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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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적 품격을 갖춘 작품입니다. 그저 그런 미사여구 같지만 고전이 될 만한 통찰이 있고 그에 필적한 문체와 서술의 품격을 갖추고 있는 보기 드문 첩보 소설이 맞습니다. 화려한 액션 빵빵, 폼 나는 영웅 짜잔, 내세우는 첩보 영화에 익숙한 시대에 정말 좋은 게 뭔지 하나의 표본이 될 만한 작품입니다. 액션을 대신해 노년의 회한과 사색이 넘실대고 애국심에 고취된 분노를 가리는 나지막한 연민과 애석함이 옅은 안개처럼 흐릅니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젊은 시절 탐독한 독일 교양소설의 영향으로 르카레의 소설은 사실에 근거한 첩보물인 동시에 성장물이라는데, 그 분석에 동의합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할 시기를 눈 앞에 둔 늙은이에게도 성장은 중요한 과제인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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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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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해 있는 소설가 중 제가 유일하게 전작을 구해 읽는 작가는 파스칼 키냐르가 유일합니다. 그의 글-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는 ‘심연’입니다.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내가 존재가 시작됐던 ‘최초의 시간’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심연의 글쓰기가 그의 모든 작품을 지탱하는 유일한 토대입니다.

 

『로마의 테라스』는 그의 국내 번역서 중 유일하게 대중적입니다. 이야기의 진행이 선명하고 행간을 흐르는 사유의 깊이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한두 단어만으로 전경을 보게 합니다. 문장과 이야기 자체에 매혹되는 즐거움은 카뮈의 『최초의 인간』 이후 처음인 것 같네요. 키냐르를 애독해도 다른 이에게 추천하는 건 부담이었는데 자신 있게 권할 만한 책이 한 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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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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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에 ‘혁명’을 달고 있는 이 강연록은 혁명에 대한 색다른 이해인 동시에 ‘혁명’적인 독서론입니다. 첫 눈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책을 좋아한다지만 한 권의 책을 보고 단번에 반하는 경우는 드문데, 서점 신간 서가에서 한 번 들어보고 푹 빠져 읽었습니다. 
 

 아타루는 인류사의 굵직한 혁명 세 가지를 펼쳐 보입니다. 루터의 종교혁명, 무함마드의 이슬람 혁명,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이 그것입니다. 그 혁명들은 모두 책에서 시작합니다. 진정한 혁명은 폭력이나 정치적 전복이 아닙니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는 것이 곧 혁명입니다. 책의 타자성, 곧 신의 속성이 세계를 충분히 바꿀 수 있다는 이 믿음은 뜨겁습니다. 루터가 성경을 읽어버린 것처럼 저 역시 이 작은 책을 읽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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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말로 내용을 채워 넣는 강연록은 다루는 주제의 난이도가 높고 가파르다 해도 상대적이나마 쉽게 대할 수 있게 하는 점이 좋습니다. 그건 장점이자 단점인데, 쉬워지려면 단순한 동시에 논리적 비약도 감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청중과 시공을 공유하며 즉흥성을 특징으로 하는 강연에서 앞의 것들은 장단이라기보단 오롯한 색깔이 아닐까요?
 

 강연자 아타루는 읽기와 쓰기가 만들어 내는 ‘혁명’을 무한 지지하고 신뢰합니다. 여기서 방점은 ‘읽기와 쓰기’에 있는데, 본문을 따를 때 그것은 여성이 되는 것입니다. 아타루가 “읽어버린” 철학자인 니체가 즐겨 쓰는 회임과 임신의 은유를 따라 개념의 어원을 훑어보자면 “철학은 개념을 낳습니다.” 영어 ‘concept’의 근저엔 ‘conceptus’ 곧 잉태된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회임으로 그리스도가 태어났는데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개념화로 산출된 개념인 것”입니다. 그 개념의 끝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하나의 몸이 생성되고 어떤 식으로든 이 몸은 세계를 뒤바꿨습니다. “여성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강연자가 종교학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매 강연의 알짬은 책과 혁명이지만 그 꼴에는 종교에 관한 일화와 해석이 우세하게 많습니다. 그 중 이슬람교의 뿌리를 되짚는 셋째 밤 강연은 생경하면서도 흥미진진했습니다. 마치 『천 하룻밤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문맹자였던 무함마드에게 읽으라고 하는 신의 역설적인 명령, 『코란』에서 잉태된 책의 개념 그리고 무함마드의 아내 하디자를 집중 조명하는 점에선 앞서 말한 “여성이 된다는 것”과도 직접 통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강연자는 자세한 논의를 건너 뛸 때마다 그의 전작 『야전과 영원』을 참고하라고 하는데 그 덕에 본서를 일독 후 가장 간절해지는 건 『야전과 영원』의 신속 정확한 번역본 출간입니다. 올해 들어 아타루의 책을 읽은 것이 저에겐 혁명이었습니다. 저 역시 사사키 아타루를 읽어버렸습니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고의 혁명이 아타루와 함께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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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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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년 전에 같은 장소에서 읽었던 '독서의 역사'(알베르토 망구엘)와 짝패처럼 읽어도 좋을 작품. 앞의 것이 얌전하게 서술한다면 아타루는 시종 힘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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