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는 알라딘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신부가 짐작보다도 훨씬 예뻤다. 신부의 친구들마저 예뻤다. 이제 드디어 남의 결혼 사진에서 빠질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했으나 모처럼 공들여 한 화장이 아까워서 이번까지는 사진을 찍기로 했다. ('안 찍으면 신부가 서운해할 것 같다'는 착한 친구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기도.) 부케 받는 분이 사진 각도 만드느라 고생하신 덕분에 웃음이 넘쳤다. 그 웃음에 녹아서, 우정에 대해 생각했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들, 그 중에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 그중에 이렇게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 고맙고 뭉클하다.


모처럼 놀러 나온 길, 남편과 나는 잔칫집 점심을 먹고 슬슬 서울 구경을 하기로 했다. 충동적으로 성북동에 갔다. 어린 시절 종종 갔던 성당과 그 골목은 그대로지만, 많이 변한 모습을 보니 감상이 새로웠다. 회상하니 기분이 좋으냐고 묻는 남편에게 "좋기도 하고 좀 안 좋기도 하고. 근데 어떻게 사람이 좋은 것만 돌아보고 살겠어요."라는 훌륭한 말을 해버렸다. 우리는 교보문고로 차를 돌렸다.


주말의 교보문고는 이상한 곳이다. 책 읽는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 무신경하게 자리잡고 책이나 물건을 보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나는 싫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도라고 들었는데 저렇게 함부로 펼쳐 보는 책들은 이제 어떻게 되나? 그런 생각도 안 할 수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 역시 이 순간 남을 불쾌하게 만드는 '많은 사람' 중 하나겠지, 씁쓸해졌다. "이제 교보문고 안 올래요." 내가 말하자 남편은 "아니에요. 또 오게 되면 또 와요." 한다. 현명한 사람.


명동 교자에서 칼국수를 먹었다. 세상에, 여긴 어쩜 이렇게 늘 맛있을까! 비록 면이 평소보다 퍼졌지만 진한 국물과 고소한 만두, 양념 범벅의 겉절이 김치 모든 게 맛있다. 게다가 그렇게 붐비는데도 밥 먹기에 정신 사납지는 않은 매장 운영이 마음에 쏙 든다. 가만 보면 직원들이 모두 일을 잘한다. 인원 확인 -> 좌석 또는 대기 줄 위치 배정 -> 주문과 계산 -> 음식 서빙 -> 김치와 밥 리필 이 모든 과정이 유연하다. 사람이 많다고 빨리 나가라고 눈치 주지도 않고, 급하다고 대충 서빙하는 법도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그릇을 치울 때도 손님 눈을 보면서 "맛있게 드셨어요?" 한다. 조그만 포스터를 보니 올해가 창업 50주년이라며 사연을 공모한단다. 진지하게 나도 내볼까 생각했다.


주말 명동이라니 사람이 얼마나 미어터질까 각오했는데 의외로 다닐 만했다. 관광객이 많아서 불편하다고들 했는데, 사실 나도 서울 관광객이니 뭐. 신중하게 샤워 퍼프를 고르는 일본 아주머니들, 알록달록한 인형 수레 앞에 멈춰서 일행을 부르는 중국인 가족, 행인을 붙잡고 메뉴판을 내밀며 "삼겹살, 김치전"을 설명하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나는 이런 활기가 좋다. "여보, 너무 재미있어요. 너무 좋아요." 더 놀고도 싶고, 추워서 차로 돌아가고도 싶어서 갈팡질팡했다. 남편은 "한 블럭만 더 걸어요." 한다. 이런 다정함이 나는 그렇게나 좋다. 동네로 돌아오는 길에 '명동이 소문만큼 막 관광객 관광객 하지 않고 놀 만 한 곳이던데, 사람들 너무 엄살이었나 봐' 하고 말하려는데 남편이 먼저 말한다. "호들갑 떠는 만큼 요란하지 않네요." 나는 그렇게나 좋다.


남대문시장 근처에서 차가 신호 대기하고 있을 때 문득, 몇 년 전의 데이트가 생각났다. 여보, 우리 그때 이쪽으로 어디어디 다녔었지, 그때 우리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땐데, 기억 난다, 얘기를 나누면서 입가가 간질간질했다. 그때 쓴 일기를 오늘 꺼내 본다.


*

지난 주말 나는



오래간만에 학교 앞 떡볶이 집에 갔고
사람이 너무 많은 유원지에서 오후를 보냈고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늘 좋아했던 영화를 또 보았다.
작정하고 찾아간 식당이 쉬는 날이라 다음을 기약하고
조개가 많이 들어간 칼국수를 먹었다.
소공동 골목길에 늘어선 오래된 양복점 진열장에서
새로 들어온 천과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나무 가구를 구경하고
명동 입구 골목 문 닫힌 ‘만물쎈타’의
구식 사진기와 라이터, 마작, 시계, 열쇠, 술병 들을 들여다보았다.
메뉴판 제목부터 철자를 틀린 길모퉁이 커피숍에서
제일 싼 커피를 시켜놓고 옛날 사진들을 오래오래 보았다.
영화관에 갔더니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서점에 들러 그림책을 몇 권 읽고
감자고로케와 새우튀김을 먹고 밤공기를 쐬었다.

 

이 모든 일들을
둘이서 했다. 
 


*



오늘은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서 소고기 미역국을 끓이고 새 밥을 했다.

다정하고 똑똑하고 재미있는 남편,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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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2-22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함께 생일축하합니다! :)

네꼬 2016-02-22 12:16   좋아요 0 | URL
으헤헤 감사합니다. (점심시간인데 왜 댓글이!)

다락방 2016-02-22 12:17   좋아요 0 | URL
저는 후발대에요. 좀 이따가 점심 먹으러 갈거에요. 배가 고파서 돌아버릴 것 같아요!!

네꼬 2016-02-22 12:20   좋아요 0 | URL
어 그러게, 배고플 것 같아서 내가 다 초조..

다락방 2016-02-2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저는 네꼬님이 좋은것처럼
네꼬님 글도 참 좋아요!
(댓글 폭탄!!)

네꼬 2016-02-22 12:20   좋아요 0 | URL
하트 폭탄 (ㄲ ㅑ )

무해한모리군 2016-02-2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꼬님 행복했겠다~

네꼬 2016-02-23 16:54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흐 (최대한 음흉하게 웃어 보았어요.)

아무개 2016-02-2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정하고 똑똑하고 재미있는 남편이라니..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네꼬 2016-02-23 16:55   좋아요 0 | URL
헤헤 제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렇게... (팔불출)

뽈따구 2016-02-22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모든 일들을
둘이서 했다

와... 감동적이에요. ♡

네꼬 2016-02-23 16:56   좋아요 0 | URL
혼자 해도 좋겠지만 저는 둘이 해서 더 좋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좋아요. 하트 감사합니다. 넙죽.

치니 2016-02-2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 간질간질, 저처럼 무미건조한 사람까지 녹아내리게 만드는, 어쩜 이렇게 글을 사랑스럽게 쓰실까요, 우리 네꼬님은. :)
혹시라도 남편 분이 이 글 보신다면 또 얼마나 기분이 좋으실까요. :)

네꼬 2016-02-23 16:57   좋아요 0 | URL
치니님이 간질간질이라고 쓴 거 보니까 제가 녹는걸요. (이상하다?)
그저 왈왈 합니다. 활활 왈왈

비로그인 2016-02-22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생일 축하드리고요. 일기를 맛깔나게 잘 쓰셨네요. 약간만 다듬어면 시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의 시로 만들어 보세요. *^

네꼬 2016-02-23 17:07   좋아요 0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시 쓸 생각은 없지만... (^^)

서니데이 2016-02-2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 오늘 대보름입니다.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네꼬 2016-02-23 16:59   좋아요 0 | URL
구름에 가렸지만 보름 잘 보냈습니다. 추웠어요.
서니데이님,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네요!

moonnight 2016-02-2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네꼬님 남편분 생일 축하드려요!!!! 여보라고 부르는 우리 네꼬님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만 제 볼이 빨개집니다. (주책 죄송 ㅠ_ㅠ;;;) 이 모든 일들을 둘이서 했다. 에서 저도 그만 녹아내림. ㅠ_ㅠ(또 주책 죄송 ㅠ_ㅠ;;;;)


그나저나, 많은 사람들이 교보문고 칭찬을 할 때 출판사 분이 쓴 기사를 읽었어요. 네꼬님 말씀하신 대로, 무신경하게 펼쳐보고 헌책이 되어버린 책들에 대해서는 서점이 책임지지 않는다고. 반품이 되어 출판사로 되돌아오는 그 많은 책들에 대해 마음아파 하시는 글이어서 저도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만든다는 명목하에 출판사에는 손해를 강요하게 되는 형국이라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요. ㅠ_ㅠ;;;

네꼬 2016-02-24 16:22   좋아요 0 | URL
헤헤 축하 감사합니다. 주책은 제가 주책이죠;;; (이건 확실함..)

겉으로는 서점이 통 크게 독자에게 쏘는 것 같은 인상인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지요. 돈도 돈이지만 저 책들의 운명이 걱정돼요. 그런만큼 모두들 살살 보면 좋을 텐데 그게 그렇질 않아서 마음이 그랬어요. 힝. 공감해주시는 문나잇님 고맙습니다.

웽스북스 2016-02-2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와주셔서 넘 감사해요!!! 네꼬님이 쓴 글을 읽으며 저도 마음의 위로를 받고...!! ^^
제가 피부관리를 안받아서 네꼬님한테 혼날 각오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예쁘다고 해주셔서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청담동 만세!)

결혼을 하니까 네꼬님 글에도 등장하고 좋군요!!!!! 사진 찍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네꼬남을 못봐서 ㅠㅠ 서운 ㅠㅠ
그래도 결혼식 오신 김에 두분 데이트도 하셨다니 또 막 좋고 그렇습니다!!! ㅋㅋㅋㅋ

네꼬 2016-03-04 13:35   좋아요 0 | URL
웬디님, 다시 한번 축하해요. 즐겁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그러시길요! (^^)
전 이제 가족 외 결혼 사진은 찍지 않겠어요... ... 안 찍을 거야.. ..
덕분에 데이트도 즐거웠습니다. 봄은 사랑의 계절. (응?)

2016-03-01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이 있어서 집에 사진 작가가 왔다. 함께 온 어시스턴트는 귀여운 아가씨였는데 긴장한 얼굴로 사진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심부름을 했다. 조심조심 움직이며 실수를 안 하려고 애쓰는 눈치였고, 화장실 쓰고 싶단 말도 사진 작가가 대신 해주였다. 그런데 일이 끝나고 나가는 길에 이 아가씨가 쭈뼛쭈뼛 나를 보더니 책장 한 구석을 가리키며 개미만한 소리로 뭐라고 뭐라고 한다.  



"저 책들... 저... 진짜 좋아해요."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것.

책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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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6-02-02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귀엽네요

네꼬 2016-02-02 16:28   좋아요 0 | URL
네 귀엽지요. 저도 그래서 그만 어깨를 안았답니다. (아가씨 죄송..)

moonnight 2016-02-0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그 마음 이해가 되네요. 귀여운 아가씨^^ 와 그런데 네꼬님 사진작가도 집으로 찾아오시는 유명인?@_@;

네꼬 2016-02-02 16:27   좋아요 1 | URL
하하하 그러는 문나잇님이 더 귀엽네요 ㅋㅋㅋㅋㅋ 일단 사진 작가는 누구나 (돈을 내면) 모실 수 있습니다... 저는 뭐 일하는 것 때문에... 아무튼 ㅎㅎㅎㅎㅎ 아 웃겨.

(정색) 혹시 제가 유명연인 된다면 이 정도로 하겠습니까. 동네방네.. 문나잇님 서재까지 가서 알릴 테니 그 전엔 걱정 마세요(응?)

하늘바람 2016-02-0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네꼬님

네꼬 2016-02-10 17:10   좋아요 0 | URL
에엣 무슨 그런 말씀을.....!

뽈따구 2016-02-11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들, 저도 사랑해요! ^^
귀여운 어시스트님이시네용. ㅎㅎ

네꼬 2016-02-18 12:32   좋아요 0 | URL
귀여운 사람들이 귀여운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J와 어머니가 내렸다. 평소 말이 없는 소년이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표정이 좋지 않다. 집이 먼 경우라 오는 길에 고단했나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자면서 왔어? 피곤해 보이네." 해도 답이 없다. 어머니가 "선생님한테 할 말 있잖아. 말씀 드려." 하는데 J는 여전히 답이 없고 대신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얘가 장염에 걸렸거든요. 그래서 누나하고 엄마만 요 앞 까페에서 차 마셨다고 기분이 안 좋아요. 오늘 수업 때도 간식 먹으면 절대 안 돼요." 어머니 말씀을 듣고 J를 안아주면서 "아이고 이 겨울에 장염이라니. 날도 추웠는데 어떡하냐." 그러자 J가 우앙 울음을 터뜨린다. 방수가 되는 점퍼 위로 눈물이 또르르 또르르 미끄러진다. 당황한 어머니가 "아이고, 왜 또 울어." 하시며 가볍게 나무라셨다. "추우니까 들어가서 울자." 나는 J를 데리고 들어왔다.  


언제부터 아팠는지, 증상이 어땠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물어보는 동안에 J는 조금씩 진정이 되어 울음을 그쳤다. 따뜻한 물을 권했는데 고개를 내젓는다. 나는 선물 포장용 비닐 봉투를 꺼내 와 테이블 위에 있던 곰돌이 젤리를 몽땅 담았다. 초콜릿을 담으면서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다음주 올 때까지 날마다 하나씩 먹어." 라고 했다. 누나랑 엄마는 절대로 주지 말고 너 혼자 먹으라고, 혹시 너무 나눠 주고 싶으면 그래도 되지만 선생님은 네가 혼자서 다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조금 웃었다. 평소에 아끼는 고양이머그 (잡지 만들던 시절 마감에만 쓸 정도였다)를 꺼내며 다시 따뜻한 물을 권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머그에 그려진 고양이가 나오는 책을 함께 읽었다. J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말수가 적은 소년은 너무 어렵고, 그리고 너무 좋다.









서울에 사는 J는 누나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 나를 만나러 파주까지 온다. 처음 만난 날은 한 시간 동안 "네"와 도리도리로만 의사를 전했고 그나마도 다 합쳐야 다섯 번이 되지 않아서 무지 애를 먹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뭐 했냐고 물어보니까 선생님이랑 얘기 엄청 많이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하셨다. 듣는 것으로 대화하는 사람이 있다. J도 그런 어린이였던 것이다. 활달하고 붙임성 있는 누나에 비해 표현이 없는 소년. 누나가 할 일을 마치고 집에 올 때까지, 어머니가 퇴근할 때까지, 빈 오후를 외할머니와 TV와 함께 보내는 게 일상인 소년. 아마도 나는 J가 실제로 만난 사람 중에서 제일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엄청 얘기를 많이 했다는 것이겠지.


애초에 일정에 무리가 있고 집도 멀어서 한 달만 만나기로 했었다. 책을 읽고, 읽어 오고, 얘기하고, 또 읽고. 떡국을 주제로 얘기하던 날(응?) J는 나이 먹는 게 좋다고 했다. "할아버지 되니까요." 이유를 물어도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헤어지는 날 내 앞에서는 잘 참았는데,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엄마가 "선생님이 또 시간 맞출 수 있으면 만나자고 하셨으니까, 나중에 전화 해볼게."라고 달랬는데 그 뒤로도 종종 울면서 전화 좀 해보라고 한다고 어머니가 난감해하셨다. "주로 자기 전에 그렇게 울어요." 그 말을 듣고 며칠 동안 나 역시 잠들기 전에 J가 생각 났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 어렵게 일정을 조정해 한 달을 만나는 중이다. 이 와중에 한 주는 누나 스케줄 때문에 못 오고, 2주만에 오는데 장염에 걸렸으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날 만나러 와주다니 생각할수록 고맙고 미안했다.


"울고 있는데 누가 울지 말라고 그러면 막 화 나지 않아?" 했더니 쑥 들어간 눈이 동그래진다. "아니, 누구는 좋아서 울고, 울고 싶어서 우느냐고. 참고 참다 어쩔 수 없이 우는 건데. 그리고 울지 말라고 하면 마음 대로 그만 울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치? 어떤 땐 그래서 더 울게 되고 그렇더라." 그러자 J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울고 싶을 때 울어도 돼. 근데 울면 힘이 빠지잖아. 그러니까 울면서도 언제쯤 그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게 좋은 것 같아. 그리고 어른이 되면서는 울면 힘드니까 이번엔 안 울어야겠다, 하면서 조금씩 덜 울면 좋고. 선생님은 그랬어." 이 말을 하면서 나는 같은 말을 나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르쳐 주어서 고맙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J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이 맥락 없는 악수에 놀라지 않고 조용히 응해 주었다. 작고, 조금 축축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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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1-30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냥 반가워요

네꼬 2016-01-30 00:51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 저도 반가워요. (어딘가 청소 안 한 집에 친구 온 기분...)

로자 2016-01-30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좋은 느낌의 글!
저에도 가르쳐 주어서 고마워요.

네꼬 2016-01-30 00:58   좋아요 0 | URL
로자님 감사합니다. 배운 것 또 배워도 저는 늘 몰라요;;

다락방 2016-01-30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마지막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늘 얘기하지만, 글 좀 자주 써주세요! 으앙 ㅠㅠ

네꼬 2016-01-30 12:07   좋아요 0 | URL
으앙 ㅜㅜ 게으른 친구를 격려하는 다락방님. 고마워요.

2016-01-30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30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6-01-30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꼬님 ㅠ_ㅠ J어린이를 떠올리며 저도 눈물이 핑 ㅠ_ㅠ;;;; 네꼬님 글을 읽으며 조카아이들에게 조금 더 좋은 고모가 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좀 더 자주 써주세요. ㅠ_ㅠ;;;;;;

네꼬 2016-01-30 12:10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은 지금 더 좋은 고모이실 것 같은데요 뭘. 여기 게으른 친구 격려하는 친구 또 계시네. 고마워요. 우아아앙 ㅜㅜ

웽스북스 2016-01-3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나도 이 글 읽는데 눈물 왜 핑 돌지? ㅜㅜ

네꼬 2016-01-30 17:35   좋아요 0 | URL
웽님이 착하기 때문이죠. 날씬한 웽님아!

밤의숲 2016-02-01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착한 건가요!!! ㅠㅠ

네꼬 2016-02-02 13:19   좋아요 0 | URL
밤의숲님 그럼여 착하고 말고요 ㅠㅠ
 

글쓰기에 게을렀던 것을 반성하면서 그간 있었던 어린이 고객님들의 사랑스러운 일화들과 내가 읽은 재밌었던 책, 망한 책에 대해 무려 한 시간에 걸쳐 페이퍼를 썼는데 (영문도 모르는 채) 날렸다. 우리집 인터넷 탓일 거다.

 

원통해서 마지막에 쓴 것만 적어 두겠다.

 

"이제 절반 정도 썼는데 배가 고파서 못 쓰겠다. 오늘 점심은 굉장히 맛 없는 계란국과 냉동 흑미밥, 너무 짠 시금치 무침이다. 결국 맛있게 먹겠지. 어쩐지 분하다."

 

쓰고 보니 더 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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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5-12-09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반성 내용 중에 ˝글로 쓰지 않은 생각과 말들은 다 날아가겠지˝ 운운했는데, 뭔가 스스로의 예언이었나!

네꼬 2015-12-09 12:36   좋아요 0 | URL
그래서 썼는데 왜 날아가! 분해!

보슬비 2015-12-0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에 임시저장 기능이 있는데 한번 확인해보세요.~ 가끔 임시저장도 잘 안되는경우도 있지만^^;;

저도 종종 분한일들을 당해서 댓글 남겼어요.ㅎㅎ

네꼬 2015-12-10 12:29   좋아요 0 | URL
임시 저장도 보았는데 아주 깨끗이 날아갔더라고요. 아마 저희 집 문제인 것 같아요. 게을렀던 값이다 하고 있어요. ㅠㅠ 감사합니다. (동지!)

뽈따구 2015-12-0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꺅... 저도 분해요 ㅠㅠ. 네꼬님 글이 날아가다니!!! ㅠㅠ

네꼬 2015-12-10 12:30   좋아요 0 | URL
뽈따구님, 분한 마음 감사합니다. (이상하네요?) 지난 일은 잊고 새로 잘 해보겠습니다.....

Mephistopheles 2015-12-09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역시 글이란 이렇게 읽기만 해도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거리는 네꼬님을 상상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네꼬 2015-12-10 12:31   좋아요 0 | URL
제 글이 그렇게 생동감! 있었던! 것으로 알겠고, 메피님 댓글도 참 생동감! 넘쳐서 이렇게! 제가 또 분하네요?

Mephistopheles 2015-12-10 12:48   좋아요 0 | URL
그치요 마치....생선같은 글과 댓글이죠....생선이요 생선....그 노라조가 제목지어 부른 그 생선말이지요..

네꼬 2015-12-10 13:16   좋아요 0 | URL
하하. 메피님 기억력 짱이셔 ㅋㅋ

다락방 2015-12-1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ㅠㅠ 어제 바빠서 서재브리핑에 네꼬님 이름 있던것만 살짝 보고..

아 맞다 네꼬님 글썼던 것 같은데? 하고 이리 와봤건만.. 글 날렸다는 거네요. 우앙 ㅠㅠㅠㅠㅠ
분하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네꼬 2015-12-10 17:23   좋아요 0 | URL
몽창 ㅜㅜㅜㅜㅜ 벌이에요 벌. 게을러서 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러나 지지 않고 또 쓸 거임!

moonnight 2016-01-30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렇게 분한 일이 제가 모르는 사이 일어났었군요!!! ㅠ_ㅠ;;; 근데, 결국 맛있게 먹겠지. 에서 빵 터졌어요. ㅎㅎㅎㅎㅎㅎ;;;

네꼬 2016-01-30 12:10   좋아요 0 | URL
그랬어요, 맛있게 먹었어요. 이런 바보 같은 나날!!!!!!!!!!
 

문맹이던 H가 어엿한 1학년이 되어 독서교실에 다시 찾아왔다. 1년만의 재회. 매너남 조기 교육을 받는 어린이답게, 체크무늬 반바지에 흰 셔츠, 까만 구두 차림에다 해바라기 한 송이까지 들고 왔다. 나도 정중히 받았다. 


H는 며칠 전에 친구 소개로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게임도 못(못!)하고 읽었다면서 가방에서 엽기 과학자 프래니 한 권을 꺼냈다. 차례를 펼치곤, 요기 요기 요기 요기 요기 요기가 재밌단다. 특히 요기가 재밌다고 해서 선생님도 읽어 보고 싶다고 했더니 문득 나를 바라보며 "같이 읽을래요?" 한다. 8세 남의 "같이 읽을래요?"라니. 


비록 "으스스한 소리"를 "스르르한 소리"로 읽고, "우스꽝스러운"을 차마 읽지 못해(아마도 여기에 진짜 '꽝'이라고 쓰인 걸까? 이렇게 안 어울리게? 하고 생각한 듯) 주저했지만 H의 낭독은 너무나 달콤했다. 같이 읽을래요? 그러고 말고, 그러고 말고. 



나는 이 책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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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숲 2015-09-16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워요! 쏘스윗 😆

네꼬 2015-09-17 11:19   좋아요 0 | URL
얼마나 진지하게 읽는지 들었으면 더 스윗하셨을 거예요 *..*

moonnight 2015-09-16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잉 이렇게 사랑스러운 (전문맹;;;)소년!!!♥♥♥♥♥♥♥ 저도 듣고 싶어요. 같이 읽을래요?^^(제 조카아이는 만화볼 때 말해요. 이거 재미있어요. 고모 같이 봐요. 그럴 때도 너무 달콤해서 녹아내리는 고모인데 같이 읽을래요?라니♥♥♥)

네꼬 2015-09-17 11:20   좋아요 0 | URL
전문맹 ㅎㅎㅎㅎㅎ 현재는 쓰기만 반문맹이에요. 어린이가 뭘 권하는 건 왜 이렇게 좋을까요? 그게 뭐든지요. 힝 문나잇님네 조카는 고모 좋아하는구나!

마노아 2015-09-16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8세남이라니!!!

네꼬 2015-09-17 11:20   좋아요 0 | URL
제가 녹아요 안 녹아요? ㅠㅠ

뽈따구 2015-09-1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같이 읽자˝ 가 달콤한 말이었다는 걸......... 몰랐어요 >.,.<

네꼬 2015-09-19 12:15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이에요. 내내 웃으면서 들었습니다. ^^

그리운남쪽 2015-09-20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꼬님!!
책정보가 필요할 때만 구경하던 알라딘서재를 네꼬님 덕분에 매일 들어오게 되고, 네꼬님의 거의 모든 글에 댓글을 막 다는 다락방님 서재도 어쩔 수 없이(?) 들락거리게 되고, 네꼬님이 일시적으로 절필하시면 금단현상에 막 시달리기도 하다가. 야튼 고마운 게 넘 많아서 이걸 다 어찌 일일이 거론한담, 난감하여 감사의 말도 일년 동안 못 남겼습니다마는. 8세남의 달콤함을 포착한 네꼬님의 사랑스러움을(으윽, 좀 간질) 찬양하지 않을 수 없어 일차로 감사의 말을 짧게(?) 써 보아요. 음...이런, 한 마디면 될 걸. 패...팬입니다!

네꼬 2015-09-21 14:54   좋아요 0 | URL
그리운남쪽님 안녕하세요? 패...팬레터 받은 건가요, 저? (대놓고 좋아 날뜀) 이 댓글은 앞으로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꺼내 보겠습니다. ㅠㅠ 저야말로 감사를 다 못 쓰겠는걸요. 야 네꼬, 너 열심히 좀 써라! (스스로 괜히 말해 보았어요.)

뽈따구 2015-09-2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꼬님 글을 보다가,
다락방님 글을 보게 되고,
다락방님글 댓글을 다는데 로긴 하라길래 하고,
로긴 한 김에 읽은 동화책 남겨볼까 하고 남겼더니......!
˝Thanks to˝ 라는게 있네요! (비록 1%로지만)
두 분 글 보고 책 많이 샀는데...... 아깝습니다!
뒤늦게 Thanks To를 눌렀으나, 이후 구매해야 적용되는는.... ㅡ.ㅡ
담엔 꼭 Thanks To 하고 살래요! ㅎㅎㅎㅎ

네꼬 2015-09-21 14:52   좋아요 0 | URL
이로써 제가 얼마나 다락님을 영업했는지(응?) 다락님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응??) 하하 이거 영광이에요. 앞으로도 열심히 소개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