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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ㅣ 블랙 장르의 재발견 1
오스카 와일드 지음, 서민아 옮김 / 예담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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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진정으로 반영하는 것은 관객이지 삶이 아니다. ......쓸모없는 것을 만드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에 열렬히 감탄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전혀 쓸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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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천재성이 아름다움보다 오래 지속된다는 건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거든. 우리 모두가 교육을 받기 위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몹시도 애를 쓴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존재를 향한 거친 투쟁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싶어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어리석은 희망 속에서 쓰레기와 사실들을 정신에 가득 채워넣는거지. 지식으로 완벽하게 똘똘 뭉친 사람 -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이상이야. 한데 지식으로 완벽하게 똘똘 뭉친 사람의 정신은 얼마나 끔찍하겠나. 그건 마치 온갖 잡동사니와 먼지로 가득 찬 데다, 모든 물건에 적정한 가치 이상의 가격이 매겨진 골동품 상점과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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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일수록, 단 한 줄의 문장, 단 한 권의 책으로 독자에게 수많은, 끊이지 않는, 답이 없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선 저 위 두 가지 인용문을 보라. 어떤 생각이 드는가.
첫 번째는 7페이지, 서문에서부터 나오는 문장, 두 번째 역시 27페이지 초반부터 나오는 문장이다. 서문은 오스카 와일드 자신의 말이고, 초반에 나오는 저 대사는 냉소적인 지식인으로 분한 책 속의 헨리 경이 읊은 말이다.
초반에 나는, 당연히 헨리 경의 저 대사에 저자인 와일드의 주장이 녹아 있으려니 믿고 다음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헷갈리기 시작했다.
헨리 경의 경구 식 대사는 가끔 치명적인 오독을 불러 일으키고자 일부러 써버린 듯한, 그러니까 반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강하게 질문을 제시하는 느낌을 주었으며, 헨리 경에게 줄곧 반론을 펼치는 인물인 도덕적인 지식인 바질 경의 대사를 읽고 있자니, 냉소하는 헨리와 훈계하는 바질 중 어느 쪽이 오스카 와일드의 본심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 시작했다.
옮긴이의 해석을 보면 이 책이 나오던 19세기 당시 와일드는 탐미주의 혹은 유미주의라고 불리는 기조의 선두에 섰던 인물이고, 그의 예술에 대한 주장은 지식이나 이성 보다는 아름다움과 감각 쪽으로 완전히 편향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나는 줄곧 헷갈렸다.
어쩌면 작가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도발하는, 바로 그 질문들 자체가 내게는 버거운 것들이라 혼돈스러운 상태에서 - 그러니까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 읽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반면 이 모든 혼돈 속에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써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도리언 그레이' 경은, 내게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악의 상징, 보들레르 식으로 말하자면 악의 꽃 같았다.
와일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성이 결국 악이라는 - 그리고 이 악은 이성 따위로는 애초부터 통제되지 않으며 오로지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때만 우리들을 해 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니면 도리언 그레이 같은 천부적인 미를 소유한 사람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의 극치이므로 변치않는 아름다움이라는 목표를 충족하고자 인간으로써의 삶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고통받고 자멸하니, 결국 인간이란 예술 - 그 쓸모없는 감각적 쾌락의 끝에 있는 무언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마는 바보같은 존재이고 예술가 역시 이를 조장하는 무리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혼돈은 계속된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뭔지도 이젠 더이상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제 만난 십대 소녀가 이 책을 읽고 싶어했을 때 내가 말렸다는 것. 그러니까 이 책을 어린 영혼이 읽으면 안될 것 같은 두려움이 내 안에 생겼다는 것.
좀 더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