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에 나온 Perks의 뜻을 모르겠어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명사

(은행) 비금전적 혜택

보충설명 금전형식으로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대출에 따라 고객이 지불하는 명목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용되는 형식을 지칭한다.


오, 이 제목이 내용에 훨씬 충족되는구나. :) 

(실상 주인공 찰리는 트라우마와 좀 튀지 못하는 외모만 빼면, 엄친아다! 결국 '비금전적 혜택'도 충분히 보고 말이지. 훗)

하지만 저렇듯 금융권에서 주로 쓰인다는 혜택을 구구절절 그대로 갖다 붙이는 직역 대신 간단하게 '월플라워'라고 해버린 한국어 판 제목도 썩 괜찮은 선택이지 싶다.

어차피 이 영화는 세상 모든 월플라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


얼마 전 대 유행을 했다던 티비 드라마 '1997 응답하라' 같은 류를 안 보는 편이다. 그렇고 그런 비슷한 류의 추억 팔기 자체가 별로이기도 하고 청춘이라면 응당, 뭐 이런 메시지와 클리셰가 잔뜩이라서 - 그런데 나는 그런 청춘인 적이 거의 없었기때문에 공감을 못해서 - 별로이기도 하며, 그 당시 유행하던 음악을 별로 듣지 않아 잘 모르는 데다 워낙에 기억력이 안 좋은 터라 거기 나오는 모든 문화적 배경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월플라워를 보면서,

믹스 테이프에 대한 그넘의 '추억'이 떠오르고야 말았다.

나도 별 수 없이 걸려든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심야라디오를 들어가며 녹음 버튼을 눌러 손수 믹스테이프를 만든 것 같은데, 역시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대신에, 나보다 훨씬 열성적으로 테이프를 만들었던 두 친구가 기억난다.


*

M은 아마도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와서 거의 확신하건대 M에게는 동성애 적인 감성이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 M을 따르는 동기 여자아이들이 많았던 것도 그래서였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별로 공통분모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국어선생님의 지목으로 같은 장소에서 지정된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다. 아마도 문예반 비슷한 특활 시간이었을 거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M보다 훨씬 글을 못 쓰는데, M은 그때 내 글이 좋다고 하면서 내게 다가왔다. 우리는 문학이나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졌는데, M에게는 내가 모르는 성숙한 세계의 아우라가 있었어서 옆에 있으면 왠지 나는 턱없이 순진하고 맹한 느낌이 들곤 했다. 다른 애들이 좋아하는 M인데, 성숙한 M인데, 유독 나를 좋아해주는 게 은근히 기뻤겠지만, '왜' 나를 좋아하는진 졸업할 때까지, 아니 우리가 한참 나이가 들 때까지 알 수도 없었고 알려 들지도 않았다. 그렇게 단순했다. 하! '단순함', 그것이 M에게 나를 돋보이게 한 것들 중 하나라니, 아이러니지 뭔가.

말했듯이, M의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기에 그런 아우라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물론 가난하다고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언니가 있었던 M은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도 집안 일이나 최소한의 벌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게, 어느날인가, 비밀스럽게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M의 아르바이트는, 사실 정정당당하지 않은 아르바이트였다.

동네 레코드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중학생인 M에게 주인이 시킨 일이 일종의 꼼수를 동반하는 단순 노동이었던 것.

일은 간단해보였지만 손 재주는 약간 필요했다. 

샵에 들어오는 정품 테이프에 붙어 있는 비닐을 아주 섬세하게 떼어내고 복사 테이프를 원하는 수량만큼 만든 뒤에 다시 아주 섬세하게 붙이는 작업, 이것이 M이 거기서 매일 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주인은 테이프 하나 값으로 최소 몇 십개 테이프를 복사하여, 정품보다 약간 싼 값으로 테이프를 사려는 소비자에게 신나게 팔았겠고, 이 일은 M이 어디에 고발이라도 하지 않는 한, 설령 고발을 하더라도 소비자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일도 아니니, 걸릴 일도 없는 조금쯤 귀여운 자구책으로 봐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 놀랐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소녀가, 믹스테이프를 제 손으로 집에서 만들어 듣고 선물할 만한 나이에, 그런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서 음악을 듣고 있다니. 상상을 해봤지만, 그 심정이 어떨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날엔가, 언제나 우리집에만 놀러 오던 M이 처음으로 자기 집에 데리고 갔을 때 그집에 딱 하나 있던 좁고 네모난 방 한구석에 떨어지는 햇살을 받으며 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시간 이상 나란히 누워 있던 기억이, 몇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명할 따름.


영화를 보니 M이 보고 싶어졌다. 벌써 수년 째 연락을 하지 못했다. 아이 둘을 일찍 낳아 기르느라 항상 바쁘던 M과 나의 생활 패턴이 다르다 보니, 별다른 애를 쓰지 않고 무심코 지내다가 바뀐 핸드폰 번호조차 알려주지 못한 채 잊고 살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M을 보고 싶지 않다. 그 선명한 오후를 잃고 싶지 않다. 

이런 마음으로 보면,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는 영화가 <월플라워>라는 생각이 든다.


*


또 다른 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아이다.

전학생이었고, 대학생 형이 있어선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유행가를 오자마자 멋지게 불러 제껴서 아이들의 인기를 모았다.

여차저차하여 이 친구는 대학 신입생 때까지 드문드문 보았다.

그에게 나는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첫사랑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생각한 이유는 역시, 믹스테이프 아니 구운 씨디 때문이다.

자주 믹스테이프를 주긴 했지만, 내가 음악을 몹시 좋아한다는 건 그애도 알지만, 서른이 훌쩍 넘어 우연히 만나기로 했을 때에도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

회사 일이 꼬여서 만나기로 한 시각보다 두 시간이나 늦었고 그애는 흔한 핸드폰조차 없는데 길에서 기다리고 있어, 무척 미안해했던 그날,

헤어지기 직전에야 건네주던 씨디 열 장.

내가 좋아했던, 좋아할 만한, 자신이 좋아하니까 공유하고 싶은 음악들이 빼곡이 구워져 있었다.

고맙다,는 말이 너무 쉽게 느껴져서 고맙다고도 못했다.

이 친구 역시 지금은 연락하지 않지만, 한편 보고 싶고 한편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다.


영화가 시작되고 첫 음악이 나오자마자 OST를 사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내게는, 이 모든 추억 돋는 에피소드를 다 배제하더라도, 충분히 매혹적인 영화.

주문을 넣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예나 지금이나 난 참 단순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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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5-2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네 읽어보세요 치니님. 책에서도 음악 얘기가 나와서 무척 좋아요. 저는 어떤 음악은 찾아듣기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이 영화는 책도 영화도 모두 좋은 케이스인것 같아요. 아 좋아 ㅠㅠ 치니님은 그런데 저만큼 좋아하시진 않을것 같아요. 횡설수설하지만, 여튼 좋아요. 하핫

저도 사춘기시절 믹스테이프를 만들어 곧잘 선물하곤 했어요. 사실 이십대 중반까지도 그랬는데 하핫, 전 이걸 싫어할 사람이 없을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연히. 좋은 노래고(내 기준이었는데!!), 성의가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믹스시디를 받고 아, 이게 싫을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받은 믹스 시디의 음악들이 하나같이 제 취향이 아니어서 말이죠. 아마도 그 때부터 믹스선물을 뚝, 끊은것 같아요.

암튼 치니님이 이 영화를 보셨다니, 그리고 서재브리핑의 제목만 보고는 이 영화에 대한 얘기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흣), 반가워요! 후훗.

치니 2013-05-24 11:01   좋아요 0 | URL
주문을 넣고 다시 리뷰나 페이퍼를 훑어보는데, 다락방 님 글만 연이어 두 개! ㅋㅋ 뒤늦게 땡스투 눌렀는데 그렇게 선후가 바뀌어도 적용되는가 몰겠어요.

책을 읽다가 정말 좋겠다 싶으면 음악을 찾아듣는 거, 저 그거 되게 좋아해요! 히히, 이것만으로도 책을 읽어 볼 이유는 충분! 그리고 왠지, 다락방 님이 저는 다락방 님 만큼은 좋아하지 않을 거 같다고 한 이유도 알 거 같아요. ㅎㅎ

저도요, 저도. 제가 곧잘 선물할 때는 캬 - 이런 지극정성 선물을 누가 싫어하겠어, 그랬는데 별로 안 좋아하는 음악 섞은 걸 받고 보니, 아닐 수도 있겠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요즘은 음원을 메일로 보내주는 방법으로 공유하곤 하지만, 아무래도 실물이 만져진다는 의미에서 (제목이랑 가수 이름 이쁘게 적고, 프린트 해서 커버지도 만들고 그랬죠 ㅎㅎ) 옛날 방식이 더 정성 가득해보이는 건 사실인 듯.

이 영화를 과감하게 선택하여 보게 한 분 중에 1위는 다락방 님, 2위는 김봉석 평론가. 두 분이 좋다는 영화는 실패한 적이 없는 거 같아요, 믿고보는 다락방의 영화 추천. 흐흐.

치니 2013-05-24 11:06   좋아요 0 | URL
아, 글고 에즈라 밀러에 대한 얘기 대 동감이요! 압도적인 배우에요. <케빈에 대하여>에서도 그랬고, 앞으로가 기대 됨!

Forgettable. 2013-05-24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랑살랑한 글이네요. 좋다..!

치니 2013-05-24 11:04   좋아요 0 | URL
살랑살랑...해요? 휴, 다행이네요. 저는 쓰고나서, 영화는 안 그랬는데 제가 너무 딱딱하게 쓴 거 같아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중.
 

소설가가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지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결론을 준비하기보다는 그저 정성껏 계속해서 가설을 쌓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설들을, 마치 잠든 고양이를 안아들 때처럼, 살그머니 들어올려(나는 '가설'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늘 곤히 자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따스하고 보드랍고 포슬포슬한 의식이 없는 고양이)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 가운데에 하나씩 하나씩 쌓아올린다.

가설의 행방을 결정하는 주체는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다. 이야기는 바람과 같다. 흔들리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눈에 보인다.

당신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면, 당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끝까지 파고들면 당신 자신에 관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나의 '굴튀김 이론'입니다. 다음에 자기 자신에 관해 쓰라고 하면, 시험 삼아 굴튀김에 관해 써보십시오. 물론 굴튀김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모두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야아, 곤란하군요" "좀 난처한 걸요" "좀처럼 결론이 나질 않네요" 하고 머리를 긁적이거나 수염을 만지작거리거나 팔짱을 끼는 것. 어디선가 빌려온 것 같은 결론을 들이대며 호언장담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사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거기에는 유머라는 게 있다. 그것 역시 아주 중요하다. 웃어넘기는 것. 웃어선 안 되는 일이라도(아니, 웃으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무심코 웃어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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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픈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속이 메슥거린다. 뭔가를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압도적이나 혼자 근무하는 날이라 함부로 자리를 비우고 먹을 걸 사러 나갈 엄두가 안 난다. 편의점이 바로 옆이라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게시리, 계속적인 갈등의 산파 역할을 한다. 김밥 한 줄만 사오는 건 괜찮지 않을까, 아니 갔는데 오늘치 김밥이 다 팔렸으면 어째, 한 줄 짜리 김밥 없으면 삼각김밥을 봐야 해, 삼각김밥은 어떤 종류든 다 별론데, 김밥이 별로라면 그 외 먹을 걸 골라야 하는데 그러는 동안 흐르는 시간은 어쩌고, 자리를 비워둔 채 나왔는데 손님이라도 들이닥쳐 다들 어디 갔냐며 두리번대면 어쩌나 등등, 이어지는 생각에 결국 아무 것도 못 먹은 상태로 괴롭기만 하다. 으이그, 저 놈의 편의점!


알라딘 페이퍼를 오랜만에 끄적이는 이유는 두 가지, 아니 세 가지인가.

하나는 위에 적은대로 속이 메슥거려서 도무지 하던 일에 집중을 못하겠다는 점,

둘은 그래서 뭐라도 끄적이면 진정이 되며 시간도 잘 간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 (그리고, 오늘 누가 그랬다, 심리치료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하루 네 시간씩인가 글을 쓰게 하면 빨리 호전된다고, 나는 그거 참 납득이 되는 치료다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거 참 의사라는 자가 치료하기엔 너무 쉬운 방법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잘 알기에 써야 하는데, 마침 이런 잡소리를 끄적이던 이글루스 블로그는 오늘 하루종일 점검이라고 쓰지를 못하게 하여.....아이고 길다 길어. 그런데 한 마디만 더, 이글루스 너무 하지 않나, 정말? SK 대자본 산하 블로그라 그런 거냐, 아무 것도 없는 주제에, 요새 사람들이 다 떠나는 폐가 기분이 드는 주제에, 무슨 점검을 하루종일 씩이나 하지? 좀 괜히 괘씸하다.


책을 한동안 제대로 읽지를 못하고 있다.

지금 근무처에서는 책 정도, 읽을 만도 한 조건이 되는데 왜 못 읽지?

(원래도 집에서는 그리 자주 읽지 않았으니까)

아직 불안한가 보다. 낯선 땅, 내가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많이 가보지도 않은 땅에서 사는 게, 발이 약간 허공에 붕 뜬 기분인가 보다.

아무 거라도 활자만 있다면 붙잡고 쉬이 집중하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고 싶구나.

어른이 된다는 건 집중력이 저하된다는 뜻. 못내 슬프다. 이 집중력때문에,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 생각이 나서. 춥고 추운 봄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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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1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째요. 페이퍼와는 다른 분위기의 댓글을 달게 되는게, 전 알라딘에서 치니님 뵈니 반가워요!!

치니 2013-04-11 13:0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여기서 간만에 다락방 님이랑 온라인 대화 나누니 좋네요.
알라딘, 벌써 십년 째에요. 정이 들 만큼 들었죠. 떠날 수가 없엉 ~

프레이야 2013-04-1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곳도 춥군요. 남쪽이라 좀 나으려나 했어요. 봄이 쉬 오긴 싫은지 날씨가 영 심통을 부리네요. 요샌 그저 건강이 최고란 생각이ᆢㅠ 글쓰기가 치유효과가 있긴 있나봐요^^ 그러길 바래요.

치니 2013-04-11 13:13   좋아요 0 | URL
아, 물론 서울보다야 나을 거라 생각은 합니다만,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여기서도 조금만 추워지면 툴툴대요. ^-^;;
맞아요, 건강이 최고. 나이 들면서 남에게 피해 안 주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ㅠ
글쓰기는 배설의 효과로 ^-^; 치유가 되는 듯요. 프레이야 님도 건강하시길!

굿바이 2013-04-1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일 시작하셨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왕 재미있으면 좋겠어요~
요즘 서울의 날씨는 딱 제 마음입니다. 그래서 신기해요.
뭔가 제가 하늘의 기운을 움직이는 것 같아서요 ^^
오늘은 뭐라도 좀 드세요!

치니 2013-04-11 13:15   좋아요 0 | URL
아, 통역안내원 일을 해요. ㅎ 재미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뭐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그나마 제가 가진 약간의 재능을 써먹는다는 데 의의를 두려면 두....실은 그냥 생계에 도움이 되어서 하는 거죠. ^-^;;
굿바이 님 마음을 돌려주세요, 더 따스한 쪽으로 ~ 헤헤, 감사.

Arch 2013-04-1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오랜만이에요. 그곳에서 잘 지내는지 궁금했었는데.
글쓰기를 하루에 네시간 하면 치유는 모르겠고 글쓰기 때문에 뭔가 스트레스 받을 것 같고 그런데 ^^

오늘 잘 안 쓰던 메일 계정을 확인하다 이글루스에서 온 메일을 봤는데. 서재에 오니 치니님이 계시고. 나비효과인가, 싶기도 하고.
날씨가 춥지만 건강하셔야해요.

치니 2013-04-11 17:53   좋아요 0 | URL
ㅎㅎ 제 기억력이 워낙 불확실한 터라 네 시간이 맞나는 모르겠어요.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쓰기 말고 일기 같은 거라면, 좀 털어내고 생각하고 하는 시간이 되어주긴 할 듯.

이글루스, 여전히 뭐가 좀 티미하지 말입니다. 뭘 건드렸는지 점검 후엔 스맛폰에서 잘 안되더라고요. (왜 알라딘에서 이글루 욕을 하고 있는가 ㅋㅋ)
넵, 아치 님도 건강하세요 ~
 

잉여 짓은 둘째 가라면 서러운 치니 씨, 이런 카페(http://cafe.naver.com/jepumo)를 만들었습니다. 데헷.

아직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이곳에서 방문을 기다립니다, 같이 노라요 ~ :) (재미는 보장 못함, 정보의 객관성도 보장 못함, 바뜨, 정보에 대한 거짓말은 없다는 점을 보장함)


오늘의 맛보기 글 (이래봐야 지금껏 글이라곤 달랑 2개여요. ㅋㅋ)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과 <토일렛>을 보신 분들이라면,
(네, 저는 둘 다 봤습니다. 물론 그 유명한 <카모메식당>을 보고 난 후, 팬이 되어서 챙겨 봤습죠.)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아마도.

'나,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가능할까? 버틸 수 있을까? 문화 생활은 어떻게 하고?'

저도 제주도에 내려 오기 전에 저를 잘 아는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던 걱정 중 하나가,
'뭐 먹고 사니' 외에 '문화생활을 어떻게 하겠니' 였습니다.
광적인 건 아니지만 주된 취미가 고작 영화나 공연 보기 뿐인 저를 알기에 그런 것이죠.
호기롭게 대답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세상인 걸 뭐. 어떻게든 되겠지. 거기도 사람 사는 덴데, 설마 영화 하나 못 보겠어?'
오, 그런데 와서 보니까, 네에, 영화 하나 못 보기 십상입니다. 커헉.
인터넷 세상인 건 맞는데, 그 인터넷으로 다운로드 받고 싶은 영화가 별로 없다는 점과 소위 씨네큐브 정도의 역할을 해주는 영화관이 이곳엔 없고 앞으로도 생길 가능성이 ㅠ 거의 없다는 점, 사실 좀 많이 씁쓸하고 참기 어려운 점입니다.

그나마도 영화관이 모여 있는 곳은 제주 시내이고 보니, 남원읍 태흥리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저로서는 영화 하나 보자고 버스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제주에서는 정말 이러합니다. 서귀포 쪽에서 제주 쪽으로 넘어가려면 한라산과 그 계곡을 넘어야 하니까요) 간다는 것은 좀 사치라 여겨지는 것이죠.

그리하여 태흥댁 치니, 며칠 집에서만 딩굴거리다가,
'그래, 그나마 도서관은 가까우니 도서관에 가자! 거기선 영화 디비디도 대여할 수 있을 거야!' 라는 결심에 이르러 오늘, 처음으로 버스 타고 10여 분 소요되는 제남도서관으로 출발 ~! (결과적으로 디비디는 대여 불가라 - 관내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 책만 세 권 빌려왔습니다만, 끄응)

그런데 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곳 제주의 외곽은 (제주시, 서귀포시를 제외하면 다 외곽이라 봐야 합니다) 대중교통편으로 이동하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습니다. 뚜벅이의 낭만을 상상하시는 분들, 조심하세요. 오솔길은 거의가 나홀로산책이니 조금 무섭기 다반사고, 큰길은 차가 너무 싱싱 달려서 무섭고, 두루두루, 올레길 맘 먹고 걷는 분들이 아니라면 뚜벅이에게 좋은 길은 별로 없습니다.
대중교통은 크게 시내버스, 시외버스, 읍면순환버스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외곽에서는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 시외버스 역시 많지는 않아요. 제주도를 동그랗게 도는 일주도로 버스와 한라산을 넘나드는 남조로/5.16도로/평화로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고, 적어도 읍 단위의 장소가 아니라면 일주도로 버스 외에는 다른 아무 버스도 다니지 않으니까 가까운 거리도 갈아타다 보면 1시간은 훌쩍 넘기는 시스템. ㄷㄷ 그래서 이곳은 교통 체계 만큼은 저 큰 미쿡 땅과 아주 흡사한 곳이라고, 쿨럭, 그리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 택시를 타면 되지 않냐고 하실 분이 있겠으나, 뭐 잠깐 왔다 가는 관광객이 아닌 한 택시비로 길에서 쓰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 그나마도 서울처럼 암데서나 잡는 게 아니라 콜로 불러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역시 쉽지 않지요.)

일례로 저는 오늘 집에서 차로 간다면 10분 안에 충분히 가고도 남는 제남도서관에 가기 위해,
1.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도보로 6분
2.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기 10분 (시각표가 있으나 3-~5분 정도 차이 납니다. 보통 약 20분 간격으로 옵니다)
3. 버스로 제남도서관까지 이동하는 데 6분
4. 정류장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도보로 10분
총 36분이 소요되었습니다. 뭐, 이 정도는 그래도 할 만하죠? :) 단, 출퇴근처럼 매일 하는 게 아니라면요.
(버 스에 대한 자잘한 정보 하나 더 - 시외버스니까 목적지에 따라 요금 다릅니다. 가장 가까운 거리일 경우, 1000원. 어디서 내릴지 몰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요. 방송은 한국어와 영어로 아주 잘 되니 정류장 이름만 검색하고 가면 됩니다. 남원읍에서는 방송으로 올레 5코스 시작이라고, 한국어/영어/일어/중국어, 무려 네 가지 언어로 말해주더군요!)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습니다.
조금 번거롭구나, 아니, 아니다, 잘 생각해보자, 서울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서도 도보로 걷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밀도를 생각해보자, 버스 정류장에서 무개념 흡연자를 만나기도 하면서 인상 찌푸리다가 멀리서 버스가 오면 혹시라도 확 가버릴까 봐 마구 뛰던 적도 많았지, 타고 나서도 출퇴근 시간에는 만원버스에 시달렸었어, 지하철이 낫다고? 아니야, 그 계단의 압박을 생각해보라구, 이렇게 출근하면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야말로 물에 젖은 솜같은 기분이 되어서 일이고 뭐고 다 귀찮았던 적이 한두 번이었냐. 호오, 이거 봐라, 그럼 여긴 괜찮잖아!
마음이 갑자기 살짝 즐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저 위에 쓴 영화들의 요런 장면들도 떠올렸고요.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일본이 배경인 <안경>의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리는 모습입니다. 어쩜 이리도 우리동네 길이랑 비슷할까요! ㅋㅋ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미국이 배경인 <토일렛>에서 할머니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이곳의 버스 정류장엔 지붕이 있는데, 여긴 없네요. 비 올 때는 이쪽이 유리, 선진형 제주 교통 시스템 ~ ㅎㅎ 이라고 우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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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11-09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예쁜 안경을 찾는데 거의 30년을 허비했는데 앞으로도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안경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더라구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늘 엄청난 기준으로 그것을 고르더라구요. 그러니 예쁜 안경이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아요. 뭔 말인지...^^

잘 지내시죠? 제주도 잘 있죠? 제 목소리를 들으신다면 제가 얼마나 떨면서 여쭙는지 아실 텐데...

치니 2012-11-10 08:49   좋아요 0 | URL
그거슨! 굿바이 님의 눈이 아름답기 때문일 겁니다. 보니까, 눈이 예쁜 사람은 무조건 안경이 안 어울리거나 벗은 게 훨씬 낫거나, 그렇더라고요. 하지만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엄청난 기준으로 고르는 거, 그건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어요. 뭔 말인지...ㅋㅋ (좋아하면야, 고르고 자시고 할 게 무에 있겄습니까, 뭐, 그런 말)

목소리가 와랑와랑 귓가에 와 닿아요. 들어봤으니까. :) 잘 지냅니다. 굿바이 님도 잘 지내셔요 ~

2012-11-09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0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11-09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시민 치니님 반가운 소식이에요. 카페 차근차근 구경갈게요. 안경, 토일렛 다 봤는데 저 장면은 기억이 가물하고, 그치만 뭔가 느리고 여유있는 분위기들 확실해요. 지붕있는 버스정류장, 제주가 우월하네요.ㅎㅎ 부럽사옵니다.

치니 2012-11-10 08:55   좋아요 0 | URL
ㅎㅎ 엄밀히 말하면 제주도민이자 서귀포시민이옵니다 ~ (이런 쪼잔한 정정을 하는 이유는, 여기선 제주시랑 서귀포시를 거의 서울과 대전 정도로 취급하기 때문에, ㅋㅋ 이해하시죠?)
전 <카모메식당>보다 <안경>이 더 큰 임팩트를 줬던 기억이 나요. 카모메는 핀란드여서 그랬나, 너무 이상적이다 싶고 그림만 이쁘다 싶기도 했는데 안경에서는 어떻게 살지 답을 구하는 과정에 영화가 깊이 개입하려 한단 느낌이 들었어요.
요즘도 영화 자주 보시죠? 부지런한 프레이야 님. :)

프레이야 2012-11-11 10:01   좋아요 0 | URL
호호~~ 그럼요^^ 서귀포시민 치니님^^
영화는 음..안 보면 숨을 안 쉬는 거랑 마찬가지니까요^^
저도 '안경'에서처럼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답을 구하고 찾으며 사는 모습이 부러워요, 정말!!
여긴 오늘 비가 오다 조금 그쳤어요. 이 비 그치면 겨울이 바짝 다가오겠죠.
행복한 하루하루 보내세요~~~ 치니님.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우리 자신에 대한 정보 과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를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환상을 품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미디어와 라디오, 특히 텔레비전 덕에 세상을 지나치게 환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가장 큰 혁명이라면, 갑작스럽게 세상을 지나치게 환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우리 자신에 대해 알아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최근 삼십 년 동안 알게 되었고, 그게 정신적 외상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나치가 한 짓이야,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가 한 짓이야, 그건......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건 어떻게든 그만둘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중략)
제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반복 단련되어 결국 감수성을 잃게 되거나, 붉은 여단처럼 일부러 과도함을 동원해 감수성을 죽이는 거죠. 파시즘은 언제나 무감각화의 산물이었어요." 24-25p.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기가 무엇을 할 것 같소? 울기 시작한다오. 울고 또 울지. 이제 기성복 같은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라오......기성의 고통, 즐거움, 두려움, 근심이 시작되는 거요. 고뇌는 차치하고도......삶, 그리고......요컨대 그 전체가 기성복과도 같소. 위로, 희망, 사람들이 책에서 배우는 것들, 이른바 다양한 철학들도......역시 기성복이라오. 어떤 게 넘 낡고 진부해지면, 시대의 취향에 맞추어 새로 기성복을 만들어내는 거라오....." 28-29p.

"그렇소. 모두 유명한 사람들을 추억한다오.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없소. 하지만 그들 역시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랑하고 희망하고 고통스러워했소.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이라는 기성복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종점에 이를 때까지 그 기성복을 겸허히 입고 있었다오. 따라서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거칠고 불쾌하고 참기 힘든 거요. 내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오." 35p.

"만약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안다면, 그것은 이미 찾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45p.

"누군가를 깡그리 잊었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입을 닥치고 있어야 한다." 74p.

"언제나 상상의 여지가 있는 게 좋다. 너무 높이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떨어져서 체면을 구기는 법. 현실에서는 아직 완전히 가동되지 않는 무언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종종 목격하지 않았던가."77p.

"제가 보기엔 그때가 오히려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걱정거리가 많았다면 그런 가사를 쓰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79p.

"마음을 어리석지 않게 먹을 수도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어리석지 않다는 건 마음이란 게 아예 없다는 뜻이니까요." 80p.



독서란 얼마나 게으른 취미인가! 그저 위대한 작가가 마치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명문장을 써 놓은 걸 곱씹기만 해도 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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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13-09-1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거 읽은지 20년은 족히 넘었겠군요.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의 찰지게 재밌던 소설.
노인으로서는 드물게 아주 멋진 '최신'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묘사로 시작했던 듯.

미하엘 엔데의 모모와 '자기 앞의 생'의 모모.처음엔 차경아씨 변역의 모모를 먼저 읽고 유행가 모모와 너무 다르다 싶었는데 나중에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나서야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 모모가 이 모모였구나 알게 되었던.

치니 2012-10-08 12:23   좋아요 0 | URL
오, 20년 전에 나왔던 거였군요! 전 최근에 번역된 책인 줄로만 알았어요.
네, 맞아요, 노인 솔로몬 씨의 멋진 외모가 처음에 묘사되는데, 구미가 확 당기더라고요.

'자기 앞의 생'의 모모가 커서 이 책의 화자인 자노가 된 듯하다는 해설이 달려 있지만, 아직 다 읽지 않아서 그렇게까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에밀아자르 혹은 로맹가리, 이 사람은 완전 제 타입이에요. ㅎ

LAYLA 2012-10-08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

치니 2012-10-09 13:46   좋아요 0 | URL
라일라 님도 읽어 보시고 감상 알려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