과 토끼만이 유일한 말동무여도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견뎌왔는데, 사람끼리 조금 눈이 맞았다고 나를 바꾸려 든다고? 안 될 말이다.  

이렇게 아마 안될거야,로 흘러가던 영화가 서둘러 그동안의 고민이 무색하게 두 사람의 해후 장면을 감동적으로 만들어내고 앞서의 불안요소들이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 해피엔딩을 맺는 것이 내게는 조금 어리둥절한 부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Love is all you need, 그렇게 믿고싶은 우리들을 위무해주려는 최소한의 서비스라고 생각하고 감사히 받는 편이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무더운 여름의 막바지. 

사족: 영화 디비디를 선물 받으면, 그 선물을 준 상대가 어떤 장면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한 순간도 놓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보느라 전체를 조감하면서 보기가 살짝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다음에 만나서는 어떤 장면이 가장 좋았는지 꼭 말해주셔야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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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17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랑 섹스한 모든 남자들의 공통점은 아침외 되고 나면 그들이 없다는 거야."
"난 아침에 여기 있을거야. 여기 살잖아."


이 부분이었어요, 치니님.

치니 2009-08-17 16:23   좋아요 0 | URL
아, 네...^-^ 그 대사가 나오는 부분에서 안도의 미소가 흘러나왔었는데.
그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