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매우 매력적인 글을 쓰는 작가를 만났다! 야호.


우리의 친구는 도시에서 소년처럼 살았고 마지막까지 그렇게 살았다. 소년의 하루처럼 그의 하루는 길고 길었으며 시간이 넘쳤다. 그는 공부하고 글을 쓰고 생활비를 벌고 자신이 사랑하는 거리에서 한가하게 빈둥거리기 위한 시간을 찾는 법을 알았다. 게으름과 부지런함 사이에서 갈등하던 우리는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부지런히 일해야 할지를 확실히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했다. 그는 수년 동안 특정한 직업을 갖고 정해진 시간에 일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사무실 책상에 앉기로 결정하자 꼼꼼한 직원이며 지칠 줄 모르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게으름을 피울 충분한 시간을 확보했다. 식사를 할 때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웠으나 거의 먹지 않았고 눈을 붙이지도 않았다.


  그는 때때로 몹시 슬퍼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성인이 되기로 결심한다면 그런 슬픔에서 벗어나리라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의 슬픔은 우리 눈에는 소년의 슬픔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직 현실에 발을 디디지 않았고 무미건조하고 고독한 꿈의 세계에 사는 소년의 관능적이고 무기력한 우울 같았다. 그는 이따금 저녁이면 우리를 찾아왔다. 목도리를 두른 채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손에 돌돌 말거나 종이를 구겼다. 그는 저녁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뭐라고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외투를 집어 들고 가버렸다. 그러면 모욕을 느낀 우리는 우리와 같이 있는 게 실망스러웠던 것은 아닌지, 우리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우리의 집 불빛 아래에서 조용히 저녁을 보낼 생각이었던 건지 서로에게 묻곤 했다. 

게다가 그가 기분이 좋아 보일 때도 그와 대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아도 그와의 만남은 그 어떤 만남보다 강렬하고 자극적일 수 있었다. 우리는 그와 만나며 훨씬 똑똑해졌다. 우리 안에 있는 보다 뛰어나고 진지한 것을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우리는 진부함과 부정확한 생각들, 그리고 모순을 던져버렸다.


  우리는 그 친구 곁에서 종종 굴욕감을 느꼈다. 우리는 그처럼 절제를 할 줄도, 겸손할 줄도, 너그러울 줄도, 이타적일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인 우리를 퉁명스럽게 대하고 우리의 결점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고통을 받거나 아플 때는 갑자기 어머니처럼 자상해졌다. 원칙적으로 그는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뜻밖의 사람, 어쩌면 어딘지 모르게 비열해 보이기도 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너그러워지고 다정해졌으며 서슴없이 많은 약속을 잡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우리가 그에게 그 사람이 많은 면에서 호감이 가지 않거나 비열해 보인다고 말하면 그는 자기도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언제나 뭐든 전부 다 아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말해주면서 기뻐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이유로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친밀하게 행동하면서 그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대해 마땅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않는지를 설명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이유를 결코 알지 못했다. 가끔 그는 고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가졌고 그를 자주 만났다. 어쩌면 그 사람을 자신의 소설에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교적인 세련된 태도나 습관을 판단할 때 그는 실수를 하곤 했다. 병 밑바닥을 수정으로 착각했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아니 이런 면에서만 그는 아주 순진했다. 그는 세련된 태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신이나 문화의 세련미로 말하자면 그는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악수를 할 때 인색하고 조심스러워서 손가락 몇 개만 내밀었다가 빼내곤 했다. 그러고는 소심하게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아껴가며 파이프를 채웠다. 우리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느닷없이 무뚝뚝하게 우리에게 돈을 건넸다. 어찌나 갑작스럽던지 우리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몹시 아끼며 그 돈과 이별하는 게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단 사라져버리면 곧 그것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는 편지를 쓰지 않았고 우리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도 않았다. 답장을 보내도 단호하고 차가운 문장 몇 개가 전부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멀리 떨어진 친구를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고 친구들의 빈자리로 인해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 당장 자신의 생각 속에 친구들을 묻어버렸다.


  그는 아내도, 자식도, 자기 집도 없었다. 그를 사랑하고 그가 사랑했던 결혼한 누나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도 평상시처럼 퉁명스러웠고 소년이나 이방인같이 행동했다. 그는 자주 우리 집에 들렀고 얼굴을 찡그린 채 온화한 표정으로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가 이룬 가정을 면밀히 살피곤 했다. 그 역시 가정을 이룰 생각이었지만 그러기 위해 떠올린 방법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하고 더 꼬이기만 했다. 너무나 꼬여 있어서 간단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해가 가면서 그는 복잡하게 뒤얽히고 냉혹한 사고와 원칙의 체계를 구축했는데, 그것은 가장 단순한 현실도 구체화할 수 없게 그를 가로막았다. 단순한 현실이 금지되고 불가능해질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그 현실을 정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점점 깊어지면서 복잡하게 뒤얽혔고 숨 막히게 이리저리 꼬인 식물처럼 가지를 뻗었다. 때때로 그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고 우리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동정의 말을 꺼내거나 위로의 몸짓을 하기만 해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마지막 몇 해 동안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볼이 홀쭉해졌으며 뒤얽힌 생각들 때문에 피폐해졌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소년 같은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는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그렇다고 소심하게 행동하는 습관이나 겸손한 태도, 매일 정확하고 세심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지니고 있던 겸허한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유명해져서 좋으냐고 우리가 물으면 거만하게 냉소를 지으며 항상 예상했던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종종 영악하고 거만하게,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심술궂게 냉소를 지었는데, 그것은 얼굴에서 일순간 번득이다 사라졌다. 하지만 항상 예상했던 일이라는 말은 이미 성취한 일이 그에게 아무런 기쁨도 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얻으면 곧 그것을 즐기고 사랑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문학을 속속들이 알았기 때문에 문학에서 찾을 비밀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문학이 전해줄 비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제 문학에 흥미를 잃었다. 그가 말한 대로라면 우리 친구들 역시 그가 찾을 비밀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로 인해 그에게 우리는 완전히 따분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를 따분하게 만든다는 말에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그가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안다는 말을 그에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일상의 현실을 정복하는 일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난공불락이어서 그는 현실에 대한 갈증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다. 그렇게 그는 끝없이 멀리서만 현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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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프랑스인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한 프랑스인 가족이 “뉴욕 메츠New York Mets”라고 적힌 캡 모자를 맞춰 쓰고(아마도 그들은 그게 관광객들이 더 흔히 고르는 뉴욕 양키스 팀의 모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뒤를 이어 들어오자 아다의 눈이 가늘어진다. 

- 오, 좋은데. 우리나라 미술관도 이런 스케줄 가능한지 궁금하다.

금, 토, 일, 화, 열두 시간, 열두 시간, 여덟 시간, 여덟 시간. 좋다. 긴 근무일이 평범해질 거고, 보통 근무일은 짧게 느껴질 거야. 오버타임 근무를 선택하면 3일째에는 무조건 쉴 수 있어.  

- 점점 읽을까 말까 망설여지게 하는 이런 식의 단정적 화법이 거슬리고. 아직 너무 초반이니 조금 더 읽어 보자.

누구도 메트Met(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의 애칭과도 같은 약칭–옮긴이)를 처음 방문했던 때는 잊지 못한다. 

- 역시 예상대로 좋은 아버지를 두신 문화 금수저.

아버지는 일과가 끝난 후 집에 있던 업라이트 피아노를 몇 시간이고 연주하곤 했다. 그는 피아노를 사랑했다. 한동안 자동차 범퍼에 “피아노”라고만 적힌 스티커를 붙여놓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의 재능은 재능 자체가 아니라 즐거움에서 비롯한 부지런함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비록 뛰어난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가 존경하는 음악인의 양대 산맥인 바흐와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다소 불안정할지언정 수줍어하지 않고 연주했다. 그리고 연주하는 내내 음악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찬양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예술가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나의 생각은 분명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 으음, 또 궁금하네. 어떻게 어디서 온 이들인지 다 아는 거지...방명록 같은 데다 쓰나?

이른 아침이지만 영국, 일본, 미국 중서부 등에서 온 관광객 몇 명이 그림에 경의를 표하러 왔기 때문이다. 

- 와, 수습 떼자마자 휴가 시기부터 이렇게 미리 말해주다니. 미국도 노조 있으면 유럽 못지 않구나.

새로운 병가와 연차 수당 기준은 바로 반영될 거고 급여는 1년간 근속을 해야 인상될 거야. 내년 봄쯤 첫 휴가 일정을 잡을 무렵에 자네를 다시 부를 텐데, 휴가는 그다음 겨울, 2월 정도로 계획하고 있으면 될 거야. 휴가 주간은 선임자가 무조건 우선 선택권을 가지니까 후임들에게 돌아가는 건 보통 그 정도야.  

- 와우, 500명!?

밥은 500명이 넘는 경비원들의 이름을 모두 아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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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효 저와는 안 맞네요. 4장까지 읽고 gg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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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기억력이 빵점에 가까운 자로서 위안이 됩니다.

기억은 아주 상세하게 하는 것보다 두루뭉술하게, 어렴풋이 해야 사고력과 판단력을 높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판단과 정보 처리가 빠른 사람일수록 기억을 잘 못 한다고 한다. 생각을 많이 하지 않기 위해서 망각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 아니 이것은 너무 모순인데요...최소한의 의욕이 없는데 어떻게 시작을 하나요, 애시당초. 시작을 못하면 의욕이 안 생긴다매요...

뇌 구조에서 보면 의욕의 스위치는 ‘그래, 해 보자!’는 생각만으로 켜지지 않는다. 일단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면 의욕의 스위치는 자동으로 켜진다. 이 스위치가 켜지면 일을 하는 동안 높은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생각만 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의욕과 집중력이 생기지 않는 게 현대 뇌 과학에서 밝혀진 의욕의 메커니즘이다. 

- 멍때리기 대회를 더 크게 엽시다.

그럼 뇌는 왜 멍하니 있을 때 더 활발하게 움직이는 걸까? 뇌는 생각과 같이 의식적으로 어떤 일을 할 때 그 행동과 관련된 부위가 활성화되고, 그곳으로 에너지가 쏠리게 된다. 뇌 입장에서 보면 에너지가 한 곳에 집중되는 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반면 멍하니 있을 때는 에너지가 뇌 전체로 분산된다. 특정 부위에 집중돼 있던 에너지가 여러 곳으로 분산되면 ‘유기적 연결’이 일어난다. 이 유기적 연결로 인해 이전에는 교류가 없던 것들이 만나게 되고, 순간적으로 새로운 발상이나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이를 비유하자면 꿈을 꿀 때와 비슷하다. 꿈속에서는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조합의 사람이나 물건이 등장하고 비현실적인 상황이 전개되곤 한다. 뇌 전체가 활성화돼 맥락 없이 연결되면 의식적인 사고로는 생각해낼 수 없는 대단한 아이디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의식적으로 ‘자, 생각해 보자!’ 하고 작정하고 행동하면 뇌가 과열돼 생각이 멈춰 버릴 수 있다. 

- KBS 홍김동전 폐지를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는 어떻게 결정할지가 아니라 ‘결정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어떤 것이든 하겠다고 결정하든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든 일단 결정할 마음을 먹는 것이 결국 인생의 만족도를 크게 좌우한다.

한 커리어지원회사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조만간 이직하고 싶다’는 사람이 응답자 중 93%를 차지했다. 경력 관리 차원에서 이직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단지 ‘그만두고 싶은데…’와 같이 애매모호한 상태라면 퍼포먼스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고민만 반복한다면 ‘앞으로 세 달 동안은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자!’라고 기한을 정하고 이후에 그만둘지 말지 선택하는 것도 좋다.

이 실험처럼 동전을 던져서 결정해도 좋다. 전진하지 못 하고 멈춰서 있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하는 원인 중 하나이다. 부디 전진하기 위해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어떻게 굴러가도 결국 흘러가는 것이 인생사이니까.

- 편도체가 지나치게 비대한 나여...

실험 결과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협력하지 않는다) 사람’은 배외측전두전야(생각하는 뇌)가 편도체(본능의 뇌)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선택을 할 때 배외측전두전야가 강하게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했다. 한편 ‘협력적인 사람’은 편도체가 크고 선택할 때도 편도체가 강하게 활성화됐다. 

정리하자면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를 중시하고, 협력적인 사람은 직관에 맡겨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즉,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협력적이라는 것이다.

뇌는 일상생활이나 습관 등에 따라 활동하는 부위가 달라지며, 활동을 많이 하는 부위일수록 크게 발달한다. 평소 장단점을 많이 따지는 사람은 어쩌면 생각하는 뇌가 활성화돼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이해관계가 없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좋다. 예를 들면 자원봉사활동 같은 것 말이다.

득실만을 따져 행동하는 사람은 손해나 리스크 같은 것을 과민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세계적으로 갑부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불안 중 하나가 ‘돈을 잃는 것’이라고 한다. 큰 부를 거머쥐고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돈을 날리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모으는 데 집착하고 돈을 잃게 되면 큰 공포에 휩싸인다고 한다. 이런 불안 때문에 곁에 있는 행복을 잘 느끼지 못 한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다. 

- 이게 진짜 된다고?

뇌에는 이 화를 억제하는 기능이 갖추어져 있다. 이는 주로 전두엽이 담당하는데, 전두엽이 활성화되면 감정의 폭발을 냉정한 사고로 가라앉혀 준다. 단,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고 나서 대략 4~6초 정도 지나야 전두엽이 활성화된다.

쉽게 말하면 감정이 생기고 난 뒤 4~6초만 잘 참으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대처법은 화뿐만 아니라 공포나 질투 등에도 효과가 있다. 마음이 무거울 때는 그 기분에 빠져 있지 말고 먼저 숨을 깊게 ‘후~’ 하고 내쉰 다음 천천히 10을 세자.

- 오, 이건 늘 해왔어. 실천하기 쉽다.

소원이나 고민을 글로 쓰면 좋다고 한다. 혹자는 이 말이 근거 없는 정신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인지행동요법’으로 쓰이는 방법이며, 특히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 부정적인 내용의 일기를 매일 쓰고 있는 나, 잘하고 있었어! (근데 왜 여전히 불안도가 높습니까 ㅠ)

하루에 15분 정도 4일간 부정적인 감정을 글로 쓴 결과, Ⓐ그룹은 일시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강해졌지만 장기적으로는 긍정적 감정이 강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글을 쓸 때 포인트는 ‘통찰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통찰언어란 생각한다, 느낀다, 이해한다 등과 같은 사고나 이해에 관련된 말로 이런 언어를 많이 사용한 사람일수록 부정적인 감정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시험 전 느끼는 불안을 글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깊이 파고들어가 글을 쓰는 게 중요하다. 글쓰기를 일기 쓰듯 습관화하면 언어화의 정도精度가 높아져 감정 조절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 테트리스도 게임 아닌가요???

폭음, 폭식, 기호품에 의존하거나 게임 등과 같은 충동적인 행동은 버릇(나쁜 습관)인 경우가 많다.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길 것 같다면 탭핑을 하거나 스마트폰에 테트리스를 다운 받아 즐겨 보기 바란다. 

- 조용한 집 놔두고 뭐 하러 굳이 카페 가서 일하냐, 는 질문은 더 이상 하지 말자.

즉, 약간 소음이 있는 환경이 뇌에 좋다는 것이다. 특히 ‘추상적인 것’을 생각할 때 좋다고 한다. 예를 들어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생각하거나 보고서를 쓸 때, 새로운 안건을 생각하거나 전략을 짜는 것처럼 곰곰이 생각할 때 적합하다. 이는 바꿔 말하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작업을 계속하면 뇌는 금세 지쳐서 하나에 진득하게 집중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작업 환경으로 좋은 곳은 어느 정도 소음이 있는 카페이다. 이유는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의 목소리나 식기를 나르는 소리 등 약간의 잡음이 작업 능률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를 ‘커피숍 효과’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향이다. 서울대 서한석 연구진은 ‘원두 향에는 활성산소에 의해 파괴된 뇌세포를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발표했다. 활성산소란 수면 부족이나 피로 원인이 되는 물질을 말한다. 

두 번째 이유는 향이다. 서울대 서한석 연구진은 ‘원두 향에는 활성산소에 의해 파괴된 뇌세포를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발표했다. 활성산소란 수면 부족이나 피로 원인이 되는 물질을 말한다. 

세 번째 이유는 ‘루틴화’에 따른 의식의 전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정해진 카페에 가서 작업을 하면 조건 반사적으로 ‘카페에 간다=뇌가 창조적으로 일한다’는 공식이 생기고, 카페에 가면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의욕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 그래 나한테 제발 파이팅! 이라고 좀 하지 마...

한 번 끓어오른 부정적인 감정을 억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뇌가 혼란스러워져서 과열되는 것이다. 즉, 원래 부정적인 사람이 무리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면 자기모순에 빠져 오히려 자신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닫게 돼 부정적인 사고를 자극하는 원인이 된다. 낙담한 사람에게 “파이팅!”, “기운 내!”라고 말하는 게 역효과가 나는 이유는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이다.  

- 아이고, 나이 들면 해야 하는 거 추가: 억지로 웃기

무엇보다 연령에 따라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가 달라진다는 게 이 연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이다. 젊은 사람은 뇌 중에서 ‘보수계’라 불리는 부위가 활발해졌다. 보수계란 기쁨·쾌감과 관련된 부위이다. 즉, ‘웃음=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달라진다. 나이 든 사람이 웃으면 뇌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가 된다. 다시 말해 기억과 가치 판단 등 번뜩임으로 이어지는 부위가 더 활성화되는 것이다. 즉, 웃으면 판단이 빨라지거나 아이디어가 잘 떠오른다는 이야기이다.

웃음은 오락이나 기분 전환 측면을 넘어 실용적인 부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웃음은 실용적인 일에 직결되니 아무 생각하지 말고 한 번씩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면 좋다. 

- 요즘 내 말 중간에 끊고 듣다 말곤 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었는데...역시 힘들 만 했구나. 신뢰가 안 가서 힘들었나 봐.

그럼 오프너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결은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재미가 없다고 중간에 듣다 말면 안 된다. 신뢰 관계를 구축할 때는 무엇보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 오...이타적이 되면 안 아프다.

우리 주변에서도 아이가 아프면 자신의 건강은 뒤로하고 성심껏 아이를 간병하는 부모님이 있다. 이렇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만을 위한 이타적 행동을 할 때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뇌의 메커니즘에서 보면 누군가를 위해 필사적인 순간에는 의식이 불안한 감정이나 통증으로 가지 않는다고 한다.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옛 말처럼 정신이 한 방향으로 향해 있으면 컨디션이나 몸의 감각이 크게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 헐, 다섯 명 중의 한 명이나 된다고요?

현대인의 다섯 명 중 한 명은 우울증이나 조현병Schizophrenia(정신분열증-옮긴이)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이 병이 생기는 데에는 많은 요인이 있을 텐데 그중 하나를 ‘불안에 의해 생각이 많아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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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헤아림의 조각들
임지은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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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그대로 나와 준 책이다.
‘쉽게 확언하지 말고 비겁하지 않으면서 끝내 솔직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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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훼손은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할 때 생기는 일이 아닐까요. 세상은 잔인하고, 그런 세상에서 사람은 사람을 외면하고 버리고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도망칩니다. 사람은 남은 사람을 돕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위해 꺼리는 일도 합니다. 사람은 아파하면서도 버텨냅니다. 사람은 최악을 면하고도 훼손됩니다. 사람은 훼손되고도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그것은 어딘가가 영영 망가진 대신, 무언가를 조금 더 이해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밝고 구김살 없이 자랐다, 티 없이 맑다, 같은 말들이 여성에게 칭찬으로 쓰일 때마다 칭찬은 비난을 포함하고 있다는 오래된 진실을 감지합니다. 그 칭찬엔 훼손된 여성에 대한 멸시가 들어 있어서, 

이미 생겨버린 흉터를 개선하려면 거기에 다시 상처를 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럼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어도 새로운 피부를 갖게 되니까요.


  나는 훼손되는 동시에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똑돌이들은 동시대 한국 소설이 세계 고전에 비해 열등하다는 식의 확언을 즐겼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이 최근 한국 문학 내 흐름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오래전 수능을 준비할 즈음 읽었을 단편, 혹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 소설이 자기가 가진 예시의 끝이라는 사실은 은폐했고……) 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끊임없이 의견을 내고 싶어 했지만, 자기 시야의 한계와 당사자의 언어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했다. (대한민국에 대해 다 아는 듯 굴면서 여성인 내 현실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그들과 미술관이라도 함께 가는 날이면, 미술사적 개념이나 연보는 들을 수 있었지만, 해당 작품이 지금 여기, 그 자신 혹은 우리에게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선 들을 수 없었다. 

학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조금 알 것 같아지는 순간들로 말미암아, 나는 각자 살면서 느끼고 간직해온 장면이 사람을 꽤 똑똑하게 만들어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색색의 슬픔이나 길냥이의 울음, 영화의 장면같이 모호한 것들을 알고자 할 때 필요한 건 꼭 들어맞는 논리보다는 빈틈이 생기더라도 빗대고 포개어 볼 수 있는 각자의 기억이었다. 그런 기억을 가지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 다른 존재의 시야를 수용해보려는 시도, 몰라서 치솟는 감정과 그로 인해 행동하게 되는 찰나, 그리고 때론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도무지 타당하지 않을 순간에서야 잊지 못할 자기 기억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한번은 한 배운 남자가 페미니즘을 운운하는 내 말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감하는 겁니다. 그는 남자들의 폭력성을 다독이거나 키워주는 사회에 대해, 그 폭력성이 망가뜨리는 것들에 대해, 아니 그것들이 증명하는 이미 망가져 있는 남자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니까 남자인 네가 뭘 알아,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나는 아닌 척 가자미눈으로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윤리를 선취하려 드는 남자 중 도무지 믿음이 가는 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가 오래전 외국의 으슥한 골목에서 남자 여럿에게 성폭력을 당할 뻔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는 무력(無力)함과 무력(武力)을 이해한 사람 특유의 얼굴로 말했고, 그 얼굴은 나같이 의심이 많은 사람조차 단번에 설득해버렸습니다. 그게 아니면 그의 불행이 나를 설득했는지도 모르죠.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듣고 보니 그가 썩 달라 보이더군요. 어떤 일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조금 뭉클하게 연대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선 참으로 무시무시했는데, 그 후 종종 나는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 남자들을 전부 그 골목으로 보내고 싶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다 놀란 나머지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던 것입니다. 서로의 말을 이해한다는 건 정말 뭣 같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차라리 피해자가 되어버리길 바라는 마음과 나도 그 누구도 그딴 걸 모르면 좋겠는 마음, 피해자에 그만 이입하고 싶은 마음과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도 나서주길 바라는 마음, 그러면서도 피해 사실에 설득되는 마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그러진 마음들이죠.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던 내 마음과 싸우던 나는 이제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는 내 마음과 싸웁니다. 이상적인 여성상은 달라졌을 뿐 여전히 존재하고, 어떤 화장품과 옷을 고를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표정을 지을지 내 몸이 숱하게 훈련해온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내면화하려 듭니다. 가끔은 다정하게, 가끔은 뾰족하게, 가끔은 불행하게, 가끔은 있어 보이게. 

인정하긴 싫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선한 의지란 정작 더 나은 삶으로 가고 싶어 하는 개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하니까요. 정말이지, 매번 화를 내지만 동시에 영원히 지속될 거 같은 분노는 내 안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패배도 그만하고 싶은데요. 가끔은 아예 그 마음들을 모른 척하고 싶은데요. 실은 내 삶이 혹사당하질 않길 바라고 있을 뿐이었는데요. 강남에 살아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지만 강남, 살아보고 싶은데요. 근데 그러면서도 막상 강남 사는 놈이 그 따뜻하지만 힘없는 사람들의 모임 따위에 있었다면, 나나 기오성이나 술김에 외쳤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자격이 있느냐고, 너같이 배부른 놈에게 자격 같은 게, 씨발, 있느냐고.


  이런 걸 생각하면 아무 데나 왁 소리 지르고 싶어지고 그걸 못 하니 으악거리며 웃는 거지요. 교육이 다 뭐랍니까. 정의감과 열패감이 원래 저들끼리 자주 엉킨다는 걸 내가 만난 선생 중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요. 좀 정의로워 보려고만 하면 자꾸 내 안의 열패감이 고개를 들어서. 얼굴이 화끈거려 급기야 가지고 있는 정의감을 통째로 내다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곤 합니다. 무겁긴 얼마나 무거운지 내다 버리지도 못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게 나쁜가요. 나를 포함해 내게 의미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곤궁함의 항상성에 대한 불만, 울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계속 울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 그런 걸 결코 누군가의 정체성으로 삼지 않겠다는 결기, 이 모든 걸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내 무능 같은 게 반복되고 뒤섞일 때면 진절머리가 나는 걸 어떡합니까. 

더도 덜도 아닌 적당한 선을 맞추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 자신을 초과해볼 요량으로 장전해둔 최선을 억눌러야 했는데, 거기에는 인터넷쇼핑 중 최저가를 찾아 헤매다 오는 공허함 비슷한 게 있었다. 최저가 물건을 찾는 데 드는 시간처럼, 최선의 노력을 계량하는 데에도 품이 들었다. 할 만큼만 하는 데 드는 에너지는 꾸준히 그리고 놀랄 만큼 의욕을 빼앗아갔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사수는 가끔 참 잘한다고 격려해주었다. 큰 감흥은 없었다. 그 칭찬은 내가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을지와는 무관했다. 오해를 살까 말하자면 사수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고, 그가 내게 한 지적은 전혀 부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서 일하는 내내, 나의 최선이 저지른 실수는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뭘 하나 해도 최선을 다하렴. 항상 그게 중요한 거란다…….


  그 시기 나는 피곤에 절은 엄마가 아침마다 최선을 다해 나를 격려할 때마다 정색을 일삼았다. 옛날 얘기 그만해. 평범한 이에게 함부로 최선을 요구하지 마.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최선은 그저 나를 소모하거나 바보로 만드는 일이야. 냉소적이고 재수 없게 인생의 진실을 꿰뚫고 있다는 듯 굴었다.


  퇴근 후엔 엄마에게 한 말을 뉘우치며 언젠가 숨어들어 울었던 산책로를 찾아갔다. 산책로는 경사가 심한 대신 정상에서 뻥 뚫린 시야로 일몰을 볼 수 있었다. 퇴근 후 헉헉대면서 경사를 올랐다. 지친 몸을 쥐어짜 매일의 일몰에라도 온 힘을 다하면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아졌기 때문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엄마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했다. 최선을 다하는 일이 있다는 건 중요했다.


  그러므로 실수가 내 안에 오래오래 남아 있는 건 단순히 내가 옹졸하거나 창피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실수로 인해 나는 평범한 이의 최선보다는 비범한 이의 평범한 방식이 중요한 사회의 원리를, 대체 가능한 일을 주어진 선만큼만 하면 되는 이의 슬픔을 깊게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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