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왜 라틴아메리카인가?

엄동설한이 한창인 지구의 남단 우수아이아에서부터 햇볕이 지글거리는 카리브해까지 사계절이 엇바뀌는 때, 머리에 희끗희끗 만년설을 얹은 안데스산맥이 하늘 높이 치솟았고 사하라사막보다 더 메마른 아따까마(Atacama)사막을 끼고 있으며 고도 3,000∼4,000m의 고산지대를 연일 넘나들어야 하는 땅, 밤나들이를 삼가야 할 정도로 치안지수가 밑바닥을 치는 곳… 그러한 때, 지구의 서반구에 있는 그 요원한 땅, 그 험난한 곳을 팔질(八?, 여든)의 문턱에 다가선 이 나이에 굳이 찾아간 이유가 무엇이냐고 사람들은 묻곤 한다.

한마디로 그 이유는 오래도록 응어리로 간직해온 숙원, 그것도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숙원 때문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인문학의 생명력은 현장(자연과 피조물, 그리고 인간)에서 돋아나고, 현장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명제와 더불어 ‘백문불여일견’이라는 평범한 통리가 눅진하게 깔려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러한 명제와 통리를 넘어선 그 어떤 절박한 또 다른 숙원이 없었던들 결행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숙원이란 첫째로, 학문적으로 해상실크로드의 환지구론(環地球論)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고증하려는 것이다. 이 시점까지 실크로드에 관한 구태의연한 통념은 인류문명 교류통로로서의 실크로드는 고작 유럽이나 아시아, 즉 구대륙에만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신구대륙 간의 해로 개척과 문물교류가 일찍부터 이루어졌다는 사실(史實)을 웅변적인 근거로 삼아 빗나간 유럽중심주의나 중화천하주의를 기조에 깐 이 진부한 통념에 통렬한 도전장을 던졌다. 이를테면 해상실크로드가 늦어도 16세기 초부터는 ‘신대륙’, 즉 아메리카대륙까지 뻗어감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인류문명의 환지구적 교류통로로 실크로드는 자리매김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작금 이러한 파격적 주장에 대한 공명 징조가 조금씩 나타나고는 있지만, 그 논리적 정립에 이르려면 오롯한 현장 고증과 확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필자는 그동안 이러한 고증과 확인의 기회를 학수고대해왔다.

이러한 숙원을 더더욱 절박하게 한 것은 실크로드를 통한 한반도와 라틴아메리카 간의 상관성이나 교류에 관한 구명이다. 이제 한민족과 아메리카 인디오의 체질인류학적 친족성이나, 언어학적 및 민속학적 상관성 같은 미증유의 담론은 솔깃한 풍문 따위를 넘어 국내외 학자들의 학문적 논제에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사의 외연적 세계성을 복원하는 데서 대단히 유의미한 일이며, 따라서 그 해명은 긴절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그 숙원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구지욕(求知慾)이다. 이것은 학창시절부터 켜켜이 쌓아온 숙원으로, 그 동인(動因)은 지구의 서반구에서 ‘신비로운’ 아메리카대륙이 던지는 숱한 수수께끼와 그에 관한 무지와 의문, 그리고 그 해답이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러한 수수께끼와 무지 및 의문은 증폭된다. 인디오의 종족 기원, 이스터섬의 거석인 상(像) 모아이나 나스까 지상화 같은 불가사의한 유물의 외계인 제작설, 마야나 잉카 문명이 남긴 갖가지 기적, 여기에 더해 문명 탄생의 통설과는 달리 자연환경이 그토록 불리한 곳에서 찬란한 고대문명이 꽃필 수 있었던 요인 등… 이 모든 것은 애당초 그 시절부터 지적 관심과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런가 하면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악의에 찬 작간으로 인해 여지없이 난도질당해온 라틴아메리카의 중세는 중세대로 혼미와 역설(逆說)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그 본연(本然)이 밝혀질 것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서구 식민주의자들은 ‘미개한’ 석기시대로부터 서구의 식민화에 의한 ‘선진’ 근대로의 전환을 이른바 ‘라틴아메리카 식 역사 패턴’이라고 강변한다. 과연 이런 강변이 가당한 역사주의적 논리인가?

이것은 분명 역사의 단절이고 초단계적 도약일진대, 인류사에서 이러한 단절과 도약은 과연 있을 법한 일인가? 또한 이 땅의 주인인 원주민의 참여 없이 백인에 의해, 백인만을 위해 강요된 ‘분가(分家)’ ‘분조(分朝)’를 ‘독립’으로 둔갑시킨 근대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중세를 맞아 한결같이 원주민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다인종사회가 된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풀어만 갔다.

역설과 우여곡절로 점철된 전대(前代)를 근본적인 체질개선 없이 어정쩡하게 이어받은 현대에 들어와서는 다행히 가렸던 허상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급기야 라틴아메리카는 갈등과 모순의 도가니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빈부격차와 사회 불평등, 그리고 독재로 함축된 ‘남미병’에 걸려 모진 신음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응보(應報)라고나 할까, 이 땅에서는 남미병 치유를 비롯해 현대를 겨냥한 색다른 각종 이론이 우후죽순처럼 어느 곳보다도 많이 양산되어 ‘이론적 고향’으로까지 불리고 있다. 한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종속이론이나 민중신학, 관료적 권위주의이론 같은 그럴싸한 담론들이 다 이 고장의 특산품이다. 그래서 필자는 짐짓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 색다른 여러가지 이론들을 현장에서 알아보고 검증하고픈 마음도 일찍부터 생겨났다. 아무튼 라틴아메리카는 우리와 한 하늘을 이고 사는 하나의 세계지만, 제대로 모르다 보니 언필칭 별난 세계로 다가왔다. 정말로 호기심이 동하는 신비의 세계다. 작금의 여러 가지 의문과 무지와 오해를 감안하면, 더 절실하게 앎이 요청되는 상대다.

끝으로 학문 외적으로는, 그 시절 인생의 표상으로 삼아왔던 ‘체 게바라의 길’을 직접 밟으면서 그를 기리려는 마음속 깊은 염원 한가지가 더 있었다. 체 게바라는 자기희생으로 ‘사건창조적 위인’으로서의 참모습을 걷는 길마다에 오롯하게 각인함으로써 세인, 특히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길을 찾아 열사의 심원한 세계변혁사상과 숭고한 글로벌정신을 되새기려던 계획이 30년 전 중도 좌절된 이래 줄곧 절절한 미련으로 남아 있었다. 고스란히 오늘을 기다리면서.




Ⅱ. 환지구적 해상실크로드

오랜 숙원 끝에 라틴아메리카를 직접 답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해상실크로드가 지구의 서편에 있는 머나먼 땅 라틴아메리카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현지에서 고증하고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구체적으로 ‘그 이어짐은 무엇에 의해 입증되고, 또 어떻게 이어졌으며, 그 이어짐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밝혀내기 위함이다.

130여년 전 독일의 지리학자 리흐트호펜에 의해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이래 문명교류 통로로서의 실크로드에 관한 연구가 꾸준히 이어져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전래의 오아시스육로 말고도 초원로와 해로(해상실크로드)가 각각 실크로드의 3대 간선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 가운데서 해로만이 갖는 거대한 잠재력과 심원한 비전 때문에 해로에 관한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구대륙(유라시아)으로부터 ‘신대륙(아메리카)’으로의 항로 확대를 비롯해 그 동서단(東西端) 등 일련의 근본 문제들이 진부한 통념에 사로잡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해상실크로드란 문명교류 통로인 실크로드의 3대 간선 중 하나로 아득한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서교류가 진행된 환지구적 바닷길이다. 이 길은 태평양과 대서양, 인도양과 아라비아해, 지중해 등 세계를 동서로 이어주는 해역을 두루 망라한다. 포괄 범위나 길이로는 실크로드 3대 간선 중 단연 가장 넓고 길다.

일찍이 기원전 10세기부터 부분적으로 알려진 이 바닷길은 고대 문명교류의 여명기인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구간별로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중세에 이르러 15세기 초 중국 명나라의 대항해가 정화(鄭和)가 7차에 걸쳐 ‘하서양’(下西洋, 서양으로의 항해)을 이끌었고, 그 세기 말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히끄(Henrique)가 아프리카 서해안 항로를 개척했다. 이어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과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16세기 초 마젤란과 엘까노(Juan Sebastian del Cano)의 세계일주 등을 아우른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개막을 계기로 해로는 하나의 범세계적 문명교류의 통로로 정착되었다. 이 길을 따라 신구대륙 간에 교역이 진행되어 유럽의 근대화가 가속화되었으며, 동서양을 망라한 세계의 ‘일체화’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세 신구대륙 해역에서 오간 교역품의 주종에서 연유한 이른바 ‘도자기의 길’이나 ‘향료의 길’ ‘백은의 길’은 모두 이 바닷길에 대한 상징적 별칭이다.

이 범지구적 교류 통로인 해상실크로드는 경유하는 해안마다에 촘촘한 해로망이 구축되면서 그 기능이 점차 증대되었다. 이 바닷길은 그 전개나 이용에서 오아시스육로나 초원로와 다른 일련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신구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범지구성,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과 교역의 증진에 따라 부단히 변모하는 가변성, 미래에도 영원히 교류 통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항구성, 이 세가지가 바로 해상실크로드만이 지닌 특성인 동시에 중요성이다.

이러한 특성과 중요성을 지닌 해상실크로드를, 그 서단을 로마로, 동단을 중국 동남해안으로 설정함으로써 그 범위를 구대륙에만 한정해온 것이 최근까지의 통념이었다. 최근 일본에서 간행된 해상실크로드 관련 사전이 해상실크로드를 동남아시아에서 인도양을 지나 홍해에 이르는 해상루트라고 정의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까지 동서양 모든 나라에서 제작된 실크로드 지도는 예외 없이 다 이런 식으로 해상실크로드를 지구의 동반구 구대륙으로만 한정해 그려넣고 있다.

구태의연한 이런 통념이 아직까지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은 해상실크로드를 포한한 실크로드 전반에 관한 고정개념을 털어내지 못한 탓이다. 바꿔 말하면, 실크로드의 개념 확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실크로드 개념 확대란, 끊임없이 확장, 정비되어온 실크로드가 포괄하는 공간적 범위와 그 기능에 대한 인식의 부단한 심화를 의미한다. 실크로드 자체는 인류의 문명사와 더불어 장기간 기능해온 객관적 실체이지만, 지적 한계로 인해 인간이 처음부터 그 실재를 그대로 파악하고 인지해온 것은 아니다. 그간 학문적 탐구와 고증에 의해 실크로드의 공간적 범위와 그 기능에 대한 인지도는 점진적으로 폭을 넓혀왔다. 이른바 실크로드 개념의 확대다.




지난 130여년 동안 중국 비단 유물의 발견지와 교역루트의 확대를 감안해 실크로드의 개념은 중국 중원지대에서 인도 서북해안까지라 는 최초의 ‘중국-인도로(路) 단계’를 거쳐 중국에서 지중해 동안까지라는 ‘중국-시리아 단계’로 확대되었다. 여기까지는 주로 유라시아 중앙부의 여러 사막에 점재한 오아시스들을 연결한 육로로서 일명 ‘오아시스로’라고도 한다. 그러다가 2차 대전 후 북방 초원로와 남방 해로를 합쳐 동서를 관통하는 실크로드 3대 간선이라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에 남북을 종단하는 5대 지선까지 더하면, 앞 두 단계의 단선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실크로드의 개념은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복선적이며 망상적(網狀的)인 개념으로 크게 확대된다. 그러나 개념이 이렇게 확대되어도 아직은 구대륙에만 국한된 국부적인 실크로드이며,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의 통념이다. 동서양 학계는 여태껏 이 낡은 통념에 안주하고 있으며, 구대륙 밖의 문명교류 통로는 아예 무시하고 있다.

앞의 세 단계를 거쳐 형성된 통념으로서의 실크로드(해양실크로드 포함)가 구대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신대륙(남북아메리카)은 인류문명의 교류권에서 소외당하고 말았다. 우스꽝스러운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늦어도 15세기 말엽부터는 해로에 의한 문명교류의 통로가 구대륙에서 신대륙까지 뻗어가 명실상부한 범지구적 바닷길로 자리 잡아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실크로드 개념 확대의 네번째 단계인 환지구로 단계다. 필자는 일찍부터 이 4단계 확대론을 주장하면서 통념에 도전해오고 있다.

도전의 핵심인 해로가 신대륙에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근거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신대륙에 이르는 해로가 개척되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1492년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에 도착한 데 이어 마젤란 선단이 1519~22년에 스페인→(대서양) 남미 남단→(태평양) 필리핀→(인도양) 아프리카 남단→(대서양)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세계일주 항해를 단행함으로써 신대륙으로의 바닷길이 트이게 되었다. 다른 하나의 근거는 신구대륙 간의 문물교류다. 16세기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필리핀의 마닐라를 중간기착지로 하여 중국의 비단이나 도자기를 중남미에 수출하고, 중남미의 백은을 아시아와 유럽에 수출하는 등 신구대륙 간에는 이른바 ‘태평양비단길’ ‘백은의 길’이 트여 ‘대범선무역(大帆船貿易)’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무역에 의해 고구마, 감자, 옥수수, 담배 등 신대륙의 농작물이 아시아와 유럽 각지에 유입, 전파되었다. 당시 세계에 알려졌던 농산물 28종 중 무려 절반의 원산지가 라틴아메리카였으며, 그것이 이 무역로를 통해 세계 각지에 퍼져나갔고,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역력하다.




Ⅲ. 문명의 보고 라틴아메리카

이른바 ‘선진문명’을 자처한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 그리고 ‘후진문명’이라는 날조와 역사의 단절 등 작위적(作爲的)인 장막으로 인해 유구하고 찬란했던 라틴아메리카 문명은 왜곡과 비하, 무시 속에 그 실상이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작금 역사적 정체성을 복원하려는 각성과 더불어 그 문명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됨으로써 라틴아메리카는 문명의 무진장한 보고(寶庫)로 인지되어가는 중이다. 필자는 그 보고다움을 현장에서 몸소 실감하고 확인했다.

우리가 라틴아메리카를 문명의 보고라고 하는 것은 우선, 인디오들이 남겨놓은 잉카문명이나 마야문명, 아스떼끄문명 등의 고대문명이야말로 휘황찬란하며, 그것 곧 인류 공유의 귀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유산에는 현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적유물과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옮겨져 소장되어 있는 유물이나 모조품, 모사도 등이 속한다. 현지 답사 과정에서 느꼈지만, 대부분 나라들은 유적유물의 발굴에 애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마련해 유물을 잘 보존하며 재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일례가 세계유수의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이다.

다음 이유는, 인류문명사에 대한 지대한 기여 때문이다. 올메까문명으로부터 시작해 잉카문명과 마야문명, 아스떼끄문명, 그리고 메소아메리카문명에 이르기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생한 모든 문명들은 명실공히 그 높은 수준으로 인해 인류문명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으며, 인류에게 값진 혜택을 베풀었다. 경탄을 자아내는 황금문화와 도자(陶瓷)문화는 유라시아 구대륙의 그것을 뺨칠 정도로 월등하다. 세계 농작물 절반의 원산지가 바로 라틴아메리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절대적인 혜택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은을 비롯한 풍부한 부존자원은 서구 산업화의 동력으로 기능했으며, 빼어난 자연경관은 인류에게 정신적 활성소를 불어넣고 있다. 다양한 생태계는 종의 기원을 비롯한 여러가지 과학연구의 장을 제공해주었으며, 근래에는 여러 사회이론의 ‘고향’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끝으로, 우리와 관련해 이유 한가지를 덧붙인다면, 우리 역사, 문화의 외연사(外延史)에 놀라운 증좌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의 종족적 기원에 관해 그간 많은 논란을 거듭해오던 끝에 지금은 우리 한민족과 동종인 몽골로이드로서, 약 1만 5,000년 전에 베링해협이나 태평양을 건너 그곳에 정책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몇몇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인디오들의 이동로 지도에는 그들이 한반도를 지나간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최근의 각종 체질

인류학적 조사에 의해서도 한민족과 인디오들의 유전자 DNA가 같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답사 과정에서 두 종족 간 생활모습의 유사점을 적잖게 발견했다.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자는 머리칼을 땋으며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닌다. 옛날 우리네 모습 그대로이다. 쟁기를 비롯한 농기구는 우리의 것과 너무나 닮은꼴이다. 어떤 학자는 마야문명을 이은 아스떼끄문명의 언어와 한글의 상관성을 제기하면서, 미지의 한글 어원을 거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도 조심스레 피력하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우리 역사, 문화의 글로벌 외연성을 시사한다.

우리는 값진 재보를 쌓아둔 창고와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문명에서 어제의 어울림이나 상관성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내일에 유용한 공통가치들을 골라 건져내야 한다. 그럴 때 지금까지 격폐되어온 신구대륙 간의 간극을 줄이고 공생공영을 함께 도모할 수 있으며, 지구는

동서반구를 가리지 않는 일체로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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