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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경험 -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DIY 가이드
한국성폭력상담소 지음 / 이매진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일전에 페이퍼에서 이 책을 쓴 사람 중 1인이 타 싸이트 블로거 이웃이라는 점을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부터 쓰는 이 리뷰는 절대 주례사 리뷰 따위가 아니다. 짐작은 가지만 정확히 이 책 어느 부분을 그분이 쓰셨는지도 모를 뿐더러, 이 책이 많이 팔린다고 그분이 직접적으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닌 것 같기에 굳이 좋은 쪽으로 리뷰를 쓰려는 노력을 할 이유도 없다는 말이다. 조금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이전에 이 책을 쓴 기관(한국성폭력상담소)에 큰 관심도 없었고 그 흔한 기부금 한번 관련 기관에 내 본 일도 없다. 그러니 제목이 너무 직설적이라도 너그러이 믿어 주시길.
참말이에요, 모든 여성, 모든 딸 가진 부모, 모든 여성을 대하는 사람들, 모든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이 -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알아두고 주변이나 자신에게 안 좋은 사태가 발생하면 참조할 내용이 가득, 단 한 줄도 뺄 게 없어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잘 정리된 구성과 감각적인 디자인, 재생종이라서 가벼운 무게감, 친근한 문체와 가독성 - 이 모두가 거의 완벽에 가까워서, 이분들의 노하우도 노하우지만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토론과 교정이 반복되었을지 상상이 저절로 되더라. 그래서인지 더더욱, 별 것 아닌 문장에도 종종 눈시울이 뜨끈해지기도 하고, 당장 내 일은 아니지만 나도 빨리 내 주변에 직장 내 성희롱으로 고생하는 H를 도와야겠다 마음이 성급하게 진도를 내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나도 담담하게 내 생애 최초의 성폭력 (사실 나는 이 경험을 두고 폭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지만 그것 역시 무의식적 자기방어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책을 읽고 깨달았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박정희가 죽었던 날, 우리 학교 전체는 슬픔에 휩싸여 교장 이하 학생들이 마당에 서서 묵념을 했다. 나는 분위기가 엄청나게 가라앉았다고는 느꼈지만 슬프진 않았다. 어른들은 그렇다 쳐도 우리 반 반장이기도 했던 그 아이가 엉엉 우는 건 어쩐지 너무나 이상해보이기도 하고 그 아이가 아주 어른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방과 후에 텅 빈 운동장에서 홀로 놀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다가와서 그 아이를 아냐고 묻고, 자신이 그 아이의 삼촌이라고 하니 '나보다 어른스럽던' 그 아이의 이미지가 단박에 떠올라 아저씨까지 꽉 믿었나보다.
아저씨가 처음에는 그 아이의 행방을 묻더니, 내가 모르겠다고 하자 자기랑 잠깐 집에 가서 그 아이에게 전달할 물건을 가져오자고 했던 것 같다. 따라간 길은 기억나지 않고 집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문을 열면 비좁은 방이 바로 있는 구조였던 것 같은데, 어린 마음에도 그 때는 들어가기 싫다,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말을 하는 것도 어쩐지 더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아저씨는 주겠다던 물건은 꺼내지도 않은 채, (늘상 깔려 있던 것 같은 더러운) 이부자리에 누워 혼자 무언가 행위를 했고, 나는 왠지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가만히 앉아 방바닥을 보았던 것 같다. 방바닥엔 하얀 색 처음 보는 액체가 흐르고,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걸레질을 했었지.
이제 가도 좋다고 해서 집으로 왔는데,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누워만 있었던 기억도 난다. 물론 엄마에게 말하지도 못했다. 왠지 혼이 나거나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데, 설명이 불가하니 막연히 그냥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자고 생각한 것 같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런 정도로 일이 끝난 게 그나마 참으로 다행이다 싶어서, 그리고 더 어른이 되어서 생각하니 그 아저씨 너무 너무 외로웠나보다고 애써 이해하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해서, 나는 그 기억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거의 지웠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이런 기억은 평생 간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큰 피해가 없었던 나조차도 이런데 더한 상황에 처했던 아이들과 여성들은 어떨까.
책 속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 94%가 바바리맨이나 가벼운 지하철 내 접촉까지 포함하는 성폭력 경험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나 혼자 그런 일 한번 없었다고 맘 편하게 살아봐야, 어느날 갑자기 이런 사회 속에서 트라우마를 갖고 사는 누군가에게 해꼬지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고, 어느날 갑자기 내가 그 대상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매일 이런 생각만 하면 무섭고 위축되고 기분이 안 좋아서 어떻게 사냐며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잘 알아두고, 잘 대처하고, 서로 도와서, 94%를 84%로라도 내려보자. 나만 행복해서는 절대 오래 행복할 수 없다. 내 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많아야 나도 오래 오래 행복하리라는 단순한 사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상기해내고, 참으로 고맙구나 라고 생각했다.
보너스: 비단 성폭력 사례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 면에서 밀리는 대상으로부터 피해를 당할 경우 가해자에게 어떤 식으로 차분하고 당당하게 대응하면 좋을지도 알 수 있고, 법적인 절차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 다른 사례에서도 응용 가능한 부분이 많다. (들어서기도 전에 무조건 주눅들게 만드는 경찰서를 상기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