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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경험론적 자유주의와 세계정부, 전쟁과 냉전, 철학과 정치에 관한 러셀의 종합선물세트.
 
이 사람은 영국의 유력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위대한 정치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에게 아이의 대부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10대 후반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장학생으로 들어갔으며, 20대 초반에는 학교를 최우등 졸업한 뒤 선임연구원이 된다. 20대 중반에 자신의 첫 저서를 출간하면서 명망가로서의 긴 삶에 첫 발을 내딛고, 런던 경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30대 중반에는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으며, 얼마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강사가 된다. 여기서 나중에 위대한 철학자가 되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전형적인 천재인 비트겐슈타인을 돌보며 학문을 하도록 권유한다.
 
40대에 접어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전운동가'로 활동하다가 학교에서 해고되고, 벌금까지 선고받는다. 이후에도 참전 반대 강연으로 인해 징역형을 선고받아 실제로 복역했으며, 1차 대전이 끝난 다음에는 러시아 혁명을 조사하다가 뛰어난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을 만나 1시간에 걸쳐 토론을 하기도 한다. 40대 후반에는 러시아에 이어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고(미국은 수시로 드나들었다), 50대부터 60대에 걸쳐 엄청난 양의 강연과 수필과 잡지 기고문과 책을 발표하면서 명성을 쌓는다. 이와 동시에 하원 선거에 출마했으며, 재혼을 했다가 또 이혼하고 세 번째 장가를 드는가 하면, 그 와중에 아이를 셋이나 낳고서 스스로 학교를 열기까지 한다.
 
60대 중반에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영국 정치에 실망한 그는 미국에서 자발적인 망명자 신세로 단기 교수직을 맡았고,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70대 초반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대학교의 특별연구원으로 오랜만에 복직한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자작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가장 많은 인세를 벌어줄 <서양 철학사(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를 출간한다. 이 책의 엄청난 성공은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어 주었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 강의는 가장 큰 강의실을 채우고 넘칠 만큼 많은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곧 '현존하는 영국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영국의 상징'이 된 그는 이후 10여 년 동안 최고의 존경을 받게 된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중적 지식인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70대 중반, 그는 부단한 강의와 방송 출연을 하면서 종전 이후 세계 각지를 돌며 대단한 인기를 얻는 한편 '핵무기 반대 운동'과 함께 '세계 평화 운동'도 열성적으로 펼친다. 마침내 70대 후반이 되자 애증의 관계였던 자신의 조국 영국에서 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공로 훈장을 수여하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받는다. 이때 출간되어 비평가들의 찬사와 독자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은 책이 바로 이번 포스트에서 소개할 <인기 없는 에세이(Unpopular Essays, 1950)>다. 철학자이자 수학자, 예술가이자 과학자, 시민운동가이자 정치가, 여성 해방 운동가, 우아하고 재치 있는 문장가, 능란하고 섬세한 논객.. 이 사람은 20세기 최고의 지성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3rd Earl Russell, 1872~1970)'이다.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은이) | 장성주 (옮긴이) | 함께읽는책 | 2013-08-26
원제 Unpopular Essays (1950년)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는 제목 그대로 수필이다. 이 세상 어떤 수필이든 그 태생적 특성상 '누가 썼느냐'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에세이 자체가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 따위를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술한 산문 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저자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가가 이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포스트는 버트런드 러셀의 소개부터 시작했고, 아무래도 책을 읽기 전에 그의 삶에 대해 좀 알고 있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우리가 Bertrand Russell 이라는 한 인간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출신 성분부터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절정기의 영국에서 러셀 가문의 자제로 태어난다는 것은 곧 영국 사회 및 정치계에서 지배층의 자리를 예약한다는 뜻이었다. 전직 총리의 손자인 동시에 백작 작위 계승권자로 태어난 버트런드 러셀은 영국 자유당 지도부에서도 가장 위세 높고 존경받는 집안 출신이었다."
- Unpopular Essays 2009년판 서문, 커크 월리스(조지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마디로 러셀은 선택받은 자였다. 유력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최고 명문대학인 케임브리지 장학생을 거쳐 최우등 졸업생이 된다. 대단한 집안 자제에다가 머리까지 좋았고 유머와 재치가 넘쳤으며 (철학자들은 평생 혼자 사는 경우도 많은데) 세 번이나 결혼을 했다고 하니, 의심의 여지 없는 '엄친아'였던 셈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바로 그에게 따라붙는 타이틀이다. 반골 시민운동가, 신식 도덕의 열혈 지지자, 진보적 지식인, 여성 성해방 운동가, 영국 노동당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 등등..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버트런드 러셀의 출신 성분과 각종 타이틀의 만남은 오히려 그의 위대함에 대한 증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최고위 지배층이었고 백작 작위 계승권자인데도 여성 해방 운동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남성, 영국 자유당 지도부에서도 가장 위세 높고 존경받는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인 러셀은 무척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또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저작을 남겼다. 그는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삶을 살았고, 엄청난 명성을 얻었으며,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버트런드 러셀은 행동하는 지식인이었고, 엄밀한 논리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진보적 가치를 전투적으로 수호해 나갔다. 그래서 그에게는 항상 칭송과 욕설, 존경과 경멸, 동조와 비난이 다같이 따라다녔다. 결국 자신의 수필 모음집에 <인기 없는 에세이>라는 이상한(?) 제목을 다는 것에 대해서도 한마디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서도 역시 그의 위트가 번뜩인다.
  
"지난 15년 동안 이런저런 상황에서 쓴 다음의 에세이들은 대부분 투쟁의 기록으로서, 그 목표는 이제껏 우리의 비극적인 세기를 특징지었던 교조주의가 좌파에서도 우파에서도 성장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막는 것이었다. 간혹 경망스러워 보이는 글이 있을지언정 원래의 목적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지했다. 경망스럽게 쓴 까닭은 엄숙하고 오만한 자들을 상대로 더욱 엄숙하고 오만하게 싸워봤자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교조주의와 회의주의의 중간에 위치하는 '경험론적 자유주의자'인데, 철학자로서 그는 "자신의 믿음에 과학적 증거를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정당이나 신념보다 인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은 경험론적 자유주의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러셀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인기 없는 에세이>는 그가 특유의 명료함과 재치를 듬뿍 담아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써내려간, 일종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러셀의 다양한 '독설'을 만끽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아마 없지 않을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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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사회 / 과학 / 예술 분야 주목 신간

 

 

사회계약론
장 자크 루소 (지은이) | 이재형 (옮긴이) | 문예출판사 | 2013-09-24
원제 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1762년)

 

그 이름도 유명한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사회계약론 (1762)>이 문예출판사에서 새로 출간되었다. 절대권력의 신분제가 존속하던 당시에 주권자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설파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는 바로 그 책이다. 이번에는 프랑스어 원저 번역이고, 부록 '주요 개념'을 통해 책 속에 나오는 여러 가지 개념도 힘들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루소와 연관지어 잘 설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상세한 작품해설도 덧붙여서 고전을 읽을 때 종종 맞닥뜨리게 되는 어려움을 덜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서술했다니 이번 기회에 한 번 제대로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지금 왜 혁명을 말하는가 -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시대의 지성 9명의 조언
하워드 진 | 노엄 촘스키 | 우르바시 바이드 | 피터 퀑 | 위노나 라듀크 | 벨 훅스 | 바버라 에런라이크 | 매닝 매러블 | 마이클 앨버트 (지은이) | 강주헌 (옮긴이) | 시대의창 | 2013-09-04 | 원제 Talking About A Revolution (1998년)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 이후 유일한 슈퍼파워가 된 미국의 1990년대는 마치 21세기 초의 전지구적 위기를 미리 경고하는 것 같았다. 노동운동이 크게 위축되었고 시민권이 후퇴했으며 기업의 힘이 무시무시하게 강해졌고 사회변화를 위한 노력은 지리멸렬했다. 젊은이들의 투표율에 대한 논쟁은 선거 때마다 반복되었으며, 대학 등록금 문제도 있었고, 정치인들은 서로 비난과 고발만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5년 전의 미국 사회 모습이 2013년의 한국 사회 모습과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미국이 정말 그랬을 때, 시대의 지성 9명이 혁명에 관해 논한 인터뷰를 한데 모은 책이 바로 <지금 왜 혁명을 말하는가>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이들이 말하는 미국의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
셸던 월린 (지은이) | 우석영 (옮긴이) | 후마니타스 | 2013-09-02
원제 Democracy Incorporated: Managed Democracy and the Specter of Inverted Totalitarianism (2008년)

 

의심의 여지 없이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적어도 한 번 쯤은 이런 의문을 가져봐야 하지 않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가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아닐까?"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의 저자 셸던 월린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는 실패할 수 있는 체제이자 반민주적 체제에 제 자리를 내줄 수 있는 체제이다. 그리고 이 반민주적 체제는 전체주의 정권에 적합한 대중과, 이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적'인 체제라는 가정을 공급한다." 바로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다! 여론조사 조작과 선거관리, 국가권력과 기업권력의 결합, 국가와 엘리트의 거짓말.. 2013년 현재,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데에 이 책이 무척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더 많이 공부하면 더 많이 벌게 될까 - 지식경제의 불편한 진실
필립 브라운 | 휴 로더 | 데이비드 휴스턴 (지은이) | 이혜진 | 정유진 (옮긴이) | 개마고원 | 2013-09-16

원제 The Global Auction: The Broken Promises of Education, Jobs, and Incomes (2011년)
 

주류 사회와 정치권은 일자리가 부족한 젊은이들에게 흔히 이런 말들을 한다. '눈높이를 낮춰라', '산업계에서 원하는 능력을 갖춰라', '경제가 안 좋아서 모든 사람이 다 어렵다', '해외로 눈을 돌려라' 등등.. 하지만 이런 말들은 다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 환경의 변화를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 것이고, 지식경제의 실체를 똑바로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노동시간이 긴 편에 속하는 나라지만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별로 높지 않은, 한마디로 노동력 착취가 일상화된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미 기본적인 경제구조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과거처럼 일자리가 그렇게 쉽게 증가하지 않으며,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각 노동자들의 형편은 그렇게 쉽게 좋아지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하는 '글로벌 옥션(마치 최저가경매처럼 가장 낮은 임금을 제시하는 노동자가 일자리를 얻게 된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정치권과 주류 사회의 뚱딴지같은 논리에 더 이상 농락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문제의 경제학
헨리 조지 (지은이) | 전강수 (옮긴이) | 돌베개 | 2013-09-02 | 원제 Social Problems (1883년)

 

사실,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는 우리에게 좀 낯설다. 한때 마르크스보다 더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으며,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로 하여금 열렬한 '조지스트'로 살게 만든 바로 그 세계적 경제학자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잊힌 경제학자로 만들었을까? 물론 단순하게 얘기하기 힘든 문제겠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한 듯싶다. 헨리 조지의 사상이 일반 시민들에게 퍼지는 걸 부자들은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헨리 조지 사상의 주된 내용은, 사람이 창조하지 아니한 것 즉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것(토지, 환경 등)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귀속되고 개인은 자신의 노동생산물만 사적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회병폐를 야기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를 생각해 보면, 확실히 뭔가 혁명적인 경제학 논리 아닌가? 1883년에 나온 이 책도 고전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부동산 버블 붕괴를 앞두고 있는 2013년 현재의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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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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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생물학을 토대로 한 기만과 자기기만의 일반이론, 그리고 인간의 생존과 번식.
 
우리가 아무리 외면하고 포장하려 해도 잘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책에다가 아무리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써놔봐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게 시작한다. 누군가가 아무리 '정의가 승리한다'라고 말해봐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정의롭지 못한 상황과 대면한다. 애써 포장하려고 온갖 논리와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지만, 결국 남는 건 무심한 현실 속에서 껍데기만 남은 평등과 정의뿐이다. 어차피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볼 수밖에 없고,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두 발을 내딛고 서있는 이 세상 자체가 그런데, 어쩌겠는가?
  
단언컨대, 인간 사회는 거짓투성이다. 인간은 철저한 거짓말쟁이고, '기만(남을 그럴듯하게 속임)'과 '자기기만(스스로를 속임)'이 판친다. 굳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속이고 속는 건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도 무수히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원래 유전자로 이루어진 생물 전체적인 이야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화도 이뤄지며 자연과학적으로 연구와 분석이 가능하다. 자연과학은 보편타당한 일반 이론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므로, 인간의 기만과 자기기만에 관한 일반 이론 역시 과학적 연구와 분석을 통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책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2013)>는 "원리상 모든 종에 적용되지만 우리 종에게 더욱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이론이 바야흐로 나올 때가 되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책의 저자는 '살아 있는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로 평가 받는다는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 1943~ )'이고, 원제는 <The Folly of Fools: The Logic of Deceit and Self-Deception in Human Life (2011)>이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은 그의 최신작인데, 로버트 트리버스의 책이 국내에 출간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사실 이 책은 어떤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책은 아니다. 상당 부분이 '아이디어' 단계에 머물러 있고, 전반적인 서술 방식도 논리적으로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는 일단 도발적인 화두를 던지는 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로버트 트리버스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들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고작 걸음마 단계를 시작하는 '미개척' 분야이고, 앞으로 엄청난 연구와 분석이 필요한 '과학'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쓴 내용 중 일부는 불가피하게 틀린 것으로 드러나겠지만, 나는 이 책에서 전개되는 논리와 주장들이 금방금방 수정되고 통합되어 더 심오한 자기기만의 과학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결국,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는 확실하게 정립된 일반 이론을 설명하는 과학 서적은 아닌 셈이다. 한글판 책 제목처럼 로버트 트리버스는 우리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기만과 자기기만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독자와 함께 고민하는 스탠스를 취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는 세계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다. 이 문제에 관해 단순히 고민만 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례와 연구 분석 결과를 총동원해서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맨 앞에서 주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상당히 '논쟁적'이고, 또 그래서 상당히 흥미롭다.
 
그리고 로버트 트리버스의 탁월한 직관력과 솔직한 자기고백(기만과 자기기만이라는 주제의 측면에서 볼 때, 특히 이 점이 중요하다)에도 불구하고, <The Folly of Fools>는 그리 쉬운 책은 아닌 것 같다. 이미 확립된 이론을 설명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자기기만'과 싸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과학 서적이기에 여러 가지 개념과 원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운 부분도 당연히 있다. 이 책은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1장~7장)는 이론적인 내용이라서 약간 더 읽기가 힘든 편이고 후반부(8장~14장)는 실재적인 내용이라서 그래도 좀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전체적인 분량도 거의 50:50이라서 전반부를 읽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생길 듯싶은데, 앞에서 이해가 잘 안 되더라도 그냥 후반부까지 죽 읽다 보면 뒤에서 저절로 이해되는 것들도 있다]

 

[Robert Trivers (이미지 출처: Scientific American)]
 
그럼 여기서부터는 본인을 포함해서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거짓말쟁이들'을 밝혀내는 통찰력의 핵심이 뭔지를 한 번 살펴 보도록 하자. 우선, 우리는 남을 더 잘 속이기(기만)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인다(자기기만). 인간에게 기만과 자기기만은 동전의 양면이며, 둘은 상부상조한다. 로버트 트리버스는 '진화생물학자(evolutionary biologist)'이므로,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는 이 주제에 대해 '진화'적으로 접근한다. 이 말은 기만과 자기기만이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탐구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저자는 1장부터 7장까지의 전반부에서 상대적으로 자연과학적인 '편향'을 드러낸다(기만과 자기기만이 어떻게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기여하는지를 여러 과학적 개념과 원리를 통해 밝히고 있다).
 
1장 자기기만의 진화 논리
2장 자연에서의 기만
3장 신경생리학과 강요된 자기기만
4장 가정의 자기기만과 분열된 자아
5장 기만, 자기기만, 섹스
6장 자기기만의 면역학
7장 자기기만의 심리학
8장 일상생활에서의 자기기만
9장 항공 우주 재난과 자기기만
10장 거짓 역사 서사
11장 자기기만과 전쟁
12장 종교와 자기기만
13장 자기기만과 사회과학의 구조
14장 우리 자신의 삶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 
 
그런데, 로버트 트리버스는 또한 'sociobiologist(사회생물학자?)'이기도 하다. 영영사전에서 sociobiologist를 찾아보면, 'a biologist who studies the biological determinants of social behavior'라고 나온다. 간단히 번역하면 '사회적 행동의 생물학적 결정요인들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인데, 아마도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에서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진화생물학은 자연과학 쪽을 향하고 사회생물학은 사회과학 쪽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8장부터 14장까지의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후반부는 사회과학적인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결국 1장~7장은 자연과학적인 이론 중심이고, 8장~14장은 사회과학적인 실재 위주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첫 장을 읽고 난 뒤에는 거의 어떤 순서로든 읽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는 '과학' 서적이다.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모두 과학적 연구와 분석을 통해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거짓말쟁이들'을 밝혀내는 통찰력의 핵심도 역시 과학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자가 책 분량의 50%를 할애해서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는 과학적 개념과 원리를 짧게 정리할 자신은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평소에 관심이 많은 '역사'와 '종교'에 관해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로버트 트리버스가 이 책에서 기만과 자기기만을 주제로 종교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굉장히 냉정하면서도 무척 공정하다. 자연과학적으로 근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사회과학적으로도 올바르다.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강압적인 대규모 성 노예제를 운영했다거나, 미국이 한국전쟁 때 한국인을 대량 학살했고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인과 캄보디아인과 라오스인을 대규모 살육했다거나, 터키 정부가 잘 살던 하위 집단인 아르마니아인들을 대학살했다거나,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시오니스트들이 인종 청소를 통해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상했다거나, 미국이 건국 때부터 아메리칸 인디언을 살육하고 대학살하는 기나긴 군사 행동을 벌였고 1980년대만 해도 대리인을 내세워 50만 명이 넘는 아메리칸 인디언을 살육했으며 한 세기 넘게 군사적 수단을 써서 신대륙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 등등..."
 
저자의 말대로, 역사학에는 과거에 관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과 거짓 역사 서사를 구축하려는 노력이라는 뿌리 깊은 모순이 담겨 있다. 대다수 역사가들은 기존의 자화자찬하는 이야기의 특정한 판본만을 말한다. 하지만 대개 모든 사회에는 과거에 관한 진실을 말하고자 애쓰는 극소수의 용감한 역사가들이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진짜' 역사가들을 통해 '불편한 진실'을 어느 정도나마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불편한 진실을 두 개만 들어볼까? 한국군의 베트남인 학살과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운용. 미군만 베트남인을 학살한 게 아니고, 일본군만 위안부를 운용한 게 아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기만과 자기기만은 한국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건 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언 살육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 부문에서 기만과 자기기만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듯, 종교에도 온갖 속임수의 메커니즘이 다 들어가 있다. 아니, 사실 추적이 가능한 역사보다도 증명 자체가 필요 없는 종교는 더 포괄적인 기만과 자기기만이 자리잡고 있다. 한마디로, 종교는 기만과 자기기만의 '결정체'다. 그렇다고 로버트 트리버스는 무조건 종교를 부정적으로 그리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플라시보 효과를 포함해서) 면역학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지기도 하며, 집단내 협력 증진과 정신적 안정감 제공 등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비록 종교의 독선이 인류 최대의 비극인 전쟁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과학적으로 종교를 완전히 폄훼할 이유는 없으며 굳이 종교 공포증에 빠질 필요도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며, 개인적으로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자, 그럼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도록 하자. 종교와 역사를 비롯해 인간 세상에는 기만과 자기기만이 판치고 있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정의가 꼭 승리하는 게 아닌 것처럼, 인간은 철저한 거짓말쟁이고 우리 사회는 거짓투성이다. 심지어 기만과 자기기만은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기여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자연선택'을 받았고, 실제로 유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만·자기기만과 싸워야 할까? 우리 모두가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해왔다면, 도대체 이와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로버트 트리버스는 과연 어떻게 대답하는지 한 번 들어보자.
 
"나는 자신의 삶, 관계, 사회가 거짓말을 토대로 구축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 우리가 이따금 성폭행을 하고, 적당할 때면 침략 전쟁을 하고, 보상할 혜택이 따라온다면 자식을 학대하는 쪽으로 자연선택을 받아왔다는 점도 유념할 가치가 있지만, 나는 그런 행동들이 과거에 선호되었든지 여부에 상관없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 정직한 것, 혹은 정직하려고 애쓰는 것, 그리고 자기기만을 줄이는 것, 혹은 자기기만을 줄이려 애쓰는 것이 멸종으로 내몰릴 일이 없는 전략인 한, 나는 그것의 진화적인 장기 결과가 어떠할지 여부는 기꺼이 미래에 내맡기련다 ... 그것이 그저 진화적으로 안정한 한―아마 낮은 빈도를 유지하겠지만 소멸당하지는 않는 한―은 자기기만 반대를 내 인생관, 이른바 내면 전략으로 삼을 생각이다.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큰 희망을 품고 있어서가 아니다."
 
예전에 누군가도 이런 비슷한 말을 했다. 명분만 확실하다면, 나중의 결과에 지금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우리가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쓰고 '정의는 승리한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꼭 그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져서가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정의와 평등은 어쨌든 우리가 행동하는 데 있어서 확실한 명분이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양심에 따라 지향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인생관·내면 전략으로서 '정의는 승리한다'라고 말하고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쓰는 것이다. 이와 똑같이, 기만과 자기기만에 대항해서 우리는 정직하려고 애쓰고 자기기만을 줄이려 애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이제까지 줄곧 '과학'을 얘기하다가 왜 갑자기 '철학'을 얘기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앞서 속이고 속는 건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도 무수히 일상적으로 벌어진다고 말했고,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의 9장부터 12장까지는 항공우주재난·역사·전쟁·종교의 기만과 자기기만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항공우주재난·역사·전쟁·종교가 자연 상태에서도 모두 존재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즉, 우리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또 '인간'이다. 과학적으로 동물의 기만과 자기기만이 설명 가능하다고 해서, 인간 사회의 전쟁과 재난에 내재한 기만과 자기기만을 그냥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무튼 인간이고, 재난과 전쟁을 막기 위해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할 수 있다. 로버트 트리버스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총동원하여 이 책을 집필한 것처럼, 우리는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거짓말쟁이를 밝혀내는 통찰력은, 과학에도 있지만 철학에도 있으니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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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민주화 시대와 이명박 시대의 한국 현대언론사 집대성.

 

요즘처럼 언론의 타락이 심각했던 적은 별로 없었던 듯싶다. 1900년대 초 일제의 신문지법(1907)과 출판법(1908)이 제정된 이래 100여 년 동안을 봤을 때 언론이 탄압 받은 경우도 물론 많았지만, 이토록 언론 스스로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가히 역사에 기록으로 남을 만큼 '눈에 띄게' 부정적인 상황인 것이다. 굳이 지난 몇 년 동안의 실제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2013년 지금 이 순간 한국 언론이 얼마나 언론 같지 않고 또 한국 기자들이 얼마나 기자 같지 않은지는, 웬만큼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직접 목격해서 알고 있는 상황 아닌가? 현재 우리 사회는 '정론지'보다는 '찌라시'의 시대이고, '저널리스트'라기보다는 '기레기(기자+쓰레기)'가 판을 치고 있다.

 

이렇게 타락한 언론의 시대에는, 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이 다름 아닌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처럼, 어쩌면 '언론사'를 제대로 보는 게 참 중요할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역사가 다 그렇듯이, 한국 언론사를 들여다보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으며 또 어떻게 문제가 처리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란 건, 현재의 거울을 통해 인간에게 어떤 통찰력과 교훈을 제공해 주는 것 아닌가? 사실 얼마 전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친일 독재' 세력의 역사 왜곡 시도도, 따지고 보면 역사의 이런 권능을 그들도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올바르게 아는 게 중요하고, 한국 언론의 타락이 심각한 바로 이때 언론사를 제대로 살펴보려는 노력이 모두에게 정말 필요하지 않을까?

 

 

올해 7월에 출간된 <폭력의 자유>는 지금 우리에게 무척 절실한 책이다. 부제가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인데, 1944년에 태어난 김종철은 1967년 동아일보사 기자로 들어갔다가 (서슬 퍼런 박정희 독재 시절인) 1974년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로 1975년 동료 기자 110여 명과 함께 강제해직 당한 언론인이다. 이후 그는 한겨레신문 창간에도 동참했으며, 민주화 시대에는 연합뉴스 대표이사를 역임했고, 현재는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고 한다. 군사독재 시대에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해직 당한 기자가 쓴 한국 언론사라면,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현재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언론을 바라보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 아닐까 싶다.

 

일제 강점기에 창간된 '친일' 신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최근에 나온 조선일보의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아들 논란' 보도와 동아일보의 '채동욱 아버지 前 上書'를 보면, 과연 이 두 신문을 '정상적인' 언론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언론의 가장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사실 확인 자체를 제대로 하지 않은 건 물론이고 아예 막무가내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걸 보면, 이들은 찌라시와 기레기로서의 병증이 중기를 넘어 말기로 넘어가는 단계인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이런 수준의 출판물이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읽히고 또 무시 못할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인데, 사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역사를 보면 이런 의문은 상당 부분 저절로 해소가 된다. 과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금부터 좀 정리해 보도록 하자.

 

[이미지 출처: 미디어오늘]

 

우선,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그해 1월에 열린 발기인 총회에서 '합병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된 박영효'를 사장으로 선출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친일파의 거두'가 동아일보 창간에 주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6일에 창간된 조선일보의 창간 허가를 받은 예종석이라는 사람은 친일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이사였으며, 총독부는 그 단체의 기관지로 조선일보 발행을 해가해준 것이라고 한다. 결국, 조선일보는 출발 자체가 '친일파 신문'인 것이다. 게다가 동아일보는 조선 반도 최대의 친일 지주였던 '김성수'가 사실상의 경영주였고, 평안북도 정주에서 광산업으로 갑부가 된 '방응모'는 1932년에 조선일보를 인수한다. 벌써 이 무렵부터 동아일보 사주 '김씨 일가'와 조선일보 사주 '방씨 일가'의 전횡이 시작된 것이다.

 

"천황 폐하께옵서 육군 관병식 행행으로부터 환행하시는 어료차의 로부가 앵전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 어경위 사고가 발생하였다 ... 본일 오전 11시 40분경 로부가 국정구 앵전정 경시청 앞에 이르렀을 적에 ... 어료차 전방 약 18간에 수류탄과 같은 물건을 던진 자가 있어서 궁내 대신 마차의 좌후부 차륜 부근에 떨어져 차체 바닥에 엄지손가락만 한 손상 두셋을 나게 하였으나 어료차 기타에 이상이 없이 오전 11시 50분에 무사히 궁성에 환행하시었다"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폭력의 자유>에서 재인용)

 

1931년 1월 8일, 이봉창 열사가 일본 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비록 폭탄은 빗나가고 말았지만, 이봉창은 조선인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친일을 일삼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바로 다음 날인 1월 9일에 위와 같이 똑같은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이 기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 쓴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이것만 봐도 소위 말하는 주류 보수언론의 역사적 실체가 어떤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지 않나?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 신문은 여전히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겠지만, 이 책은 흔히 말하는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혹시 서점에 가서 <폭력의 자유>를 보게 되면,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친일 청산 실패와 이승만의 언론 탄압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친일 청산에 실패했다. 그리고 해방 후 북위 38도선 이남의 남한에서 실시된 미군정은 (자신들이 친일파였기 때문에 친일파 처단을 결사 반대한) '한국민주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군정 고문'을 임명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를 중심으로 한 한민당의 주축 세력(동아일보계)은 미군정의 비호를 받으면서 세력을 키워나갔고, 실제로 친일파가 적지 않았던 한국민주당은 검찰과 법원 등의 요직은 물론이고 도지사나 군수 등의 지방 관직도 많이 차지했다고 한다. 요즘도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듯이 미군이 손을 대서 제대로 된 나라는 없으며, 미군정청의 통치를 받았던 남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중에 '반민특위'도 좌절하게 되지만) 사실상 바로 이 시점부터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대한민국의 치욕스런 역사가 본격화된 셈인데, 이런 시대와 사회의 왜곡은 2013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이승만 정권의 <언론정책 7개항>

(1) 대한민국의 국시·국책을 위반하는 기사

(2) 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3) 공산당과 이북 괴뢰정권을 인정 내지 비호하는 기사

(4) 허위의 사실을 날조·선동하는 기사

(5) 우방과의 국교를 저해하고 국위를 손상하는 기사

(6) 자극적인 논조나 보도로써 민심을 격앙 소란케 하는 외에 민심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기사

(7)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기사

 

1948년 8월 15일에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고, 이즈음 (한반도가 두 동강 나기 전에) 공산당을 피해서 북의 친일 지주와 자산가 ·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전직 관료와 경찰관 등 다수가 남으로 내려왔다(반면, 남한의 사회주의자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북으로 넘어갔다). 48년 8월과 9월의 바로 이 '대이동'이 어쩌면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를 비롯한 한반도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예고한 것일 수도 있을 텐데, 당장 1948년 9월 이승만 정권이 발표한 '언론정책 7개항'은 (마치 국가보안법처럼) 온통 모호하고 비합리적인 용어로 가득차 있다. 이승만은 이런 언론 탄압 정책을 발표하자마자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던 신문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였고, 이런 진보언론 탄압의 흐름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를 거치며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친일과 독재의 아이콘' 박정희와 언론 자유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오랜 군사독재 시대를 겪었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 친일과 독재를 얘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박정희'는 5.16 군사 쿠데타(1961년 5월 16일 새벽)를 일으켰고, 당일 오전 9시 '군사혁명위원회'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포고 제1호'를 통해 언론 활동을 규제했다. 계엄령 제3항은 '언론·출판·보도 등의 사전검열'을 강제하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들은 보도를 일절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친일 청산을 좌절시켰던 권력자 이승만이 발표한 1948년 9월의 '언론정책 7개항'처럼, 장기간의 군사독재를 시작한 권력자 박정희가 발표한 1961년 5월의 계엄령은 온통 비합리적이고 모호한 용어로 가득차 있다. 기본적으로 언론 자유가 생명인 신문과 방송 · 출판물에 이런 금지사항을 적용하는 게 도대체 가당키나 한가? 이것은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모든 언론에 치명타나 마찬가지였다.

 

(1) 적을 이롭게 하는 사항

(2) 군사혁명위원회의 제 목적에 위반되는 사항

(3) 반혁명적 여론 선동·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사항

(4) 치안 유지에 유해한 사항

(5) 국민 여론 및 감정을 저해하는 사항

(6) 군 사기를 저해하는 사항

(7) 군 기밀에 저촉되는 사항

(8) 허위 및 왜곡된 사항

(9) 기타 지시하는 사항

 

결국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전국에서 1천 170개 언론기관이 폐쇄되었고, 쿠데타 직후부터 1962년 6월까지 약 1년 여 동안 포고령이나 반공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되거나 구속된 기자는 무려 960명에 달했다. 앞에서 이 책 <폭력의 자유> 저자인 김종철이 1967년에 동아일보사 기자로 들어갔다고 말했는데, 그는 곧바로 2년 4개월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1970년 7월 초 동아일보사에 복직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종철은 '한국 현대언론사'를 집필함에 있어, 일제 강점기부터 박정희 정권 전반기까지는 철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사실 관계를 명확히 정리하고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진실(대표적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절대 '민족 신문'이 아니고 사실은 '친일 반민족 신문'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자신이 언론인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부터는(박정희 정권 후반기부터는) 역사적 사실을 그저 나열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이 직접 겪은 일들도 '에세이' 식으로 첨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내가 1971년 대통령선거 과정과 결과를 보면서 가장 뼈아프게 느낀 것은 권력과 언론의 '지역감정 부추기기'였다. 이 '작전'은 박정희의 승리에 결정적 작용을 했다" 또는 "나는 1971년 한여름의 '광주대단지 사건'을 계기로 진정한 언론인이 되려면 전문적 기능보다는 따뜻한 가슴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처럼.. 이런 식의 서술은 일반적인 역사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인데, 단순 지식 서적보다 훨씬 더 '공감' 지향적인 구성인 듯하고 또 (언론자유 같은) '가치'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기 좋은 방식이 아닐까 싶다. 이건 다름 아닌 우리 한국사회의 진짜 언론 역사니까 말이다. 

[이 점이 바로 38년째 해직기자인 김종철이 보고 듣고 적은 <폭력의 자유>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 책은 기자가 쓴 최초의 한국 언론 현대사라고 한다]

 

 

노무현을 거쳐 다시 이명박근혜 시대로, 그리고 언론의 타락

 

다들 알다시피, 박정희 다음엔 전두환·노태우였고 김영삼과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에 이르렀다. 위의 목차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언론사를 집대성한 이 책은 당연히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시절의 언론 상황도 정확히 다루고 있으며, 부록으로 해외 '언론재벌'과 위키리크스의 '언론혁명'도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박근혜 정권이 집권하고 있는 현재 가장 의미 있는 '친일 독재'와 더불어,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언론사가 제일 흥미로웠다. 그 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보수 신문인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와 대통령 노무현의 충돌에 눈길이 많이 갔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노무현 대통령은 (적어도 언론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 먼저, 2001년 말 민주당 경선주자로서 노무현이 조선일보의 인터뷰를 거절한 이유를 설명한 한겨레 인터뷰 내용을 한 번 살펴보자.

 

"조선일보가 반민주적인 특권집단이라는 본질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조선일보의 권위와 신뢰를 높여주는 어떠한 인터뷰에도 응할 수 없다. 나는 조선일보의 장사거리가 되지 않겠다. 민주당과 조선일보는 언론사 세무조사를 통해 비정상적 적대관계임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조선일보가 편파와 왜곡보도를 통해 끊임없이 정부와 여당에 상처를 입히는 한 일상적인 협조는 불가능하다. 나는 조선일보의 편파와 왜곡 보도로 많은 피해를 본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조선일보의 특권과 공격에 짓밟혀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도리의 차원에서도 조선일보의 인터뷰에는 응할 수 없다. 조선일보는 민주화 과정에서 남은 마지막 특권세력이자 성역이며, 이 특권세력을 실질적 법치주의의 지배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 민주화운동이다" (2001년 11월 19일자 한겨레 인터뷰, <폭력의 자유>에서 재인용)

  

김종철이 지적하는 것처럼,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들에게 언론의 인터뷰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조선일보의 인터뷰에는 응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굉장한 모험인데, 그런데도 기적적으로 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수구·냉전·기득권 세력'인 보수 신문들은 노무현에 대한 공격을 그만두지 않았고, 결국 일련의 비극적인 사태가 잉태됐다. 그리고 바로 지금 2013년 9월, '언론의 특권과 공격에 짓밟혀 고통 받는 사람들'중에는 대한민국의 검찰총장 채동욱과 그와 관련됐다는 의혹을 받는 어린 남학생도 포함된다.

[국제아동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의 9월 17일 성명서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논란을 둘러싼 언론보도에 대한 세이브더칠드런의 입장> "누구보다도 존중 받고 보호받아야 할 아동의 권리가 침해 당하는 폭력적인 보도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언론의 각성과 자제를 촉구합니다"]

 

"국가가, 정부가, 이렇게까지 조롱거리가 된 적이 한국의 근대사에는 없다 ... 노무현 권력은 막무가내다. 권력에 취해 나라를 총체적으로 결딴내고 물러갈 심산인 것 같다. 아니 물러가지 않으려고 애를 더 쓰고 있으니 나라의 장래가 걱정이다 ... 난맥의 뿌리는 국가적 리더십이 없다는 것이다. 국가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 대통령은 그동안 받아든 시험지마다 부실답안을 작성했다. 마지막 시험시간, 그는 시험을 포기하는 학생 같다 ... 실권이 두려워, 4년 반 누렸던 영화가 달아나는 게 두려워, 벌벌 떨면서 정신을 잃고 있다 ... 나라는 철부지들의 권력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2007년 9월 12일자 중앙일보 사설, <폭력의 자유>에서 재인용)

 

중앙일보의 이 사설은 2012년 9월 12일이 아니라 2007년 9월 12일에 나온 것이다. 결국 이명박이 대통령이 됐고, 노무현이 죽은 뒤에도 조·중·동은 여전했으며, (4대강 사업을 가장한) 한반도 대운하나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한 수많은 의혹에도 보수 신문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완전히 실패한 4대강 사업은 한반도의 대재앙이 됐고, 합리적인 의혹조차 제대로 제기할 수 없게 된 천안함 침몰 사건은 이제 <천안함 프로젝트> 같은 영화 하나도 편하게 볼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가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이명박근혜 시대의 보수 언론은 흉기이고, 이런 사회와 시대의 왜곡 속에서 '언론의 자유'는 단지 '폭력의 자유'로 추락해 버렸다. 도대체 그 누가 동아일보의 사설 '채동욱 아버지 前 上書'를 보고 이를 정상적인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건 그저 파렴치한 '폭력'일 뿐이다.

 

현재 시점에서, <폭력의 자유>의 저자 김종철은 이렇게 말한다. "보수 언론을 대표하는 조선·동아·중앙일보의 행태를 보면 세 신문은 단순히 정치권력의 비위를 맞추면서 온갖 특혜를 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선거철이 되면 보수 언론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처럼 치밀하고도 교활하게 '작전'을 벌인다. 그런 사례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이 2012년 4월의 19대 총선과 12월의 18대 대통령선거 기간이었다." 이 순간, 뭔가 강하게 떠오르는 게 있지 않나? 바로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 사건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중대한 사건은 없을 텐데, 사실 이것만큼 우리가 심각하게 바라봐야 할 문제가 보수 신문의 일상적인 '왜곡'이다! <폭력의 자유>를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어보면, 보수 언론이 저지른 뻔뻔한 왜곡의 역사를 책 한 권으로 일목요연하게 다 정리할 수 있다. 폭력의 자유를 언론의 자유로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이렇게 '기억'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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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성실록 - 우리 역사의 맨얼굴을 만나다
정명섭 (지은이) | 북로드 | 2013-08-07

 

<조선백성실록>,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조선왕조실록과 조선백성실록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나 크리스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 같은 책이 우리 역사서에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디, 조선백성실록이 그런 책이길 바란다. 이 책의 목차를 보니,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던 조선 민초들의 모습을 교정하고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산체스네 아이들 - 빈곤의 문화와 어느 멕시코 가족에 관한 인류학적 르포르타주
오스카 루이스 (지은이) | 박현수 (옮긴이) | 이매진 | 2013-08-09 | 원제 The Children Of Sanchez (1961년)

 

이 책은 '빈곤의 문화'라는 개념을 만든 20세기 빈민 연구의 역작이자 인류학의 고전이라고 한다. <산체스네 아이들>이 처음 한국에서 출간된 지 35년 만에 50주년 기념판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왔다. 마가렛 미드의 편지, 개정판 서문과 후기, 산체스네 아이들이 출간된 이후의 논쟁과 후일담까지 더해진 50주년 기념판.. 고전을 읽는 쏠쏠한 재미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런던 특파원 칼 마르크스
칼 마르크스 (지은이) | 정명진 (옮긴이) | 부글북스 | 2013-08-15

 

칼 마르크스는 저널리스트였다. <런던 특파원 칼 마르크스>는 1850년대 칼 마르크스가 쓴 기사들을 모은 책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읽을 이유가 충분할 듯한데, 과연 '기자' 칼 마르크스는 그 당시 사회의 어떤 문제들을 바라 보았고 또 그 시대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었을까? <자본>은 굉장히 길고 어렵지만, 그가 저널리스트로서 발표한 글들은 아무래도 짧고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어서 빨리 칼 마르크스의 세계관과 문제의식을 엿보고 싶다.

 

 

 

에너지 노예, 그 반란의 시작
앤드류 니키포룩 (지은이) | 김지현 (옮긴이) | 황소자리 | 2013-08-16 | 원제 The Energy of Slaves (2012년)

 

예전에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장기 비상시대(원제: The Long Emergency)>라는 책을 무척 인상 깊게 읽었다. 석유 없는 세상, 그리고 우리 세대에 닥칠 여러 위기들에 대한 책이었고, 2005년에 출간되었다(한국판은 2011년에 나왔다). 아마도 <에너지 노예, 그 반란의 시작>은 그 뒤를 잇는 최신의 '경고'일 것 같은데, 2012년에 출간된 책이 2013년에 곧바로 번역되어 나온 게 참 반갑다. 저자인 앤드류 니키포룩은 '레이첼 카슨 환경도서상' 수상자.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은이) | 장성주 (옮긴이) | 함께읽는책 | 2013-08-26 | 원제 Unpopular Essays (2009년)

 

개인적으로 버트런드 러셀을 상당히 좋아한다. 특히 그의 에세이를 좋아하는데, 이 책은 러셀의 책들 가운데 출간 즉시 가장 널리 읽힌 책이라고 한다. "때로는 경박해 보이겠지만, 이 진지한 목적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엄숙하고 오만한 사람들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엄숙과 오만을 버려야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러셀의 '독설'을 만끽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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