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순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시대 그림과 글씨를 보는 안목을 기르기 위한 유홍준의 명작 해설.

 

너무나 유명해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예술평론가 유홍준의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화 49점에 대한 해설을 모은 책이다. 유홍준의 말에 따르면, "한 화가가 어떤 계기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사회적·예술적 배경이 있었으며, 화가의 예술적 노력과 특징이 그림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액면 그대로 친절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명작순례>를 읽어 보면 모두가 그렇게 느끼겠지만, 꼭 저자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더라도 이 책은 정말로 편안하고 복잡하지 않은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옛 그림과 글씨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고, 말 그대로 감상 '입문서'로서 거의 완벽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그냥 소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굉장히 부드러운 책이며, 별로 두껍지도 않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곳 하나 모난 데가 없고, 그냥 읽는 족족 쉽게 다 넘어간다.

 

게다가 시대순 목차이기에 앞뒤로 약간씩 관련성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49점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서라서,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다. 그저 아무거나 그때 그때 읽고 싶은 것만 골라 읽어도 상관 없으며, 몇 개 읽고 한참 뒤에 다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화장실에 두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싶다. 각 작품 해설 분량도 한 번 볼일 보는 동안 읽기에 적당하고, 내용 자체도 편하게 머리 식히기에 알맞다.

 

매일 한 꼭지씩 설렁설렁 읽으면 되고, 볼일이 끝나면 다시 변기 옆에 놔두자. 다 읽는 데에 한 두 달 가까이 걸릴 텐데, 그 두 달 동안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기초적인 안목이 서서히 길러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스스로 공부해 오지 않은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시대 명작에 대해 문외한일 테지만, 전혀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봤듯이, 유홍준은 이쪽 분야에서의 '대중적'인 글쓰기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다.

 

우리가 멀티플렉스에 상업영화를 보러 가면서 공부할 생각으로 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냥 두 시간 동안 즐기러 가는 것이다. 조선시대 그림과 글씨 감상 입문서 <명작순례>도 마찬가지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지 말고, 그저 멋진 글씨와 그림을 즐기는 마음으로 읽으면 된다. 물론 옛날 작품들이기에 한자나 전문용어가 좀 등장하긴 하지만, 이런 것들을 억지로 다 이해하려고만 들지 않는다면 별로 문제될 것도 없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500년 조선왕조의 직접적인 후손이면서도 언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조선시대의 그림과 글씨를 관심 갖고 살펴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테스트를 해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서양 미술사의 유명 화가들 이름을 한 쪽에 쭈욱 써보고, 그 옆에는 자기가 아는 조선시대 화가들 이름을 다 써보라. 어느 쪽 개수가 더 많은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십중팔구는 서양 미술사 화가들 이름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용어나 한자를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보다는 일단 조선시대의 글씨나 그림과 친근해지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사실 개인적으로도 <명작순례>에 등장하는 예술가들 이름 중에 원래 알았던 사람은 겨우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나머지 대다수는 이제까지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니 난생 처음 이름을 알게 되고, 거기에 더해서 대표작까지 보는 것 자체가 모두 새로운 일이다.

 

서양 미술 작품보다 우리의 조선시대 그림과 글씨가 훨씬 더 낯선 현실 속에서, 유홍준의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은 상당히 소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마다 한 꼭지씩 읽어도 될 정도로 부담 없는 볼륨이고, 한자나 전문용어를 몰라도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저자의 주특기인 대중적 글쓰기가 여지없이 빛을 발하고 있으며, 형식적으로도 스토리텔링에 기반한 서술을 하고 있기에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적어도 서양 미술사 화가들의 이름을 아는 만큼은, 우리가 조선시대 화가들의 이름을 알아야 되지 않을까? 그 첫걸음을 유홍준의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으로 시작함이 어떠한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의 정복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일반적으로 고생대(5억 4천만 년 전~ )는 '양서류의 시대', 중생대(2억 3천만 년 전~ )는 '파충류의 시대', 신생대(6천 5백만 년 전~ )는 '포유류의 시대'라고 불린다. 양서류는 수중생활에서 처음으로 육상생활을 하게 된 '척추동물'로서, 어류와 파충류의 중간단계이다. 파충류는 뱀·도마뱀·악어·거북 등과 이미 멸종한 공룡류를 포함하고, 수많은 고등동물들과 함께 인간은 포유류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시대 구분과는 별개로, 육상세계의 진정한 지배자는 따로 있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현재 시점에서 지구 전체의 지배자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현생인류)'라는 한 종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하지만 인류와 함께 육상세계를 지배하는 건 양서류도 아니고 파충류도 아니고 다른 포유류도 역시 아니다. 우리 지구의 또다른 지배자는 바로 진정한 사회적 조건(진사회성)을 갖춘 '사회성 곤충'이다.

 

개미·흰개미·벌 등의 진사회성 곤충은 인류 외에 가장 복잡한 '사회'를 이룬 사회성 동물로서, 도시를 건설하고 가축을 기르며 농사를 짓는다. 흔히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도시, 가축, 농사.. 잘 믿겨지지 않겠지만, 진사회성 곤충의 진화단계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또 개미를 예로 들면, 이들은 모든 육상 척추동물(조류, 파충류, 양서류, 포유류)을 다 합친 것보다 몸무게가 무려 4배나 더 나간다.

 

진사회성 곤충은 인류보다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오래된 존재이다. 현재 육상 무척추 동물세계의 지배자인 이들은 대부분 1억 년 전에 진화했고, '그 진화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다른 생물들과 함께 진화하면서 지구 생태계는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날 이들이 지배하는 생태계는 지속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지배자인 인간은 분별없이 지구 생물권을 파괴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영속 가능성까지 없애고 있다.

 

인류는 겨우 수십만 년 전에 출현하여 지난 6만 년간 전세계로 퍼졌고, '다른 생물들과 함께 진화할 시간'이 없었다. 지구 생태계는 인류의 대량 학살에 대비할 시간이 없었으며, 이 때문에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생물 다수는 곧 끔찍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바로 이 비극, 이 지점이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 지성'으로 손꼽히는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 1929~ )'의 최근작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 2012)>가 가진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서양미술사의 걸작 '폴 고갱(Paul Gauguin, 1848~ 1903)'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 1897)>에서 그대로 따온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고갱 최후의 역작이다), 이 책은 지구의 정복자인 인류의 기원과 진화를 정면으로 탐색한 대작이다. 단순히 곁다리로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양념처럼 건드린 게 아니라, '사회생물학'을 창시했고 '통섭(Consilience, 지식의 통합)'을 주창한 대학자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내놓은 인류 역사의 종합적 탐험이다(어쩌면 에드워드 윌슨 최후의 역작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사고의 깊이와 범주는 통섭을 주창한 에드워드 윌슨의 저작답게 우리가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학문의 경계를 넘나든다 ... 이 책은 현존하는 최고의 통섭형 학자가 그의 학문 여정의 정점에 다가서며 내놓은 걸작이다."

-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국립 생태원 원장)

 

<지구의 정복자>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목차상 1부와 2부는 인간의 조건과 인류의 기원에 대한 부분이고, 3부와 4부는 (인류의 진화 역사에 참조할 수 있는) 사회성 곤충의 발달 과정을 '자연과학자'로서 정리한 내용이다. 그리고 5부와 6부는 인간의 본성과 문화의 기원, 인류의 미래를 한 사람의 명망 있는 노학자로서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대서사시로 조망한 부분이다. 전문적인 생물학자 외에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첫 번째와 세 번째 내용이 이 책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도 5부가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사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내용이 다 기나긴 인류 진화의 발자취를 총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저 일부분을 요약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인류가 육식을 하게 된 원인에 대한 저자의 분석만 해도 그렇다.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식량 다양화가 필요했고(기후가 달라지면, 획득할 수 있는 식량도 변화될 수밖에 없다), 식물성 식량보다 에너지 효율이 훨씬 더 높은 고기를 먹음으로써, '잡식성'이 된 인류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결국 생존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단순히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으로서의 육식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전체적인 발달 단계의 측면에서, 육지 생활 ·  커다란 몸집과 상대적인 비이동성 · 움켜쥐기에 알맞은 손과 발 · 잡식 · 불의 제어 · 야영지 마련 등을 통합적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집단을 형성하고 분업을 하며, 더 나아가 요리한 음식을 나눠먹는 행위가 사회적 유대형성의 보편적 수단이 되는 순간(요리 나눠먹기의 의미)까지도 함께 떠올려야 한다. 이게 바로 에드워드 윌슨의 탁월한 통찰력이고,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다.

 

또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면, 진사회성 군체는 같은 생태적 지위를 놓고 경쟁할 경우 단독생활을 하는 개체들보다 훨씬 유리하다. 그런데 왜 진사회성은 생명의 역사에서 그렇게 드물게,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출현하게 되었을까? 이의 대답을 위해서 에드워드 윌슨은 외부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의 성공 여부, 준비된 학습과 혁신의 필요성, 균형과 협동, 보금자리의 중요성, 외부적 위험의 역할, 대립 유전자 출현의 의미, 개체선택과 집단선택, 초유기체 형성, 유전자 가소성, 후성규칙과 문화적 변이 등등 이런 통섭적 지식들을 총망라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되지 않으려면, 전체 내용을 차근차근 다 읽어봐야만 하는 것이다.

[저자는 퓰리처상을 2회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저술가이기에, 일부 전문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책 자체는 참 재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흥미로웠던 내용들을 여기에 몇 가지만 그대로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울트라마라톤 세계 기록을 세운 배른트 하인리히는 <우리는 왜 달리는가>에서 마라톤이라는 주제를 깊이 탐구했다. 그는 25킬로미터 달리기 2000년 미국 챔피언인 숀 파운드의 말을 인용하여 장거리 달리기의 원초적 기쁨을 표현한다. "장거리 달리기를 체험할 때, 당신은 ... 사냥을 다시 체험한다. 장거리 달리기는 단거리 질주에서 당신을 이길 수 있는 먹잇감을 약 49킬로미터에 걸쳐 추적하여 잡아 마을에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굉장하지 않은가."

 

- 오늘날 전세계의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점점 더 신중해지고 전쟁의 결과를 두려워하면서 그것의 도덕적 등가물인 단체 운동 경기(대중 스포츠)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자기 집단이 우월하기를 원하는 욕구는 단체 운동 경기라는 의례화한 싸움터에서 자기편 전사들이 승리할 때 충족된다 ... 그들은 승리한 뒤에 벌어지는 의기양양한 축제에 참석한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전사나 처녀 같은 연령대에 속한 이들은 자제력을 모두 버리고 전투의 분위기와 전투가 끝난 뒤에 흥에 겨워 벌이는 요란한 행동에 참여한다.

 

- 인간의 감각계와 뇌는 가시광선의 연속적인 파장들을 나누어 우리가 색깔 스펙트럼이라고 부르는 분리되어 있는 단위로 배열한다. 이 배열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근본적으로 임의적이다. 수십만 년에 걸쳐 진화했을 수 있는 수많은 배열 중 하나일 뿐이다 ... 생물학적 현상으로서의 색깔 지각은 가시광선이 가진 진동수 이외의 또 다른 주요 특성인 빛의 세기에 대한 지각과 대조적이다. 조광기 스위치를 부드럽게 돌려 빛의 세기를 서서히 바꾸면, 우리는 실제 그대로 그 변화를 연속적인 과정으로 지각한다. 하지만 단색광을 사용해 한 번에 한 가지 파장만을 비추면서 한 파장에서 다른 파장으로 차례로 옮겨 가면, 우리는 연속적이라고 지각하지 않는다.

 

- 창작 예술은 인류가 추상적 사유능력을 계발했을 때 가능해진 진화적 발전의 한 유형이다.

 

이 외에도 무척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으니, 웬만하면 이 책을 사서 찬찬히 읽어보길 권한다. <지구의 정복자>에 관해 최재천 교수도 이렇게 말했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고 또 읽을 책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smithsonianmag.com] 

 

앞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이 바로 5부 '우리는 무엇인가'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에드워드 윌슨은 인류가 가진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와 정면승부를 벌이고 있다. 그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단순히 과학자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지구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호모 사피엔스 동료로서, 도덕과 명예 · 종교와 같이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주제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어루만지며 자기 목소리를 그대로 내고 있다. 유명한 학자로서 자신의 명망이 손상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애매한 태도나 망설임 없이 곧장 문제의 중심으로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마치 돈키호테 같은 분위기마저 풍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5부 뿐만 아니라 전체 책 내용에서 뽑았다). 저자에 따르면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의 선행 인류 조상들이 지구의 정복자가 된 건, 선택된 것도 아니고 위대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고, 우연이다. 전쟁과 대량학살은 어느 특정한 시대나 장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것이다. 족벌주의와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우리가 확보하게 될) 우생학적 조작 기술을 이용하려 들 테고, 그것은 결국 사회를 좀먹을 것이다. 그리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회는, 가장 부유한 사람과 가장 가난한 사람의 소득 차이가 가장 적다.

  

또 도덕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해는 절대적인 교리와 단정적 판단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및 이데올로기적 교리에 맹목적으로 기대지 말라고 경고한다. 종종 그렇듯이, 그런 교리가 오도될 때에는 대개 '무지'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가 '인공 피임'을 금지한 것도 지식 부족 때문에 교조적인 윤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고, '동성애 혐오증(homophobia)' 역시 마찬가지다. 심리학과 번식 생물학에서 나온 많은 증거들은 성교에 또 다른 추가 목적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성교의 목적은 아이를 잉태하는 것만이 아니다), 동성애의 존재는 인류의 다양성에 어떻게 건설적으로 기여하느냐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의 얘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이기적 개인이 이타적 개인을 이기는 반면,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은 이기주의자들의 집단을 이긴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개체 선택'과 '집단 선택'에 관한 내용인데, 개체 선택이 선호하는 행동의 요소들과 집단 선택이 선호하는 요소들 사이에는 (인류 역사를 영원히 관통하며) 계속해서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저자는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됐는데, 유전적인 사회성 진화의 냉엄한 법칙이 바로 일종의 '영구적 모호함'인 셈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 폴 고갱(Paul Gauguin), 1897. 유화, 141 x 376cm, 미국 보스턴미술관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지성'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의 특성을 이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지구의 정복자>는 고갱의 그림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저자가 고갱에게 전하는 말을 끝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에드워드 윌슨은 이렇게 말한다. "그림은 답이 아니다. 질문이다." 그는 한 사람의 자연과학자로서 인류의 기나긴 진화 역사를 최대한 알기 쉽게 서술하고 있으며, 또 한 사람의 동족으로서 현재 인류의 사회 문제를 나름대로 분석하는데, 심지어 사회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사안인 '조직적인 불의에 맞선 개인과 소수집단의 저항'까지도 다루고 있다(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에드워드 윌슨의 '예언'을 옮기며 리뷰를 마친다. 최근에 읽었던 책들 중에 가장 놀라운 명저로서 <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강력 추천한다!

 

"이제 내가 지닌 맹목적인 믿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몹시 원한다면, 22세기쯤이면 지구는 인류의 영원한 낙원이 되거나 적어도 그 초입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생물들에게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히겠지만, 서로에게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소박한 윤리관, 이성을 가차 없이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 태도, 우리가 진정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게 된다면, 우리의 꿈은 마침내 이곳 지구에서 실현될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인문 / 사회 / 과학 / 예술 분야 주목 신간



 

불씨잡변 - 조선의 기획자 정도전의 사상혁명 l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6
정도전 (지은이) | 병환 (옮긴이) | 아카넷 | 2013-12-29


- 불교의 대표적 이론과 인간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유학의 입장에서 비판함.

- 삼봉 정도전이 죽기 전에 저술한 생애 마지막 작품.

- 요즘 신작 드라마로도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정도전. 조선왕조 500년 역사 중에 왕들을 빼고 이 정도로 유명한 인물도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생애 최후의 작품이면서, 우리도 기본적인 지식은 갖고 있는 유교와 불교를 함께 다루고 있는 책이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최근 한 세기만 빼면 불교와 유교는 몇 백 년 동안 한반도 사람들의 곁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니..




포크를 생각하다 - 식탁의 역사
윌슨 (지은이) | 김명남 (옮긴이) | 까치글방 | 2013-12-10
원제 Consider the Fork: A History of How We Cook and Eat (2012)


- 음식의 역사는 재료와 입맛 못지않게 기술과 도구에 좌우되었다!

- 영국의 대표적 진보성향 일간신문인 [The Guardian] [The Independent] 선정 2012 올해 최고의 .

- 음식을 다룬 책은 많다. 그런데 대부분 '무엇을' 먹느냐에 관한 것이고, 이 책처럼 '어떻게' 먹느냐를 다룬 책은 흔치 않다. 이제까지 우리가 음식의 역사에서 'What'을 주로 봤다면, 수많은 찬사를 받은 <포크를 생각하다>는 바로 'How'를 보여주는 책이다. 간단한 목차만 봐도 강한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는가?

1. 냄비와 팬

2. 칼

3. 불

4. 계량

5. 갈기

6. 먹기

7. 얼음

8. 부엌

 

 


위험한 식탁
한스 울리히 그림 (지은이) | 이수영 (옮긴이) | 율리시즈 | 2013-12-16
원제 Vom Verzehr wird abgeraten: Wie uns die Industrie mit Gesundheitsnahrung krank macht (2012)


- 네슬레, 크노르, 크래프트, 켈로그, 유니레버, 다논, 바스프, 하인츠, 씨밀락, 아지노모토, 다니스코, 허벌라이프.... 산업적으로 생산되는 건강식품·기능성 식품의 작용 메커니즘과 소비자들을 위협하는 정교하고 치밀한 전략을 고발함.

- 독일의 대표적 진보성향 주간잡지인 [Der Spiegel] 논픽션 베스트셀러 1.

- 아마도 요즘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농락당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먹는 문제'일 것이다. 저지방 식사, 유기농 편향, 저콜레스테롤의 유지 관리, 비타민 필요량 섭취 등등.. 장사치를 가장한 전문가들이 나와서 온갖 좋은 식품들을 소개하며 섭식관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다 새빨간 거짓말인 경우가 많다. 그냥 제철에 로컬푸드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조리해서 골고루 먹는 게 사람 몸에 가장 좋다. 괜히 다국적기업의 인공 물질에 휩쓸리다 보면 건강만 잃기 십상이다. 하찮은 인간들이 만든 가공식품에 절대 속지 말고, 대자연을 믿어라!




다이어트의 배신 - 뚱뚱한 사람이 오래 사는가
아힘 페터스 (지은이) | 이덕임 (옮긴이) | 에코리브르 | 2013-12-20 | 원제 Mythos Ubergewicht (2013)


- 시중 서점에는 그토록 다이어트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있는가? 그리고 살이 찌는가? 뚱뚱한 사람이 오래 사는가?

- "진실을 말하자면비록 진실이 불편할지라도 세상에 빠르고 쉬울뿐더러 위험하지 않고 건강한 체중 감량 비법이란 없다. 그런 방법이 있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진실을 감추는 것이다."

- 다국적기업의 가공식품 농락이나 체중감량 전문가들의 다이어트 농락은 둘 다 거의 비슷한 매커니즘이 아닐까 싶다. 비싸더라도 저지방, 저콜레스테롤 식사를 해라! 따로 돈을 주고 비타민을 사먹어라! 과체중은 나쁘다, 비용을 들여서라도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다국적 식품기업들이 하는 말이나,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 유사하다. 그런데 사실 비만은 사회적인 문제이고, 단순히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잘못된 속설들의 함정도 많다. 이제 우리는 음식이나 체중과 관련된 산업적 조작에 그만 휘둘리고, 진정 우리 몸에 필요한 근본적인 질문과 올바른 태도를 갖기 위해 진실의 눈을 떠야할 때가 아닐까?




도덕적 인간은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 철학이 묻고 심리학이 답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
로랑 베그 (지은이) | 이세진 (옮긴이) | 부키 | 2013-12-20 | 원제 Psychologie du bien et du mal (2011)

 

-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것보다 그냥 목차를 한번 보는 게 훨씬 더 호소력이 있을 것 같다.

 

 

1 나는 누구인가
나와 거울 속의 나 | 나는 도덕적인 사람인가 | 자아의 이미지 관리 | Dennis가 dentist가 될 확률 | 자아가 기억을 조작한다 | 도덕적 자기만족 | 타인과의 비교 | 나는 평균 이상일 것이라는 착각 | 거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습니까? | 술은 양심을 가볍게 한다 | 집단 속에서 사라지는 자의식 | 가면 뒤의 안락함 | 집단 내에서 희미해지는 책임감

2 가로등이 지켜보는 사회
가로등이 지켜보는 사회 | 눈치 보는 원숭이 | 사회통제와 범죄의 상관관계 | 양심을 저버리는 사람들

3 동물이기를 거부하는 인간
이 짐승만도 못한 놈! | 동물이기를 거부하는 인간 | 인간의 동물성 | 증오의 우화집 | 어떤 인간집단이 '동물화'될 때 | '그들'과 '우리'의 경계 | 종의 도덕적 분류 | 인간이 도덕의 범위를 확장하는 이유

4 사회적인 사람은 도덕적인 사람인가
사회성이 가져오는 이점 | 우리가 법을 어기지 않는 이유 | 사회적 평판의 힘 | 언어가 도덕적 평판에 미치는 영향 | 왕따의 고통 | '다수'가 깡패다! | 만장일치를 거스르는 죄 | '검은 양'을 찾아라! | 감정의 등가 교환 | 위계질서에 순응하는 안락함 | 죄의식과 수치심의 구분 | 죄의식이 오히려 안도감을 낳는다 | 당혹감은 사회적 편입의 표식이다

 

5 정의를 무엇으로 실현할 것인가
당근과 채찍 | 무엇으로 행동을 강화할 것인가 | 넌 참 착한 아이야! | 채찍은 부메랑이 된다 | 보상은 진정한 동기 부여가 아니다 | 가정교육에 따른 아이의 도덕성 | 도덕성을 떨어뜨리는 처벌 | 사태를 악화시키는 처벌 | 정의의 실현 | 처벌에서 겨우 건질 만한 것

6 파괴적 모방과 이타적 모방
일탈행위의 모방 | 좋은 본보기를 모방할 때 | 동물도 모방을 한다 | 서로를 모방하는 인간과 원숭이 | 단순 모방에서 선택적 모방으로 | 모방은 사회의 윤활제 | 본보기를 통한 대리 학습 | 관찰을 통한 모방의 단계 | 폭력을 확산하는 파괴적 모방 | 미디어가 확산시키는 모방의 역기능 | 조건화와 학습의 관계 | 아이는 '백지상태'가 아니다 | 체벌의 정당화는 가능한가

7 도덕과 이성은 전통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장 발장의 딜레마 | 콜버그의 도덕적 추론 모형 | 콜버그 도덕적 추론 모형의 오류 | 일상 속의 도덕적 판단 | 관습적 규칙과 도덕적 규칙의 구분 | 종교가 도덕규칙에 미치는 영향 | 피해자 없는 도덕 위반 | 세 가지 인류학적 규약

 

8 인간, 감정의 딜레마에 빠지다
폭주하는 전차의 딜레마 | 뇌량을 제거당한 환자의 사후 합리화 실험 | 혐오의 심리학 | 도덕성과 청결도의 상관관계 | 예쁘면 착하다?

9 피해자의 관점에서 세상 바라보기
좋은 피해자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 | "천벌을 받아 그런 몹쓸 병에 걸렸지" | 에이즈는 부도덕의 증거인가 | '성도덕'이라는 이름의 주홍 글씨 | 죽음 앞의 인간 | 아이들의 도덕적 판단 | "넌 그래도 싸다!"는 판결 | 피해자를 업신여기는 태도에 대한 실험 | 누가 공정한 세상을 믿는가 | 도덕적 판단에 이용되는 정보들 | 감정이입의 패러독스 | 누가 피해자를 비난하는가

 

10 자신에게만 관대한 사람들
위선자를 묘사해보세요 | 성자는 자신을 보아줄 관객을 찾나니 | 나의 도덕성 포장하기 | 도덕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유혹 | 위선에 대하여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독실한 종교인은 일반인보다 관대한가? | 원숭이가 높이 올라갈수록 | 도덕 이후의 탐욕 | 약속을 지킨다는 것 | 자신에게만 관대한 사람들

11 인간이 부도덕에 굴복할 때
권위에 대한 복종 | 우리를 복종하게 만드는 조건들 | 복종하세요, 카메라 돌아갑니다! | 이데올로기와 사이코패스 | 개인의 성격과 복종의 상관관계 | 악은 그것을 보는 이의 눈 속에 있다 | 스탠퍼드 모의 감옥 | 사형수와 사형 집행인 | 친절한 간수 |관점의 차이와 악의 유혹

 

12 인간을 유혹하는 것들
무엇이 선한 일인지 알면서도 악을 행한다 | 신념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 | 급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제공하는 조건 | 약해지는 의지 | 폭력과 단맛 | 탄탈로스와 마시멜로 | 딜레마의 대가 | 술김에 저지른 일 | 섹스, 알코올, 플라세보 | 도덕과 권위주의 | 악은 자기통제의 부재 상태인가
 

 

- 2013 이그 노벨상 수상자 로랑 베그의 사회심리학 명저.

- 스스로를 '도덕적 인간'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행해온 도덕적 행위에 대한 반성. '도덕의 정의' 대한 고민 없이는 '좋은 사회' 만날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루토 크라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대의 석학,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이자 동료 학자 사이에서 즉각적인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 (the Guardian)"이라는'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 )'이 올해 자신의 새로운 저작에서 말했듯이, 세계는 지금 "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로 양분되어 있다.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지고,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불과 10여 년 남짓, 흔히 말하는 '양극화'는 확실히 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이번 세기에 과연 양극화가 인류에게 어떤 역사를 가져올지 아직 불투명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한 듯싶다. 소위 말하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양극화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이는 그 어떤 사회 문제도 앞으로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학자들을 비롯해서 전세계 수많은 언론들이 양극화에 주목하고 있으며, 다양한 국제기구들도 이와 관련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그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얼마나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잠깐 얘기를 들어보고 넘어가자.

 

"세계 인구 가운데 가장 빈곤한 10퍼센트의 사람들은 상시적인 기아 상태에 있다. 가장 부유한 1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굶주림을 겪어본 일이 없다. 최하위 10퍼센트는 자녀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최상위 10퍼센트는 자녀들이 이른바 '엇비슷한 친구들'이나 '더 나은 친구들'과만 어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더 많은 수업료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최하위 10퍼센트는 거의 언제나 사회보장도 없고 실업수당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반면, 최상위 10퍼센트는 그런 수당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최하위 10퍼센트는 도시에서 날품팔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농촌에 사는 농부들이다. 그러나 상위 10퍼센트에게는 안정적인 월급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최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거부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이 아니라 봉급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인류지리학자 Daniel Dorling <Injustice(한국판: 불의란 무엇인가, 2012)>

 

양극화, 우리 시대의 화두
 
이제 이 세상의 불평등은 단순히 하나의 견해나 이론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하는 일종의 '사실'인 셈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악화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절대 외면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고, 부자들을 비판하기 쉬운 좌파와 부자들을 옹호하기 쉬운 우파 외에 다양한 관점에서 양극화를 바라보는 여러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2012년 [파이낸셜 타임스]지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이자 2013년 국제 문제를 심도 깊게 다뤄 대중의 이해에 기여한 세계 최고의 논픽션에 수여하는 [라이오넬 겔버]상 수상작인 <플루토크라트(Plutocrats, 2012)>다.

 

 

이 책은 [워싱턴 포스트], [이코노미스트], [뉴요커], [애틀란틱] 등의 유력 언론에 기사를 기고해 왔으며, [파이낸셜 타임스]의 부편집장을 지냈고, [톰슨 로이터스]의 편집장을 맡았던 캐나다 언론인 '크리스티아 프릴랜드(Chrystia Freeland, 1968~ )'가 쓴 것이다(최근 행보를 살펴보니, 2013년 11월에 캐나다 '자유당' 멤버로 의회에 진출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Plutocrats>라는 책의 주된 입장(특징)을 일단 좀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플루토크라트'는 그리스어로 부를 의미하는 'pluto'와 권력을 의미하는 'kratos'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부와 권력을 다 가진 최고 부유층'을 뜻한다]
 
저자는 언론인 출신이고, 정치적으로도 중도적인 'Liberal'이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유명 언론인으로서 '글로벌 슈퍼 리치'들을 오랫동안 취재해온 사람이고 다양한 언론에 기사를 기고하면서 고위 임원을 거쳤다는 걸 볼 때, 특별히 어느 한쪽으로 확고한 이념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정치부 기자가 정치인과의 원만한 관계를 중시하는 것처럼, 이 저자도 슈퍼 엘리트들과의 관계 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분명한 비판이나 옹호보다는 플루토크라트 전문가로서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그들의 정체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데에 방점을 찍고 있으며, 아마도 언론인으로서의 '중립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플루토크라트,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다고 <플루토크라트>가 무미건조한 사실의 나열이나 일반적인 내용의 반복으로 채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어쨌든 유능한 저널리스트이고, 최대한 직접적인 가치 판단은 피하면서도 역사와 문화 · 산업 혁신과 사회 개혁의 측면에서 거시적으로 무척 충실하게 사태를 총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굳이 예단할 이유 없이 이 책을 정독하면서 플루토크라트라는 존재 자체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이들에 관해서 전혀 몰랐던 사람도 상당히 인상적으로 흥미롭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이게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선 '글로벌 슈퍼 리치'라는 인간들이 도대체 어떤 이들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난 다음에, 자신의 철학에 따라 좌파든 우파든 마음이 가는 비평가의 글을 읽고 판단해도 별로 늦지 않다. 어차피 현재 모습의 Plutocrats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이와 관련된 사회 변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테고, 우리의 문제의식은 21세기 내내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사이의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다.

 

 

물론 플루토크라트라는 사람들이 갑자기 지구상에 출현한 건 아니다. 역사적으로 '프로토타입(prototype)'이라고 할 만한 집단들이 몇 차례에 걸쳐 특정 시대에 존재했었고, 사회문화적으로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현재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인물들 예를 들면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와 에릭 슈미트(구글) 같은 실리콘밸리의 거부들, 또는 예전 소련 지역의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들이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중국과 인도 등의 갑부들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비슷한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과거의 유사 집단들이 가졌던 재산과는 아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요즘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엄청나게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으며(이전 세대의 1% 또는 0.1%가 그외 나머지에 비해 작게는 몇 배에서 크게는 몇 십 배에 이르는 자산을 보유했다면, 지금의 1% 또는 0.1%는 작게는 몇 백 배에서 크게는 몇 천 배에 이르는 부를 독점하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같은 '기술 혁신'으로 말미암아 과거 세대의 권능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21세기의 글로벌 슈퍼 리치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게 크게 다른 점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Plutocrats에게 국경이나 개별법도 초월할 수 있는 거의 무제한의 가능성을 부여했고, 이제 이들은 전세계를 종횡무진 누빌 수 있는 가공할 능력을 계속적으로 가질 수 있게 됐다]

 

승자독식사회의 돈과 권력, 지대추구와 인지 포획

 

이제 세계는 80:20의 사회를 넘어 99:1의 세상이 되었다. 극소수가 사회의 거의 모든 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99%의 자손들과 1%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삶을 시작한다. 양극화로 완전히 나눠진 이들은 애초에 교육의 수준부터 판이하며, 직업 선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학 졸업장도 아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존에 집안이 가지고 있던 인맥과 대학을 통해 보유하게 되는 개인적 인맥이 합쳐지면서 플루토크라트의 인맥은 그외 나머지들의 그것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고, 이는 전체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분리된 특정한 집단을 만들게 되었다. 많은 돈을 가진 소수,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돈과 권력까지 가진 극소수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독점적 지위를 가진 인간 집단들이 대부분 그렇듯, 플루토크라트도 그 지위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빈번하게 '지대추구(rent seeking, 경제주체들이 기득권을 활용해 비정상적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비생산적인 활동에 경쟁적으로 자원을 투입하는 현상)' 행위를 벌이기도 한다. 지대추구의 전형적인 예로 큰 돈을 가진 집단이 권력을 가진 집단에 접근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시장의 법칙을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결과가 바로 독재자 일가와 세습 권력이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신흥 공업국의 권력층 다수는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독점 사업권과 민영화를 통해 갑부가 된 이들 중 일부는 제한된 인재풀을 빌미로 곧장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가 되기도 한다]
 
지대추구 문제를 지적하면서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따로 설명하고 있듯이, 특히 공적인 규제와 감시가 필연적인 금융 분야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인지 포획(cognitive state capture)'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인지 포획이란 '주요 규제 기관에 뇌물을 갖다 바치는 대신, 공공 이익의 편에서 규제하고 감독해야 할 대상인 기득권 집단의 목표와 이해관계·인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정부기관 종사자들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금융 감독부서의 인적 구성 자체를 교육(대학) 또는 출신(기업)이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로 채움으로써 이들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공익보다는 사익에 더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다(프랑스에 원전 비율이 높은 원인도 인지 포획으로 설명할 수 있단다).
 
한국에서도 금융관료와 금융회사 고위직들은 상당수가 대학이나 기업의 인맥으로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고, 금융사를 관리·감독하던 관료가 퇴직 후에 금융사로 영입되어 고액의 연봉을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흔히 무슨 '감사'나 '이사' 등으로 옮겨가서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이런 현상은 법조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결국 '그놈이 그놈'인 셈인데, 어차피 맨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주변 무리가 다 비슷하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유사하고 원하는 것도 동일하다. 엄연히 공공의 이익과 개별 금융회사의 이익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감독부서 공무원의 인지 포획으로 인해 마치 '금융회사에 좋은 건 공익에도 부합'하는 일인냥 실로 어처구니 없는 망상을 품게 되는 것이다.

 

[2011년 8월 17일 한겨레 보도]

 

그리고, 한국에서 특별히 더 심각한 문제들

 

<플루토크라트>에서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주로 다루고 있는 글로벌 슈퍼 리치들은 '일하는 부자들'이고, 자수성가한 이들도 많으며, 진짜 의도야 어찌됐건 그래도 각종 기부나 공익재단을 통해 자신들의 부를 어느 정도 품위 있게 활용하려는 생각이 있는 인간들이다. 물론 부자들의 공익재단이나 기부로는 절대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돈과 권력을 다 가진 최고 부유층으로서 최소한의 미덕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 중에는 자신들의 세금을 더 올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일부는 양극화로 불안정해진 사회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비록 플루토크라트 외의 나머지 부류와 자신들이 결정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고 보지만, 그나마 마지막 인간성을 잃지는 않은 모습을 외부에 드러내는 것이다(물론 모든 플루토크라트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부자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일단 일을 하기 보다는 건물주 등으로 불로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많으며, 자수성가한 이들보다는 세습 부자가 상대적으로 더 다수를 차지하는 것 같고, 일부 대기업 외에 기부나 공익재단 활동도 그다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현황 외에 더 이상한 건, 한국에서는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인해 전세계에서 다수 출현하고 있는 각 산업의 혁신적 플루토크라트 자체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한 번 우리 사회를 둘러보라. 재벌이나 모피아와 관련이 없고, 기술 혁신을 통해 새로이 글로벌 슈퍼 엘리트로 떠오른 인물이 과연 몇 명이나 있는지..
 
이건 플루토크라트를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상관없이, 유독 한국이 다른 나라와 달리 전개되는 측면으로서 분명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국가마다 좀 차이가 있겠지만) 진정한 글로벌 슈퍼 리치라면 자신의 전문 직종과 관련된 분야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보통 100억 원 이상을 기준으로 볼 수 있을 테고, 활동 무대가 전세계에 걸쳐 있으며, 사회적으로 큰 인정을 받는 사람인데(가장 쉬운 예로, 실리콘밸리의 혁신가들을 꼽을 수 있다), 한국에서 모피아나 재벌을 빼고 나면 도대체 누가 남나? 아마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다른 나라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심각한 양극화를 겪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갑을 문제' 때문이기도 할 테고, 최악의 '재벌 동물원'이어서 그렇기도 하다. 정치인이나 행정부 관리들과 산업계 수뇌부의 유착관계 때문이기도 하고, 죄질 나쁜 '세습'에 대한 일반의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한국의 가진자들이 플루토크라트와 같은 최소한의 미덕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다. 한국의 가진자들에 비해 어쩌면 혁신적 플루토크라트는 양반이며, 이념을 차치하고 크리스티아 프릴랜드의 중립적인 시각을 그대로 믿는다면 기존의 한국 재벌들보다는 차라리 플루토크라트가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단, 한국 재벌들과 비슷한 수준의 나쁜 플루토크라트들도 있다).
 
물론 플루토크라트도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지만, 이들이 사회적 유동성과 접근성에 대한 최후의 약속을 저버리지만 않는다면, 혁신적 플루토크라트가 한국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한국에서 자수성가한 플루토크라트와 세습 재벌 간에 혈투가 벌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념적 논쟁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 아닐까? 아울러, 자기 자신을 좀 돌아보면서 말이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비참함에 무관심하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에 유감과 분노를 느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보다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더욱 극심하고, 죽음의 슬픔이 더욱 클 것이라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베의 사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우선 근원적인 얘기를 좀 해보자.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 게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좋다'와 '나쁘다'에 대한 부분부터 시작하겠다. 단도직입적으로, '쓰나미(tsunami)'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직접 쓰나미의 피해를 겪어본 사람들은 대부분 '나쁘다'라고 말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기본적으로 자연현상으로서의 쓰나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저 무심한 대자연의 활동일 뿐이며, 태풍이나 지진도 마찬가지다. 우주, 신, 자연.. 그 어떤 단어를 앞에 붙이든, 좋고 나쁨이 없는 'X의 섭리'일 따름이다.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동양사상에서도 음양오행과 육십갑자(천간과 지지)를 바탕으로 인간의 생년월일시를 통해 사람의 명운을 들여다 보기도 하지만,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장사치의 논리가 아니라면 'X의 섭리'를 논할 때 단순히 좋고 나쁨의 잣대로는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계로 오면 상황은 완전히 바뀐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모두 다 불완전한 존재이고, 단지 좋다와 나쁘다 뿐만 아니라 '옳다'와 '그르다'의 문제까지 더해진다. 게다가 우리는 '좋다'와 '옳다'가 언제나 일치하기를 바라지만, 사실 이 두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실례로, 어떤 사진기자가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를 향해 독수리가 접근하는 걸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국제뉴스로 내보냈다. 그래서 세계인들의 아프리카 기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큰 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끝내 이 사진기자는 자살했다.

 

 
도대체 왜? 그는 애처로운 아이를 보고도 곧바로 구하지 않고, 먼저 사진부터 찍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들었고, 자기 스스로도 죄책감을 느껴 자살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좋은' 일을 했다. 이 사진기자로 인해 전세계에서 엄청난 구호 물품이 도착했고, 기아에 허덕이는 다수의 아이들이 삶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옳은' 일을 하지는 못했다. 독수리가 아이에게 접근하는데도 당장 아이에게 달려가지 않고, 멀리서 사진을 찍은 것이다. 물론 아이가 죽지는 않았지만, 그는 좋은 일과 옳은 일 사이에서 좋은 일을 선택한 셈이 됐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건 참 어려운 문제다. 뭐가 좋은지 나쁜지, 뭐가 옳은지 그른지.. 좋은 것과 옳은 것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상이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옳고 그름 · 좋고 나쁨에 대한 고민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고, 또 다수의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있는 '사회'에서 일종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판단을 내려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 그에 따른 정리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l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은이) | 오월의봄 | 2013-10-30 | 272쪽 (반양장본)

 

그저 '다른 것'을 아예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히 문제지만, 분명히 '틀린 것'을 단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확실히 문제가 있다.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틀린 걸 틀렸다고 제대로 말하지 않는 것 역시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공직자(구미시장)가 국민의 세금이 지원되는 행사(박정희 탄신제)에 가서 죽은 정치인(박정희)을 두고 '반인반신' 운운하는 건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이런 짓은 '독재'나 '종교'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전혀 용인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런 걸 '잘못됐다'고 말하면, 엉뚱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다. 엄연히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고 그저 다르다라고만 말하는 사회를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틀린 걸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다음에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 아닌가? 틀린 걸 틀렸다고 제대로 말하는 것, 이게 바로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깊이 있는 분석이나 나름의 해결책 제시도 이 첫걸음이 명확하게 이뤄지고 난 다음에 와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간베스트저장소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는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은, 일베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례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동안 일베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잘못됐다'고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과연 이걸 쓴 이유가 무엇일까? 일베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쓴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단순 사건 나열 식으로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있는가?" 틀린 걸 틀렸다고 제대로 말하는 '첫걸음'이 명확하게 이뤄지지 않은 것, 이게 바로 <일베의 사상>의 가장 큰 실수가 아닌가 싶다.
 
도대체 왜, 저자 박가분은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설마 일간베스트저장소에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일베에 관한 책을 쓴다면 당연히 이 커뮤니티가 물의를 일으키며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건들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이 필수적인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무슨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혹시 일베 유저들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또는 자기 논리에 자신이 없어서? 아니면 그저 한 사람의 '먹물'로서 점잔을 빼는 것일까? 저자의 소심함에 대해서는 일단 이쯤에서 정리하고, 다음 얘기를 계속하자.

 

 

어떤 사회 현상이든 홀로 동떨어져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체 사회나 여러 인간들과 다양한 영향을 주고 받고, 어느 정도 맥락이란 게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회 비평 서적은 종합적인 통찰력의 제공이 중요하고, 또 그것이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은 <일베의 사상>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여 놓았지만, 곳곳에 쉽지 않은 외국 학자 인용과 단편적인 해부는 있을지언정 진정한 일베의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책의 구성 자체가 이런 저런 파편화된 주제들의 연속일 뿐,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다 읽어봐도 전반적으로 유기적인 결합이 부실한 것이다.
 
가장 단순한 예로, 일베 유저들의 전체 구성에 대해서도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박가분은 상당한 분량을 들여서 촛불 시민들과 일베 유저들의 관련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후반부에는 '쌍생아'라고까지 말한다), 촛불 시민들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는 일베 유저는 전체 일베 구성원들 중에 그저 일부일 뿐이란 걸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일간베스트저장소는 '디시인사이드'의 일부 극단적인 자료들을 모아놓은 사이트로 시작됐는데, 애초에 디시인사이드 유저들 중에는 촛불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박가분은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그저 웬만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어딜가나 다 볼 수 있는 잉여, 막장, 병맛, 관심병 등의 일반적인 '문화'에 대한 얘기를 초반에 정리하는 게 고작이다. 이런 문화가 일베만의 것인가? 아니, 이런 문화 중에 일베에서 처음 시작된 게 있기는 한가? 물론 이와 같은 하위 문화의 특성상 그 누구도 단언하기 어렵겠지만, 이런 것들이 일베만의 특수한 문화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도대체 왜 저자는 정작 필요한 분석은 제대로 하지 않고, 괜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촛불과 일베를 연결시키는 데에 과도한 분량을 허비하고 있을까?

 

종합적인 분석을 하지 못한 예는 또 있다. 저자가 486 세대들이 하지 못한 일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개인적으로도 원래 관심을 두고 있던 부분이지만, 이 책은 굉장히 미시적인 차원에서만 적은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일베 유저들 중에 486의 자녀 세대가 많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우리는 이걸 바탕으로 광범위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 노무현의 실패와 486의 실패, 486의 가치와 그 자녀들에 대한 교육, 김대중·노무현에 대한 실망과 부모 세대에 대한 반발, 486 부모와 자식들로 구성된 가정의 붕괴 등등 굉장히 다층적으로 분석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486과 일베의 관계를 제대로 고찰하지 못한 것, 이게 바로 <일베의 사상>의 가장 큰 허점이 아닐까 싶다.

 

 

   응답하라 486, 안녕들 하십니까?

 

 

박가분이 얼마나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베의 제일 핵심적인 특징은 '극단성'이다. 애초에 디시인사이드에서 떨어져 나온 이유도 '게시판 관리'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고, 급격하게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결국 사회 일반의 규범을 벗어난 극단적인 콘텐츠(특정 지역 혐오, 여성 혐오, 특정 인물 혐오 등)로 인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극단적이지 않은 범위 내에서는 인터넷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내용들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지역주의나 여성 비하도 너무나 흔한데, 일베는 보통 다른 사이트들이 꺼려하는 극단성을 강력한 무기로 세력을 확장해온 것이다.
 
일베가 그동안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들 역시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뭐든지 극단적이고 노골적으로 어떤 주제를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유머 코드나 유행어 같은 것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인터넷의 특성상 어차피 극단적인 게 일반적인 콘텐츠보다는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기 마련이고, '게시판 관리'라는 것 자체가 없는 일베에서는 유저들이 점점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경쟁적으로 극단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다보니, 도저히 사회의 일반 상식으로는 허용될 수 없는 수준까지 침범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급기야 '일베충'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 것이다.

 

만약 일베에서 극단성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일베에 주목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굳이 심각한 이념 얘기까지 할 이유도 없다(많은 이들이 이미 말하고 있듯이, 과연 일베를 정상적인 '우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일베의 사상>은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이라는 부제까지 달고,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온갖 억지스러운 과잉 의미 부여로 점철되어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장 기본적으로 틀린 것을 틀린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일베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보다는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분석에 머무르고 있으며, 과도하게 촛불과 일베를 연결시키면서 말이다.
 
저자 박가분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혹시, 어떻게든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무리수를 둔 건 아닐까? 하긴 그냥 신문 기고문이나 블로그 포스트도 아니고 돈을 받고 판매하는 사회과학서적인데, 이 정도 의미부여는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명색이 '청년논객'이라고 한다면 이런 저런 내용도 쉽지 않은 인용에 공을 들이기보다는, 좀 더 본인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정면승부를 하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그저 먹물로서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잡설을 늘어 놓기보다는, 그냥 곧장 명료하게 (다른 권위자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더라도) 자신만의 논리를 펼쳤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말이다. 안 그래도 한국에는 40대 이상을 빼면 30대 이하에서는 이렇다할 논객이 없는데, 박가분이라도 좀 제대로 활동하길 바란다. 언제까지 우리가 486의 얘기만 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