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이 어차피 착취당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면, 섬유상인 바스케스에게 착취당하는 편이 허영심과 명예, 경멸과 질투 혹은 불가능에게 착취당하는 것보다 덜 비참하지 않겠느냐고.


  심지어는 신에게 착취당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이 세계라는 공허 속에서 사는 예언자들과 성자들이다. 

내 영혼에는 마치 성가신 아이와 같은 짐스러운 조급함이 달라붙어 있다. 그것은 쉬지 않고 자라나는 동일한 성질의 불안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란 모든 이에게 일어나거나, 혹은 우리에게만 일어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첫 번째 경우라면 새로울 것이 없고, 두 번째 경우라면 타인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다. 

우리는 일생 동안 하나의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그 길에 맞서서 행동한다. 우리 아닌 어떤 것, 우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에 우리 자신을 맞춘다. 또한 우리의 실체라고 결코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것을 참조하면서, 우리의 몸짓과 태도를 선택한다.


  읽지 않을 책을 산다. 음악을 들으려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나오는 누군가를 보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콘서트에 간다. 걷는 것이 피곤할 때, 우리는 긴 산책을 나선다. 우리는 시골로 휴가를 떠난다. 다름아닌 전원생활이 지루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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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한소희 씨의 이런 인터뷰 내용을 읽다가, 책도 새삼 찾아보게 되었다.


- 페르난두 페수아, 과연 불안을 매일 치우자고 생각하는 사람 다운 일생이다.

무역통신문 번역가로 일하며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 발문을 쓴 김소연 시인에게는 이런 상태로 글을 썼을 것 같은 사람이고.

보통의 사람들이 정상적인 척하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고 파악할 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미 관성이 되어버려 감지될 수 없는 것까지를 볼 수 있는 ‘진짜 인간’의 상태. 이미 미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각성 상태. 

- 오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얻었던 경험들 모두를 배제한 채로 읽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얻었던 어딘지 모를 실망감을 모두 상기한 채로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 오호

이 (엉망진창인)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를 포기할 권리, 삶의 숭고함에 나를 헌납하여 삶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체념을 선택할 권리, 그러니까 한없이 나약할 권리, 끝없이 불안할 권리, 권태로울 권리와 공허할 권리, 그리하여 질 나쁜 인간의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질 좋은 고독을 향유할 권리를 얻어낸 쾌락이었다.

- 발문이 왜 이리 좋아요 ㅠ

포기와 체념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을 알려면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더 현명한 환멸에 도착한 이후여야 하리라. 

- 으앙

“열정이 배제된, 고도로 다듬어진 삶을 살기. 이상의 전원에서 책을 읽고 몽상에 잠기며, 그리고 글쓰기를 생각하며. 권태에 근접할 정도로, 그토록 느린 삶. 하지만 정말로 권태로워지지는 않도록 충분히 숙고된 삶. 생각과 감정에서 멀리 벗어난 이런 삶을 살기. 오직 생각으로만 감정을 느끼고, 오직 감정으로만 생각을 하면서. 태양 아래서 황금빛으로 머문다. 꽃으로 둘러싸인 검은 호수처럼. 그늘 속은 독특하고도 고결하니, 삶에서 더 이상의 소망은 없다. 세상의 소용돌이를 떠도는 꽃가루가 된다. 미지의 바람이 불어오면 오후의 대기 속으로 소리 없이 날리고, 고요한 저녁빛 속 어느 우연한 장소로 내려앉는다. 더욱 위대한 사물들 사이에서 자신을 망각한다. 이 모두를 확실하게 인식하면서, 즐거워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햇살을 주는 태양에게 감사하고, 아득함을 가르쳐주는 별들에게 감사한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더 이상 소유하지 않고,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 굶주린 자의 음악, 눈먼 자의 노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낯선 방랑자의 기억, 사막을 가는 낙타의 발자국, 그 어떤 짐도 목적지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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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부자의 사치일 뿐

지금 나의 문제는 단 하나(물론 이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결국 부자의 사치일 뿐이다), 거추장스럽고도 폭군적인 자아로, 나는 이게 날뛰는 것을 억제하고 싶었던바 이를 위한 수단이 바로 명상이었던 것이다. 

- 어쩔 수 없다!

왜 이런 개인적인 얘기들을 주절주절 늘어놓느냐고? 독자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쩔 수 없다! 여러분들은 작가들이 이런 종류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다시 읽어 보면서 삭제해 버리지 않는 것을 참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런 것들은 소중하고, 글을 쓰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구해 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 와, 파스칼 키냐르, 나도 부럽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동호인 관계는 몇몇 친구와 함께 실내악을 하는 거였다. 예를 들면 아마추어 현악 사중주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집에 가게 되면 형식적으로 몇 마디를 나누고는 금방 악보대를 세우고 악보를 펼친 다음 「안단테 콘 모토」의 열여섯 번째 소절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이런 즐거움을 알고 있는 내 동료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너무 부러운데, 애석히도 나는 음악을 사랑하지만 연주할 줄도,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태극권 수련은 악기나 성악 수련과 닮은 점이 많다. 태극권 수련도 똑같이 인내심, 엄격함과 몰입을 요구하며, 어느 피아니스트가 피아니시모라는 건반상의 한없는 느림을 반복하고 다듬듯 무한히 느린 동작들을 반복하고 다듬는다. 그러면서 그 많은 시간을 보내는, 너무나도 다른 환경과 기질의 이 모든 사람들이 내게는 모두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 모두가 갈 수 있는 오솔길

하지만 아주 조금이나마 경험을 해본 나로서는 보다 덜 험준한 길, 아무것도 아닌 작은 길, 모두가 갈 수 있는 오솔길을 통해서도 명상에 접근할 수 있으며, 명상에 들어갈 수 있는 기술을 단 10분 만에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앉아서 얼마간의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는 그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명상이다. 나는 종종 명상에 대한 좋은 정의(최대한 적확하고 단순하고 포괄적인 정의)를 찾아보곤 했는데, 내가 이 이야기를 해가면서 차례로 꺼내게 될 다른 여러 가지 정의들도 찾아냈지만 이것이 내게는 최고의 것으로 느껴지니, 가장 구체적이고도 위압적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반복하거니와, 명상은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 동안에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지루함도 명상이다. 무릎이 아픈 것도, 등과 목덜미가 아픈 것도 명상이다. 떠오르는 여러 가지 잡생각도 명상이다. 배 속에서 나는 꼬르륵거리는 소리도 명상이다. 지금 내가 이른바 〈구도(求道)〉를 위해 이런 헛짓거리를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느낌도 명상이다. 머릿속으로 전화 통화를 준비하는 것, 전화를 걸기 위해 방석에서 일어나고 싶은 생각도 명상이다. 이런 마음에 저항하는 것 또한 명상이다(하지만 여기에 굴복하는 것까지 명상인 것은 아니다). 이게 다다. 더 이상은 없다. 여기서 더 이상의 것은 지나친 것이다.

- 프로이트도 맞말하긴 한다니까

프로이트는 정신적 건강에 대해 첫 번째 것만큼이나 명쾌한 두 번째 정의를 내놓았으니, 그것은 더 이상 신경증적인 불행은 겪지 않고 통상적인 불행만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신경증적인 불행은 끔찍이도 반복적인 형태로 스스로가 만드는 불행이고, 통상적인 불행은 삶이 다양하고도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우리에게 부과하는 불행이다. 

- 예술의 목표 by 글렌 굴드

〈예술의 목표는 아드레날린의 일시적인 분비가 아니라, 어떤 평온하고도 경이로운 상태를 삶 전체를 통해 끈기 있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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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1-21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엇 저도 이거 사놨는데요!! 어떤가요??

치니 2023-11-21 20:29   좋아요 0 | URL
아직 초반이라 단정짓긴 어렵지만, 일단 흥미로워요. 안그래도 요가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다락방님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ㅎㅎ 이미 사셨군요!
 
















왜때무네 저렇게 저자의 얼굴을 떡 하니 표지에 뒀는지 모를 일이다만 (잘 생기지도 않았잖아요?) 그래도 2019년 번역이니 좀 읽기가 용이할 거라고 생각했으나...으음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생산적 직업의 대부분은 야만시대 전기 여성의 일에서 발전했다. 

약탈 문화의 출현 여하는 생산의 상한에 따른다. 생산수단이 발달함으로써 생산 종사자의 생계유지에 더하여 전투를 할 여유가 생길 때까지, 어떤 집단이나 계급에서도 약탈이 습관화하고 정착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화에서 약탈로 이행하는 것은 생산에 대한 기술적 지식과 도구의 활용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기가 발달하여 인간이 맹수를 죽일 수 있게 될 때까지 약탈은 실행될 수 없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구의 발달이나 무기의 발달은 같은 것을 다른 시점에서 서술한 것에 불과하다. 

여자를 소유하는 관습이 야만시대 전기에 여자를 포로로 잡은 것에서 시작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자를 포로로 잡아 점유한 본래의 이유는 전리품으로서의 효용에 있었다. 적에게 여자를 빼앗아 전리품으로 삼는 행위가 여자를 소유하는 형태의 결혼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남자를 가장으로 하는 가족제도를 출현시켰다. 그 뒤 노예의 범위는 여자뿐 아니라 포로나 천민으로 확대되었고, 소유권의 상대도 포로뿐 아니라 일반 여자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약탈적 생활환경에서 벌어지는 남성들의 경쟁이 한편으로는 힘이 지배하는 결혼 형태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유재산제로 연결되었다.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그 두 제도는 분화되지 않았다. 자신의 영웅적 행위를 어떤 계속적 효과로 과시하여 자신의 용맹을 증명하고자 하는, 승리한 남자의 욕망에서 비롯된 두 제도에는 약탈적 공동체에 흘러넘치는 정복욕을 만족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하여 소유라는 개념은 여자에 대한 소유에서 발전하여 여자의 노동 산물에 대한 소유를 포함하게 되고, 사람뿐 아니라 물건에 대한 소유권도 생겨났다. 

소유의 근원적 동기는 타인에게 지지 않는다고 하는 경쟁심이다. 그리고 이 동기는 사유재산제의 발전 과정에도, 이 제도에 관한 사회구조의 모든 측면의 발전 과정에도 계속 작용한다. 부의 소유는 명예를 초래하고, 그 상하의 차별을 수반한다. 재산의 소비와 획득에 아무리 다양한 유인이 있다고 해도 그 이상의 정확한 설명은 없다. 특히 부의 축적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동료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도 자존심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정신 이상자뿐이다. 명백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신앙심을 가진 자들인데,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모두 내려다보는 초자연적 존재에게서 받는 가상의 칭찬에 의존하므로 참된 의미의 예외라고 할 수 없다. 

부를 추구하는 욕망의 성질상 어느 하나의 항목도 충분히 만족될 수 없고, 모든 종류의 부에 관하여 욕망을 만족시킬 수도 없다. 부가 아무리 널리 또는 균등하게 또는 ‘공평하게’ 분배되더라도, 공동체의 부가 전반적으로 늘어가는 것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욕망은 재산 축적에서 타인을 능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이 금기라고 하는 것의 논리적 귀결로서, 고귀한 출신이지만 부를 축적하지 못한 남자들은 생산적 노동으로 재산을 얻지도 못하게 된다. 결국 그들에게 남겨지는 길은 구걸이나 궁핍밖에 없다. 그리하여 과시적 여가, 즉 유한을 과시하는 것을 좋다고 하는 행동 규범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세상에 침투한 경우에는 이류라기보다 허위의 유한계급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지극히 가난하고 불안정하며 열악한 궁핍 생활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참고 수입을 얻으려고 일에 종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유한계급이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유한’이라는 말은 태만이나 무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시간의 비생산적 소비이다. 첫째, 생산적 노동은 비천하다는 생각에서, 둘째, 태만한 생활을 할 만큼의 재력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시간은 비생산적으로 낭비된다.

예의라는 것은 유한 없이 발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의의 지식이나 습관은 오랜 시간을 들여 몸에 익히는 것이고, 세련된 취미나 예의나 생활 습관은 훌륭한 교육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몸에 익히기에는 시간과 노력과 돈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노동에 쏟는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의에 관한 지식을 갖추는 것은, 상류계급의 생활 중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시간도 금전적 이익과는 무관한 학예의 습득에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즉 예의의 가치는 유한 생활을 증명하는 데 있다. 따라서 거꾸로 말하면, 유한이 재력의 평판을 얻는 표준적 수단이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유복한 모습을 갖추고자 하는 자는 예의에 정통해야 한다. 

복종을 요구하는 데 익숙해지고 내일의 걱정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매우 자신 있는 모습이나 무례한 행동이야말로 신사의 천부적 권리인 동시에 신사를 신사답게 만드는 기준이다. 게다가 대중은 그것에 대해 매우 감사한다. 그러한 명예를 우월적 가치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비천하게 태어난 평민은 즐겁게 그것에 추종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부의 기준이 차차 높아지면, 재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서 피고용인을 소유하고 활용하는 방식도 더욱 세련되어진다. 재산 생산에 종사하는 노예를 소유하고 유지하는 것은 부와 용맹의 증거가 되지만,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하인을 계속 고용하는 것은 더욱 강고한 부와 지위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원리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언제나 주인의 신변에서 대기하는 하인이라는 계급이 출현한다. 그들의 유일한 일은 그러한 봉사를 통하여 주인에게 그 정도로 장시간의 비생산적인 봉사를 소비할 재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하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는 피고용인들 사이에 분업이 발생한다. 주인을 위해 재산을 생산하는 집단과, 주인을 위해 과시적 여가를 소비하는 집단이다. 후자는 대부분 아내, 특히 본처가 중심이 되고, 그들이 소비하는 정도를 통해 우월한 재력이 손상되지 않고 많은 금전적 손해를 견딜 수 있는 주인의 능력을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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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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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다가 엔딩에서 약간 뻘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군데군데 고전의 품격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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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1-14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엔딩이야말로 이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던 작품이었어요!

치니 2023-11-14 16:43   좋아요 0 | URL
그럴 수도요!
저는 근데 오잉? 이렇게 슝슝 담대하게 간다고?ㅎㅎ 잠시 그랬던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