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들은 처음에 눈앞에서 엄마가 안 보이면 당황한다고 한다. 엄마가 완전히 없어진 줄 아는 것이다. 그러다 엄마가 나타나면 안심한다. 그러다 엄마가 안 보이면 또 가슴이 미어진다. 엄마가 보이면 안심한다. 엄마는 있는 엄마(=좋은 엄마) Vs 없는 엄마(=나쁜 엄마)로 나뉜다. 그러다 눈앞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엄마는 늘 엄마라는 걸 알고 나면 마음 놓고 제 할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성장의 한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나는 아기가 아니기 때문에 진짜로 아기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이론이 대략 맞는 것 같다. 더 자라서 똑같은 일이 이번엔 자기 자신에게 일어났을 때, 그러니까 나 자신이 어떤 때는 좋은 사람이고 어떤 때는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당혹감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럼 나는 둘인가? 아니다. 좋은 나도 나고 나쁜 나도 나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만 여기거나 나쁜 사람으로만 여기면 성장할 수 없다(병에 걸리기 쉽다). 성장을 위해서는 분열도 통합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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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콜스>에서 코너의 엄마는 암투병 중이다. 코너는 다른 여자와 결혼해 떠난 아빠 대신 엄마 곁을 지킨다. 아직 어리므로, 그 자리에 착하게 있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해 간병하는 것이 된다. 학교 선생들은 그런 코너를 과도하게 배려하고, 못된 아이들은 코너의 엄마가 대머리라고 놀린다. 심지어 밤이면 몬스터의 방문을 받는다. 동네 묘지의 커다란 나무가 몬스터가 되어 코너를 찾아오는 것이다. 몬스터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겠다면서 네 번째 이야기는 코너가 해야 한다고 한다. 몬스터의 말에 의하면 그 네번째 이야기는 "네가 감추는 것,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을에 뿌리를 박고 살았던 몬스터는 저 먼 옛날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마을에서 일어난 모순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사랑하는 여인을 스스로 살해하고 마녀의 소행으로 몰아 왕국을 지킨 왕손 이야기, 착했던 목사가 자신의 딸들을 살리기 위해 그토록 강고했던 신념을 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벌을 받는 이야기, 보이지 않아 외로웠던 사람이 자신을 보이게 한 다음 더욱 외로워진 이야기.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으며 코너는 혼란에 빠진다.
'코너 자신이 부른' 몬스터는 그러니까 코너의 다른 이름이다. 거부하고 싶은 나의 다른 면. 몬스터를 대면한 뒤 엄마를 걱정시킬 만큼 '착한 아이'였던 코너는 몬스터조차 '제대로 된 파괴'라 인정할 정도로 분노를 폭발시킨 다음 비로소 균형을 찾는다. 그리고 진실을 고백해야 할 순간을 맞는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엄마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엄마가 죽어서 이 고통의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너는 엄마가 떠나길 바랐고 동시에 엄마를 간절히 구하고 싶었다. 너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면서도 마음을 달래 주는 거짓말을 믿은 것이다."(254면) 코너는 그 사실을 인정한 뒤에야 마음 깊은 곳에서 "엄마를 보내기 싫어요." 라는 완전한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코너는 힘든 길을 걸었다. 두 개의 나를 마주하기 위해 걷는 길. 둘러서 갈 방법조차 없는 혹독한 성장의 길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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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씨와 유령 선생>은 좀 다른 면에서, 아주 많이 다른 방식으로 두 개의 나를 이야기 한다. "그 이름에 걸맞게 더없이 진지하고 성실한 신사" 진지한 씨는 자기 집에 사는 유령과 우연히 맞닥뜨린다. 진지한 씨가 대대로(할아버지 진지함 아버지 진지해) 살고 있는 이 집에서 오랫동안 주인의 모습을 하고 살아왔다는 유령은 집주인이 자고 있는 동안 집안 공기를 휘젓고 다니면서 공기가 너무 굳어 버리지 않도록 풀어준다는 것이다. "진지한 성격이 자꾸만 뒤틀리고 비꼬여, 결국에는 뒤틀린 화석 같은 고집불통이 되어"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유령도 진지한 씨도 이 문제에 대해 사뭇 진지한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에 웃음을 참을 도리가 없다.
서로 얼굴을 튼 진지한 씨와 유령 선생은 쪽지와 선물을 주고받다가 때로 함께 체스를 두는 사이까지 된다. 덕분에 회사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던 진지한 씨는 지각을 하고 허둥대는 등 빈구석이 노출된다. 그러자 그간 진지한 씨와 거리를 두었던 회사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갖고 말을 붙이며 집으로 찾아오기까지 한다. 나중에는 아예 유령 선생이 진지한 씨로 가장해 출근을 하고(몸이 자꾸 둥둥 뜨기 때문에 신발에 바둑알을 넣어야 했지만), 진지한 씨는 집에서 빈둥대며 시간을 보낸다. 이제 진지한 씨는 '적당히 진지한 신사'가 되었지만 역시 세상에는 한 발 한 발 조금씩 내딛기로 한다. 여전히 함께 영화를 보고 춤을 추면서 진지한 씨와 유령 씨는 즐겁게 산다.
정색을 하고 나누는 대화와 묘하게 긴장되는 전개, 거기 걸맞게 진지해서 더 웃긴 그림 덕분에 즐겁게 읽을 수 있는데, 책장을 덮고 나면 아닌게 아니라 꽤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코너에게 몬스터가 그랬듯이 진지한 씨에게 유령 선생은 빈틈 없는 자신의 빈틈이다. (악, 이말 제가 지어냈는데 멋있는 것 같아요! 약간 겉멋..) 낮이 아니라 밤에 나오는 나, 따박따박 걷지 않고 둥둥 떠 있는 나, 필요한 말만 하지 않고 허술한 농담을 하는 나. 그런 나 덕분에 질서 있는 삶이 자칫 경직된 삶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고, 나아가 친구를 사귀고 세상과 가까워질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씨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그 유령과 함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라는 점이다. 진지한 씨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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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외형 때문에 손이 가지 않았던 <몬스터 콜스>를 뒤늦게 읽으면서 <진지한 씨와 유령 선생>이 떠올라 다시 읽어 보았다. 나는 무엇보다 유머가 있는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조그마한 감동에도 예민하게 대응한다. 두 개의 나 모두 나다. 덕분에 친구들에게 두 권을 함께 소개할 수 있으니, 지금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 단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화자찬으로 서둘러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