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오후 1시 10분.
자다가 얼핏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과 함께, 어디선가 쾅! 하는 굉음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다.

화장실에 가니 비데가 작동되지 않는다. 얼마 전 수리했는데 벌써 또 고장? 짜증이 밀려 오는 걸 서둘러 막으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전기 시설도 점검한다. 역시나, 아무 것도 작동되지 않는다. 핸드폰을 보니 밧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쾅! 소리 때문이었든, 그냥 폭우 때문이었든, 원인불명, 아무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 이제 어쩔까.

방은 어둡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이 흐리기 때문이다. 밧데리가 다 한 핸드폰은 꺼지고, 컴퓨터 전원이야 저장된 밧데리로 들어오지만 인터넷이 되지 않는데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언제부터 이 따위가 되었을까, 인터넷 없던 시절에도 컴퓨터를 썼건만, 이제는 그게 안 된다)

어제 조금 읽다 만 <포기의 순간>을 읽기로 하면서, 어두운 방 안보다는 카페가 낫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만다.
어쩐지, 이 책은 어두운 곳에서 읽기에 오히려 적절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놓인다. 하지만 분명히 금세 다 읽고 말 것 같은 분량의 책을 보면서 이후엔 어둠 속에서 무얼 할지 또 다른 우려가 스물스물. 가까운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살펴본다. 4시20분, <플레이>라는 음악영화가 있네, 오케이. 책을 읽고 극장으로 가자.

나는 나름대로 분명하고 예측 가능한 설정을 해두고 문명(전기)이 잠시 끊긴 사이에도 지혜롭게 대처한 것 같아 뿌듯하다.
하지만 이 뿌듯함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내 사라지고 만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우리에게는 예감을 초석으로 인생을 구축할 권리가 있다." - 234 쪽.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불의의 사건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 247쪽에 나온 옮긴이의 말 중, 이 책의 작가 필립 베송이 독자들에게 한 말을 읽고 나자, 잠시 잠깐 자족했던 마음이 곧 불안해지고 만다.

그리고 갑자기, 단 몇 시간동안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나와 85호 크레인에서 태양열에 의지해 겨우 핸드폰만 쓸 수 있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숱한 밤을 보내고 있는 김진숙 씨를 비교해본다. 그렇다. 나는 <포기의 순간>을 읽기 전에 <소금꽃 나무>를 읽고 있었다.
그이는 유쾌하고 정직하고 재미난 사람 같다. 그런데도 난 그이가 쓴 일기와도 같은 기록들을 보면서, 견뎌내기가 조금 힘들다는 핑계로 일단 책을 치워 놓고 다른 가벼운 짓들을 하다가 오늘은 소설책을 읽었다. 오해하지 말아주시라, 그렇다고 <포기의 순간>이라는 소설책이 <소금꽃 나무>보다 무겁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현실의 김진숙을 떠올리다가 의식은 어느덧 김이설 작가의 <환영>을 읽었던 그때로 기어코 돌아간다. 모두가 지독하다고들 했던 그 소설. 하지만 나는 지독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고, 내가 무얼 알겠느냐고, 거기 나온 주인공이 백숙을 파는 곳에서 팔아야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내가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고, 어떤 경우에는 상투적인 말을 하는 순간 덫에 걸리고 마는 법이다. (마지막 문장은 역시 <포기의 순간>에서 읽었던 문장을 섞은 것이다)

단전을 겪고 김진숙, 편의점 알바를 하고 백숙집에서 일하는 윤영을 떠올리는 나. 치가 떨릴 만큼 가벼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란 인간이 이 정도 주제라고 인정하자. 그리고 관망하기만을 바라는 비겁한 마음. 그러나 인간에게는 누구나 비겁할 권리도 있다. (이 문단의 마지막 문장에서 쓴 '비겁할 권리'라는 말도 <포기의 순간>에서 인용하였다)

책을 다 읽고나니 전기가 다시 들어온다. 핸드폰도 다시 켜졌다.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철저히 경계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던 내가, 그 몰입을 자발적으로 깨고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하고 집을 나서 영화관으로 간다.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저 작고 소박한 인디음악인의 다큐멘터리 정도로만 알고 갔는데, 막상 보니 전에 티비에서 보고 '에잇, 겉멋 투성이'라면서 채널을 돌렸던 그 그룹의 이야기다. 한 곡이라도 내 마음에 닿았으면 좋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봤지만 내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이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누구든지 짐작하는 그 노래에서 인용, 상투적이다. 그러니 나는 덫에 걸렸다. 지금이 아니지, 이 페이퍼를 시작한 순간부터지,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적는 건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상투적인 글쓰기 아니던가)

집에 돌아오면서 세탁소에 들렀다. 아저씨가 얼른 옷을 찾아주지 못해서 굉장히 미안해하신다. 어눌해서 미안하단 말도 못하지만, 그 마음이 오롯이 내 마음에 와 닿는다. 아저씨가 옷을 이윽고 찾아내고, 환하게 웃으시니까, 그 어떤 책보다, 그 어떤 음악보다 내 마음이 물컹한다. 이 세탁소에 자주 들러야겠다고 생각한다. 저녁에는 친구들이 해물찜을 먹자고 한다. 맛있겠다. 오늘 같은 날씨에 소주까지 한 잔 곁들이면 금상첨화인 안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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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7-13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에 간 친구가 전화를 했어요. 토요일 새벽이었는데, 나도 깨어있고 친구도 깨어있고.
친구가 다짜고짜 전화기에 대고 악을 쓰더라구요. 비겁하다고, 저에게 말이죠.
그래서 말했어요. 오냐, 비겁하다, 어쩔래....
<포기의 순간>이 책상에 있는데 제목이 꼭 제 마음 같아요. 그래서 아직 못 읽고 있어요ㅡㅜ

치니 2011-07-13 12:20   좋아요 0 | URL
지난 토요일 새벽에 깨어있지 않기란 힘들었어요. 서울에 앉아 트위터 송신되는 글들만 바라보기도 힘들었어요. 나는 이제껏 얼마나 수없이 많은 경우에 무임승차를 해왔는가, 세어봐야 할 정도로. 변화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무슨 말이라도 거들 자격이 있는가, 비겁할 권리 대신 포기해야 할 자격이겠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기 올라가 있는 김진숙 씨는, 안 온 사람들에게 비겁하다고 악을 쓸 분은 아니란 점. 친구 분도 아실 거에요. ^-^;;ㅠ

chaire 2011-07-13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물찜과 소주, 맛있으셨어요?(맛있었겠다)
'비겁할 권리'에 나도 모르게 끄덕끄덕...(그러면서도 불안하고 미안한 기분은 또 어쩌지 못하고..)

치니 2011-07-13 12:23   좋아요 0 | URL
맛있었어요! 너무 맛있어서 (음식만이 아니라 이야기도요) 소주 한 잔만 할라다가 어쩌다보니 와인 두 병에 또 다시 소주, 울캴캴캴.
불안하고 미안하고 비겁하고 또 용기를 내고, 이걸 반복하는 것이 삶이 아닌가 - 대개들 다 그렇지 않나, 용기를 내어 행동하는 것과 아닌 것에는 정말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만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 요즈음입니다.

당고 2011-07-2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제 친구들과 <소금꽃나무>를 읽고 모임을 가졌죠. 흠흠-
왠지 책 얘기는 별로 안 하고 각자의 고민을 많이 얘기했네요.
<포기의 순간>은 재밌나요?
다락방 님과 웬디 님, 그리고 치니 님의 블로그에서 동시에 보게 되다니......

치니 2011-07-28 13:25   좋아요 0 | URL
<포기의 순간>은 솔직히 제 기대보다는 살짝 아래였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전체가 좋다기 보다는 부분에서 아주 예리하게 공감되는 점이 도드라지는 책 - 저에겐 그렇게 기억되요. :)
 

   
  사랑할수록 문학과 더 많이 싸우게 된다.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 잠을 자려고 하는 시인과 소설가들 앞에서 내가 춤을 추기도 했을 것이고, 내가 춤을 출 때 독자들이 잠을 자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한 배를 타게 되지만 그 배가 하늘로 날아오를지 벼랑으로 떨어질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줄을 알면서도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다. 언뜻 거창해보이는 이 책의 제목이 그 말의 가장 소박하고도 간절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를 나는 바란다.
 
   

서문을 멋지게, 혹 하게, 두근거리게,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그 흔한 진정성을 가지게,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일 터 - 이 책, 느낌의 공동체는 서문만으로도 읽어볼 가치를 준다. 더 많은 좋은 문학작품의 탄생을 고대하는 독자로써, 시인과 소설가 뒤에 신형철이라는 문학비평가가 함께 한다는 것이, 든든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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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1-05-17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두.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가능하다면 필사를 해서라도 품어, 생각하고 싶게끔 한 책이었어요.
 몇 해 전만해도 비평가라면 눈길 한 번 주지않고 관심도 두지 않았었거든요.
 김영하와 조영일씨의 논쟁(?)이 벌어질때즈음에 비평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 문학의 틈새를 찾고 있었는데 , 신형철의 책이 계기가 되었어요.
 곧 몰락의 에티카도 읽어보려구요.
 
 참 , 좋아요.
 

치니 2011-05-17 16:45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이 책의 서문을 읽기 직전에 June* 님의 수채화 같은 리뷰를 읽었습니다. :) 그에 비하면 제 페이퍼는 얼마나 무뚝뚝한지요. 에그그.

저 역시 비평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기란 쉽지 않았어요. 좋은 작가도 드물겠지만 좋은(그리고 글도 재미난) 비평가는 우리 문화에서는 더더욱 찾기 어려웠던 듯.
저도 <몰락의 에티카>를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명불허전이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읽고나면 또 멋진 리뷰 올려주세요.

굿바이 2011-05-1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요, 이 책을 두 권 샀는데요, 두 권 다 뺏겼어요 ㅜㅡ
그래서 생각했어요. 나와 연모를 나누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겠어,라구요 :)
그렇지만 또 생각했어요. 나는 계속 뺏길 것이다,라구요~

얼마 전 윤대녕의 책 뒤에서 신형철을 만났을 때, 참 좋았어요. 그렇게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아요~

치니 2011-05-17 16:47   좋아요 0 | URL
ㅎㅎㅎ 굿바이 님은 독자이지만 벌써 시인이에요, 언젠가 신형철의 비평문에서 환하게 피어날 시를 쓸 시인. 그러니 계속 뺏기셔도 뭐, 별로 안타깝지 않습네다.

아이코 그러고보니 윤대녕이 있었죠. 그가 어떻게 변했나 읽어봐야 하는데 잊고 있었네요.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무한하다!

blanca 2011-05-1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락의 에티카> 참 좋았는데 이 책은 더 땡기네요. 원래 평론이라는 것 자체를 고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신형철 평론은 정말 다른 것 같아요. 절로 밑줄을 긋게 하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치니 2011-05-18 12:58   좋아요 0 | URL
<몰락의 에티카>도 역시 읽어 봐야겠어요! 이렇게 다들 좋다고 하시니. :)
이 책 어딘가에도 나오지만, 평론이라 해서 반드시 어렵고 묵직하고 자기만의 감성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덜 내야 한다는 법칙은 없는데도 대부분 암암리에 그 틀을 깨지 못해서 신형철 평론이 유독 마음에 와 닿나봐요.

차좋아 2011-05-1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의 평론 어디선가 봤던 기억은 있는데 가물가물.....
두근거리게 만드는 서문을 읽은 기억이 .... 지금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아마 없었나봅니다. 신형철은 그런 사람이군요. 기억해야지 신형철....

치니 2011-05-18 13:00   좋아요 0 | URL
네, 차좋아 님도 어디선가 보셨을 거에요. 이 책도 그 어딘가에 여기 저기 실었던 글들을 4년간 모은 모음집이니. ^-^
저는 알베르 까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에 쓴 서문, 아 그건 추천사라 해야 하나, 암튼 그 서문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 때 <섬>을 사길 잘했다고 스스로 막 기특해 했죠.

네꼬 2011-05-1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은 좋겠다. 흥.

치니 2011-05-18 17:51   좋아요 0 | URL
헤헤헤, 네꼬님이 와서 넘흐 좋아요.

루쉰P 2011-06-05 0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들어오니 치니님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셨어요. 원래 비평가들의 책을 무슨 헛소리냐며 읽지 않는 스타일인데...치니님의 리뷰 속의 신형철의 글은 그다지 난해한 것 같지가 않고 아름다워 보여, 은근히 읽어 보고 싶은 욕망이 나네요. 하아..근데 전 왜이리 한국 비평가들의 책은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

치니 2011-06-05 13:4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비평가의 글뿐만 아니라 어려운 글은, 내 이해력이 부족해선지 몰라도 잘 읽고 싶지 않게 되더라고요. 가끔은 진짜로 헛소리일 때도 있는 것 같고. ㅎㅎ
신형철의 이 산문집은 짧은 에세이를 모은 것이라 흔히 비평 하면 떠올리는 길고 난해한 글은 거의 없어요. 다만 시를 즐겨 읽지 않는 분에게는 재미가 덜 할지도 모르겠어요. 시인들에 대한 신형철의 지극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거든요. :)

루쉰P 2011-06-06 09:10   좋아요 0 | URL
아뿔싸!! 시를 거의 읽지는 않는데..전 휘트먼 '풀잎'과 윤동주 시인의 시 빼고는 읽은게 없어서...T.T
나중에 김수영님의 시라도 읽고 한 번 꼭 도전해 봐야겠어요.

난해한 글이 없는다는 것 그것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글쓰기입니다. ㅋ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에서 송승준 편집장님이 언급하셨듯, 현 출판계에서는 무리한 홍보 전략과 치열한 가격 경쟁이 초래하는 부담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땡스 투 하나 당 작게는 몇 십원에서부터 몇 백원 까지 차곡차곡 쌓이는 적립금에 무심할 수만은 없는 소시민으로써 우아한 소비자보다는 홍보에 즉각 반응하는 소비자로 사는 나를 부정할 수는 없는 법. 반값도서라고 하면 우선 들여다보고, 주문 전에 땡스 투를 눌러서 적립금 올리기 위해 안 읽었던 40자 평, 페이퍼, 리뷰 등을 서둘러 읽기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책값을 절약할까 고심한다. 그러나 퍼뜩 정신을 차리고나면 나름대로 약게 계산해서 장바구니를 채웠다고 해도 바로 그 '약은 계산' 때문에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책을 충동적으로 구입했음을 깨닫기도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알라딘과 나 중에 누가 더 꼼수가 나을까 평가라도 한다면, 반드시 알라딘이 이길 것이매 섣부른 도전으로 아껴봐야 거기서 거기라는 경험치만 쌓이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정신이 외출하여 주문을 다 하고보니 땡스 투도 안 눌렀고 이리 저리 맞춰서 가격에 상응하는 할인도 받지 못했던 것. 부랴부랴 땡투 할 평들을 살폈으나 오 - 신기하게도 정말 하나도 누를 것이 없.다.
그런데 이게 더 순도가 높고 책에 대해 순정적이라는 마음이 들며 뿌듯한 건 또 웬일? 물론 자체적으로 온라인 서점이니까 할인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내 손으로 뭔가 책값을 깎아내리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리저리 할인 받는다고 구색 맞추는 게 괜히 깨끗한 천에 누더기 입히는 기분도 들고(그래, 너 배가 불렀구나 욕할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당장은 로또 맞지는 않아도 사두기는 한 사람처럼 착각의 호사를 누리고 싶다), 누가 뭐라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척척 주문하고 다른 건 신경쓰지 않았다며 혼자 괜스레 으쓱, 소신있는 독자가 된 기분이다. 풋.
아무튼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땡스 투 없었던 이유:
신간이라 리뷰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타 블로그에서 이웃으로 지내는 D님이 공동저자로 낸 이 책의 출간 배경을 알고있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마음을 제 돈 주고 사는 행위로나마 스스로에게 표현하고 싶었다.
부디 많이 많이 팔려서 수많은 분들이 용기를 내고 내상을 극복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땡스 투 없었던 이유:
이 책 역시 리뷰가 없었다. 신간이어서는 아니고 어쩐 일인지 덜 소개된 모양인데, 나는 이 책을 트위터에서 팔로잉하는 W님을 통해 알게 되었고 '초방'이라는 출판사 이름을 보니 몹시 반가워서 무조건 읽기로 마음 먹었다.
십 몇년 전 '초방'이 연대 근처에 작은 어린이 책방으로 있을 때, 그 대표와 나같은 초짜 몇 몇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어린이책을 열심히 읽고 합평회를 하던 기억, 그 때 먹은 빵이 너무나 맛났던 기억까지 - 추억이 아롱다롱. :)







땡스 투 없었던 이유:
이 책 역시 알라딘을 통해 알게 되기보다는 네*버에서 출판사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기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지금 진정한 의미에서의 땡스 투를 해야만 한다는 억지를 좀 쓰는 중이다. ㅎ 나의 구매에 정말로 영향을 끼친 이에게만 한다는 원칙 따위를 내세우면서), 신간이라 아직 리뷰가 달리지 않았다.
제목이 너무 비장하기는 하지만 최근 번역 일에 관심이 높은 나로서는 일독에의 유혹을 피하기 어렵다. 권남희 씨 책은 나도 여럿 읽어본 기억이 있지만 정확히 어땠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번역가란 오역이 심했을 경우에만 다시는 그의 번역서를 읽지 않기 위해 이름과 작품이 기억되는 운명을 지녔는지도. ㅠ




땡스 투 없었던 이유:
이 책은 아주 최근에 나온 신간이 아니라서 리뷰나 페이퍼가 있기는 했지만...역시 엄정한 나의 잣대에 ^-^;; 맞는 땡스 투 대상은 없었다.
심리학 서적이나 자기계발서를 유독 꺼리기는 하지만, 이런 책에 거는 기대는 솔직히 전체가 아니라 일부에 대한 기대이기에 - 즉, 단 몇 줄만이라도 나의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면 족하다는 뜻 - 읽어보기로 했다. 아들 좀 잘 키워보겠다고 이제 와서 욕심 내는 건 아니고, 나와는 성별이 다른 아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가끔 아주 많이 궁금해지기 때문.







책들은 별일이 없으면 내일 도착한다. 우적우적 먹어치울테다! 생뚱맞게 돋은 독서욕에 힘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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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11-04-2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래서 '순정한' 주문이군요. 하하.
저는 대체로 귀찮아서 순정한 주문을 하게 되는데... 음...
역시 엄마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역시 참 책을 많이 (그것도 실하게) 읽으신다 하는 생각 하나...^^

치니 2011-04-20 11:20   좋아요 0 | URL
이힛, 오버 좀 했어요. 무슨 순정 씩이나.
카이레 님은 쿨 한 주문을 하시는군요! 귀찮아서 땡투 따위 신경 안 쓰는 ~ 오.
엄마 노릇도 배워 가며 하는 게 저 같은 철부지에게는 필요하더라고요. ^-^;;

굿바이 2011-04-2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정한 주문, 너무 근사한데요.
그나저나 저는 땡스투가 뭔지 몰라서....그러니까 저는 반편이 주문!이라고 외칩니다! ;0

아참, 치니님은 번역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으시는 것 같아요. 음....뭐든 대박나세요!!!:)

치니 2011-04-20 11:22   좋아요 0 | URL
하하, 나 참, 제 서재에 와주시는 분들은 왤케 쿨하신 거에욥. 굿바이 님은 아예 뭔지도 모르다니. ㅋㅋ 이렇게 살짝 허술한 게 굿바이 님 매력인 걸요.

번역, 으흑 - 그 애증의 단어.

Arch 2011-04-20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가 맑아지는(?) 페이퍼에요. 못미더운 땡투도 우선 누르고 봤던 제 경우엔 더더욱! 앞의 두 책은 찜했어요.

치니 2011-04-20 11:23   좋아요 0 | URL
제가 그래서 순정 씩이나 하다며 웃기는 주장을 하잖아요. ^-^;; 저 역시 못미더운 땡투도 누르고 본 경험이 있는지라.
보통의 경험 찜해주셨다니 고마워요. 왠지 이 책은 제가 막 사라고 홍보하고 다니고 싶어서. ^-^;;

당고 2011-04-20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것이 말로만 듣던 입소문 마케팅! ㅎㅎㅎ
애정해요, 치니 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치니 2011-04-20 11:41   좋아요 0 | URL
히히, 나 잘했쎄요?
실은 더 많이 돕고 싶은데 어째야 할지 몰라서 일단 나부터 책을 구매하자, 그런 중이에요. 하지만 이 글 읽고 누군가 한 권이라도 사고 누군가 큰 도움을 받는다면, 정말 좋겠다 바라기는 해요.
게다가 익히 알고 있는 누구누구의 글 솜씨 때문에 심지어 재미있으리라는 기대도 하고 있답니다. 아훗.

2011-04-20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20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친구와 마주한 자리에서, 어릴 적 한 때는 작가가 되고자 했던 친구의 꿈을 되살리며 만일 정말 작가가 되었더라면 그 숨 막히는 '마감 증후군'을 어떻게 견뎠을까 - 자조 섞인 웃음으로 작가로 살지 않는 생에 감사하는 동시에 잠시나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어깨를 잔뜩 움추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작가라고 뭉뚱그렸지만, 우리가 호명한 작가는 자기계발서나 어떤 학문의 사상을 간추리는 책을 쓰는 사람을 뜻한 것이 아니라 시와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창조하는 사람'을 무의식 중에 떠올리게 된 글 짓는 이라는 의미가 더 크겠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어떤 시가 어떤 소설이 이러니 저러니 말로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참 쉽다.
문자 그대로 피 눈물을 짜내어 문단에 등단할 만한 작품을 인정 받고나서도 이후에 의뢰 받아 쓰는 작품이 최초 작품에서 비춘 소위 '가능성'을 뒷받침하지 못할까봐 두려운 마음을 눌러가면서 대중을 떠나 자기 자신에게 납득이 갈 만큼의 완성도를 내야 하고, 그 누구도 쓰지 않은 무엇을 쓰고 싶다는 열망과 좌절 사이에서 오가는 오만가지 심정을 평생 다스리며 오로지 계속 쓰는 것 외에 대안이 없는 삶을 사는 그들, 작가들에 비하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로로 (짐작에 불과한) 그 괴로움과 환희를 살짝 엿보았을 뿐이다.
엿본 자의 죄가 있다면 그 대가로, 이런 책을 읽을 때의 내 마음은 한없이 두근거리고 때로는 아프다.
















읽기 전에 두근거렸던 마음은, 이제 알 수 없는 외로움으로 물들어 간다.
내용을 차치하고, 그저 이 문장 하나 하나, 수없이 쳐내고 다듬고 넣다 뺐다를 반복한 어휘들을 예전처럼 휙휙 - 쉽사리 지나치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려주는가', 그도 아니면 '문체가 아름다운가 아닌가' 따위를 생각할 수 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다듬기를 반복하여 갖추게 된 가독성이 담보로 깔리지 않았다면 내 어두운 눈은 결국 여전히 문장을 천천히 음미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비'라는 주제를 두고, 마감을 온 세포로 느끼면서, 그 와중에도 일상을 영위하면서, 그 누구도 아닌 '쓰고자 하는' 자신이 만들어 낸 형벌 아닌 형벌 앞에서 와들와들 떨어가며,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순간들이 오기 전까지의 '고독' - 그 무시무시한 시간을 상상하면서 읽자니 많이 시리더라. 그래서 감히 나까지 덩달아 외로워져 버린 것이다.

7개나 되는 작품이 모였다면, 그 중 한 둘은 어떻게든 상대적인 비교 끝에 지렛대 아래로 끌어내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없지는 않았다. 아주 야멸차게 말하자면, 출판사에서 유명 작가들의 각개 전투를 기다리기 보다는 짧은 단편으로 모음집을 만들어 기획하면 더 빠른 시간 내에 결과물을 만들고 더 많은 독자층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지도 모르기에, 한 둘이 그렇게 끌어내려지면 책의 가치는 은연 중에 훼손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싶어서.
노파심이었다. 종합선물세트라고 해도, 내용물이 알차면 원래 종합선물세트에 심드렁하던 사람도 다시 보기 마련. 잘됐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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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3-1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뭐좀 물어볼께여 이 소설집에 "김숨 | 김미월 | 한유주 | 윤이형 | 황정은 | 장은진 | 김이설" 이렇게 작가가 있는데 김숨어떤가여? 편혜영이랑 동급으로 취급하던데여~ 편혜영의 신간 저녁의 구애를 읽고 나서 "아 좋다" 그러고 그 기분살려서 김숨으로 넘어가고 싶긴한데 아직 전혀 읽어보지를 않아서여:D 윤이형, 장유주도 알고 싶은데 ㅋㅋ

저의 게시판의 댓글 남기신거 정말 감사합니다,,
친히 왕래까지 하셔서 몸둘바를 모르겠네여~
제가 누누히 (건방지게 표현하자면) 말하고 싶은게 영화많이 보는것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대화가 저한테 더 소중한거 같아여(제가 선택한 영화를 안보면 어때요ㅎㅎ) 그대신 저번에 오버스럽게 영화광친구들이랑 술먹다가 이세상에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본 사람과 안본 사람으로 나눌수 있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했는데 동의하더라구여ㅋㅋㅋㅋㅋㅋ
저 그영화되게 좋아해요~

아파트공화국의 감상은 치니님이 남기신 40평 그대로예여 저의 느낌도, 단지 프랑스인도 되게 치밀하다라는 정도여~


치니 2011-03-16 18:49   좋아요 0 | URL
저도 김숨 씨 작품은 다른 건 못 읽어보고 이 책에 소개된 <대기자들>이 처음이에요. 화려하거나 기승전결이 뚜렷한 작품은 아니지만 묘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고요, 편혜영 씨 작품을 안 읽어봐서 ^-^;; 상대적으로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영화를 보고 나누는 대화는 요샛말로 깨알 같은 재미가 있죠. :) 저 같이 잘 까먹는 사람은 한참 지난 영화에 대한 대화는 좀 어려움이 있지만서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봤어요. 저더러 누가 마츠코 같다고 하면서 권한 영화라 조금쯤 부담스러운 시각으로 봤는데, 영화 자체는 저도 마음에 들었어요. 다만 제가 마츠코 같다고 한 그 분에게는 억울한 심경이 오래 갔죠. -_-;

네오 2011-03-17 10:13   좋아요 0 | URL
어~ 저번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셨다고 해서 언급한건데ㅠㅠ
아니 그런데 치니님이 어떤면이 마츠코를 닮아있길래 궁금궁금^^;

치니 2011-03-17 11:3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도 그걸 모르겠더라고요. 물론 그 여배우의 생김새를 말하는 건 아니겠고, 그 영화 속 마츠코처럼 평생 허영에 눈이 가려 멍청한 남자라도 덥석, 뭐 이런 걸 두고 닮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좀 꺼림직했어요.

네오 2011-03-18 23:53   좋아요 0 | URL
이 "비"의 인기스러움은 뭐져? 교보에서 그 실체를 확인하니 반갑더라구요~
조금 읽어보고 사지는 않았어여 대신에 <저녁의 구애>는 다 읽어답니다~
자랑질 ^^v

"마츠코처럼 평생 허영에 눈이 가려 멍청한 남자라도 덥석" 이라고 쓴걸보고~ 치니님은 이렇게 해석하셨나봐여? 전 마츠코가 진심으로 그 남자들을(남자들이 그녀가 싫다고 헤어지기 전까지는) 다 사랑한것으로 봤는데~ 아~ 멍청한 남자들은 맞죠~ 그녀가 허영에 멀었다,,,,생각해볼 대목이네여~


치니 2011-03-19 13:04   좋아요 0 | URL
<저녁의 구애>는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네오 님이 이렇게 자랑하시니. :)

음, 마츠코는, 그넘의 '너랑 닮았어'라는 말을 머릿 속에 가득 담은 채로 봤으니 저에게만 유독 허영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랑이, 때로는, 그 순간엔 사랑이지만 지나고나면 제 마음을 소비하기 위한 허영이기도 하더라고요. ^-^;;

따라쟁이 2011-03-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고 있어요. 음.. 치니님 처럼 멋진 글을 쓸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리뷰를 써야할것 같은 기분이 드는 책이에요. 치니님 말씀처럼. 그녀들의 애씀이 보여서. 뭔가 답글을 써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건방진> 기분이 드네요^^

치니 2011-03-16 18:50   좋아요 0 | URL
아, 읽고 계시군요. 알라딘의 많은 분들이 읽고 계신 듯해서 괜시리 제 마음이 든든(?)합니다. :)
건방지다뇨 ~ 이렇게 댓글 남겨주시면 감사할 따름인 걸요. :)

차좋아 2011-03-16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볼래요^^' 저도 그런 걱정을 했는데 치니님이 걱정 마, 했으니 읽을래요 하하
(노파심말이에요^^&)

치니 2011-03-16 18:52   좋아요 0 | URL
차좋아 님 지금 책 리스트도 많고 커피 로스팅도 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하고 책 모임도 나가야 하고 - 헉헉,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하는 거 아닌가, 괜한 걱정이 들어요. ㅋㅋ 하지만 이 책은 읽어보시면 어쩌면 많은 일들을 하는 중에 쉼표 같은 책이 될 지도 몰라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

stillyours 2011-03-1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아침 하나씩 읽고 있는데,
그 사이에 비 오는 날이 하루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

치니 2011-03-18 18:54   좋아요 0 | URL
아, 매일 아침 하나씩 - 이 방법이라면 각 작품을 곱씹을 시간이 더 확보된다는 점에서 좋은 듯. 저도 그럴 걸 그랬어요! :)
 

세계일주라 - 가만, 돌이켜보니 내 생애 단 한번도 세계일주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 왜 그랬을까, 여행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좋아하는 편인데. 누구나 한번쯤은 꿈 꿔보는 세계일주에 왜 관심 무였을까.  

 

이 책을 읽어보니, 그 답이 저절로 나온다. 내게는 도무지 '목표의식'이란 게 평생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행을 간간이 했지만 어느 여행도 뚜렷한 목표를 지닌 적 없었고, 소위 목표라는 게 생길까봐 오히려 전전긍긍했던 모양. 

그런데 이 작가, 세스 스티븐슨의 말을 들어보니 오호라, 여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조금쯤은 깊게 고민할 만하기는 하다. 아무 생각 없이 비행기를 타고 내가 가고싶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대신, 그러면서 비행기 이코노미 석을 언제 돈 벌어 탈출하려나 툴툴대는 대신, 발상의 전환이자 새로운 도전에의 의식을 여행의 목표로 삼는 것. 이런 고민이 전혀 없었던 내가, 조금쯤 창피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계속 읽다보니 게을러 터진 나는, 죽었다 깨나도 이런 여행은 못하지 싶다. 단지 비행기 타지 않고 지상의 교통수단으로 세계일주를 해냈다는 만족감을 위해, 뛰고 또 뛰고 많은 시간 지상교통이 제대로 그 임무를 완수해줄지 걱정을 거듭하면서 여행한다는 게, 솔직히 공감되지 않았다.  

내가 꿈 꾸는 여행은 어찌 보면 그 반대다. 세계일주를 목표로 처음 집을 나섰다고 해도, 지상의 교통수단만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해도, 여행하다 마음이 바뀌면 바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러니까 세계일주 하겠다고 실컷 경로를 계획했지만 가다가 이름 모를 어느 지역에 홀딱 반하면 남은 시간동안 그냥 거기 눌러 앉아 살아보는 것, 지상의 교통수단만 이용하려고 했는데 막상 컨테이너를 실어나르는 화물선을 타고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바로 포기하는 것, 이것이 '일상'이 아니라 '여행'에서만 가능한 '내 멋대로 해보기'지 않겠느냐, 여행에서 그런 내 멋대로 해보기가 없다면 굳이 왜 여행을 하면서 '사서 고생'을 하는가, 뭐 이런 반발심이 들었다. 

그러나 책은 나와 여행에 대한 가치가 다른 저자의 기록이긴 해도 '여행을 꿈 꾸는 설레임' 만큼은 충분히 자극적으로 전달한 모양이다. 지난 겨울 무리해서 영국에 간 이후로 당분간 여행 따위는 생각지도 말아야지, 주머니 짤랑이는 돈이라도 잘 지키자, 이랬는데 - 후아, 지금은 갑자기 마음이 두근거리고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최소한 어디론가 떠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다. 아흑. 로또를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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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2-27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로또 사셨나요? 여행하다 마음이 바뀌면 바로 바꾸는 것,,완전 여행목적의식의 유연성 혹은 즉흑성^^, 윤미나씨의 번역물을 좋아하시나봐여? 도대체 150일면 5달인데 그럼 직장인들은 도저히 실현불가능한 여행계획인데여~

치니 2011-02-28 11:39   좋아요 0 | URL
아아뇨, 맨날 말만 하고 실제로 직접 사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동네에 파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ㅎㅎ 로또는, 그냥 마음이 허할 때 상상하기 좋은 도구.
네, 윤미나 번역가를 존경하죠, 여러가지 면에서. :)
책에서는,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살던 집은 임대를 끊어버리고 가구와 세간살이는 짐 창고에 맡기고, 그러고 5달 간 여행을 떠나요. 그럴 용기가 부럽기도 하지만, 으음, 다녀와서 대책이 설 만한 직업 - 프리랜서 기자, 변호사 - 을 가진 분들이라는 게 좀... ^-^;;

네오 2011-03-03 09:43   좋아요 0 | URL
이책 시사인에서의 이주의 추천책이더군 :)

치니 2011-03-03 13:55   좋아요 0 | URL
오, 그래요? 흠, 홍보가 좀 되는 편인가 보네요. :)

2011-02-28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8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