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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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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석학,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이자 동료 학자 사이에서 즉각적인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 (the Guardian)"이라는'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 )'이 올해 자신의 새로운 저작에서 말했듯이, 세계는 지금 "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로 양분되어 있다.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지고,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불과 10여 년 남짓, 흔히 말하는 '양극화'는 확실히 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이번 세기에 과연 양극화가 인류에게 어떤 역사를 가져올지 아직 불투명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한 듯싶다. 소위 말하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양극화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이는 그 어떤 사회 문제도 앞으로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학자들을 비롯해서 전세계 수많은 언론들이 양극화에 주목하고 있으며, 다양한 국제기구들도 이와 관련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그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얼마나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잠깐 얘기를 들어보고 넘어가자.

 

"세계 인구 가운데 가장 빈곤한 10퍼센트의 사람들은 상시적인 기아 상태에 있다. 가장 부유한 1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굶주림을 겪어본 일이 없다. 최하위 10퍼센트는 자녀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최상위 10퍼센트는 자녀들이 이른바 '엇비슷한 친구들'이나 '더 나은 친구들'과만 어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더 많은 수업료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최하위 10퍼센트는 거의 언제나 사회보장도 없고 실업수당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반면, 최상위 10퍼센트는 그런 수당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최하위 10퍼센트는 도시에서 날품팔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농촌에 사는 농부들이다. 그러나 상위 10퍼센트에게는 안정적인 월급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최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거부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이 아니라 봉급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인류지리학자 Daniel Dorling <Injustice(한국판: 불의란 무엇인가, 2012)>

 

양극화, 우리 시대의 화두
 
이제 이 세상의 불평등은 단순히 하나의 견해나 이론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하는 일종의 '사실'인 셈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악화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절대 외면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고, 부자들을 비판하기 쉬운 좌파와 부자들을 옹호하기 쉬운 우파 외에 다양한 관점에서 양극화를 바라보는 여러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2012년 [파이낸셜 타임스]지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이자 2013년 국제 문제를 심도 깊게 다뤄 대중의 이해에 기여한 세계 최고의 논픽션에 수여하는 [라이오넬 겔버]상 수상작인 <플루토크라트(Plutocrats, 2012)>다.

 

 

이 책은 [워싱턴 포스트], [이코노미스트], [뉴요커], [애틀란틱] 등의 유력 언론에 기사를 기고해 왔으며, [파이낸셜 타임스]의 부편집장을 지냈고, [톰슨 로이터스]의 편집장을 맡았던 캐나다 언론인 '크리스티아 프릴랜드(Chrystia Freeland, 1968~ )'가 쓴 것이다(최근 행보를 살펴보니, 2013년 11월에 캐나다 '자유당' 멤버로 의회에 진출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Plutocrats>라는 책의 주된 입장(특징)을 일단 좀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플루토크라트'는 그리스어로 부를 의미하는 'pluto'와 권력을 의미하는 'kratos'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부와 권력을 다 가진 최고 부유층'을 뜻한다]
 
저자는 언론인 출신이고, 정치적으로도 중도적인 'Liberal'이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유명 언론인으로서 '글로벌 슈퍼 리치'들을 오랫동안 취재해온 사람이고 다양한 언론에 기사를 기고하면서 고위 임원을 거쳤다는 걸 볼 때, 특별히 어느 한쪽으로 확고한 이념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정치부 기자가 정치인과의 원만한 관계를 중시하는 것처럼, 이 저자도 슈퍼 엘리트들과의 관계 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분명한 비판이나 옹호보다는 플루토크라트 전문가로서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그들의 정체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데에 방점을 찍고 있으며, 아마도 언론인으로서의 '중립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플루토크라트,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다고 <플루토크라트>가 무미건조한 사실의 나열이나 일반적인 내용의 반복으로 채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어쨌든 유능한 저널리스트이고, 최대한 직접적인 가치 판단은 피하면서도 역사와 문화 · 산업 혁신과 사회 개혁의 측면에서 거시적으로 무척 충실하게 사태를 총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굳이 예단할 이유 없이 이 책을 정독하면서 플루토크라트라는 존재 자체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이들에 관해서 전혀 몰랐던 사람도 상당히 인상적으로 흥미롭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이게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선 '글로벌 슈퍼 리치'라는 인간들이 도대체 어떤 이들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난 다음에, 자신의 철학에 따라 좌파든 우파든 마음이 가는 비평가의 글을 읽고 판단해도 별로 늦지 않다. 어차피 현재 모습의 Plutocrats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이와 관련된 사회 변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테고, 우리의 문제의식은 21세기 내내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사이의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다.

 

 

물론 플루토크라트라는 사람들이 갑자기 지구상에 출현한 건 아니다. 역사적으로 '프로토타입(prototype)'이라고 할 만한 집단들이 몇 차례에 걸쳐 특정 시대에 존재했었고, 사회문화적으로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현재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인물들 예를 들면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와 에릭 슈미트(구글) 같은 실리콘밸리의 거부들, 또는 예전 소련 지역의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들이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중국과 인도 등의 갑부들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비슷한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과거의 유사 집단들이 가졌던 재산과는 아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요즘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엄청나게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으며(이전 세대의 1% 또는 0.1%가 그외 나머지에 비해 작게는 몇 배에서 크게는 몇 십 배에 이르는 자산을 보유했다면, 지금의 1% 또는 0.1%는 작게는 몇 백 배에서 크게는 몇 천 배에 이르는 부를 독점하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같은 '기술 혁신'으로 말미암아 과거 세대의 권능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21세기의 글로벌 슈퍼 리치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게 크게 다른 점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Plutocrats에게 국경이나 개별법도 초월할 수 있는 거의 무제한의 가능성을 부여했고, 이제 이들은 전세계를 종횡무진 누빌 수 있는 가공할 능력을 계속적으로 가질 수 있게 됐다]

 

승자독식사회의 돈과 권력, 지대추구와 인지 포획

 

이제 세계는 80:20의 사회를 넘어 99:1의 세상이 되었다. 극소수가 사회의 거의 모든 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99%의 자손들과 1%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삶을 시작한다. 양극화로 완전히 나눠진 이들은 애초에 교육의 수준부터 판이하며, 직업 선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학 졸업장도 아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존에 집안이 가지고 있던 인맥과 대학을 통해 보유하게 되는 개인적 인맥이 합쳐지면서 플루토크라트의 인맥은 그외 나머지들의 그것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고, 이는 전체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분리된 특정한 집단을 만들게 되었다. 많은 돈을 가진 소수,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돈과 권력까지 가진 극소수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독점적 지위를 가진 인간 집단들이 대부분 그렇듯, 플루토크라트도 그 지위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빈번하게 '지대추구(rent seeking, 경제주체들이 기득권을 활용해 비정상적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비생산적인 활동에 경쟁적으로 자원을 투입하는 현상)' 행위를 벌이기도 한다. 지대추구의 전형적인 예로 큰 돈을 가진 집단이 권력을 가진 집단에 접근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시장의 법칙을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결과가 바로 독재자 일가와 세습 권력이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신흥 공업국의 권력층 다수는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독점 사업권과 민영화를 통해 갑부가 된 이들 중 일부는 제한된 인재풀을 빌미로 곧장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가 되기도 한다]
 
지대추구 문제를 지적하면서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따로 설명하고 있듯이, 특히 공적인 규제와 감시가 필연적인 금융 분야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인지 포획(cognitive state capture)'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인지 포획이란 '주요 규제 기관에 뇌물을 갖다 바치는 대신, 공공 이익의 편에서 규제하고 감독해야 할 대상인 기득권 집단의 목표와 이해관계·인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정부기관 종사자들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금융 감독부서의 인적 구성 자체를 교육(대학) 또는 출신(기업)이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로 채움으로써 이들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공익보다는 사익에 더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다(프랑스에 원전 비율이 높은 원인도 인지 포획으로 설명할 수 있단다).
 
한국에서도 금융관료와 금융회사 고위직들은 상당수가 대학이나 기업의 인맥으로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고, 금융사를 관리·감독하던 관료가 퇴직 후에 금융사로 영입되어 고액의 연봉을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흔히 무슨 '감사'나 '이사' 등으로 옮겨가서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이런 현상은 법조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결국 '그놈이 그놈'인 셈인데, 어차피 맨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주변 무리가 다 비슷하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유사하고 원하는 것도 동일하다. 엄연히 공공의 이익과 개별 금융회사의 이익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감독부서 공무원의 인지 포획으로 인해 마치 '금융회사에 좋은 건 공익에도 부합'하는 일인냥 실로 어처구니 없는 망상을 품게 되는 것이다.

 

[2011년 8월 17일 한겨레 보도]

 

그리고, 한국에서 특별히 더 심각한 문제들

 

<플루토크라트>에서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주로 다루고 있는 글로벌 슈퍼 리치들은 '일하는 부자들'이고, 자수성가한 이들도 많으며, 진짜 의도야 어찌됐건 그래도 각종 기부나 공익재단을 통해 자신들의 부를 어느 정도 품위 있게 활용하려는 생각이 있는 인간들이다. 물론 부자들의 공익재단이나 기부로는 절대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돈과 권력을 다 가진 최고 부유층으로서 최소한의 미덕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 중에는 자신들의 세금을 더 올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일부는 양극화로 불안정해진 사회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비록 플루토크라트 외의 나머지 부류와 자신들이 결정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고 보지만, 그나마 마지막 인간성을 잃지는 않은 모습을 외부에 드러내는 것이다(물론 모든 플루토크라트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부자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일단 일을 하기 보다는 건물주 등으로 불로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많으며, 자수성가한 이들보다는 세습 부자가 상대적으로 더 다수를 차지하는 것 같고, 일부 대기업 외에 기부나 공익재단 활동도 그다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현황 외에 더 이상한 건, 한국에서는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인해 전세계에서 다수 출현하고 있는 각 산업의 혁신적 플루토크라트 자체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한 번 우리 사회를 둘러보라. 재벌이나 모피아와 관련이 없고, 기술 혁신을 통해 새로이 글로벌 슈퍼 엘리트로 떠오른 인물이 과연 몇 명이나 있는지..
 
이건 플루토크라트를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상관없이, 유독 한국이 다른 나라와 달리 전개되는 측면으로서 분명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국가마다 좀 차이가 있겠지만) 진정한 글로벌 슈퍼 리치라면 자신의 전문 직종과 관련된 분야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보통 100억 원 이상을 기준으로 볼 수 있을 테고, 활동 무대가 전세계에 걸쳐 있으며, 사회적으로 큰 인정을 받는 사람인데(가장 쉬운 예로, 실리콘밸리의 혁신가들을 꼽을 수 있다), 한국에서 모피아나 재벌을 빼고 나면 도대체 누가 남나? 아마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다른 나라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심각한 양극화를 겪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갑을 문제' 때문이기도 할 테고, 최악의 '재벌 동물원'이어서 그렇기도 하다. 정치인이나 행정부 관리들과 산업계 수뇌부의 유착관계 때문이기도 하고, 죄질 나쁜 '세습'에 대한 일반의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한국의 가진자들이 플루토크라트와 같은 최소한의 미덕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다. 한국의 가진자들에 비해 어쩌면 혁신적 플루토크라트는 양반이며, 이념을 차치하고 크리스티아 프릴랜드의 중립적인 시각을 그대로 믿는다면 기존의 한국 재벌들보다는 차라리 플루토크라트가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단, 한국 재벌들과 비슷한 수준의 나쁜 플루토크라트들도 있다).
 
물론 플루토크라트도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지만, 이들이 사회적 유동성과 접근성에 대한 최후의 약속을 저버리지만 않는다면, 혁신적 플루토크라트가 한국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한국에서 자수성가한 플루토크라트와 세습 재벌 간에 혈투가 벌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념적 논쟁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 아닐까? 아울러, 자기 자신을 좀 돌아보면서 말이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비참함에 무관심하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에 유감과 분노를 느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보다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더욱 극심하고, 죽음의 슬픔이 더욱 클 것이라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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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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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근원적인 얘기를 좀 해보자.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 게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좋다'와 '나쁘다'에 대한 부분부터 시작하겠다. 단도직입적으로, '쓰나미(tsunami)'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직접 쓰나미의 피해를 겪어본 사람들은 대부분 '나쁘다'라고 말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기본적으로 자연현상으로서의 쓰나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저 무심한 대자연의 활동일 뿐이며, 태풍이나 지진도 마찬가지다. 우주, 신, 자연.. 그 어떤 단어를 앞에 붙이든, 좋고 나쁨이 없는 'X의 섭리'일 따름이다.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동양사상에서도 음양오행과 육십갑자(천간과 지지)를 바탕으로 인간의 생년월일시를 통해 사람의 명운을 들여다 보기도 하지만,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장사치의 논리가 아니라면 'X의 섭리'를 논할 때 단순히 좋고 나쁨의 잣대로는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계로 오면 상황은 완전히 바뀐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모두 다 불완전한 존재이고, 단지 좋다와 나쁘다 뿐만 아니라 '옳다'와 '그르다'의 문제까지 더해진다. 게다가 우리는 '좋다'와 '옳다'가 언제나 일치하기를 바라지만, 사실 이 두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실례로, 어떤 사진기자가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를 향해 독수리가 접근하는 걸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국제뉴스로 내보냈다. 그래서 세계인들의 아프리카 기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큰 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끝내 이 사진기자는 자살했다.

 

 
도대체 왜? 그는 애처로운 아이를 보고도 곧바로 구하지 않고, 먼저 사진부터 찍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들었고, 자기 스스로도 죄책감을 느껴 자살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좋은' 일을 했다. 이 사진기자로 인해 전세계에서 엄청난 구호 물품이 도착했고, 기아에 허덕이는 다수의 아이들이 삶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옳은' 일을 하지는 못했다. 독수리가 아이에게 접근하는데도 당장 아이에게 달려가지 않고, 멀리서 사진을 찍은 것이다. 물론 아이가 죽지는 않았지만, 그는 좋은 일과 옳은 일 사이에서 좋은 일을 선택한 셈이 됐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건 참 어려운 문제다. 뭐가 좋은지 나쁜지, 뭐가 옳은지 그른지.. 좋은 것과 옳은 것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상이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옳고 그름 · 좋고 나쁨에 대한 고민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고, 또 다수의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있는 '사회'에서 일종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판단을 내려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 그에 따른 정리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l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은이) | 오월의봄 | 2013-10-30 | 272쪽 (반양장본)

 

그저 '다른 것'을 아예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히 문제지만, 분명히 '틀린 것'을 단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확실히 문제가 있다.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틀린 걸 틀렸다고 제대로 말하지 않는 것 역시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공직자(구미시장)가 국민의 세금이 지원되는 행사(박정희 탄신제)에 가서 죽은 정치인(박정희)을 두고 '반인반신' 운운하는 건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이런 짓은 '독재'나 '종교'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전혀 용인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런 걸 '잘못됐다'고 말하면, 엉뚱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다. 엄연히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고 그저 다르다라고만 말하는 사회를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틀린 걸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다음에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 아닌가? 틀린 걸 틀렸다고 제대로 말하는 것, 이게 바로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깊이 있는 분석이나 나름의 해결책 제시도 이 첫걸음이 명확하게 이뤄지고 난 다음에 와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간베스트저장소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는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은, 일베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례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동안 일베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잘못됐다'고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과연 이걸 쓴 이유가 무엇일까? 일베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쓴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단순 사건 나열 식으로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있는가?" 틀린 걸 틀렸다고 제대로 말하는 '첫걸음'이 명확하게 이뤄지지 않은 것, 이게 바로 <일베의 사상>의 가장 큰 실수가 아닌가 싶다.
 
도대체 왜, 저자 박가분은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설마 일간베스트저장소에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일베에 관한 책을 쓴다면 당연히 이 커뮤니티가 물의를 일으키며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건들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이 필수적인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무슨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혹시 일베 유저들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또는 자기 논리에 자신이 없어서? 아니면 그저 한 사람의 '먹물'로서 점잔을 빼는 것일까? 저자의 소심함에 대해서는 일단 이쯤에서 정리하고, 다음 얘기를 계속하자.

 

 

어떤 사회 현상이든 홀로 동떨어져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체 사회나 여러 인간들과 다양한 영향을 주고 받고, 어느 정도 맥락이란 게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회 비평 서적은 종합적인 통찰력의 제공이 중요하고, 또 그것이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은 <일베의 사상>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여 놓았지만, 곳곳에 쉽지 않은 외국 학자 인용과 단편적인 해부는 있을지언정 진정한 일베의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책의 구성 자체가 이런 저런 파편화된 주제들의 연속일 뿐,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다 읽어봐도 전반적으로 유기적인 결합이 부실한 것이다.
 
가장 단순한 예로, 일베 유저들의 전체 구성에 대해서도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박가분은 상당한 분량을 들여서 촛불 시민들과 일베 유저들의 관련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후반부에는 '쌍생아'라고까지 말한다), 촛불 시민들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는 일베 유저는 전체 일베 구성원들 중에 그저 일부일 뿐이란 걸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일간베스트저장소는 '디시인사이드'의 일부 극단적인 자료들을 모아놓은 사이트로 시작됐는데, 애초에 디시인사이드 유저들 중에는 촛불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박가분은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그저 웬만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어딜가나 다 볼 수 있는 잉여, 막장, 병맛, 관심병 등의 일반적인 '문화'에 대한 얘기를 초반에 정리하는 게 고작이다. 이런 문화가 일베만의 것인가? 아니, 이런 문화 중에 일베에서 처음 시작된 게 있기는 한가? 물론 이와 같은 하위 문화의 특성상 그 누구도 단언하기 어렵겠지만, 이런 것들이 일베만의 특수한 문화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도대체 왜 저자는 정작 필요한 분석은 제대로 하지 않고, 괜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촛불과 일베를 연결시키는 데에 과도한 분량을 허비하고 있을까?

 

종합적인 분석을 하지 못한 예는 또 있다. 저자가 486 세대들이 하지 못한 일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개인적으로도 원래 관심을 두고 있던 부분이지만, 이 책은 굉장히 미시적인 차원에서만 적은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일베 유저들 중에 486의 자녀 세대가 많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우리는 이걸 바탕으로 광범위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 노무현의 실패와 486의 실패, 486의 가치와 그 자녀들에 대한 교육, 김대중·노무현에 대한 실망과 부모 세대에 대한 반발, 486 부모와 자식들로 구성된 가정의 붕괴 등등 굉장히 다층적으로 분석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486과 일베의 관계를 제대로 고찰하지 못한 것, 이게 바로 <일베의 사상>의 가장 큰 허점이 아닐까 싶다.

 

 

   응답하라 486, 안녕들 하십니까?

 

 

박가분이 얼마나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베의 제일 핵심적인 특징은 '극단성'이다. 애초에 디시인사이드에서 떨어져 나온 이유도 '게시판 관리'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고, 급격하게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결국 사회 일반의 규범을 벗어난 극단적인 콘텐츠(특정 지역 혐오, 여성 혐오, 특정 인물 혐오 등)로 인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극단적이지 않은 범위 내에서는 인터넷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내용들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지역주의나 여성 비하도 너무나 흔한데, 일베는 보통 다른 사이트들이 꺼려하는 극단성을 강력한 무기로 세력을 확장해온 것이다.
 
일베가 그동안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들 역시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뭐든지 극단적이고 노골적으로 어떤 주제를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유머 코드나 유행어 같은 것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인터넷의 특성상 어차피 극단적인 게 일반적인 콘텐츠보다는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기 마련이고, '게시판 관리'라는 것 자체가 없는 일베에서는 유저들이 점점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경쟁적으로 극단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다보니, 도저히 사회의 일반 상식으로는 허용될 수 없는 수준까지 침범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급기야 '일베충'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 것이다.

 

만약 일베에서 극단성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일베에 주목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굳이 심각한 이념 얘기까지 할 이유도 없다(많은 이들이 이미 말하고 있듯이, 과연 일베를 정상적인 '우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일베의 사상>은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이라는 부제까지 달고,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온갖 억지스러운 과잉 의미 부여로 점철되어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장 기본적으로 틀린 것을 틀린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일베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보다는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분석에 머무르고 있으며, 과도하게 촛불과 일베를 연결시키면서 말이다.
 
저자 박가분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혹시, 어떻게든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무리수를 둔 건 아닐까? 하긴 그냥 신문 기고문이나 블로그 포스트도 아니고 돈을 받고 판매하는 사회과학서적인데, 이 정도 의미부여는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명색이 '청년논객'이라고 한다면 이런 저런 내용도 쉽지 않은 인용에 공을 들이기보다는, 좀 더 본인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정면승부를 하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그저 먹물로서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잡설을 늘어 놓기보다는, 그냥 곧장 명료하게 (다른 권위자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더라도) 자신만의 논리를 펼쳤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말이다. 안 그래도 한국에는 40대 이상을 빼면 30대 이하에서는 이렇다할 논객이 없는데, 박가분이라도 좀 제대로 활동하길 바란다. 언제까지 우리가 486의 얘기만 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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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버트런드 러셀이 1937년에 쓴 <억압받는 자들의 미덕>이라는 에세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어른들이 스스로를 위해 마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위한은 새로이 아동 심리학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전통 신학에서는 사탄의 수족으로, 또 교육 개혁가들의 머릿속에서는 신비롭게 윤색된 천사로 여겨졌던 아이들은 다시금 어린 악마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탄에게 조종당하는 신학적 악마가 아니라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과학적이고 프로이트적인 혐오 대상이 된 것이다. 아이들은 카톨릭 수사의 가열한 꾸짖음을 들을 때보다 더욱 사악한 존재가 되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오늘날의 교과서에서 아이들은 못된 공상을 꾸미는 데에 영특함과 고집을 발휘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과거의 사례 가운데 여기에 비교할 만한 것은 오로지 성 안토니우스의 시련뿐이다. 이 모두가 객관적 진리일까? 아니면 그저 어린 골칫덩이들을 두들겨 팰 수 없게 된 어른들이 그 보상으로 만들어 낸 상상일 뿐일까? 각 질문의 답은 프로이트 심리학의 추종자들한테서 듣기로 하자."

 

미셸 옹프레가 쓴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적 평전'이라는 <우상의 추락>을 읽은 다음, 개인적으로 딱 하고 싶은 말이 바로 버트런드 러셀 에세이의 인용구 마지막 문장이다. "각 질문의 답은 프로이트 심리학의 추종자들한테서 듣기로 하자."

 

심리학이라는 용어가 적합할지 아니면 정신분석학이라는 용어가 적합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상의 추락>은 프로이트 추종자들을 위한 책이 아닐까 싶다. 프로이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과연 '우상'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미셸 옹프레가 '비판적 평전'을 쓰는 것의 의미 자체를 우선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저자는 꽤 긴 '서문'을 통해 자신에게 있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먼저 설명하고 있지만, 솔직히 프로이트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리 공감이 잘 되지는 않는다. 그저 상식적인 수준에서 일종의 '스토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일 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프로이트와 관련된 '디테일'을 이해하며 보는 건 아닌 것이다.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미셸 옹프레에게 있어서 프로이트는 '내 우울한 청소년기를 견디게 해준 천재'인데 이 당시 그를 사로잡은 책 세 권은 니체의 <적그리스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프로이트의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라고 한다. 게다가 저자는 철학자이고, 철학교사이며, 50권이 넘는 책을 펴낸 저술가이다. 그러니, 쉰 살이 넘은 미셸 옹프레가 프로이트와 관련해 <우상의 추락>에 담은 내용들은 상당히 디테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우상'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 수준이 그렇게 낮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이야기'로서 읽으면 그 나름대로 괜찮다. 하지만 그 디테일과 볼륨 때문에, 완전히 몰입하기는 사실 만만치 않다.

 

결국 <우상의 추락>은 소위 말해 '아는 만큼 보이는' 책이 되기가 쉬운 것이다. 아마 프로이트라는 한 인간과 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가 보면 참 훌륭한 만찬이 될 테고(단, '비판적' 평전이라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별로 그렇지 못한 독자에게는 좀 지루한 오찬이 되기 십상일 듯하다. 불행히도, 필자에게는 만찬보다는 오찬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상'의 의미에 대해,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로 우상이라면 흔히 말하는 '아이돌'인데, 여기서는 당연히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는 아이돌일 것이다. 일단, 프로이트가 과연 아이돌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만한 인물인가? 솔직히, 이것부터 좀 고민이 된다. 부정적인 뉘앙스를 무시하면 추종자들은 대부분 동의할 테지만, 그외 사람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이 한때 굉장한 유행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므로, 요즘 텔레비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바로 그 아이돌 가수와 비슷한 의미라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와 동시에 아이돌 가수들과 유사한 특성을 가질 수도 있다. 팬들에게는 아이돌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소중하지만, 팬이 아닌 이들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추종자들에게는 <우상의 추락>에 나오는 디테일한 내용들이 모두 중요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저 한 스토리상의 섬세한 설정처럼 받아들여질 뿐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프로이트에 관한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상당히 버거울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미셸 옹프레가 학자보다는 좀 더 작가적인 입장에서 전반적인 서술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어차피 정신분석에 대한 학술서가 아니라 프로이트에 대한 평전(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필자의 논평을 겸한 전기)이니까, 약간 그런 식으로 풀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애초에 미셸 옹프레가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프로이트와 관련된 놀라운 디테일들을 읽으면서 잘만 구성하면 무척 재미있는 드라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저자의 서술을 보고 드라마틱한 흥미를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너무 많은 인용과 직접적인 설명이 몰입에 방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기본 소재 자체가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설사 불가피하다손 치더라도, 일반 독자 입장에서 이걸 장점이라고 보긴 힘든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추종자들에게 이는 다른 책에서는 찾기 힘든 탁월한 '미덕'일 수 있다.

 

"스타나 아이돌은 대중의 욕망을 샤워처럼 많이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무대에 올랐을 때, 많은 대중들의 욕망을 대변해 줄 수 있다." -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

 

글쎄 프로이트 얘기를 하면서 이와 같은 인용을 하는 게 잘 어울릴지는 미지수지만, 어쨌든 '우상'에 관한 두 번째 논의는 '대중의 욕망'을 중심으로 하고자 한다. 프로이트나 그의 정신분석학이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 역시 대중의 욕망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텐데, 이에 대해서는 미셸 옹프레도 분명히 동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얘기를 참 많이 하지만, 마지막 결론 '변증법적 망상'에서 저자는 정신분석학이 성공을 거두게 된 핵심 키워드 다섯 가지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성(性)

2. 유럽문화의 공세

3. 종교

4. 역사적 분위기

5. 사상적 오해

 

사실, 이 다섯 가지가 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그 이후 얼마간 대중의 욕망을 대변한다. 당시 성 담론의 폭발은 물론이고, 1차 대전을 전후한 전세계적 유럽문화의 확산, 그럼에도 아직 종교적 관념을 전방위적으로 적용하는 것, 전쟁 이후의 혼란과 허무, 기존의 사상과 신념 붕괴 속에서 새로운 사상으로서의 지위 장악 등..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역시 역사적 맥락과 인류의 변화 위에서 발흥한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아이돌'은 어떻게 됐나? 시대가 변했고, 대중의 욕망도 바뀌었다. 이미 성(性)은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다뤄진 주제이고, 유럽 중심의 세계관도 꽤 옅어졌으며, 종교적 관념은 더이상 문제가 안 된다. 전쟁을 겪은 사람보다 겪지 않은 사람이 이제 훨씬 더 많으며, 마르크스처럼 프로이트도 지금은 기존 사상으로서 무수한 책 속에 그저 '존재'한다. 결국 대중적 욕망의 중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어쩌면 그래서 <우상의 추락>과 같은 책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프로이트는 그 이후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정신분석학 역시 전영역에 걸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을 읽지 않았다고 요즘 경제문제를 논할 수 없는 게 아니듯,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모른다고 심리 분석을 아예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조용필 음악을 전혀 안 들어 봤어도 아이돌그룹의 음악을 만끽할 수 있고, 고전영화를 한번도 본 적이 없어도 최신개봉작을 맘껏 즐길 수 있다.

 

다만 소위 말하는 '깊이'가 문제인데, 인간사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깊이를 달성하는 길은 단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다. 단언컨대, 프로이트가 100년 뒤에 태어났다면 분명히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대중의 욕망이 언제나 변화하듯이, 그 욕망을 대변하는 아이돌도 항상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상의 추락'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미셸 옹프레의 <우상의 추락>은 어쨌든 위시리스트의 맨 끝에 위치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추종자들에게는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을 자기 나름대로 최대한 사유한 다음에 읽기에 좋고, 그외 사람들에게는 프로이트가 살았던 당대 학자들의 유산을 섭렵하고 난 다음에 모자이크의 빈 부분을 채우는 과정에서 스스로 어떤 중요성이 느껴질 때 읽기에 좋다.

 

자신의 욕망을 대변해줄 아이돌을 굳이 처음부터 추락시킬 이유도 없으며, 아이돌 자체가 아닌데 굳이 추락의 관점에서 볼 이유도 없지 않은가.. 우상의 존재 의의도 결국 우리의 필요에 의한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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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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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2012년 대통령 선거 이후의 행보를 보면 <다크나이트(The Dark Knight)> 같은 영화에 등장해도 될 법한 이 사람은 자신의 블로그 프로필에서 '자유직 범죄학자, 범죄심리학자, 프로파일러, 범죄수사전문가, 작가, 칼럼니스트, 방송인'으로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그는 경찰관이었고, 경찰대학 교수였으며, 아시아경찰학회장을 역임했다. 넉 달 전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는 이제 '자발적 백수'가 된 표창원을 이렇게 소개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 비겁한 남자!"

 

지승호. 13년차 전업 인터뷰어로서, 무려 서른 권이 넘는 인터뷰집을 냈다. 유시민, 장하준, 우석훈, 김수행, 박노자, 강신주, 김규항, 신성일, 신해철, 공지영, 양익준, 박원순, 김상곤, 정봉주, 이상호 등.. 그가 만나서 인터뷰하고 함께 책을 낸 인물들의 면면만 봐도 우리는 이 사람의 인터뷰집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란 걸 예감할 수 있다. 지승호는 우리 시대의 거울들을 제대로 비춰주는 또 하나의 거울인 셈이다. 영화로 치면, 잘 플로팅된 '액자식 구성'의 작품이 바로 그의 인터뷰다.

 

'국내 유일의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가 이번에는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 표창원을 만났다. <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2013년 10월에 출간된 이 책은 지승호와 표창원의 한국형 범죄학 인터뷰집이다. 표창원이 진정한 개혁적 보수주의자로서 사회적 커밍아웃을 한 이후 꽤 긴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기록이며, 다루는 소재나 내용이 그리 가볍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터뷰집이니만큼 비교적 편하게 술술 잘 읽히는 편이다.

 

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 | 지승호 (지은이) | 김영사 | 2013-10 | 반양장본 (448쪽)

 

 

이 책의 프롤로그 '비정한 공범들의 도시에 홀연히 나타난 정의의 사나이'는 인터뷰어 지승호가 썼고, 에필로그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는 인터뷰이 표창원이 썼다. 그럼 지승호가 프롤로그에서 직접 밝힌 <공범들의 도시> 기본 구상부터 한번 읽어보자.

 

"표창원 박사는 원래 연쇄살인이나 엽기적인 범죄 등을 분석하는 전문가이자 범죄자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분석하는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러로 유명하신 분이잖아. 범죄를 통해 본 한국 사회 진단, 한국 과학수사의 현주소, 범죄 예방을 위한 경찰 시스템의 개혁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가 묻고, 타고난 경찰 표창원이 답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범죄 전반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신창원에서부터 오원춘까지, 자식 살해와 아동 성폭력, 묻지마 범죄부터 연쇄살인까지, 경찰대학 문제와 과학수사의 실패, 장준하에서부터 김광석·김성재까지, 경찰 내부의 문제와 정치 검찰 그리고 작년 대선 이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완전히 멘붕에 빠뜨린 국가기관들의 조직적인 대선개입 사건과 현재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폭넓게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표창원의 강의와 방송 출연을 그동안 인상적으로 본 사람들은 <공범들의 도시>를 통해, 그가 다양한 한국적 범죄들을 과연 어떤 철학적 바탕 위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어떻게 진단을 내리고 있는지를 총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까지 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왔고, SNS를 포함해 워낙 많은 글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기 때문에,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좀 혼란스러운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잘 단련된 관찰자이자 기록자인 지승호의 도움을 받아 심각하지만 친절하게, 무겁지만 상세하게, 전문적이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고 있다. 명확하면서도 편안한 대화체로 말이다. 게다가 두 사람 다 '베테랑'이어서 그런지, 곳곳에 자연스러운 유머도 가미되어 있고 한없이 깊이 빠져들기보다는 중간 중간 독자의 숨통을 틔워주는 얕은 대화도 적절하게 등장한다. 그 덕분에 인터뷰집치고는 약간 볼륨이 있는 편인데도 직접 읽어보면 생각보다는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사회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해 발생하는 비극적인 범죄의 잠재적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그가 지난해 연말 홀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크리스마스 선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지승호가 쓴 프롤로그 '비정한 공범들의 도시에 홀연히 나타난 정의의 사나이' 중에서.

 

암울한 현실과 근본적 고민, 불편한 진실과 정의를 위한 선택

 

"'대한민국 사회가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3.8%가 '공정하지 않다'라고 답하고 있고, 청소년 대상 조사에서 44%가 '10억 원을 준다면 징역 1년 정도 살 짓을 저지를 수 있다'라고 응답하고 있다.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우리 모두다."

- 표창원이 쓴 에필로그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 중에서.

 

현대 사회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디나 다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공범들의 도시>에서 표창원이 모범사례로 영국을 자주 언급하지만, 영국만 해도 이민정책의 전반적인 실패로 말미암아 자국 국민 3명 중에 2명이 '이민자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민자를 배척하고, 급기야 이민자들의 폭동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미국 역시 말로는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뻐기지만, 실상 '백인·남성·기업인'으로부터 대부분 기부되는 정치자금 즉 '돈'으로 선거를 치르고 그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편이다.

 

[출처: 고발뉴스 동영상 갈무리]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영국은 유럽인들 사이의 농담 중 '경찰이 영국인이면 천국'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상당히 훌륭한 경찰 제도를 보유한 나라이고(요리사는 이태리인, 기술자는 독일인, 애인은 프랑스인), 미국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교훈을 가진 나라로서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하고 범죄를 은폐하려고 하면 어떤 대통령이든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나라다. 어쩌면 그래서 영국이 이민자 폭동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빨리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고, 미국 역시 극소수 엘리트층의 정치기부금 지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주주의 선거가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선거 부정을 저지른 인간들이 오히려 더 큰소리를 치고, 이를 엄정하게 수사해야 할 경찰은 사건을 축소하기 바빴다. 불법 선거가 드러난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혐의가 있는 정치인들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대한민국 정부 안팎을 뻔뻔하게 활보하고 있으며, 사건 은폐에 책임이 있는 경찰관들은 국회 청문회에 나와서까지도 전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표창원 같은 사람이 경찰대학을 박차고 나와서 지금도 수구 정치 세력과 거대 경찰 조직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 아닐까?

 

일반 시민이 보기에도 요즘 현실이 너무나 암울한데, '타고난 경찰' 표창원은 오죽할까.. 그래서 시민을 대표해 지승호가 묻고, <공범들의 도시>에서 표창원은 진정한 보수의 품격, 민주 사회의 품격, 국민을 위한 경찰의 품격에 대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분명한 어조로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국의 경찰 제도에 대한 이해도가 이전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개별 사건뿐만 아니라 한국적 범죄의 전체적인 그림도 웬만큼 조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표창원과 지승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고민도 보여준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뭘 하나 하나 바꾸려고 해서 바뀔 문제가 아니다'라는 식의 얘기가 자주 오가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말도 무척 인상 깊었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희생과 봉사 정신으로 자기를 바쳐서 일해온 사람들 때문에'라는 말 자체를 언제까지 사용해야 될 것인가" 한마디로 각 개인의 노력이나 도덕성보다는, 사람들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제도와 감시체제가 잘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이걸 제대로 못한 다음에 찾아온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보면, 그 필요성과 중요성은 금방 답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공범들의 도시>에서 지승호와 표창원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게 사회 전체가 투명하게 되고, 가장 정점에 있는 정치권력이 불법이나 반칙 없이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국민의 감시를 받고, 또 국민과 제대로 소통해야만 사회의 모든 분야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2012년 대선 과정에서의 부정 선거 사태를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유이고, 표창원이 한국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불편한 진실들을 알고 있음에도 경찰대학을 뛰쳐나오고 방송진행을 그만두면서까지 정의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록 그는 지금 '백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이 일종의 깨달음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터뷰 마지막에 표창원은 이렇게 다짐한다.

 

"저로서는 경찰과 범죄, 형사사법제도라는 것이 28년간, 경찰대학 입학하면서부터 모든 열정과 관심과 노력을 쏟아부은 분야니까요. 그걸 뭉뚱그려서 제가 얻은 한 가지의 단어는 결국은 정의거든요. 그 이외의 다른 이유나 명분,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상황이 어떻고, 안보가 어떻고, 이 모든 것들은 정의라는 이름 앞에서 길을 비켜줘야 된다. 정의만 제대로 바로 서게 된다면 다른 모든 것들도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제 삶은 거기에 모든 것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완벽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의 정의'라는 수준이 확립되는 그런 사회가 되는 데 기여를 하고 싶어요. 이 책이 거기에 출발점 내지는 중요한 주춧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죠."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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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불평등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명백히 '불평등'하다. 그냥 막연히 주관적인 불만족의 차원에서 불평등한 게 아니라, 현재 상황을 실제로 포착하고 수량화하고 측정한 수치들의 결과 자체가 '객관적으로' 불평등한 것이다. 이미 전세계에서 수많은 연구자들이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축적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새로운 증거들이 계속 추가되고 있다. 다양한 국제기구들이 전세계의 전문가를 동원해서 해마다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각종 통계 자료의 수치로도 객관적 불평등은 증명되고, 이러한 증거들은 단 10분 만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무수히 찾아낼 수 있다.

 

이제 이 세상의 불평등은 단순히 하나의 견해나 이론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하는 일종의 '사실'인 셈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나쁜 소식들이 날마다 줄을 잇고 있으며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불평등은 5년 여 전의 전세계적인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선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고 빈자들은 더 가난해졌다. 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 전세계가 필사적으로 경제성장 근본주의를 밀고 나가고 있는데도, 빈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런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이것이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학자적 양심을 걸고 모두에게 던지는 처절한 질문이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은이) | 안규남 (옮긴이) | 동녘 | 2013-08-30
원제 Does the Rich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 (2013년)

 

 
<Does the Rich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소수의 부유함이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가?)>은 2010년에 '지금 유럽의 사상을 대표하는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시대의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 )'의 2013년작이다. 한국어판 제목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인데 불과 몇 달 만에 곧바로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걸 보면, 물론 책 자체가 얇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 출판사가 보기에도 2013년의 한국 사회에 이것이 무척 중요한 질문이라고 여겨지지 않았을까 싶다. 예전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 사회는 '양극화'가 극심하고, 또 올해에는 흔히 말하는 '갑을 문제'에도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주목을 했으니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불평등의 심화는 사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전세계 인구 중 겨우 상위 20퍼센트가 생산된 재화의 90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 가장 가난한 20퍼센트는 불과 1퍼센트만을 소비하고 있을 정도로, 이것은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매우 심각한 화두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라는 질문이 한국인들에게 유독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최근 연이은 두 번의 정치적 선택 이후 한국에서 현재 급격한 소득 불균형과 중산층 붕괴가 발생하고 있으며 향후에도 최소한 4년 이상은 이런 흐름이 지속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기 때문이다.

 

[2012년 1월 10일 경향신문(상), 2012년 7월 23일 문화일보(중), 2013년 8월 20일 한겨레(하)]

우리는 오늘날 정확히 얼마나 불평등한가?
 
아무튼 불평등은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적 현상인데,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새 책에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과연 우리는 정확히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먼저 정리하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몇 가지 수치만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 헬싱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세계 인구 중에서 최상위 1% 부자들의 부의 총합은 하위 50%에 속한 사람들의 부의 총합보다 거의 2000배나 된다.

- 2011년에 미국의 억만장자들의 수는 1210명으로 당시까지 역사상 최고를 기록했으며, 2007년에 3조 5000억 달러였던 그들의 전체 부는 2010년에는 4조 5000억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 약 30년 동안 하위 50% 미국인들의 평균 소득은 6퍼센트 증가한 반면, 상위 1%의 소득은 229퍼센트 증가했다.

- 1990년에는 영국 내 200대 부자의 목록에 들어가려면 재산이 5000만 파운드(한화 약 865억 원)정도 되어야 했는데, 2008년에는 이보다 무려 9배나 늘어난 4억 3000만 파운드(한화 약 7443억 원)로 급증했다.

- 전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모두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 명의 부를 모두 합한 것의 거의 두 배가 되고, 전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은 가장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 총합과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인구 가운데 가장 빈곤한 10퍼센트의 사람들은 상시적인 기아 상태에 있다. 가장 부유한 1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굶주림을 겪어본 일이 없다. 최하위 10퍼센트는 자녀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최상위 10퍼센트는 자녀들이 이른바 '엇비슷한 친구들'이나 '더 나은 친구들'과만 어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더 많은 수업료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최하위 10퍼센트는 거의 언제나 사회보장도 없고 실업수당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반면, 최상위 10퍼센트는 그런 수당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최하위 10퍼센트는 도시에서 날품팔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농촌에 사는 농부들이다. 그러나 상위 10퍼센트에게는 안정적인 월급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최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거부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이 아니라 봉급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인류지리학자 Daniel Dorling <Injustice(한국판: 불의란 무엇인가, 2012)>,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재인용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으며 아직도 약 3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동 노동·성 착취·강제 결혼 등 현대판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는데, 전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이 가장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 총합과 같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지구상의 전체 인구 70억 명 중에 고작 20명의 재산이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금융위기가 시작되기 전 이십 년 동안, 대부분의 OECD 국가들에서는 상위 10%의 실질 가구소득이 최하위 10%의 실질 가구소득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며, 또 얼마나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짓인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이런 불평등을 감수하는 것일까?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우리의 선택, 우리의 생활방식, 우리의 삶의 궤적을 합작하는 자율적인 요소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운명'이고 나머지 하나는 '인격'이다. 운명은 현실적 선택지들의 범위를 결정하고, 인격은 그 범위 내에서 우리의 선택을 결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구조화된' 사회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구조화는 바로 확률의 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어떤 선택들의 확률은 훨씬 높이고, 어떤 선택들의 확률은 훨씬 낮추는 식으로 '보상'과 '처벌'의 배치를 재조정한다). 사회적 비용들은 개인의 저항을 매우 힘들게 만들고, 따라서 저항하기보다는 체념하고 얌전히 굴복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시도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정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된 소비자 사회의 주민인 우리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전부 혹은 대부분에서 계속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주사위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거나 혹은 이익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정해져 있다."

 

다들 알다시피, 원래 운명은 우리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종류의 상황으로서 태어난 곳이나 부모의 사회적 위치, 태어난 시기처럼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뜻한다. 방금 운명이 현실적 선택지들의 범위를 결정한다고 말했는데, 예를 들어 핀란드에서 태어난 아기와 짐바브웨에서 태어난 아기는 운명이 다르고 그래서 현실적 선택지들의 범위 또한 다르다. 그냥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이 다르다.
[핀란드는 세계 최고의 교육 선진국이고, 짐바브웨는 세계 최빈국이다. 핀란드 아기는 전혀 생존의 위협 없이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반면, 짐바브웨 아기는 교육은 고사하고 아예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조차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우리가 흔히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 선택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그 선택 행위 자체의 확률마저 가진자들이 만든 사회가 조작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회적 비용이 큰 선택일수록 선택될 확률이 낮은 건 당연하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현실적으로'라는 표현 역시 사회의 구조화가 반영된 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반해 행동하기가 극히 어렵다. 결국, 현실적인 선택지들의 범위뿐만 아니라 선택지들이 선택될 확률들의 분포 또한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영역에 속하는 셈이다.

[어떤 아이가 핀란드에서 태어나거나 또는 짐바브웨에서 태어나는 것은 본인의 노력 여하와 전혀 관계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구조화된 사회의 확률 조작으로 인해, 절대 다수의 핀란드 아이는 교육을 선택하게 되고 짐바브웨 아이는 생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며, 자연스러운 '운명'이다]

 

 
새빨간 거짓말, 그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이자 동료 학자 사이에서 즉각적인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 (the Guardian)"이라는 Zygmunt Bauman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들여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불평등의 기반이 되는 '거짓' 전제들에 대한 반박이다. 다만, 불평등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역시 사회학자다. 단순히 경제학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아닌, 사회학적으로 쟁점을 정리하고 종합 분석하여 우리 모두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이도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암묵적 전제들 가운데 이 책에서 면밀히 검토"한 네 가지 거짓말은 다음과 같다.

 

1. 경제성장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3.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4. 경쟁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실'이 되어버린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어떤 식으로건 회피하지 않으며, 숙고나 의심·확인 없이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진 네 개의 쟁점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아울러 가진자들이 경제적·사회적 조작을 통해 정치적으로 일반 대중의 믿음으로 만들고자 하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와 관련해서도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사회의 상층에 축적된 부는 다른 사람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과 자기 아이들의 미래가 더 안전하고 낙관적이라고 느끼게 하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하는 '낙수효과'를 발휘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낙수효과 역시 새빨간 거짓말인 셈이다. 그런데도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지고,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 경악스러운 일은, 불평등의 직접적 피해자들이 오히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건 소위 말하는 교육과 훈련을 통한 '수용'이고 어떻게 보면 일종의 '세뇌'일 수 있는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쉽게 타협하지 않는 우리들 각자의 철저한 '사유'를 바라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읽으며 가슴 깊이 반성한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불평등에 관한 "이상과 현실,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을 논하며 끝을 맺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과연 이 사이의 간극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스스로 대답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신작을 마무리짓는다. 이 책은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중에 한 명인 저자의 '정신적 모델'과 '현실에 대한 말의 영향력'을 논하고 있으며, 결국 맹목적인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바람에 따라 행위를 한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도 '현실적'이 되려고 계속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옮긴이가 말하듯이, 저자는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도 않고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그리고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자유로울 운명을 타고 난 인간이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하나 이상의 길이 놓여 있을 것이며, 위에서 말했듯이 '선택'하는 동물의 자율적인 요소는 '운명'과 '인격'이다. 비록 이 세계에서 운명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고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격에 (지그문트 바우만이 바라기로는 철저하게 사유하는) 바로 그 인격을 통해 선택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우리는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격을 함양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격만으로 이 세상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는 '기부'로는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기존 사회의 '구조화'와 '세뇌'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불평등한 사회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보며 온갖 이야기를 하고 온갖 것을 읽고 생각하는 사람들, 불평등을 보며 음울하고 참혹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사람들,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들, 포기하지 않고 거듭해서 더욱 더 열심히 다른 삶의 방식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정말 중요하다. 이들이 세뇌와 구조화를 거부하고, 철저한 사유를 하며 운명보다는 인격으로 선택을 하고,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각자가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 이를 테면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 1917~2013)이나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사람(온갖 이야기를 하는 사람), 또 끊임없이 <분노하라(Indignez Vous!, 2010)>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와 같은 책을 읽는 사람(온갖 것을 읽고 생각하는 사람).. 바로 당신과 나.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서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감탄을 표하면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은 경명하거나 무시하는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우리의 도덕 감정을 타락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이자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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