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 The Lives Of Other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대로 살지않으면 머지않아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Il faut vivre comme on pense, sans quoi l'on finira par penser comme on a vécu)  

-Paul Bourget -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인연이 맞아 감상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폴 부르제의 저 말이다.  

용기를 내어, 용기를 내어, 용기를 내어. 용기란, 얼마나 힘든 마음의 결기인가. 영화 속 타인의 삶을 도청하는 남자의 행동은 자신의 양심을 최소한이나마 지키고자 했던 용기였을까, 아니면 그저 예술을 탐미하는 '당신의 관객'으로써 갖는 최소한의 권리 주장이었을까.  

글을 쓰는 작가의 양심이란 1984년 동독에서 어디까지 책무로 치환되어야 할까. 아니 1984년 동독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 지금 이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침묵하는 작가들에게 이 영화 속 파울처럼 '당신이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는 한 나는 당신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걸세'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백배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 있을까.  

자신이 하는 예술이 자신의 삶보다 절대적이라서, 그 예술을 지키기 위해서만큼은 몸을 팔 수도 있었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애인을 권력 앞에서 배신할 수 있었던 크리스타는, 그녀의 때늦은 후회는, 그저 용기 없음에 지나지 않는가. 그녀가 권력 앞에서 소신을 지켰다면, 그래서 예의 도청하는 남자가 그녀의 아름다운 연기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녀를 그리워 할 것인가 기억 속에서 잠깐 아름다웠던 한 여인으로 버릴 것인가.  

믿고 싶은 것이 사람에 의해 지켜지는 것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면, 우리는 잠시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언급된 음악이 그러하다. 레닌이 '내가 그 음악을 계속 들었다면 혁명은 성공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그 소나타. 그 소나타 때문에 한 상급 국가 공무원은 우체국 집배원이 되었고 그가 구해 준 작가는 베스트셀러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거듭 났다. 이것은 믿고 싶은 것이 지켜진 예가 아니다, 내가 잘못 말했다. 나는 잠시 위안을 받기 보다 세상이 그저, 우연 속에 기대고 있다는 허망함을 맞이한다. 슬프다, 사람이여. 그래서 크리스타에게 예술이 그토록 중요했음을, 음악이 그토록 위대함을, 영원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임을, 다시 깨달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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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0-0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정말 좋죠, 치니님!!
별 다섯개 이상을 마구 주고 싶은, 그런 영화에요. 드디어 보셨군요!

치니 2009-10-03 14:51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님, 드디어!
블리저인가 블러저인가, 벌써 이름은 가물하지만, 그 도청하는 국가정보부 아저씨, 제이상형이에요. 으흐. 가만보면 제가 베니니를 비롯해서 대머리 외국 아저씨들 좋아하는 듯.

니나 2009-10-03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구나, 지금 제 앞에는 영국에 간 후배가 보낸 터너의 엽서가 있고
그런 말이 적혀있어요
<"이런 아름다운 예술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곤 해요
어쩌면 사람 구할려고 예술이 있는게 아니라, 사람이 살아볼려고(어떻게든)
예술을 하게 된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사람이 남는게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게 남는건가... 생각들었네요
문득, 저도 허망하기도 하고 영원도 부질없어 뵈기도 하고 ^^ 히.

치니 2009-10-03 14:53   좋아요 0 | URL
영국에 간 후배, 영국에 간 후배, 아아 이 영국이라는 글자만 왜 폰트 44로 보이죠.
얼마 전에 오키나와 갔다왔는데, 이눔의 유럽여행병 도졌나봐요. ㅋㅋ

사람이 살아볼려고, 예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겠죠, 아마도. 그나마 사람이 살아볼려고 한 것 중 예술이 제일 낫긴 하겠구요.
가을인데 허망, 허무, 이 쪽으로 가면 안되는데, 으 노력해도 잘 안되네요.

네꼬 2009-10-0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나는 영화를 너무 몰라서 이런 작품도 본다 본다 본다 본다 하면서 미루고 있었어요. 볼게요, 뭐, 치니님이 이러시면.

치니 2009-10-03 14:54   좋아요 0 | URL
액션영화를 즐기는 터프 네꼬님, 가끔은 이런 영화로 힘 좀 빼봐요 ~ ^-^
응응 야한 장면도 나온단 말여요. 히히.


2009-10-04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5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6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6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토니 2009-10-13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보셨네요! 남동생이 권해서 본 영화인데 별 수천개는 주고 싶더라고요... 근데 도청하는 아저씨 제 타입이기도한데 ㅋㅋ 저도 대머리 좋아하거든요.

치니 2009-10-14 11:50   좋아요 0 | URL
그 남동생, 차암, 알수록 멋진 청년입니다.^-^
흐흐, 그런 타입이란 말이죠, 오케 접수!

hanicare 2009-10-16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죠?
그런데 예술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뭐고 간에
내 곁의 삶은 그냥 그대로라는 사실이 슬픕니다.가을탓을 할까요? 비겁하게......

치니 2009-10-16 14:08   좋아요 0 | URL
네, 볼 당시보다 지나고나서 더 생각이 많기도 합니다.
한번 더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를 거 같기도 하고요.

가을은 탓을 해도 잘 받아줄 겁니다. ^-^;
 
<사일런트 머신, 길자> 출간 기념, 김창완 북콘서트에 초대합니다.

 

 

 

 

 

<김창완밴드>의 두번 째 앨범이 나왔다. 

저 앨범의 따사로운, 국화를 연상 시키는 노란 빛이랑 하늘이랑 29-1이라는 번호랑 버스 표지판이랑, 이 가을에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벌써 내가 들르곤 하는 블로거들 중 누군가는 이걸 대문 사진으로 걸어두었더라. 

저 버스에 올라타면 조근조근 담담하게 수다를 떨 친구들이 있을 것만 같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첫번째 트랙 <내가 갖고 싶은 건> 을 들었을 때, 조용히 미소짓게 되는 건, 그저 내 생각이랑 똑같은 생각을 가사로 옮겨두어서 만이 아니라, 페시미스트 김창완이 이런 암울한 시대에도 꾸준히 이런 음악을 만들고 전파해주는 데 대한 고마움 때문이겠지. 좋은 옷도 비싼 자동차도 거대한 정원이 딸린 집도, 사랑하는 너와의 따스한 시간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걸 누가 모르랴.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 많지 않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배 부른 사람이나 그런 소릴 한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더 많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지, 김창완은 또 다른 트랙 <Good Morning>을 파트1 과 파트2로 나누어서 두 번 녹음하면서, 길을 나서면 갈 곳이 딱히 없고 지하철을 타고 구인광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방황하는 젊은이의 심정을 노래하며 '나도 다 알아'라고 공감어린 위무를 하지만 기어이 <길>에서는 다시, '열세살 이후 젊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는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어제 산 주간지와 작은 오토바이 한 대 뿐이지만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길'을 가르쳐 줄 뿐이라며 관조와 달관의 목소리로 조용히 그러나 세차게 달릴 뿐이라고 한다. 

김창완에게, 앞으로 어디로 가는가는 중요하지 않아보인다. <그땐 좋았지>의 지나간 시절의 추억이랑 <너를 업은 기억>의 힘들지만 아름다왔던 동행, <앞집에 이사온 아이>의 무심한 혼자놀이, <결혼하자>의 '지금 당장 친구들이 있으니까' 해버리자는 조우 정도가 있을 뿐. 

이 모든 이야기들이 동화 같다고들 하지만,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동화라는 것이 어린아이들이나 꿈 꿀만한 것을 소재로 삼아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좁은 의미로 규정될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그저, 잘 살고 있고, 잘 살고 싶고, 다같이 잘 살자고 할 뿐이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만가만 되짚어 주는 중인 것 같다. 

한없이 느긋하고 여유만만일 것 같은 이 사람이 음반이 나왔나 했더니 책까지 냈단다.  

크윽, 부지런하구나. 천재들은 모두 백조 같다. 우아하게 수면 위에 몸을 띄우고 있지만 발 아래 그 누구보다도 가열찬 움직임을 숨기고 있는. 

알라딘에서 북 콘서트 이벤트를 열었다. 김창완과 너무 잘 어울리는 이벤트인 것 같아서 당락 여부를 떠나 마음이 참 좋다. 어서 책부터 읽어봐야겠다. 노래에서 못다 한 '판타지로의 여행'이 얼마나 독특하게 펼쳐질 지, 현란한 상상력을 앞세운 흥미 위주의 SF가 아닌 따스한 위로가 숨어있는 우주에의 여행길로 슬며시 내 손을 잡아 이끄는, 그런 책이길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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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1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제까지 초대 이벤트는 한번도 가고싶었던 적이 없는데 이건 정말 구미가 당기는데요!!

치니 2009-09-17 13:25   좋아요 0 | URL
저도 지난번 최규석작가 이벤트 외에 구미가 당긴 이벤트는 딱히 없었는데, 오늘 아침 이거 보고 말 그대로 '헙' 하면서 심장이 벌렁 하더랍니다. :)

무해한모리군 2009-09-1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목소리가 너무너무 좋아요. 그 목소리로 무슨 곡을 불러도 좋아할 수 밖에 없어요. 저를 데려가 주세요. 1번 댓글 달았잖아요 굽신굽신 ㅎ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9-17 13:22   좋아요 0 | URL
앗 댓글 다는 동안 괴물님이 --;;

치니 2009-09-17 13: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휘모리님, 안그래도 제가 '1번은 아니지만...'이라고 댓글을 다는 중이었는데요.
그런데 지금 가보니 휘모리님도 신청하셨네요. 우리 둘 중 1명이라도 되면, 둘 중 1명을 데리고 가주기로 해요 ~
(이러다 둘 다 되면, 휘모리님의 오이지군을 보게 되는 걸로 알겠습니다.ㅋㅋ)

무해한모리군 2009-09-17 13:48   좋아요 0 | URL
오호호 좋아요 좋아요~~

chaire 2009-09-17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칫하면 원하지도 않는 플래티넘 회원 등극할까 봐 당분간 구매를 안 하려 하고 있는데 그만 이 페이퍼를 읽어버렸어요. 치니 님 말씀대로 자켓의 노란색이 정말 국화처럼 보여요.
얼마전 김창완의 라라라를 보게 됐는데, 이런 프로가 있는지도 몰랐다 본 거라, 게스트보다 호스트가 더 반갑더군요.

치니 2009-09-17 17:48   좋아요 0 | URL
chaire님, 책은 저도 아직 안 읽어서 모르겠지만, 음반은 플래티넘 등극이라는 보너스와 함께, 자체로 충분히 그 값을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라라라는 제가 첫 방송 때부터 사랑했던 프로그램인데 - 제발 안 없어지길 바라고 또 바라죠 -, 요즘은 그 시각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버려서 안타까워요. 흙.

2009-09-17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8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09-09-17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옷!!!!나도 가고 싶다! 이벤트!!!하지만 한비야때의 이벤트를 생각하면
주저된다는,,,ㅎㅎㅎㅎㅎㅎㅎ
그나저나 책과 음반 지를 만한 돈이 예치금으로 있긴 한데,,,요즘 넘 질러놔서,,,,죄책감까지 느낀다는,,ㅠㅠ

치니 2009-09-18 13:45   좋아요 0 | URL
하하하, 역시 열성파 나비언니.
예치금까지 있고, 멋지십니다. 저는 예치금도 없는 판국인데 막 질러요. ㅋㅋ

무해한모리군 2009-09-21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저 북콘서트 당첨이 되었어욧!!
치니님은 어찌되셨나요?
안되셨으면 저랑 같이가요 히~~

라로 2009-09-21 15:41   좋아요 0 | URL
나도 치니님 이벤트 당첨 되었는지 궁금해서 왔는데~.
난 당첨이 안됐더라구요,,,에구 이벤트든 뭐든 당첨 되는것과 인연이 먼 나비~.ㅜㅜ에효
혹시 치니님 당첨 되었으면 휘모리님은 절 데꾸가주세용~.헤헤헤

무해한모리군 2009-09-21 15:43   좋아요 0 | URL
그래요 나비님~
치니님이 되셨으면 우리 같이가요 ^^

치니 2009-09-21 15:44   좋아요 0 | URL
앗 찌찌뽕, 저 지금 휘모리님 방에 가서 댓글 달고 오는 길인데. ㅎㅎ
거기 제 답변을 미리 적었답니다. :)

나비언니, 저도 안되었어요 ~ ㅋㅋ

2009-09-21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2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라딘의 모 님 서재에서 며칠 전 (남들처럼) 나도 당할 뻔 하다가 '극적으로' 걸리지 않은 메신저 피싱 사기에 대한 수다를 떨다가, 혹시라도 아직 모르시는 알라디너도 있지 않을까 하는 오지랍 우려 때문에 알려드리고자, 혹은 토요일 오전 당직의 심심함을 달래고자, 몇 자 끄적여봅니다. :) 

S양과 저는 고교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라, 며칠 연락이 안되거나 하면 걱정을 할 정도로 연락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좀 과장하면 서로 집 부엌에 무슨 무슨 과일이 있고 숟가락은 몇 개이고, 이런 자잘한 것들까지 아는 관계랄까요. 그래서, 웬만하면 쪽 팔려서 안할 것 같은 금전적인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꺼리낌 없이 해왔죠.  

이런 관계에 있는 S양이, 그날도 오전에 메신저로 몇 마디 나눈 차에, 오후가 되자 갑자기 급하게 돈 부칠 일이 생겼는데 그만 집에 usb도 두고 오고 회사에서 나갈 시간은 없고 하니, 저더러 대신 부쳐달라, 낼 바로 돌려주겠다 하는 것입니다? 

살갑게 'ㅇㅇ 야' 라고 이름도 먼저 불렀고, 웃음 이모티콘도 날리면서, 평상시 제가 아는 S양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어요.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하는 걸 보니, '음 역시 뭔가 되게 급한 일이 있구나' 싶었지 이것이 그녀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해킹하느라 겹 로그인(즉, 진짜 S양도 로그인 되어있고 그분들도 로그인 되어 있으니 S양이 에이 메신저 왜 이래 하고 로그아웃 하지 않는 이상, 자꾸 왔다갔다 할 수 밖에 없었던)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녀가 서두르니 저도 마음이 괜시리 덩달아 급해져서 '왜' , 그리고 '누구'에게 부치는 것이냐는 질문은 하지도 않았어요. 우리 사이에 그런 걸 일일히 따지고 부쳐주면, 너무 야박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건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 해 줄테니 그 때 들으면 되는 거죠. 

그리하여 일은 1분 안에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침 usb가 있었고 그녀에게서 구좌번호와 이름을 받았고. 금액은 지금 '니 잔고에 있는 만큼 전부' 일단 부쳐달라고 하더군요. 모자라는 것은 자신이 채울테니 그것만이라도, '급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부치려고 하다보니, 이거 제 이름으로 부칠 게 아니라 그녀의 이름으로 바꿔 부쳐야 하지 않나 싶어서, 재차 물어본 거죠. 혹시 돈을 받은 상대가 이름 때문에 못 받았다 하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물은 것인데, 이 때부터 그녀는 '응 알았어' 라는 답 밖에 할 줄을 모르는, 평소와 달리 무척 천치 같은 태도입니다? (평소 S양은 언어의 마술사죠. 아무렇게나 말하는 법은 없습니다, 급하면 말이 더 정확해지는 사람이에요) 

그때서야, 언젠가 다른 블로그에서 읽은 피싱 이야기가 후다닥 떠오르고, 전화를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전화를 안 받아서 그녀가 다니는 회사에 연락하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군요. 당연히 메신저를 하고있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제 통장 비밀번호나 주민번호 등을 알려주지 않아서 통장에서 잔고가 빠져버리진 않았지만, 은행에서는 범죄 예방을 위해 상대방이 알려준 계좌를 신고해달라더군요. 음, 하지만 저는 이미 창을 닫아버려서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요. 

일련의 사건은 이랬습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당할 때는 어이없고 가슴이 덜컹 했다가 휴 다행이네 정도의 감정만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보니 므흣해지는 구석이 있는 사건이지 뭡니까. 저와 S양의 믿음과 신뢰가 확인되었달까요. (그 방법이 비록 안타까운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지만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그녀가 필요할 때 SOS를 청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피싱을 당할 지라도 참 든든한 일이 아닐까 해서 솔직히 약간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기를 당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무조건 멍청한 일만은 아니지 않나, 에이 사람 사는 세상 사기도 당할 수도 있지 뭐, (이건 이미 안 당했기 때문에 ㅋㅋ) 대범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란 말이죠. 역시 사람, 참, 간사해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이 생각이 확장되어서,  

그렇다면 저와 S양과 같은 관계 말고 다른 관계들은 어떤 반응들이 나왔을까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인데 잊지 못해서 메신저 삭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런데 그/그녀가 갑자기 예전처럼 다정하게 'ㅇㅇ 야' 하면서 안부를 묻는다면, 그런데 안부를 묻자마자 급하다면서 돈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렇다면...그 메시지를 받은 그/그녀의 마음은 어떨까. 이거 이거 글 잘 쓰는 사람이면 꽁트 정도의 소재는 되지 않을까요? ^-^; 

건조한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리 친해도 비밀번호는 갈쳐주지말자, 로 이 글을 마무리하지만, 상상력이 보다 풍부하고 맛갈나는 글솜씨를 가진 알라디너분들이 이와 관련해서 재미난 글 하나 써주시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헐거운 토요일 아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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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9-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게요. 저도 메신저들 비밀번호좀 바꿔놔야겠어요. 이니나양도 후배가 말을 걸어서 전화해봤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은근 리얼하더라며. ㄷㄷ

치니 2009-09-13 16:07   좋아요 0 | URL
네, 안그래도 니나님도 당한 거 보면서 이거 아주 대유행이구나 싶더라구요.
허허 참, 살벌한 세상입니다.

마노아 2009-09-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찔함과 훈훈함을 동시에 보여준 에피소드군요. 그런데 정말 사기당했으면 훈훈함으로 안타까움을 못 덮었을 것 같아요ㅠ.ㅠ 아무튼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치니 2009-09-13 16:08   좋아요 0 | URL
그러게말여요, 훈훈함은 안 당해서 겨우 챙긴 거구, 당했다면 돈도 돈이지만 그 번거로움을 어쩔 뻔 했나 싶습니다. ^-^

마늘빵 2009-09-1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익후. 저도 연락 끊긴 친구가 갑자기 돈 부쳐달래서 - 메신저로 - 이상하다 생각해서 일단 전화를 했더니 피싱이더라고요. 지금도 그 친구 메신저 제목은 "네이트온 사기 조심하세요"입니다. -_-

치니 2009-09-13 16:09   좋아요 0 | URL
역시, 아프락사스님은 저보다 야무지시네요. 일단 전화를 해보는 생각을 하셨으니. ^_^ 제 친구 메신저 제목도 같은 거에요. ㅋㅋ(거기에 더해서 '저 돈 빌릴 일 없습니다'도 써놨죠. ㅋㅋ)

동탄남자 2009-09-1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 얼마 전 제가 마누라 아이디 해킹에 당할뻔한 수법과 비슷하군요.
오래도록 외국 생활을 하고 돌아오는 주재원이나 교환 교수처럼 나름대로 똑똑하고 경제적인 문제도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입국과 동시에 보이스 피싱의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아예 금액이 노골적으로 크고, 신용카드 발급과 비밀번호 노출 등을 이유로 접근하는데, 금액도 수 천만원씩 빼가버리더군요. 그런 걸 직간접적으로 지켜봤는데, 당할 땐 정말 모두 바보가 되는 기분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V

치니 2009-09-14 09:1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사실무근님, 제 서재에서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어휴, 저 말고도 이래저래 당하신 분들이 많았군요.
평이한 일상에서도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조심 살아야 한다는게, 절대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조심해야해요. 흑.

또치 2009-09-1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네요.

치니 2009-09-14 13:25   좋아요 0 | URL
가슴도 쓸어내렸지만,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속는구나 생각하니 허탈하기도. ^-^;;
 

새로 이사한 곳에서는 거의 티비를 보지 않는다. 요며칠 인터넷도 거의 하지 않았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니 참 좋더라만, 이런 기사를 보고는 또 울컥. 월요일이다, 힘 내야 하는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07164&CMPT_CD=P0000 

엄기영 사장님, 네, 아무튼 결코 물러나지 마십시오. 그렇게만 하신다면 길이 있을거라 믿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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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01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텔레비전을 아예 보지 않는데(언젠가 방송 끊겼음) 정말 갈수록 괴상망측한 일 뿐이어요.

치니 2009-09-01 13:58   좋아요 0 | URL
아예 보지 않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네요. -_ㅠ
갈수록 태산이죠. 휴.
 
음악, 그 번쩍하는 순간

 지난번에 <비밀의 숲>을 점심시간 마다 야곰야곰 읽는 재미를 잠깐 페이퍼에 끄적인 뒤로, 일주일이면 3-4번 가던 그 커피전문점에 한 2주 뜸하게 안갔더니 다 읽지도 못했는데 그예 책장에서 사라져 있더라. 

그래서 다른 책은 없나 하고 빈곤한 - 잡지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소설은 두 권, 미술이나 디자인 관련 책 두 권이 꼴랑 꽂혀 있다 - 책장을 들여다보자니 소설 두 권 중에 한 권은 역시 하루키다. (이 쯤에서 이 집 주인이 하루키를 꽤 좋아하는군, 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고보니 갈 때마다 음악도 일본인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흘러나오는 것이, 한 마디로 왜색이 짙군, 하면서 주인이 들으면 살짝 황당할 결론을 내림) 

아무튼 그래서 집어든 책은 이 책. 

 

 

 

 

 

 

 

이 책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최근의 하루키 사진을 봤는데, 엄허, 이 사람이 그 사람인지 몰라볼 정도! 하루키도 늙는구나. 



<출처: 알라딘 '렉싱턴의 유령' 책 소개 중 '저자 및 역자 소개'>  

이 따위 저질 사진 비교는 그만하고, 책 이야기를 하자면, 오! 하루키는 역시 단편 체질인가 싶게 읽는 재미가 완전 삼삼하다. 최근 이렇게 가독성이 좋은 단편은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짧은 길이 내에서 인간의 깊은 어딘가를 탐구하는 동시에 세계나 인류, 사회적인 문제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공력이라니, 하루키는 역시 대단하구나 싶다. 

훔, 그런데 그런 하루키를 왜 자꾸 유부초밥이나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면서 점심시간에만 살짝 만나는데 만족하는지, 그러니까 왜 맘 잡고 진지한 독서를 하는 대상이 안되는지 생각해봤더니, 아유 여러번 읽어도 도무지 적응 안되는 그의 영어 사용 문체가 가장 큰 문제다. 그리고 고상한 취미들, 재즈나 클래식을 알아야만 그가 글 속에서 표현하는 그 느낌을 온전히 알 것 같은, 그러나 끝끝내 다 알지 못할 거 같다는 예감 속 소외감으로 인해, 에이 하면서 그가 섬세하게 골라서 치밀하게 문장에 삽입했을 것이 분명한 브랜드 명들은 건너 뛰고 읽고 말아버리게 된단 말이다. 그렇다고 이걸 스노비즘이라고 치부하기에도 석연치 않다. 아 하루키씨, 이거 참, 이래저래 당신 작품에는 무념무상으로 올인하기 힘든 저 같은 독자들의 심정을 아실랑가요. 

사족: 며칠 전 KBS 1 FM에서 클래식 방송을 듣던 중, 하루키의 최근작 IQ84에 나오는 (지금은 당연히 이름을 잊은) 모모 음악가를 국내 초빙, 콘서트를 연다며, 실제로 일본에서는 그 모모 음악가의 씨디 판매량이 급증하여, 그의 일생을 거쳐 판매한 양을 단 한 달만에 훌쩍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소설 혹은 작가의 음악에 대한 영향력을 언급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자면, 하루키씨는 자신이 책 속에 소개한 모든 음악들의 저작권자들에게 약간의 수수료를 받아야 할 지도. (헤 - 농담입니다. 저 요새 삐뚤어져서 이래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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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2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렉싱턴의 유령] 정말 좋지요? 저는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 중 [일곱번째 남자]를 가장 좋아해요. 그 단편을 읽고 하루키 작품을 다 읽어버리기로 마음먹게 됐었어요. 왜 그 소년일 때 친구가 태풍에 휩쓸려 죽는 걸 목격하고 다시는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다가 아주아주 어른이 되어서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는데 그 장소의 파도를 보면서 자신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상처가 치유된다는 식의 글이었는데요, 와, 제가 다 가슴이 뻥- 뚫리는 거에요. 어엇, 이게 뭐지, 이 사람 정말 좋잖아, 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치니 2009-08-30 12:07   좋아요 0 | URL
무서운 영화 절대 못보는 저로서는 '유령'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괜히 쳐다도 안봤던책인가봐요. 그런데 막상 첫 단편 렉싱턴의 유령을 읽고보니, 오 하루키 책들 중 이 책이 유난히 좋구나, 그런 생각이 들대요.
다락방님이 왜 그렇게 열렬히 좋아했나도 알겠구요. ^-^
[일곱번째 남자]까지는 아직 진도 못 나갔지만 가슴이 뻥 - 뚫렸다는 거, 짐작 갑니다.하루키의 재능이에요, 분명.
지금까지는 저는 [침묵]이 제일 좋았어요.

니나 2009-08-2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결국 아주 많이 하루끼를 사랑하게 되었거든요. 긴시간에 걸쳐.
렉싱턴의 유령에서 아직 토니 타키타니 밖에 안 읽었는데
언능 다 읽고 이번에 나온 신간도 봐야겠어용 ㅎ

치니 2009-08-30 12:09   좋아요 0 | URL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 - 뭔지 알 것 같아요.
전에 어떤 분이 하루키는 애증의 대상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에도 공감이 되구요.
결국 사랑하게 될 만큼 깊은 여운을 남기다가 갑자기 그저 그런 글을 써버리는 하루키, 저에게도 애증까지는 아니지만 아리송한 분으로 계속 남아 있었어요.
하지만 니나님처럼 결국, 그렇게 될 지도. ㅎㅎ

토니 2009-09-07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하루 휴간데.. 책 사러 갈까합니다. 언니 덕분에 또 좋은 책 한권 알게 되었네요. 감사해요! 꾸벅 ^^

늘 저에겐 휴식같은 이 공간이 오늘은 더 친숙하게 더 편안하게 느껴지네요. 언니 신경숙 씨의 엄마를 부탁해 읽어보셨어요? 언니 생각은 어떤지 좀 알고 싶네요. 읽으셨다면...

치니 2009-09-08 09:11   좋아요 0 | URL
앗, 휴가군요. ^-^ 휴가에 책을 사러 가는 건강한 토니님.

전 신경숙의 책을 읽지 않은 지 좀 오래 되었는데, '엄마를 부탁해'는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인 것 같아서 안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