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석양을 향해 가고, 밤은 새벽을 향해 가고, 음은 양의 씨앗이고, 양은 생성 중인 음이며, 우리는 이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들 가운데 갇혀 있다. 이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헛된 일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며, 때로는 그것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모든 순간은 지나가고 절정은 쇠락을, 패배는 미래의 승리를 예고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데 도움이 된다. 삶이 우리에게 미소 지을 때 곧 이것이 우리를 사정없이 후려 패리라는 점을, 또 우리가 어둠 속을 헤맬 때 곧 빛이 나타나리라는 점을 아는 일은 유익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중함을 부여하며 자신감을 준다. 또 순간의 우울한 감정들을 상대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적어도 그래야 할 것이다. 

약 15분 동안 윌리엄 허트는 자신은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어리고 경박했던 나는 이런 고결한 척하는 말들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친구처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왜 그렇게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것에 집착하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우리가 만난 이후로, 아니 영화 프로모션을 위한 이날 하루 동안 처음으로 진정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나를 정말로 쳐다보는 거였다. 파란색 눈의 동공이 확장된 그는 내게로 지그시 몸을 기울이더니 내 귀에 대듯이 하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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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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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렇게 재미가 없는데 평점이 다들....나는 모르겠다. 아무튼 초반 1/4만 읽고 말았으니 뭐라 하기 어렵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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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작은 미덕들 흄세 에세이 4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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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기고한 느낌이 나는 글들이긴 해도 전체적으로 글의 수준이 고르고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는 점, 독특한 유머를 내재한 문체로 주제나 소재를 넘나드는 솜씨가 유려하다는 점에서 모처럼 멋진 작가를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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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교육할 때 나는 작은 미덕들이 아니라 큰 미덕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약이 아니라 돈에 대한 관대함과 무관심을 가르쳐야 한다. 신중함이 아니라 용기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 기민함이 아니라 솔직함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외교술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성공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존재하는 법과 앎에 대한 열망을 가르쳐야 한다. 

사실 차이는 표면적일 뿐이다. 작은 미덕들도 우리의 가장 깊은 본능에서, 방어 본능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성이 말하고 판단하고 논의를 펼치면서 개인적인 안전을 변호하는 뛰어난 변호사 역할을 한다. 큰 미덕들은 이성이 말을 하지 않는 본능, 내가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본능에서 탄생한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그 말 없는 본능에 있다. 이성의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고 판단하고 논의를 펼치는 방어 본능 속에 있는 게 아니다.

교육은 우리와 아이들 사이에 우리가 설정한 어떤 관계이자 감정, 본능, 생각이 무르익는 특정한 분위기일 뿐이다. 지금 나는 작은 미덕들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면 냉소주의나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알게 모르게 커진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비밀은 적절한 때를 포착하는 데 있다. 

우리가 부자인데 우리 자녀들에게 소박한 습관을 갖게 하고 싶다면 그런 습관을 통해 절약한 돈은 모두 아낌없이 타인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그와 같은 습관은 탐욕이나 두려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유함 속에서 소박함을 자유롭게 선택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부유한 가정의 아이에게 낡은 옷을 입힌다고, 덜 익은 사과를 간식으로 먹게 하고 오래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자전거를 사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절제를 배우지는 않는다. 부유함 속의 절제는 순수한 허구이며 허구는 언제나 비교육적이다. 이런 식으로는 인색함과 돈에 대한 두려움밖에 배우지 못한다. 아이가 원하고 우리가 사줄 수 있는 자전거를 사주지 않음으로써 아이에게 정당한 것을 갖지 못하는 데에 대한 좌절감만 안겨줄 수 있고, 현실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추상적인 원칙의 이름으로 아이의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 앞에서 암묵적으로 돈이 자전거보다 더 낫다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아이는 자전거가 언제나 돈보다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곧 공부를 잘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것은 실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고귀함이 없는 돈을 훌륭하고 가치 있는 것, 그러니까 배움과 앎의 기쁨과 뒤섞어버린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돈을 줄 때는 아무 이유도 없어야 한다. 무심하게 돈을 주어 무심하게 그것을 받는 법을 배우게 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돈의 진정한 성격을 알게 하기 위해 돈을 주어야만 한다. 돈은 가장 진정한 욕구, 정신이 원하는 욕구를 만족시켜줄 힘이 없다는 것도 알려야 한다. 돈을 상, 도착 지점, 도달해야 할 목표로 격상시킴으로써 우리는 돈에 어떤 지위와 중요성과 고귀함을 부여하는데 돈이 아이들의 눈에 그렇게 비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돈이 노력에 대한 최고의 보상이자 궁극적인 목표라는 잘못된 원칙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돈은 노력에 대한 대가로 인식되어야만 한다.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대가로, 그러니까 정당한 사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보상과 처벌을 약속하고 시행할 때는 매우 주의해야 한다. 인생에는 보상과 처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개 희생은 어떤 보상도 받지 않으며 악행이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악행이 성공과 돈으로 과도하게 보상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은 선행은 보상을 받지 않고 악행이 반드시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아는 게 좋다. 그렇기는 해도 선을 사랑하고 악을 증오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다. 

사실 학교는 자녀들에게는 부모 없이 혼자 처음 전투를 치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학교가 전쟁터이고 부모는 아주 가끔 사소한 도움 이외에는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만일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오해를 받는다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는 점을 아이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는 계속 오해를 받고 과소평가되고 부당한 처사의 희생자가 될 것을 예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스스로가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공유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아이들이 차츰 커가면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 기쁨이나 걱정을 아이들과 똑같은 크기로 공유한다.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자신의 재능을 공부에서 최대한 발휘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공부의 길에 들어서게 했으니 그저 앞으로 가는 게 아이들의 의무일 뿐이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학교가 아니라 좋아하는 다른 일, 가령 딱정벌레를 수집하거나 튀르키예어를 공부하는 데 발휘하고 싶다면, 그것은 자녀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에게는 아이들을 비난하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서 불만이라는 표시를 할 어떤 권리도 없다. 자신들의 재능을 지금으로서는 아무 데도 쓰고 싶지 않다는 듯이 행동하고 몇 날이고 책상에 앉아 연필만 씹고 있어도 우리는 그들을 크게 꾸짖을 권리가 없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빈둥거리는 듯해도 사실은 내일이면 결실을 맺을 상상을 하거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실패로 인해 슬퍼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곳에 있어야 한다. 실패로 인해 좌절한다면 용기를 주기 위해 그곳에 있어야 한다. 성공으로 우쭐한다면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그곳에 있어야 한다. 학교가 협소하고 낮은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곳에 있어야 한다.  것은 아

미래를 저당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학교는 간단한 도구들을 제공하는데 아이들은 그중에서 내일 이용할 수 있는 것을 하나 선택할 수 있다.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아이들이 삶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무기력하고 외롭고 소심한 아이라도 삶에 대한 사랑이 없고 삶의 두려움에 압도당한 것은 아니다. 그저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소명을 따를 준비에 몰두해 있을 뿐이다. 삶에 대한 사랑을 가장 뛰어나게 표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인간의 소명이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그 아이 곁에서 그의 소명이 잠에서 깨어나 구체화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아이의 행동은 두더지나 도마뱀과 유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고 있지만 사실은 곤충의 냄새를 맡고 있으며 돌연 곤충에게 달려들 것이다. 그의 옆에서 조용히, 그리고 조금 떨어져서 아이의 정신이 도약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아이에게 천재, 예술가, 영웅, 성자가 되기를 요구하거나 바라서도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가 더없이 뛰어난 인생을 살거나 아주 평범하게 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기다리며 인내해야 한다. 

소명을 찾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공간이 필요하다.공간과 침묵, 그러니까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침묵이다. 우리와 아이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생각과 감정을 활발하게 주고받아야 하지만, 깊은 침묵의 구역도 그 안에 존재해야 한다. 친밀한 관계여야 하지만 그들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침묵과 말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중요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우리를 조금만 좋아해야지 너무 좋아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되고, 우리의 직업을 그대로 따라 하고,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선택할 때 우리 이미지를 찾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과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친구 같아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우리에게는 하지 못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친구를 찾고 연애를 하고 종교 생활을 하고 직업을 탐색하는 일은 침묵과 그림자에 둘러싸인 채 우리와 떨어져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 자녀들과의 친밀감이 거의 사라진다고 내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과의 관계에는 종교 생활, 지적인 생활, 애정 생활, 인간에 대한 판단 등 모든 게 간결하게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단순한 출발점이 되어주고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어야 한다. 구조가 필요할 때 구조를 위해 거기 있어야만 한다. 자녀들은 자신들이 우리에게 속한 게 아니라 우리가 자신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든 이용 가능하며 모든 질문과 요청에 대해 우리가 아는 대로 대답할 준비를 한 채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소명이 있다면,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았다면 자녀들이 우리 외부에서 소명의 싹과 존재의 싹이 요구하는 공간과 그늘에 에워싸여 조용히 싹트게 내버려둘 수 있다. 이것이 그들이 소명을 찾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기회일 것이다. 또한 우리 스스로 소명을 갖고, 그것을 알고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일할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삶에 대한 사랑이 삶에 대한 사랑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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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뜨거운 속을 지닌 나라 사람들에게 이렇게 보일 수 밖에 없다. 동감.

영국은 결코 저속하지 않다. 순응적이지만 저속하지는 않다. 슬프다고 거칠어지는 일도 없다. 저속함은 거칠고 오만한 데서 기인한다. 영감과 상상력에서 나오기도 한다.


  우리는 때때로 쇳소리 나는 여자의 목소리나 날카로운 웃음소리에서, 짙은 화장이나 헝클어진 누런색 머리에서 저속함이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곧 이 나라 어디에서든 우울이 저속함을 압도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사실 영국인의 대화만큼 슬픈 대화는 어디에도 없는데 언제나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피상적인 이야기에 머무르고 말기 때문이다. 신성한 사생활을 침해해서 이웃을 불쾌하게 하지 않기 위해 영국인의 대화는 모두에게 극도로 지루하지만 아무런 위험이 없는 화제 주위를 빙빙 맴돌 뿐이다.

영국 점원들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다.

그렇지만 그 멍청함에는 냉소, 무례, 오만, 경멸이 전혀 없다. 멍청함에는 저속함이 담겨 있지 않다. 점원은 천박하지 않고, 그래서 불쾌하지 않다. 영국 점원들의 눈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는 양들의 눈처럼 깜짝 놀란 듯 고정되어 있고 공허하다.

우리가 상점에서 나올 때는 깜짝 놀란 듯하고 공허한 점원의 눈이 우리를 좇지만 거기에는 우리에 대한 어떤 평가나 생각도 담겨 있지 않다. 우리가 그 눈동자에 잠시 머물다 떠나자마자 우리를 즉시 잊어버리는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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