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비평의 길을 열다
에밀리 비커턴 지음, 정용준.이수원 옮김 / 이앤비플러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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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라는 익숙한 것에 붙은 '카이에'라는 낯선 것의 간추린 역사: 만약의 오해 아닌 오해가 하나 있다. 진지함은 어디서나 지나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라는 것. 진지한 사람은 웃기거나 썰렁한 사람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시초의 '카이에 뒤 시네마' 의 상징이었다던 노란색 표지를 본 딴 국역본의 이 책은 '영화'에 진지하고 게다가! 급진적이었던 한 무리의 시네필들이 걸어온 길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 진지하게 굴려는 사람에게 내가 속한 이 시대는 어떻게 나오는가? 애석하게도 저자 에밀리 비커턴 역시 지금의 '카이에'를 지지하지 않는다. 어쩌면 '카이에'의 마지막 황금기를 이끌었던 세르주 다네가 물러나고 그와 공동 편집장이었던 세르주 투비아나가 단독 편집권을 차지한 뒤의 '카이에'는 가벼워졌고 유해졌다. 특유의 고집과 싸우고자 하는 의지, 편파적인 사랑과 지지로 똘똘뭉친 돌파력은 지금의 '카이에'에서 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비커턴이 지금의 '카이에'(이건 고유명사다)에 대는 잣대를 앞으로의 '카이에'(이건 일반명사다)까지 던지진 않는다. 그녀는 불사조의 신화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카이에>는 현재 죽은 태양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풍부한 원천을 남겼다. <카이에>의 잿더미에서 1,000명의 대천재들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 (222면, '맺음말')


 히치콕은 알지만, 하워드 훅스는 모르고, 장 뤽 고다르는 알지만 자크 리베트는 헛갈린 사람에게 이 책은 좀 난처하다. 약사(略史)의 미덕을 지키기 위해 친절하게 풀어주는 설명은 거의 생략됐기 때문이다. 대신 집중적으로 파헤쳐 정리한 듯한, 그래서 외워두고 싶은 문장들은 곳곳에 있다. 집단 '카이에'보단 그 안의 각자의 빛나는 지점을 돋아낸 그것들은 대부분이 긴 편이다.  


바쟁은 엄격한 질서와 자발성, 그 둘을 규정하는 자유와 속박의 혼재에 매료되어 마치 자신이 집에서 키우는 동물을 돌보며 느끼는 매혹과 같은 감정을 갖고 영화를 보았다. “그의 영화 사랑법은 영화를 통한 사랑법인데 그것은 마치 그가 앵무새나 카멜레온, 뱀 등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세계의 생명체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바쟁의 글은 그가 영화 앞에서 경험하는 이 같은 폭로의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즉 영화는 그에게 인생과 예술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고, 그는 이제 막 무언가를 알게 된 학생이 그 새로운 지식을 즉시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하는 흥분된 열정으로 글을 썼다. (52면, '황색 시대: 1951-1959'


다네와 투비아나는 모두 1973년 이후 ≪리베라시옹 Libération≫에 비평을 써왔는데 이는 이들이 비평가의 역할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다네는 이 경험에서 많은 것을 얻었는데, 마감 시한이 빠른 데다 독자들이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분석해서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들을 좀더 정기적으로 그리고 보다 절박하게 제기해야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다네는 이러한 형식으로 글을 쓰면서 진공 상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보다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구체적인 적―”반동적이며 파시스트적인 영화”―에 대항해 싸우는 실제 투쟁의 일부가 되는 것을 느꼈으며, 이 투쟁에 글을 쓰며 참여할 때 저널리스트들은 그 대상, 즉 독자를 고려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145면, '다네의 시대: 1974-1981')


 이 책(지금 독서일기 쓰는 비커턴의 책 또는 카이에'의 역사라는 추상적인 책)에서 유일하게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영화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정의 이야기들이었다. '카이에' 1세대에게 영화가 가족과 교육을 대신했다는 대목이나 들뢰즈나 푸코 등 동시대의 지식인들의 영화 사랑으로 뛰어나고 힘이 있었으며 역사적인 공동 창작물을 남긴 에피소드가 그렇다. 정치로 뜨겁기도 했고, 이론에 경도돼 아카데믹해지기도 했다가 이제는 자본 '안에서'(그건 창간호 때부터 주어진 조건이었다. 문제는 한창 때와 달리 지금의 '카이에'가) 그냥 순응하며 살기로 이어져 오기까지 '카이에'의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아직 단 한 권의 '카이에 뒤 시네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비커턴의 안내를 받으며, '카이에'의 지속이 아니라 그 '정신'의 지금의 당위성과 가능성 그리고 잠재성을 진지하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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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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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서문으로 이루어진 제 1권 제 1부 `콩브레` 또는 한 권의 책으로써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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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피앤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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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유배자의 신학: 


에티카」(황태연 옮김, 피앤비)




기하학적 구성의 틀 안에서 제한된 어휘로만 축조된 이 책은 고갈되지 않는 태풍을 머금고 잇는 것 같다. 스피노자의 이 글은 난해하지는 않지만 전경을 담은 투시도를 그려서 읽지 않으면 도구적 인용으로만 쓸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명명백백한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의 빛 아래서 세부적인 것들의 유기성을 배우고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같잖은 쓸모의 책으로 남을 뿐이다. 스피노자의 목적의식은 직관으로 풀어 말할 수 있는 제 3종의 인식(가장 높은 단계의 지식)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amor Dei intellectualis)'에 있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민음사)의 제사로 소설을 인용하는데, "얼마 후 몇 쪽을 읽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마치 돌풍이 등을 밀고 있기라도 하듯 멈출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말씀드리지만,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에 접하게 되자마자, 우리는 마치 요술쟁이 빗자루를 타게 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는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강조는 인용자)은 마참하다. 내게 스피노자의 진가를 포괄적으로 인식시켜 준 매튜 스튜어트의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교양인)에는 "언뜻 보기에 그의 『에티카』는 고색창연한 용어들과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들이 난무하는 고통스러운 가시덤불이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적인 장벽을 관통해 들어감으로써 얻게 되는 보상은 엄청나다. 미적인 체험도 결코 적지 않은 유혹이다. 왜냐하면 정의, 공리, 그리고 명제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거미줄은 어떻게 보면 산문체로 써진 시가이자, 눈부신 지성의 조각품"이라고 써 있다.

 스피노자의 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이성적인 신인데, 스피노자의 신에게 은총이나 인격은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오류이며 착각이다. 그것은 고래로 사람들이 신에 대한 사유의 시작점을 신 자체가 아닌 인간으로 잡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스피노자는 그것을 바로 잡고자 한다. 이것이 불경했기 때문에 그는 파문 당하고 사회적으로 유폐됐지만, 나는 그의 신이 비정한 신으로 비추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왜 이 책의 제목이 '윤리학'이고 윤리가 신을 사유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히는 지점일 것이다. 

 여기서는 매튜 스튜어트의 도움을 받아볼 수 있겠다. "의인화된 신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완강한 거부에서 우리는 그의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깊은 연결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신학정치론』에서 처음 전개한 정치적인 분석에 따르면, 정통의 신 개념은 전제정치의 대들보 중 하나이다. 신학자들은 미신에 갇힌 군중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심판하고, 처벌하는, 무서운 신에 대한 믿음을 조장한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300) 이를 통해 신(성)에 대한 개념과 사유를 그 안에서 초극하여 그 외연을 넓히는 일은 유물론적 무대인 정치와 결코 밀접하다. 지금 와서 나는, 물리계와 물질계의 우리의 이 생활-현실에서 신의 자리는 손톱 끝과 같다고 본다. 연한살과 헤어져 하얗게 죽어 이제는 깎아버려야 할 그만큼의 손톱 말이다. 

 매튜 스튜어트의 전기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상의 삶이 무익하다는 느낌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철학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니체가 말했다시피 모든 철학은 개인적 수기일 뿐이다. 하지만 니체가 철학을 비하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 않을까? 철학이 복권되고자 한다면 철학은 진리가 되기를 그쳐야 한다. 비참해진 뒤에야 철학은 장수할 수 있다. 비참은 산 자의 주제이지 죽은 자 또는 노예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학제 연구에 갇힌 오늘날의 철학은 비참하지도 않다. 니체의 지적에서나 그 근원에서나 철학은 동시에 철학자이다. 나는 그런 철학(자)들에게만 끌린다. 스피노자나 소크라테스, 그 이전의 철학자들(그들은 글을 쓰지 않았기에 철학 자체가 될 수 있었다) 등이 그렇다. 






나는 앞서, 스피노자에게는 은총이 없다고 했는데, 그에게도 은총의 희구는 있다. 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교적 신의 은총이 없을 뿐이다. "스피노자가 기술한 바니타스(Vanitas, 허무)의 감정은 단지 덧없는 불만족의 느낌이 아니다. 마니타스는 그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스피노자가 그랬듯이, 자신이 '치명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어서 ... 만일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음이 확실히 예견된다.'고 뼈에 사무치게 느낄 때, 비로소 철학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바니타스는, 절대적 무로 굴러 떨어질지 모를 가능성, 즉 아무런 의미 없이 무의미한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 삶과의 비참한 조우이다."(매튜 스튜어트, 98) "철학은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영구적인, 신성한 행복의 기반을 찾고자 하며, 또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저인 『에티카』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그의 완성된 철학의 주된 목적, 그러나 실제로는 유일한 목적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은총이나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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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도 좋아
김병년 지음 / IVP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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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도 좋아』(김병년, IVP) 

讀後感思(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



인생이 어느 날 문득, 고통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돌연히 삶에 처 박혀 들어오는 것이 맞으리라. 고통의 대지가 삶의 구석에 붙박여 있는데, 거기 찾아가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길 잃은 낙타처럼 떠돌던 고통의 두 발이 약속 없이 내 삶의 문을 두드리거나 돌진해 들어오는 것이리라. 여기서 ‘문득’과 ‘약속 없이’에 내 응시는 오래 처한다. 

 고통과의 접점에 섞여 들어가게 되면 누구나 존재의 궁극 또는 존재의 결국이라는 타점을 잡게 된다. 거기엔 허무의 무미(無味)가 일정량 이상은 배음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동시에 희망의 좌표가 재설정되기도 한다. 내 정신에 박아 넣은 말 하나, “영화감독에게서 불안이 없다면 그려낼 이야기가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며, 희망이 없다면 형식이 없을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감독) 그리고 곁붙여 들여오는 인용...... 어쩌면, 신음. “삶의 불안과 우울은 내면의 거룩은 고사하고, 내 속에 잠들어 있던 어둠을 불러내고 있었다.”(『바람 불어도 좋아』, 19면)

 김병년 목사의 『바람 불어도 좋아』를 거칠게 일독한 후, 1부 1장까지 다시 읽어봤다. “2005년 8월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그리고 아내는 도무지 일어날 줄을 몰랐다.”(17면) 고통은 철저하게 몸의 이야기다. 몸에 뿌리 내려 정신에까지 몸피를 불린 검질긴 것의 이야기다. 이 책 역시 몸에 끼쳐 온 전면적인 난항으로 물큰해진 언어가 흘러나와 수렴된 ‘그 이야기’다. 부부라는 몸의 반쪽이 완전히 마비된 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남은 반쪽이 가족이라는 한 몸으로 살아냈고 살고 있는 ‘생활의 이야기다. 절반의 신경과 손으로 그려내는 자화상 연작이다. 

 거듭된 부정의 끝에 긍정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긍정의 경지가 아니라 긍정의 ‘순간들’이다. 삶이 계속되는 한 그런 밝은 순간은 박하나마 온다. 이 책은 “그 순간적인 종합”(리 호이나키)에 제련된 언어로 쓴 저자의 두 번째 책이다. 더욱 솔직해졌다. 부박한 예의는 버리고 진중한 경의를 담아 쓰여졌다. 우리는 신 앞에 던지는 투정에 있어 동시대의 언어를 너무 적게 갖고 있다. 『바람 불어도 좋아』는 그 빈약한 자산의 곳간에 더할 만한 책이다. 왜인지, 언제부터인가 나는 책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유사 착취와 같다는 절감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저 배우고자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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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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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괴롭다. 위로는 우주가 아래로는 바다가 허공을 집어삼킨 오묘한 검은 빛으로 존재의 안쪽을 길게 잡아당기고 있다. 한 때, 우주는 기하학적인 상상력과 신학적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어둠이었다. 불가해한 동시에 물리적으로 가닿을 수 없는 광막함이니 무릎 꿇고 섬기면 되었다. 하지만 바다는 육지를 향해 악다구니를 놓지 못하고 사이렌의 노래 소리처럼 모험심과 정복욕을 부채질하는 용광로였다. 이전의 배움과 코 아래 깔아놓고 봤던 미래의 환영을 까무러트리고 휘저어 잡탕으로 섞어버리는 존재의 시험장이었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신을 만나고 누군가는 악마에게 사로잡혔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장사 수완을 발휘해 돈을 벌어 부자가 됐다. 거룩한 잡탕! 경건의 먼지와 세속의 주춧돌이 거리낌 없이 몸을 버무려 이성을 압도하는 새로운 야만을 창조해냈다. 흰 고래는 그런 바다의 맹아였다.

 

 작가 멜빌은 의도적으로 흰 고래와의 대결을 마지막에 위치시킨 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줄창 늘어놓는다. 화자 이슈마엘은 고고학자가 돼 예부터 내려오던 고래에 관한 단편과 일화들을 수집하다가 메스와 확대경을 들고 고래 해부학자가 되더니 이내 신학자가 되어 신과 자연, 인간에 관한 장황한 토론에 끼어들기도 한다. 영탄조의 서사시적 어조와 황홀하게 난립하는 무수한 은유와 언어의 실험들. 호손의 소설에서 접하기 쉬운, 약간 정신 나간 듯한 청교도 정신의 예언자적 어투들 하며, 총 13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어디든 펴서 얼굴을 파묻고 읽다보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런 작품을 읽으면서 거기에 ‘소설’이라는, 정말 소심하게 조어된 이, 차라리 바늘로 찌르고 쥐어짜고 입으로 물어뜯고 싶은 허접한 말풍선을 붙여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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