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 속 베이비부머를 향해 담담한 노래를 부르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말하는 베이비붐 세대는,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중반까지 약 10여 년 동안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70~90년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의 주역인 동시에, 흔히 말하는 '486' 민주화 세대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세대다. 작가 성석제는 베이비부머 중 한가운데인 1960년생이고, 그의 신작 소설 <투명인간(2014)>의 주인공 '김만수' 역시 1960년생이다.


2014년인 지금, 베이비붐 세대는 말 그대로 50대 그 자체다. 보통 196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들(50대 후반)은 개발독재 · 압축성장 · 군사문화에 상대적으로 순응적인 편이고, 1960년 이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들(50대 전반)은 486 민주화 세대에 가까운 정서를 보인다. 쉽게 말해 베이비붐 세대 중 막내들이 486 세대의 맏형인데(1961년생이 1980년도에 대학 입학), 현재 50대가 전체적으로는 여당 지지율이 높은 반면 이들은 야당에 좀 더 호의적이다.


결국 성석제와 동갑인 <투명인간> 속 주인공 김만수는, 베이비붐 세대의 중심이면서 민주화 이전 세대의 마지막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50대 남성들은 어떠한가? 요즘 50대 남성의 자살자 비율은 전 연령을 통틀어 가장 높고, 비슷한 또래의 여성에 비해서도 무려 세 배나 더 많다. 도대체 왜, 한국의 50대 남성 자살률은 유독 이렇게 높을까? 과연, 무엇이 베이비부머를 '위기의 세대'로 만들었을까?


[사진 출처: 경향신문] 


이 작품은 베이비붐 세대에게 바치는 성석제의 '엘레지(elegy, 슬픔의 노래)'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50대 친구들을 위한 역사 탐구의 결과물이다. 작가는 김만수라는 인물 또 그의 부모와 자식·주변인들의 삶을 통해 지난 100년 동안 한반도의 민중들이 겪어온 격동의 세월을 집약하고,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어떻게 '연속성'을 지니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연속성은 이 소설이 20대든 80대든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상처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바로 이런 부분들이 개인적으로도 참 아프게 다가왔다.


익숙하지만 슬픈 '내용'을 실험적이지만 담대한 '형식'으로


사실 <투명인간>의 주요 내용들은 다 어디서 한 번쯤은 봤던 얘기들이다. 일제시대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작가들이 계속 다뤘던 것들이고, 부분적으로는 거의 똑같은 줄거리로 요약될 수 있는 내용이다. 덕망 있고 존경 받는 부잣집에서 태어난 엘리트 젊은이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가혹한 고문과 감옥생활을 겪으며 좌절하고 집안도 풍비박산 나는 이야기(만수 할아버지)라든가, 명석하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자기 공부는 포기하고 남자 형제들 뒷바라지를 한다고 개발독재 시절에 공장에서 일하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심신이 파괴된 비극적 여인의 이야기(만수 누나) 등을 우리는 이제까지 익숙하게 봐왔다.


만약 성석제가 이런 오래된 슬픔에만 주목해서 그대로 갖다 썼다면, 이 소설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고리타분한 작품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이야기들을 상당히 새로운 형식에 버무려 넣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십 개의 이야기들을 각 내용의 주요인물이 직접 화자가 되어서 서술하며(<투명인간>에 등장하는 화자는 자그마치 서른 명이 넘는다), 거의 시간순으로 각 챕터마다 다른 화자가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월남 파병을 가는 만수의 형 이야기는 그 형이 직접 편지글 형식으로 서술하고, 바로 뒤이어서 이 무렵 국민학교를 마치는 만수의 졸업식은 만수의 누나가 목격담 형식으로 전한 다음, 고엽제로 인해 만수 형이 죽는 내용은 만수 할아버지의 입으로 원통함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우리 역사 속 수많은 비극을 적재적소에 다 보여주면서도 과도하게 어느 한 부분의 슬픔에 독자들이 빠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연속된 상처들과 일정한 거리감을 획득하고, 최대한 담대하게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런 형식은 각 챕터마다 화자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좀 혼란스럽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실험적인 서술 방식은 너무 익숙해서 자칫 식상할 수 있는 내용에 입체적인 생동감을 부여한다. <투명인간>의 줄거리 자체가 그렇게 편히 읽을 수 있는 편도 아니고, 아마도 나이가 적을수록 점점 더 공감하기 힘든 내용일 수도 있는데, 이런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와 같은 불편함을 상당 부분 희석시키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풀어낼 수 있는 열쇠, 역사적 맥락


서른 명이 넘는 화자가 각 챕터별로 1인칭 서술을 하기 때문에, 성석제의 이 신작 장편소설은 우리의 역사를 잘 모르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약간 애를 먹을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를 테면, 3남 3녀 6남매 중 넷째인 만수가 60년생이고 첫째인 백수는 51년생 · 둘째 금희는 54년생 · 셋째 명희는 57년생 · 다섯째 석수는 62년생 · 여섯째 옥희가 66년생인데(작가가 이걸 직접적으로 말해주지는 않는다), '10월 유신'이 1972년이고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1983년이며 문민정부가 93년부터 97년까지 집권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주요 인물들의 나이와 이야기의 흐름을 그때 그때 제대로 연결해서 내용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순수한 하나의 스토리로서만 이 작품을 본다면 크게 상관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마치 외국사람이 읽은 <투명인간>의 이해 수준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한국사람이라면 자매가 남자형제를 위해 자신의 공부를 중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가슴이 아릴 테고, 연탄가스 중독인데 치료를 둘 중에 한 사람만 받을 수 있어서 나머지 한 명이 바보가 되는 상황을 보며 그저 화를 내기보다는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을 느낄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게 주변사람 한 둘을 탓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아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더욱더 편하게 읽을 수만은 없고, 단순한 재미가 아닌 일종의 '한(恨)'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기품 있고 학식 높은 만수의 할아버지가 왜 조국이 해방되고 나서도 고향 읍내로 돌아올 수 없었는지, 대한민국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도 있었을 수재 백수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월남에 갔다가 객사하게 됐는지, 또 민주화 운동의 어두운 면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등이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앞서 말한 실험적 형식의 '거리감' 덕분에, 비교적 담담하게 전체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 공간을 확보한다. 비록 각 독자의 경험과 역사 인식에 따른 '상처들'이 작품을 읽는 동안 적잖이 쓰라리겠지만..


[<투명인간> 가제본]


단 한 차례도 화자로 직접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


위에서 말했듯이, 작가와 같은 해에 태어난 김만수가 <투명인간>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만수는 서른 명이 넘는 화자가 등장할 동안, 단 한 번도 직접 화자가 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김만수만 빼고 주변 인물들이 전부 다 화자로 등장한다(일종의 1인칭 관찰자 시점). 이들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만수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넓게 보면 이 모든 건 김만수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수의 움직임이 일단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어느새 독자는 전체적으로는 만수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부분적으로는 각 챕터의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다중적 감정이입의 단계에 들어선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좀 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각자 입장이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다층적으로 감정적 동조를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만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체로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는데, 둘 중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그냥 양쪽을 일정 부분씩 이해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소개하자면, 만수 할아버지의 장점과 만수 아버지의 장점이 만수에게서 둘 다 발현되는 부분이다.


"남편(만수 할아버지)은 서울서 학교에 다닐 때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사람이 모여 앉아 토의를 하고 토의 결과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생활해왔다고 했다."

"김만수는 사장이 한 말을 전하고 나서 모든 것을 회의를 통해 정하자고 했다. 자신이 회의의 진행을 맡고 기록을 했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을 모아서 모든 일을 처리하니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결정이 내려진다 해도 불만이 없었다. 충분히 토론을 했기 때문이다."


"만수는 몸은 제 할아버지를 닮아 빌빌거리는데 내가 닦달해서 어디 데려다놔도 굶어 죽지 않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일찍부터 일은 많이 배웠다."

"만수 오빠는 어릴 때부터 먹을 것을 찾아서 산과 들을 종일 쏘다니다 밤이 이슥해 집으로 돌아왔다. 한번도 빈손으로 온 적이 없었다."


타고난 학자 타입인 할아버지와 상농사꾼 아버지로부터 좋은 것 한 가지씩을 제대로 물려받은 만수. 바로 이 김만수 같은 사람들이 고도 성장시대의 산업 역군이었고, 이들의 노력이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기. 이러다 보면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시대와 사회의 왜곡에 관하여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특히 50대 베이비붐 세대의 아픔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보수적인 50대 남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참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60년생 성석제의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저 답답해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그래도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이들을 담담하게 바라볼 용기가 조금은 생긴 것 같다.


한편 만수의 목소리가 아닌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만수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셈이니까, 이런 이야기 구조 자체는 만수를 마치 각 부분의 작은 조각들을 이어붙여서 전체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종이인형'처럼 보이게 한다. 한 조각은 어떤 화자가 바라보는 만수의 일면이고, 이것들이 덕지덕지 모이고 덧붙여져서 하나의 인물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진정한 생명력은 어차피 그의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므로, 만수의 목소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타자의 시선으로 간접적으로 서술한 건,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비현실적인 '투명인간' 이야기를 할 때 독자들이 느낄 수 있는 위화감을 상쇄시켜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가장 업신여김당한 김만수에게서 정의와 책임을 발견하는 아이러니


만수는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만 크고 손발이 시원찮았으며, 자라면서도 늦되고 어리숙했다. 비실비실 허약하고 주눅이 들어 매사에 자신이 없었고, 다른 다섯 형제자매와는 달리 머리도 별로 명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전 세대의 애정어린 보살핌, 자신의 순박함과 끈기·긍정적 사고, 이후 세대에 대한 책임감과 남다른 노력 덕분에 모두 다 힘든 시절 주변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김만수의 희생과 도움을 쉽게 잊었고,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만 항상 힘들게 살았다.


격동의 세월, 잘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끝까지 한결같은 모습을 보인 유일한 사람은 만수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절한 다음에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우리 일곱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무식해서 정치도 모르고 법 같은 건 잘 몰라도 정의가 뭔지는 알아. 아,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더라고..."


정의가 뭔지도 모르고 책임 지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 시대, 김만수는 마지막 선비였던 할아버지의 당부대로 진정 '염치'를 아는 인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기차가 전복되고 비행기 떨어지고 서해상에서 페리 가라앉고 한강다리 무너지고 도시가스 폭발해서 애먼 사람들"이 죽고 나서도 또 한참 뒤에 여전히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듯이 만수에게는 또다시 시련이 닥치고, 결국 그는 '투명인간'으로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고 만다. 책임과 정의가 투명인간처럼 사라져버린 지금 이 순간의 대한민국, 역사적으로 피하기 힘든 연속성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상처들은 끝내 치유되지 못한 것이다.


베이비부머를 향한 엘레지인 동시에 배턴터치 선언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기껏해야 죽기 직전 만수의 입을 빌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투명인간>의 마지막 문장은 "형. 만수 형."인데, 마치 작가가 모든 베이비붐 세대를 부르는 소리 같다. 어쩌면 50대 중반의 성석제가 자기 위에 '어른'이라고 할 만한 존재를 끝내 찾지 못하고 한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대한민국에 진정한 어른이 있는가? 베이비부머 이전에도 없고, 지금 50대는 스스로 어른이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왠지 이 작품에는 그런 '회한'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작가는 < 투명인간 > 속 세상은 실제보다 완화된 이야기라고 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참 어떻게 살지, 그런 생각이 드는데도 다 살고 있거든요. 세상에서 < 투명인간 > 같은 상황이 아닌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까요. 물론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작가가 작품 후반부를 쓰던 중 세월호가 침몰했고 소설도 달라졌다. 그는 "순간적으로 이 소설은 어쩌면 영원히 완성을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이 들었다"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많아서 새로 집어넣기보다는 뺀 게 많다"고 말했다. 

- 경향신문(2014/06/29) 기사 <2년 만에 신작 '투명인간' 낸 성석제 "작품 후반부 쓰던 중 세월호 침몰, 영원히 완성 못할 것 같은 절망감"> 발췌


그래서 그런지, 베이비붐 이전 세대에 대한 내용은 비교적 충실한데 비해 50대 이후 젊은 세대에 대한 부분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어린 학생들이 거의 '학살' 당한 세월호 참사가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작가는 세월호 참사를 보며 50대 이상 세대들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린 듯하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투명인간>의 후반부와 결말이 좀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1960년생 성석제는 이 작품을 통해 베이비부머 친구들과 그 이전 세대에 대하여 담담한 평가를 내렸고, 그 이후 세대가 50대 이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마지막에 "나는 포기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만수는 투명인간으로서 끝내 생을 마감했고, 이 소설은 출간되긴 했지만 아쉽게도 완결되진 못했다. 작가는 자신있게 스스로 어른이라고 말하지 못한 것처럼, 이후 세대에 대한 서술 역시 자신있게 마무리짓지 못했다(실질적인 이야기는 아들처럼 키우던 조카가 자살하고 아내가 신장을 이식 받은 2000년대 초반에 멈춰서고 만다). 김만수가 최초로 분노하는 모습이 그려진 다음에 뭔가 더 스토리가 진행될 법한데, 그대로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더 앞으로 나가지 않고, 성석제의 '지친 베이비붐 세대에게 바치는' 엘레지로 남았다.


신문 기사 속 작가의 말대로 세월호 참사를 보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많아서'였는지, 이후 10여 년은 그냥 공백으로 처리된 것이다(2000년대 초반~현재). <투명인간> 속의 바로 이 빈 공간, 50대의 자식 세대들 이야기는 앞으로 젊은이들이 채워나갈 수밖에 없게 됐다. 베이비부머는 이제 투명인간과 같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고, 60년생 성석제도 완결보다는 불완전한 엘레지를 선택했다(이후 세대에 대한 '참견'보다는, 차라리 '단절'을 통한 변화를 기약했다). 이제 우리는 담담하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역사적 상처들을 끌어안고 새로운 연속성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투명인간'이라는 제목 자체가 회한 많은 베이비붐 세대의 바로 이 '배턴터치 선언'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창비 '책읽는당'을 통해 <투명인간> 가제본을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류신 또는 구보 또는 벤야민. 


"이 책을 소설가 구보 씨와 산책자 발터 벤야민에게 바친다."


중앙대학교 유럽문화학부 교수인 류신이 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맨 첫 장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것만 봐도, 우리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터 벤야민과 구보 씨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20세기 사상계의 전위에 섰던 독일 문예 비평가 발터 벤야민, 그리고 1930년대 박태원의 단편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소설가 구보 씨. 아마도 벤야민과 구보 씨가 살았던 시기는 비슷할 테고, 시간적인 공통점은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세계대전 속 유럽에 살았고, 구보 씨는 일제 식민지 속 한반도에 살았다. 장소적인 차이점, 그런데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2013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 그럼 정리해 보자.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주인공 '구보'는 1930년대 소설가 구보 씨와 장소적으로 일치하는 반면(물론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장소라고 볼 수는 없다), 벤야민과는 일단 접점이 금방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부분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좀 필요할 듯싶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은 19세기 초반 '세기의 수도' 프랑스 파리에 등장한 새로운 쇼핑 공간을 미시적으로 탐사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기원을 천착했다."


이게 바로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제목이 나오게 된 이유다. 벤야민의 머리(이론)가 '(파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시도했다면, 류신은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벤야민의 방법론을 그대로 따라가는데, 온갖 문헌에서 발췌한 인용문과 그에 대한 짧은 주석과 단상이 곧 이 책의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류신은 "소설처럼 읽히는 재미있는 문학 평론(문화 비평)을 쓰고 싶었다"며 소설이면서 동시에 평론을 글을 쓰게 된다. 비평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기 위해 '소설가 구보 씨'를 패러디한 삼인칭 화자를 도입했고, 하루동안 서울이라는 시공간에서 '산책자 구보 씨'가 걷고 보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 결과물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다.


벤야민의 머리와 구보 씨의 다리로 서울을 산책했으니, 등장하는 장소들은 모두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뭐랄까 좀 생경한 측면이 있다. 부제가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이고 이 책 자체가 '문화 비평서'이기 때문에, 온갖 문헌에서 발췌한 인용문과 그에 대한 짧은 주석과 단상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상당히 낯선 인용도 꽤 있고, 기본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별로 일상적이지 않다. 어려운 단어들을 따로 설명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문체도 그리 평이하지는 않다.


그래도 저자는 '재미있는' 평론을 쓰고 싶었다며 최대한 익숙한 소재들을 활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니, 부분적인 이해는 좀 막힐지 몰라도 전체적인 이해는 크게 무리가 없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듯싶다. 인용과 주석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도 그냥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단상이려니 생각하며 전반적인 맥락으로 이 책의 내용을 파악하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게 나름대로의 관점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더 편리할지도 모르겠다.


목차를 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는 장소와 풍경이 구보 씨의 이동경로다. 게다가 최신 출간 서적인 만큼,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도 인용되어 있고 심지어 소녀시대에 대한 단상도 보인다. 네일숍 붐에 관한 얘기도 있고, G20 정상회의에 대한 평가도 있다. 그래서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비평서가 끊임없이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었으며, 독자 입장에서는 지엽적인 난해함에 얽매이지 않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가장 큰 미덕은 아마도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도 하고, 어려운 이론을 친숙한 사례로 풀어보기도 하는, 이런 절묘한 상호보완의 내러티브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들고 직접 책 속에 등장하는 장소에 가서 공감각적으로 독서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현장감). 여기에 덧붙여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용문의 원본도 한 번씩 찾아보면서 읽으면 더 재밌을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문화 비평서를 읽으려고 마음 먹었을 때는 그 정도 수고로움은 각오한 것 아닌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을 체포하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로버트 단턴 <Poetry and the Police>,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오늘날 우리는 소위 말하는 '여론'을, "정치와 사회 어디에서나 작용하는 하나의 능동적인 동인이자 피할 수 없는 현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론에 관심이 있고, 특히 정부나 언론은 항상 여론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매일같이 수많은 여론조사가 실시되며 언론발표가 동반되고, 최근엔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대해 흔히 말하는 빅데이터 분석도 복잡하게 이뤄진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여론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고, 우리들 모두는 그것을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 지극히 한정된 부분의 일시적인 수학적 수치만 알고 있는 것이며, 여론에 가장 민감하다는 정치인들 역시 (모든 선거에서 보듯이) 여론에 대해 아는 거라곤 거의 모험에 가까운 짐작이 전부다. 그만큼 여론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어렵고,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며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아무도 정확히 모르는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그 자체가 모순적이거나 다른 지표들과 모순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계몽사상가들이 18세기 후반에 여론의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기 전('여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등장하기도 전), 그러니까 사람들이 여론이라는 걸 분명하게 인식하기 전에는 과연 어땠을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입장에서 보면 여론을 구성하는 담론은 하나의 복잡한 과정인데, 거기에는 지각의 질서가 포함되고 대상은 담론적으로 구성되기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다('여론'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전까지 여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쉽게 말해, 18세기 후반 이전에 '여론'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의 입장에서 보면, 여론은 사회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고 사회적 영역을 형성하는 여러 기구들에서 '공적인 문제에 대한 사적인 개인들의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역은 18세기에 처음 출현했으며, 결국 여론은 18세기적 현상이다. 푸코의 입장이든 하버마스의 입장이든, 우리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알고 있으며 그 이전에 이미 여론이 존재했었다는 걸 만약 인정한다면, 참 쉽지 않은 문제지만 어쨌든 18세기(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론이 본격적으로 개념화되는 18세기 후반 직전)는 인류 여론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임을 절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단순하게 말해서 "'여론'이라는 게 없이 과연 '혁명'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라는 가장 기본적인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론이 개념화되기 직전, 18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계몽사상가들은 도대체 뭘 보고 '여론'이란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게 되었는가? 우리가 신이 아니듯, 이들도 신이 아니다. 분명히 뭔가 사회적인 변화의 흐름이 있었을 테고, 그걸 보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인식론의 좌표에 근거한 근본적인 범주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20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도 여론의 실체는 불분명한데, 이것이 최초로 출현한 18세기에는 오죽했을까? 그런데도 '여론'이라는 용어는 기어이 등장하고야 말았다. 도대체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위의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추적하는 책이 바로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 1939~ )의 <시인을 체포하라(원제: Poetry and the Police, 2010)>다. 저자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유럽사를 가르친 후 하버드 대학교의 도서관장에 취임했는데, 이 책 이전에 이미 역사학 부문에서 유명한 몇 권의 책을 썼으며 '책의 역사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로버트 단턴은 저명한 역사학자이고, 또 탁월한 저술가인 셈이다. 그렇다면 '실험적 역사서'라는 꼬리표가 붙은 <시인을 체포하라>는 과연 어떤 책이고, 무엇을 다루고 있을까? 프랑스 혁명 40년 전의 파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의 부제는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이다.
 
수없이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14인 사건'에 대해서도 우리는 전혀 모른다. 그래서 <시인을 체포하라>의 초반에 로버트 단턴 교수가 가르쳐주는 14인 사건의 개요를 여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사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입문서가 아니라 일류 대학의 나이 많은 교수가 쓴 역사서이기에, 전체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다 설명해주는 편은 아니다]
 
"1749년 봄, 파리 시 치안총감에게 '검은 분노의 괴물'이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시의 지은이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경찰에는 '모르파의 유배'라는 시의 제목 말고는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4월 24일, 루이 15세는 해군과 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는 대신으로서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모르파 백작'을 해임하고 유배시켰다. '괴물'은 루이 15세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므로 왕을 공격하는 그 시는 모르파의 편에 선 사람이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경찰이 동원된 이유였다. 공공연히 회자되는 시로 왕을 비난하는 것은 역모였고 왕권모독이었다."
 
"루이 15세를 비방하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한 의대생이 체포되면서 '14인 사건'이 시작되었다. 바스티유에서 취조를 받는 동안 그 학생은 자신에게 시를 건넨 사람을 자백했고 그 사람이 구속되었다. 구속된 이 역시 시의 출처를 자백했고, 경찰은 불법적인 시 암송에 가담한 혐의로 밀고된 14인을 잇달아 체포해 바스티유의 감방에 집어넣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을 탄압하는 것은 경찰의 일반 업무에 속한다. 하지만 경찰은 14인을 추적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했다. 게다가 경찰에 체포된 사람들은 평범하고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파리 시민들이었고 베르사유의 권력투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경찰의 수사는 분명한 질문을 유발한다. 파리 당국은 물론이고 베르사유 당국은 왜 시를 추적하는 일에 그토록 열을 올렸을까? 이 질문은 여러 다른 질문들로 이어진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따라 단서를 추적해가면 우리는 복잡한 의사소통망을 밝혀낼 수 있고, 글을 아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되는 사회에서 정보가 유통되었던 방식을 연구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저자가 직접 설명하는 이 책의 주제다. 그래서 제목도 <Poetry and the Police>이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도 14인 사건 앞뒤를 둘러싼 인물들과 권력관계 · 당시 사회의 풍경과 역사를 굉장히 미시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아직도 남아있는 시의 원문은 물론이고, 260여 년 전에 파리와 그 주변에 살았던 관련 인물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사건을 세밀하게 파헤친다. 로버트 단턴은 14인 사건의 수사기록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문헌은 모조리 동원하며 독자를 18세기 초중반의 구어 세계 의사소통망 속으로 순간이동시키고, 마치 영화를 보여주듯 우리 앞에 생생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물론,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일은 무척 어렵고 또 상당히 불확실한 작업이다. 아무리 저자가 탁월한 저술가이자 저명한 역사학자라고 해도, 그 시대 · 그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거시적 통설이 아닌 미시적 분석의 측면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는 아예 모르고 있는 부분이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14인 사건은 무슨 국가 차원의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약간 이례적인 시국 사건에 좀 더 가깝기 때문에, 전체적인 그림을 한 눈에 볼 수는 없고 여러 조각의 모자이크를 여기저기서 짜맞추는 식으로 사건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니 260년의 세월 동안 어쩔 수 없이 사라진 조각도 있고, 근본적인 시대상부터가 지금과 다른 부분도 많을 것이다. 결국 '실험적 역사서'라는 말은 이 책의 태생적인 한계를 내포하는 동시에, 여기서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독자가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는 게 아닌가 싶다. 계몽사상가들이 신이 아니듯 로버트 단턴도 신이 아니고, 그 역시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현재의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저자도 책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전문가로서 독자들이 계속 상상하는 데에 유용한 단서들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어쩌면 이런 흥미로운 탐구과정 자체가 <시인을 체포하라>의 가장 핵심적인 미덕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결론을 좀 내려보자. 도대체 1740년대 말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1790년 즈음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나? 낭만주의적으로 생각한다면 14인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혁명적 도전들이 있었고, 결국 1789년에 완전히 폭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아마도 상당히 비학문적인 추측일 테고, 소설가가 아닌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은 그렇게 말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여길 것이다. 실제로 14인 사건으로 체포된 인물들의 면면을 봐도 이런 체제 전복적인 사상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고, 관련된 여러 편의 시들 중에는 그저 별 의미 없이 말장난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도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건 아무래도 무리한 시도일 수밖에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정말 눈여겨 봐야 할 점은, 여론과 대중 · 의사소통망과 같은 일종의 사회 체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다. 비로소 이때부터 파리 시민들은 어렴풋이나마 왕이나 귀족 같은 일부 극소수 권력자들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저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주변사람과 같은 다수 일반인들의 생각이 어떤지가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만큼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문주의의 발달과 인쇄술의 발명을 위시해 근대적 사상들의 발전은 이때쯤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시와 노래를 통해 대중을 관찰하고 또 스스로 대중으로서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다. 당시 파리는 유럽의 수도나 마찬가지였고,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14인 사건처럼 상징적인 일이 가장 먼저 벌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 무렵부터는 최고 권력인 루이 15세조차 파리 시민들이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굴이 수척해'질 정도로 진정 스트레스를 받았고, 귀족과 관료들은 매일같이 여론의 향배를 주시하며 진심으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여론이라는 것이 정책 결정에 실질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는 게 가능해졌고(물론 실제로 '여론'이라는 말을 사용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권력자들을 비판했다. 바야흐로 대중의 여론이 어떤 힘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며,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그로부터 40여 년이 더 걸렸다) 뭔가 혁명의 인프라가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18세기 중반 파리는 혁명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하나의 효율적인 의사소통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대중에게 사건을 알렸으며 그에 대해 나돌던 세간의 논평을 전했다. 의사소통은 심지어 정보를 전파하고 받아들이는 행위가 공적 사건에 개입한다는 공통된 의식을 구축함으로써 '대중'을 형성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로버트 단턴은 수많은 사료를 바탕으로, 14인 사건을 깊이 있게 분석하며 구어 세계의 의사소통망을 복원하고 (여론에 관한 역사 연구를 지배하는 두 가지 입장인 미셸 푸코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입장을 검토하는 것을 포함해) 여론의 형성 과정을 추적한다. 그가 <시인을 체포하라>에서 보여주는 18세기 초중반의 이런 역사적인 여정이 없었다면, 과연 프랑스 혁명이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혁명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원래 변화되기가 정말 어렵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대부분의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고통을 받지만, 그래도 사회는 그대로일 때가 더 많다. 그래서 혁명이란 건 원래 실패하는 것인데, 만약 혁명이 성공했다면 그건 이미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740년 말부터 1790년 즈음까지 이어진 변화의 결과가, 마침내 프랑스 혁명이라는 놀라운 이정표를 세운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로버트 단턴의 <시인을 체포하라>는 바로 그 시작점에 대한 책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작순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시대 그림과 글씨를 보는 안목을 기르기 위한 유홍준의 명작 해설.

 

너무나 유명해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예술평론가 유홍준의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화 49점에 대한 해설을 모은 책이다. 유홍준의 말에 따르면, "한 화가가 어떤 계기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사회적·예술적 배경이 있었으며, 화가의 예술적 노력과 특징이 그림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액면 그대로 친절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명작순례>를 읽어 보면 모두가 그렇게 느끼겠지만, 꼭 저자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더라도 이 책은 정말로 편안하고 복잡하지 않은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옛 그림과 글씨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고, 말 그대로 감상 '입문서'로서 거의 완벽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그냥 소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굉장히 부드러운 책이며, 별로 두껍지도 않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곳 하나 모난 데가 없고, 그냥 읽는 족족 쉽게 다 넘어간다.

 

게다가 시대순 목차이기에 앞뒤로 약간씩 관련성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49점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서라서,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다. 그저 아무거나 그때 그때 읽고 싶은 것만 골라 읽어도 상관 없으며, 몇 개 읽고 한참 뒤에 다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화장실에 두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싶다. 각 작품 해설 분량도 한 번 볼일 보는 동안 읽기에 적당하고, 내용 자체도 편하게 머리 식히기에 알맞다.

 

매일 한 꼭지씩 설렁설렁 읽으면 되고, 볼일이 끝나면 다시 변기 옆에 놔두자. 다 읽는 데에 한 두 달 가까이 걸릴 텐데, 그 두 달 동안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기초적인 안목이 서서히 길러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스스로 공부해 오지 않은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시대 명작에 대해 문외한일 테지만, 전혀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봤듯이, 유홍준은 이쪽 분야에서의 '대중적'인 글쓰기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다.

 

우리가 멀티플렉스에 상업영화를 보러 가면서 공부할 생각으로 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냥 두 시간 동안 즐기러 가는 것이다. 조선시대 그림과 글씨 감상 입문서 <명작순례>도 마찬가지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지 말고, 그저 멋진 글씨와 그림을 즐기는 마음으로 읽으면 된다. 물론 옛날 작품들이기에 한자나 전문용어가 좀 등장하긴 하지만, 이런 것들을 억지로 다 이해하려고만 들지 않는다면 별로 문제될 것도 없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500년 조선왕조의 직접적인 후손이면서도 언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조선시대의 그림과 글씨를 관심 갖고 살펴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테스트를 해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서양 미술사의 유명 화가들 이름을 한 쪽에 쭈욱 써보고, 그 옆에는 자기가 아는 조선시대 화가들 이름을 다 써보라. 어느 쪽 개수가 더 많은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십중팔구는 서양 미술사 화가들 이름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용어나 한자를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보다는 일단 조선시대의 글씨나 그림과 친근해지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사실 개인적으로도 <명작순례>에 등장하는 예술가들 이름 중에 원래 알았던 사람은 겨우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나머지 대다수는 이제까지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니 난생 처음 이름을 알게 되고, 거기에 더해서 대표작까지 보는 것 자체가 모두 새로운 일이다.

 

서양 미술 작품보다 우리의 조선시대 그림과 글씨가 훨씬 더 낯선 현실 속에서, 유홍준의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은 상당히 소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마다 한 꼭지씩 읽어도 될 정도로 부담 없는 볼륨이고, 한자나 전문용어를 몰라도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저자의 주특기인 대중적 글쓰기가 여지없이 빛을 발하고 있으며, 형식적으로도 스토리텔링에 기반한 서술을 하고 있기에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적어도 서양 미술사 화가들의 이름을 아는 만큼은, 우리가 조선시대 화가들의 이름을 알아야 되지 않을까? 그 첫걸음을 유홍준의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으로 시작함이 어떠한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의 정복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일반적으로 고생대(5억 4천만 년 전~ )는 '양서류의 시대', 중생대(2억 3천만 년 전~ )는 '파충류의 시대', 신생대(6천 5백만 년 전~ )는 '포유류의 시대'라고 불린다. 양서류는 수중생활에서 처음으로 육상생활을 하게 된 '척추동물'로서, 어류와 파충류의 중간단계이다. 파충류는 뱀·도마뱀·악어·거북 등과 이미 멸종한 공룡류를 포함하고, 수많은 고등동물들과 함께 인간은 포유류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시대 구분과는 별개로, 육상세계의 진정한 지배자는 따로 있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현재 시점에서 지구 전체의 지배자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현생인류)'라는 한 종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하지만 인류와 함께 육상세계를 지배하는 건 양서류도 아니고 파충류도 아니고 다른 포유류도 역시 아니다. 우리 지구의 또다른 지배자는 바로 진정한 사회적 조건(진사회성)을 갖춘 '사회성 곤충'이다.

 

개미·흰개미·벌 등의 진사회성 곤충은 인류 외에 가장 복잡한 '사회'를 이룬 사회성 동물로서, 도시를 건설하고 가축을 기르며 농사를 짓는다. 흔히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도시, 가축, 농사.. 잘 믿겨지지 않겠지만, 진사회성 곤충의 진화단계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또 개미를 예로 들면, 이들은 모든 육상 척추동물(조류, 파충류, 양서류, 포유류)을 다 합친 것보다 몸무게가 무려 4배나 더 나간다.

 

진사회성 곤충은 인류보다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오래된 존재이다. 현재 육상 무척추 동물세계의 지배자인 이들은 대부분 1억 년 전에 진화했고, '그 진화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다른 생물들과 함께 진화하면서 지구 생태계는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날 이들이 지배하는 생태계는 지속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지배자인 인간은 분별없이 지구 생물권을 파괴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영속 가능성까지 없애고 있다.

 

인류는 겨우 수십만 년 전에 출현하여 지난 6만 년간 전세계로 퍼졌고, '다른 생물들과 함께 진화할 시간'이 없었다. 지구 생태계는 인류의 대량 학살에 대비할 시간이 없었으며, 이 때문에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생물 다수는 곧 끔찍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바로 이 비극, 이 지점이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 지성'으로 손꼽히는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 1929~ )'의 최근작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 2012)>가 가진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서양미술사의 걸작 '폴 고갱(Paul Gauguin, 1848~ 1903)'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 1897)>에서 그대로 따온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고갱 최후의 역작이다), 이 책은 지구의 정복자인 인류의 기원과 진화를 정면으로 탐색한 대작이다. 단순히 곁다리로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양념처럼 건드린 게 아니라, '사회생물학'을 창시했고 '통섭(Consilience, 지식의 통합)'을 주창한 대학자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내놓은 인류 역사의 종합적 탐험이다(어쩌면 에드워드 윌슨 최후의 역작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사고의 깊이와 범주는 통섭을 주창한 에드워드 윌슨의 저작답게 우리가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학문의 경계를 넘나든다 ... 이 책은 현존하는 최고의 통섭형 학자가 그의 학문 여정의 정점에 다가서며 내놓은 걸작이다."

-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국립 생태원 원장)

 

<지구의 정복자>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목차상 1부와 2부는 인간의 조건과 인류의 기원에 대한 부분이고, 3부와 4부는 (인류의 진화 역사에 참조할 수 있는) 사회성 곤충의 발달 과정을 '자연과학자'로서 정리한 내용이다. 그리고 5부와 6부는 인간의 본성과 문화의 기원, 인류의 미래를 한 사람의 명망 있는 노학자로서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대서사시로 조망한 부분이다. 전문적인 생물학자 외에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첫 번째와 세 번째 내용이 이 책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도 5부가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사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내용이 다 기나긴 인류 진화의 발자취를 총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저 일부분을 요약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인류가 육식을 하게 된 원인에 대한 저자의 분석만 해도 그렇다.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식량 다양화가 필요했고(기후가 달라지면, 획득할 수 있는 식량도 변화될 수밖에 없다), 식물성 식량보다 에너지 효율이 훨씬 더 높은 고기를 먹음으로써, '잡식성'이 된 인류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결국 생존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단순히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으로서의 육식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전체적인 발달 단계의 측면에서, 육지 생활 ·  커다란 몸집과 상대적인 비이동성 · 움켜쥐기에 알맞은 손과 발 · 잡식 · 불의 제어 · 야영지 마련 등을 통합적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집단을 형성하고 분업을 하며, 더 나아가 요리한 음식을 나눠먹는 행위가 사회적 유대형성의 보편적 수단이 되는 순간(요리 나눠먹기의 의미)까지도 함께 떠올려야 한다. 이게 바로 에드워드 윌슨의 탁월한 통찰력이고,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다.

 

또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면, 진사회성 군체는 같은 생태적 지위를 놓고 경쟁할 경우 단독생활을 하는 개체들보다 훨씬 유리하다. 그런데 왜 진사회성은 생명의 역사에서 그렇게 드물게,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출현하게 되었을까? 이의 대답을 위해서 에드워드 윌슨은 외부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의 성공 여부, 준비된 학습과 혁신의 필요성, 균형과 협동, 보금자리의 중요성, 외부적 위험의 역할, 대립 유전자 출현의 의미, 개체선택과 집단선택, 초유기체 형성, 유전자 가소성, 후성규칙과 문화적 변이 등등 이런 통섭적 지식들을 총망라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되지 않으려면, 전체 내용을 차근차근 다 읽어봐야만 하는 것이다.

[저자는 퓰리처상을 2회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저술가이기에, 일부 전문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책 자체는 참 재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흥미로웠던 내용들을 여기에 몇 가지만 그대로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울트라마라톤 세계 기록을 세운 배른트 하인리히는 <우리는 왜 달리는가>에서 마라톤이라는 주제를 깊이 탐구했다. 그는 25킬로미터 달리기 2000년 미국 챔피언인 숀 파운드의 말을 인용하여 장거리 달리기의 원초적 기쁨을 표현한다. "장거리 달리기를 체험할 때, 당신은 ... 사냥을 다시 체험한다. 장거리 달리기는 단거리 질주에서 당신을 이길 수 있는 먹잇감을 약 49킬로미터에 걸쳐 추적하여 잡아 마을에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굉장하지 않은가."

 

- 오늘날 전세계의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점점 더 신중해지고 전쟁의 결과를 두려워하면서 그것의 도덕적 등가물인 단체 운동 경기(대중 스포츠)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자기 집단이 우월하기를 원하는 욕구는 단체 운동 경기라는 의례화한 싸움터에서 자기편 전사들이 승리할 때 충족된다 ... 그들은 승리한 뒤에 벌어지는 의기양양한 축제에 참석한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전사나 처녀 같은 연령대에 속한 이들은 자제력을 모두 버리고 전투의 분위기와 전투가 끝난 뒤에 흥에 겨워 벌이는 요란한 행동에 참여한다.

 

- 인간의 감각계와 뇌는 가시광선의 연속적인 파장들을 나누어 우리가 색깔 스펙트럼이라고 부르는 분리되어 있는 단위로 배열한다. 이 배열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근본적으로 임의적이다. 수십만 년에 걸쳐 진화했을 수 있는 수많은 배열 중 하나일 뿐이다 ... 생물학적 현상으로서의 색깔 지각은 가시광선이 가진 진동수 이외의 또 다른 주요 특성인 빛의 세기에 대한 지각과 대조적이다. 조광기 스위치를 부드럽게 돌려 빛의 세기를 서서히 바꾸면, 우리는 실제 그대로 그 변화를 연속적인 과정으로 지각한다. 하지만 단색광을 사용해 한 번에 한 가지 파장만을 비추면서 한 파장에서 다른 파장으로 차례로 옮겨 가면, 우리는 연속적이라고 지각하지 않는다.

 

- 창작 예술은 인류가 추상적 사유능력을 계발했을 때 가능해진 진화적 발전의 한 유형이다.

 

이 외에도 무척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으니, 웬만하면 이 책을 사서 찬찬히 읽어보길 권한다. <지구의 정복자>에 관해 최재천 교수도 이렇게 말했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고 또 읽을 책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smithsonianmag.com] 

 

앞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이 바로 5부 '우리는 무엇인가'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에드워드 윌슨은 인류가 가진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와 정면승부를 벌이고 있다. 그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단순히 과학자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지구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호모 사피엔스 동료로서, 도덕과 명예 · 종교와 같이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주제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어루만지며 자기 목소리를 그대로 내고 있다. 유명한 학자로서 자신의 명망이 손상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애매한 태도나 망설임 없이 곧장 문제의 중심으로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마치 돈키호테 같은 분위기마저 풍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5부 뿐만 아니라 전체 책 내용에서 뽑았다). 저자에 따르면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의 선행 인류 조상들이 지구의 정복자가 된 건, 선택된 것도 아니고 위대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고, 우연이다. 전쟁과 대량학살은 어느 특정한 시대나 장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것이다. 족벌주의와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우리가 확보하게 될) 우생학적 조작 기술을 이용하려 들 테고, 그것은 결국 사회를 좀먹을 것이다. 그리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회는, 가장 부유한 사람과 가장 가난한 사람의 소득 차이가 가장 적다.

  

또 도덕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해는 절대적인 교리와 단정적 판단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및 이데올로기적 교리에 맹목적으로 기대지 말라고 경고한다. 종종 그렇듯이, 그런 교리가 오도될 때에는 대개 '무지'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가 '인공 피임'을 금지한 것도 지식 부족 때문에 교조적인 윤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고, '동성애 혐오증(homophobia)' 역시 마찬가지다. 심리학과 번식 생물학에서 나온 많은 증거들은 성교에 또 다른 추가 목적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성교의 목적은 아이를 잉태하는 것만이 아니다), 동성애의 존재는 인류의 다양성에 어떻게 건설적으로 기여하느냐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의 얘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이기적 개인이 이타적 개인을 이기는 반면,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은 이기주의자들의 집단을 이긴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개체 선택'과 '집단 선택'에 관한 내용인데, 개체 선택이 선호하는 행동의 요소들과 집단 선택이 선호하는 요소들 사이에는 (인류 역사를 영원히 관통하며) 계속해서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저자는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됐는데, 유전적인 사회성 진화의 냉엄한 법칙이 바로 일종의 '영구적 모호함'인 셈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 폴 고갱(Paul Gauguin), 1897. 유화, 141 x 376cm, 미국 보스턴미술관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지성'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의 특성을 이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지구의 정복자>는 고갱의 그림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저자가 고갱에게 전하는 말을 끝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에드워드 윌슨은 이렇게 말한다. "그림은 답이 아니다. 질문이다." 그는 한 사람의 자연과학자로서 인류의 기나긴 진화 역사를 최대한 알기 쉽게 서술하고 있으며, 또 한 사람의 동족으로서 현재 인류의 사회 문제를 나름대로 분석하는데, 심지어 사회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사안인 '조직적인 불의에 맞선 개인과 소수집단의 저항'까지도 다루고 있다(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에드워드 윌슨의 '예언'을 옮기며 리뷰를 마친다. 최근에 읽었던 책들 중에 가장 놀라운 명저로서 <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강력 추천한다!

 

"이제 내가 지닌 맹목적인 믿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몹시 원한다면, 22세기쯤이면 지구는 인류의 영원한 낙원이 되거나 적어도 그 초입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생물들에게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히겠지만, 서로에게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소박한 윤리관, 이성을 가차 없이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 태도, 우리가 진정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게 된다면, 우리의 꿈은 마침내 이곳 지구에서 실현될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