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둑 호첸플로츠 1 비룡소 걸작선 7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글, 요제프 트립 그림, 김경연 옮김 / 비룡소 / 1998년 11월
구판절판


위대하고 사악한 마법사 페트로질리우스 츠바켈만은 마법의 성 부엌에서 짜증난 얼굴로 웅크리고 앉아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었어.
그는 위대한 마법사였어. 사람을 어떤 동물로건 가볍게 바꿀 수 있었고, 똥으로 금을 만들 수도 있었지-하지만 감자 껍질 벗기는 마법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 뭐야. 그렇다고 언제나 국수하고 보리쌀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러니 좋건 싫건 이따금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감자 껍질을 벗기는 귀찮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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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1-07-18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수 없는 것이다, 감자 껍질이란. 위대한 마법사라 해도 직접 까야 된다. 쪼그리고 앉아서.

순오기 2011-07-18 10:42   좋아요 0 | URL
어릴 때 감자껍질 벗기기 싫어서 언니한테 칼부림(?) 패악을 부렸는데...왜, 충청도에선 꼭 껍질을 벗겨서 감자를 쪄먹었는지 몰라요. 광주에 살면서 감자를 껍질째 쪄먹는 걸 알고 얼마나 충격받았던지.ㅋㅋㅋ

지금은 껍질 벗기는 칼로 죽죽 밀면 벗겨지니 패악부릴 일도 없어요.ㅋㅋ

무스탕 2011-07-18 10:41   좋아요 0 | URL
저는 씽크대 앞에 서서 숟가락을 박박 긁어서 까요 :)
요즘 하지감자들은 껍질이 얇아서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서 까면 살도 거의 안버리고 좋아요.

무스탕 2011-07-18 10:4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전요 다른건 몰라도 감자만큼은 껍질 벗기는 칼을 못쓰겠어요 ㅠㅠ
오이랑 무랑은 다 껍질 벗기는 칼로 슥슥 벗겨내는데 감자만큼은 도대체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감자 껍질을 칼로 벗겨야 하는 감자는 그냥 과일칼로 깍아요.
17년을 두고 시어머니께서 희안해하는 부분이지요;;;

순오기 2011-07-18 10: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하지감자는 달챙이 숟가락으로 박박 긁으면 돼요.ㅋㅋ
아~ 껍질 벗기는 칼로 하면 살이 많이 떨어져 나가나요?
그것도 고수가 되면 껍질만 얇게 벗길 수 있어요.ㅋㅋ

네꼬 2011-07-18 11:35   좋아요 0 | URL
어머나 이웃들의 정겨운 감자 수다. 제 서재가 오늘은 사랑방 된 거 맞죠? (좋아라.)

저는 감자칼을 쓰고 있긴 해요. 근데도 괜히 무서워서 (응?) 자꾸 감자를 놓치는 바보짓을 계속하고 있어요. 하지만 감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부턴 나도 위대하고 사악한 마법사다, 하고 생각하려고요. (뭐래.)

pjy 2011-07-18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반찬할꺼 아니라면 ㅋㅋ 쪄먹을때는 껍질 전혀 안깍는 전라도타입 여기 있습니다~~~

네꼬 2011-07-18 17:22   좋아요 0 | URL
근데 껍질 안 까고 찌면 나중에 깔 때 뜨거울 때 까야 되잖아요. 식으면 잘 안 벗겨 지니까. 근데 냄새가 솔솔 나면 빨리 먹고 싶어서 조바심 나고... 전 그래서 일단 까서 쪄요. 어쩔 수 없어요. ㅠ

moonnight 2011-07-18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귀여워요. 위대하고 사악한 마법사가 어두컴컴한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감자껍질을 벗기다니! >.< 네꼬님 서재에 옹기종기 모여서 감자얘기 나누는 알라디너분들도 너무들 예뻐보이시고요. ^^

네꼬 2011-07-18 17:21   좋아요 0 | URL
응 하하 웃기죠. 저도 이 대목에서 소리 내서 웃었어요. (그림은 더 웃김) 그 다음에 마법사가 한숨 쉬면서 하는 말은, "머슴이 없어서 이래!" ㅎㅎㅎ 감자 먹고 싶다. 여름이에요, 문나잇님.

다락방 2011-07-18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뭐, 누가 껍질 벗겨줘야만, 누가 요리를 해서 완성해줘야만 감자를 먹는 스타일이니까, 감자껍질 벗기는데 그렇게 크게 관여하지 않아요. 후렌치 후라이를 잔뜩 쌓아놓고 맥주나 마시다가 기절해버리고 싶은 오후에요, 네꼬님.

네꼬 2011-07-18 17:20   좋아요 0 | URL
"후렌치 후라이를 잔뜩 쌓아놓고 맥주나 마시다가 기절해버리고 싶은 오후에요,네꼬님"이라고 다락님이 그랬다고 남편한테 말하면서 나도 그렇다고 했더니 더우니까 조심하래요... 그 네꼬에 그 남편. ㅠㅠ

다락방 2011-07-1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나 투피엠하고 술 마시고 싶어요.

네꼬 2011-07-18 17:19   좋아요 0 | URL
비스트는 안 될까요....?

난 다락님하고 술 마시고 싶은데 :)

다락방 2011-07-18 17:20   좋아요 0 | URL
비스트가 뭐에요, 네꼬님. 하아- 아직도 나를 모르네. 나는 그런 멸치대가리 같은 애들 말고 사내를 좋아하잖아요. 비스트 대신 엠블랙..으로. 응?

(네꼬님도 좋지만 네꼬님과 엠블랙은 다르니까.. )

네꼬 2011-07-18 17:22   좋아요 0 | URL
어머 멸치 대가리라니! (나 왕 흥분) 멸치 대가리는 타블로고! 비스트가 어딜 봐서! 당장 취소해요!

다락방 2011-07-18 17:28   좋아요 0 | URL
흥! 취소 못해요! 이건 자존심의 문제야!

네꼬 2011-07-18 17:30   좋아요 0 | URL
취소해 취소해 취소하란 말야!!!!! (데굴데굴)

씩씩.
좋아요, 타협안.

비스트보다 투피엠이 더 '사내'란 건 인정하겠어요. 그러니 멸치대가리 발언은 취소해요. 더 이상 협상은 없어.

다락방 2011-07-18 17:41   좋아요 0 | URL
하아-
여자로 태어나서 한평생을 살면서...한번 뱉은말을 취소하는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해야 하다니..그런 일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네꼬님이 데굴데굴 구르니, 내 기꺼이 취소하겠소.

그치만, 엠블랙의 Y(와이)란 노래를 혹시 들어봤소? 젊은 사내들의 숨소리가 들린다오..

네꼬 2011-07-18 17:45   좋아요 0 | URL
퇴근 전에 취소 못 받아낼까봐 전전긍긍했네. 화해의 뜻으로 오늘 "Y"를 찾아 들어보겠소. (아아 다행... 긴장 풀렸다.)

다락방 2011-07-18 17:50   좋아요 0 | URL
내가 이메일로 파일을 주겠소. 찾는 수고를 덜게끔.
그런데 이메일 주소 좀.. (네꼬란 미녀의 이메일 주소따기 스킬 혹은 하우투 이메일 주소따기. 훗)

네꼬 2011-07-18 17:58   좋아요 0 | URL
흥 이 여자...! 흥 누가 넘어갈 줄 알고! (이러고 비밀댓글 단다.)

2011-07-18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1-07-19 12:23   좋아요 0 | URL
푸하하 두 분 너무 재미있어요. 커피 마시다가 흘렸어요. ㅠ_ㅠ 네꼬님의 데굴데굴.에서 그만 푸핫. ^^;

네꼬 2011-07-19 17:43   좋아요 0 | URL
=_= 문나잇님, 저는 광분했다 진정했다 하느라 피곤했어요. ==_== 눈이 이렇게.

레와 2011-07-19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배잡고 웃느라 데굴데굴데굴데굴)

네꼬 2011-07-19 17:43   좋아요 0 | URL
왜요 왜 왜 감자 땜에? 멸치 대가리 땜에? 데굴데굴땜에? (아, 나 멸치 넣은 감자 고로케 먹고 싶나?)

레와 2011-07-20 09:58   좋아요 0 | URL
크크크크크크크 반은 감자껍질 때문에, 크크크크크크크 반은 네꼬님과 다락님의 댓글때문에요. 히히히히히

네꼬 2011-07-22 09:17   좋아요 0 | URL
감자 껍질 때문에라면 얼마든지 웃으셔도 좋지만, 나와 다락님의 논쟁은... 뭐랄까 나와 다락님의 어떤... 고비...? ㅋㅋ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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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글을 못한다, 물을 삼킬까봐. 샤워기를 고정시키고 머리 감는 것도 못한다. 코에 물이 들어갈까봐. 그 얘기를 했더니 내 친구 클레어 씨가 엄청나게 웃은 다음, 사실 자긴 어렸을 때 알약을 못 삼켜서 수박씨로 삼키는 연습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엄청나게 웃었다. 우린 알약을 못 삼키던 어린이였고, 어느 부분은 여전히 다 배우지 못한 채 늙어가고 있다. 문득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놀랍다. 우리 모두가 "자기 팔이 자기 거라는 거 잘 모르"고, "자기가 자기란 걸 믿으려고 자꾸 막" 그러던 조그만 아기였는데, 이만큼 늙었고 이만큼은 아직도 덜 자랐다. 놀라운 일.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가슴이 두근거렸고 슬펐고 기뻤다. 몸이 아프다 싶을 만큼 속이 상해서 더는 못 읽겠는데 자꾸만 더 읽고 싶어서 괴로웠다. 애초에 김애란이 좋았고, 성석제 아저씨의 추천사를 믿었고, 잡지에 앞 부분 연재할 때 잘 따라 읽으면서 '정말 잘 쓰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더 좋았다. 처음에 표지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읽으면서 다시 보니 너무 슬프고 가혹하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정말 예쁜 것 같았다. 책을 다 읽고 한참을 운 다음 나는 애인(이자 남편)에게 말했다. "소설의 독자들이 돌아올 것 같아."   

우리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 우리는 남들도 고단하게 산다는 것을 알고 싶었고, 원래 인생이 그렇다는 것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사는 일이 참 신비롭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주고 싶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사는 일을 좋게 생각하고 싶었다. 몸과 마음이 엉켜 있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다. 어떤 어른들은 엄청난 꼰대이지만 대부분은 좋은 사람들이고, 심지어 나쁜 사람들도 사연이 있다는 걸 되새기고 싶었다. 젊으나 늙으나 사는 일은 엄연하고 팍팍하고 가슴 뛰는 일이고, 어려서 철이 없거나 늙어서 주책맞거나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책으로 읽고 싶었다. 그리고 또한 부모를, 사랑하고 싶었다.    

알라딘의 김애란 인터뷰 트위터 중계를 엿보니, 그녀는 "일년 간 쓴 편지에 답장을 받는 기분으로" 리뷰들을 챙겨 읽는다고 했다.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멋지게 쓸 수가 없어서 부끄럽지만, 그녀가 보라고 나는 여기에 쓴다. 김애란씨,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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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9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30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11-06-2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상큼한 리뷰를 올리면 궁금해지잖아요!

네꼬 2011-06-30 13:03   좋아요 0 | URL
(어리둥절) 어느 대목요? 아무튼 전 요새 브론테님을 (심지어 저 피카소 그림조차!) 질투하고 있다고요. (게다가 다락방님하고도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요, 흥.)

마노아 2011-06-30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어도 두근두근거려요.^^

네꼬 2011-06-30 13:04   좋아요 0 | URL
어맛 참... 어머. (마노아님 머리 근데 예쁘삼.)

섬사이 2011-06-30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네꼬님의 이런 글을 다시 읽을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특히 '심지어 나쁜 사람들도 사연이 있다는 걸 되새기고 싶었다'거나
'이만큼 늙었고 이만큼은 아직도 덜 자랐다. 놀라운 일.' 같은 부분을 읽을 때면
아, 네꼬님이다,라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져요. ^^
이 책, 꼭 읽어볼게요.

네꼬 2011-06-30 13:05   좋아요 0 | URL
저는 섬사이님 다시 만나서 반갑고 기뻐요. 제 서재에 먼지 쌓일 때도 이따금 가서 섬사이님 글 읽곤 했어요. 응, 저기 계속 계셔주시는구나, 하면서요. 고맙습니다, 언제나 :)

다락방 2011-06-30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저는 김애란에 대한 애정이 없고 '젊은' 작가이기 때문에 시기하기도 하므로 김애란의 책은 읽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이런 리뷰를 쓰면 어떡해요!! 하아-

네꼬 2011-06-30 13:07   좋아요 0 | URL
아우.
괜찮아요, 다. 내가 다락님한테 애정이 넘치니까. (보셨겠지, 나의 댓글들. 당신에게 달린 남의 댓글들도 그냥 못 넘기는 내 마음을....!)

moonnight 2011-06-3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 서평을 읽고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절대 읽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책이었는데!!! 네꼬님 리뷰에 무너집니다. 읽어야겠어요. (체념조로;)

네꼬 2011-06-30 13:08   좋아요 0 | URL
앗 문나잇님 목소리 들린다. ㅎㅎ 네, 체념하셔요. (다독인다) 괜찮아요, 잘 다 될 거예요. (응?)

꼬마요정 2011-06-3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리뷰는 사람을 설레게,궁금하게 하잖아요.. 읽지 않으면 왠지 네꼬님이 고개를 까딱이며 읽어봐~~ 읽어봐~~ 라고 최면을 걸 것 같은 느낌.. ^^

네꼬 2011-07-04 11:36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럼 최면이라면 만두 얼굴 고양이보단 "꼬마요정"님이 더 어울려요 하하하.

굿바이 2011-07-0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요리조리 피해다녔는데 아무래도 읽어봐야 할 모양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의지를 무너지게하는 이런 리뷰, 너무 자극적입니다요 :D

네꼬 2011-07-04 11:37   좋아요 0 | URL
저도 잠깐 피할까 어쩔까 했는데 그냥 읽으시는 게 좋겠어요. 걱정 마세요. (응?)

2011-07-01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4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4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4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7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4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7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6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7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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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씹어 먹듯 읽을 책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 성격상 어쩔 수 없이 배아파하며 읽게 되는 남의 여행기에 이토록 두근거릴 수 있나. 어쩔 수 없이 크게든 작게든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독서기가 이렇게 나를 지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나. 거의 항상 뜬구름 잡기가 되기 십상인 음반과 영화 소개가, 이토록 내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나. 때로는 너무 삐딱하고 때로는 대책없이 순진하며(아니 그 차에 탄 사람들이 누구일 줄 알고 덥석 낯선 승합차에 올라탄답니까? 사람 가슴 졸이게 참!) 대체로 완벽하게 주관적인 이 책은, 이미 많은 독자들이 말했듯 여행기가 아니라 산문집에 가깝다. 그리고 내가 이때까지 읽어온 어느 여행기보다도 재미있고 아름답다. 저자처럼 삐딱하고 순진하고 주관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빌 브라이슨보다 요네하라 마리보다 훨씬 나를 즐겁게 한 여행기였다. 제일 마음에 든 점은 저자가 전혀 잘난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카프카를 안쓰러운 동네 청년으로, 지젝을 참 별난 옆집 할아버지로 느끼게 하는 이 천진한 눈과 입을 보라지. 동유럽의 나라들 뿐 아니라 다양한 책과 영화, 음반의 세계를 종횡무진 헤엄치는 필자를 만난 기쁨이 나를 벅차게 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작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 "인생을 긍정하고 찬미할 줄 아는 천성"(143면)이라면, 저자도 참 좋은 작가의 천성을 갖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다만 오바를 마다 않고 늘 끈적이며 감상이 많고 잔걱정이 많은 글이니, '쿨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들춰볼 생각도 않는 게 좋다.  

*

책을 만들기도 참 잘 만들었다. 저자가 읽고 보고 들은 책과 영화, 음악에 대한 설명을 각주로 처리하고, 각주 표시조차도 보일 듯 말 듯 한 세심한 편집도 마음에 든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저자의 산문을 읽어가는 데 어려움이 없고, 원한다면 각주만 모아서 읽어도 좋은 읽을거리가 된다. 많은 여행서들이 그렇듯이 사진도 꽤 실었는데 이게 또 맘에 드는 것이, 아는 사람이 보면 모를까 나같은 사람이 봐서는 본문과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진들이다. 글은 촘촘하고 사진은 성기다. 얼마나 괜찮은 조합인가. 다만 수사가 너무 많아 이건 좀 걸러줬어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시 봐도 참 말 되는 비유들이라 뭘 덜고 뭘 남겨둬야 하나 고민됐을 것 같다.

*

표지에는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여행자가 있다"는 문장이 쓰여있다. 그럴듯하긴 한데, 사실은 어느정도만 맞는 말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게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윤미나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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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03-19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유럽여행계 할래요, 콜! (근데 이거 언젠가 알라딘 어디서 했었지 싶은 게...데자뷔 현상인가)

네꼬 2010-03-23 17:24   좋아요 0 | URL
그러게, 치니님 말씀 듣고 보니 알라딘 어디선가 저도 본 것만 같은 게... (설마 저랑 치니님이랑 같이 한 건 아니겠죠? ㅎㅎ)

다락방 2010-03-19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내 마음에 쏙드는 예쁜 리뷰에요. ♡

네꼬 2010-03-23 17:24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하하. (아니 왜 이런 웃음이...)

레와 2010-03-19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주는 네꼬님?! ㅋ
나도 콜~이요!! ^^


네꼬 2010-03-23 17:25   좋아요 0 | URL
이 계주를 믿는 건가요, 레와님? (아이고 이 아가씨 속여먹기 딱 좋겠네!)

순오기 2010-03-19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추천하는 분들이 많아서 말귀를 알아 먹으려면 꼭 봐야하는 책이네요.^^

네꼬 2010-03-23 17:25   좋아요 0 | URL
^^ 순오기님이 읽으시면 어떤 소감이 나올지 궁금해요. 네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비로그인 2010-03-19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뭐 요렇게 사랑스런 리뷰를 봤나~^^*

네꼬 2010-03-23 17:26   좋아요 0 | URL
어머, 아니 이런 감사한 오해를 보았나...;; (땀 뻘뻘)

프레이야 2010-03-1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네꼬님표 리뷰에요.^^
태그 보고 웃음 나요. 나도 계꾼에 끼고싶다는..ㅎㅎ

네꼬 2010-03-23 17:27   좋아요 0 | URL
"계꾼"은 정식 명칭인 건가요? 거 참 좋은데요! ㅎㅎ

2010-03-20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3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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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책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책이라고, 누가 한 말을 주워들은 적이 있다. 아마 카프카쯤 될 것이다. 말하자면 얼음을 깨는 도끼 같은 책이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랬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슨 독서가 그렇게 고통스러워야 돼? 유쾌한 책만 읽으려고 애를 써도 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책은 만나게 마련이다. 액션 영화만 보려고 티비 채널을 열심히 돌려도 이따금 가슴이 먹먹한 영화의 한 장면을 마주쳐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이 카프카가 만족할 만큼 좋은 책일지, 무섭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어딘가 아쉬운 점이 있는 책일지, 어쩌면 '자살, 우정' 이 얽힌 짐작하기 쉬운 청소년소설일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이 책을 읽는 동안 너무 많이 울었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워서 울었는지, 울어서 고통스러웠는지 모르겠다. 다만 편집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네, 저는 지금 사적인 이유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리뷰를 써야 했고 그래서 다시 책을 들추어야 했을 때 그러고 싶지 않을 만큼, 이 책은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왜일까? 가까운 친구의 은밀한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천지가 불쌍해서? 딸을 가슴에 묻고도 바로 그 슬픔 때문에 씩씩하던 엄마가 "아가! 좋은 배 타고 편히 가거라!" 라면서 흔들리는 장면 때문에? 죽지 않고서는 풀리지 않는 비밀들이 실타래처럼 풀려나는 것이 한스러워서? 친구를 죽게 한 화연이의 못된 방황이 안타까워서? 글쎄, 그럴 수도 있고 다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것, 내가 운 것은 어쩌면 다른 이유.  

안다고 말하지 마라. (어떤 독립영화의 제목이었지요.)

그래,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깊은 상처를 준다. 너 힘든 거 내가 안다, 너 아픈 거 내가 안다, 너 속상한 거 내가 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를테면 가족, 베스트 프렌드, 애인들-이 제일 결정적인 상처를 준다. 왜? 어디를 찔러야 제일 아픈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평소의 네꼬씨와 어울리지 않은 줄 알아요. 이게 다 술의 힘이랍니다.) 나는 그런 것이 늘 싫었다.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 나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언젠가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집어던지고 싶을 만큼, 그런 말에 화가 난 적도 있었다.(친구 여러분을 실망시켜서 미안합니다만, 저도 이따금 난폭한 고양이라고요.)  

그래도 너는 씩씩하니까 괜찮겠지, 라고 말했던 친구가 있다. 내가 불행을 잘 이겨내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너는 겉으로는 멀쩡하면서 속으로 약한 게 탈이야, 라고  말했던 친구도 있다. 아, 참, 구체적인 예가 떠올랐네. 재수를 하는 나를 막 걱정해놓고 막상 내가 대학에 합격하자 뭐 꼭 재수까지해서 좋은 학교 갈 필요 있나 싶어, 라고 말한 친구도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 그것이 손에 가시가 박히는 통증이든, 내일 모레 죽을 사람의 절망이든. 이렇게 쓰고 보니 나에게도 물어보게 된다. 그래서 너는 네 친구들에게 언제나 조심해왔니? 친구의 고통을 알면서도 그 고통을 확인함으로써 네가 행복하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우아하게 괜찮냐고 물어본 적이 없니? 성급하게 위로하기 전에 친구의 신음소리를 경청해봤니? ...... 그래서 내가 지금 맥주를 이만큼이나 마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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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공주 2009-12-1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다고 말 못해요.만나주지도 않는데 어떻게!버럭!

네꼬 2009-12-15 13:26   좋아요 0 | URL
버럭! 하시지 말고 조만간 뵈어요. 그러게, 안다고는 말씀 마시고.. (응?)

다락방 2009-12-14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네꼬님의 이 리뷰에 가만가만 추천을 하고 가요. 왜냐하면요, 추천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네꼬 2009-12-15 13:26   좋아요 0 | URL
어휴, 다락님. 제발 제 서재에 오실 땐 쿵쾅쿵쾅해주세요!

섬사이 2009-12-15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완득이 때보다도 좋아졌단 말이죠?
음... 읽고 그냥 확 울어버릴까요?
다들 좋다고 하니까 궁금해 죽겠네요. ^^

네꼬 2009-12-15 13:27   좋아요 0 | URL
음.. 꼭 완득이보다 이 작품이 좋아서라기보다.. 작가의 마음 한편을 엿본 기분이랄까요? 하여간 제 주변에 운 사람 많아요. 섬사이님은 어떠실지!

무해한모리군 2009-12-1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픈 소설은 안읽을라 그랬는데..
참 좋은 리뷰예요.
고기를 같이 먹으면 네꼬님을 더 알고싶은 마음이 생길거 같긴해요 ㅎㅎㅎ

네꼬 2009-12-15 13:28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이랑 고기를 같이 먹는데, 뭐 더 알고 말고 할 거 있겠어요? 우리 만나서 같이 고기에 대해 알아볼까요? (뭐래?)

치니 2009-12-1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의 저 말은, 카프카를 통해서가 아니라 최승자 시인을 통해서 알았어요. 저도 그때 입이 삐죽 했지만, 잊혀지지 않아요.
휴, 고민이네요, 내용상 읽고 싶지 않지만 네꼬님이 이렇게 쓰시니 읽어볼까 싶기도 하고.

네꼬 2009-12-15 13:28   좋아요 0 | URL
저는 대학 때 철학 수업에서, 역시 시인인 진은영 선생님 통해서요. (^^) 저는 입을 삐죽이면서 심지어 받아적기까지..-_- 읽어보세요, 읽어보세요, 하린군하고 같이 읽어보세요.

희망찬샘 2010-01-0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최근 들어 가장 집중해서 읽은 책! 무척이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잠자리를 뒤숭숭하게 한 책! 바로 어제 저녁에 눈 빠지게 읽었습니다. 리뷰 쓰기 전에는 네꼬님 글 읽지 말아야겠어요. 지금 저도 리뷰 쓰려고요.
네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들어 와 봤어요. 좋은 일 가득 만나시는 한 해가 되길 빌어요. ^^

네꼬 2010-01-04 11:16   좋아요 0 | URL
샘님, 안녕하세요? 으와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으와아는 왜?) 이 책을 읽고 저도 한동안 마음이 싱숭생숭했어요. 잘은 모르지만 그런 뜻에서라도 좋은 책인 것 같아요. 새해에는 희망찬샘님도 저도 좋은 책 많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좋은 책을 통해서 우리 둘도 많이 만나고요!)

2010-01-15 0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0-06-2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의 리뷰, 계속 읽게 되네요..
스윽-
바람도 없는데 문이 열리면, 공포영화가 따로 없는데..
스윽- 저도 모르게 마음 문이 열려버렸으니..
아아.. 네꼬님 무서워요. 힝~~
 
중력과 은총
시몬느 베이유 지음, 윤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0월
구판절판


사람들이 줄 거라고 우리 스스로 상상하는 것, 사람들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빚지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부채를 면해줄 것.
실제의 그들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모습과 같지 않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것. 이것은 신의 자기희생을 본받는 것이다.
나 역시 스스로 상상하는 것과 다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용서이다. -22-23쪽

가진 힘을 모두 사용하지 않는 것, 그것은 빈자리를 견디는 것이다. 그 어떤 자연법칙에도 어긋나며 오직 은총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은총은 물론 대상을 채워주지만, 우선 받아들이기 위한 빈 공간이 있어야 은총이 들어올 수 있다. 그 빈자리를 만드는 것 역시 은총이다.

준 것만큼의 대가를 받아야 할 필요성, 보상의 필요성. 만일 이 욕구를 누르고 빈 공간을 남겨 두면 흡인 작용이 일어나고 초자연의 보상이 찾아온다. 초자연의 보상은 다른 보상이 있을 때는 오지 않는다. -24-25쪽

‘나’가 외부로부터 상처받게 되면 처음에는 발버둥치는 짐승처럼 극단적이고 격렬하게 반항한다. 그러나 반쯤 죽어버린 상태가 되면 차라리 완전히 죽길 바라고 정신을 잃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랑의 손길이 건드려 깨우면 고통스러워하며 그 고통을 야기한 사람에 대해서 분노와 증오심을 갖게 된다.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은혜를 베푸는 사람에 대해 오히려 복수심을 품는, 일견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53쪽

일반적으로 말해서 ‘신을 위하여’라는 말은 옳지 못한 표현이다. 신은 ‘위하여’란 말 앞에 놓일 수 없다.
신을 위하여 이웃에게로 가지 말고, 사수가 쏜 화살이 표적을 향해 가듯이 신에게 쫓겨서 이웃을 향해 갈 것.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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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lflorist 2010-03-10 0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밋는책이겠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