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감감하지만 사무실에 갇혀 하릴없이 쇼핑몰을 들락거리느니 밀린 리뷰나 쓰자,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까 작정한 책 1.2.3월의 어머니.숙적.레미제라블을 아주 잘 읽고(즐거운 독서라는 말) 남은 것은 리뷰인데 게으름 병 도지고 컴퓨터 싫어져서 숙제로 남게 된 그 독후감.
엔도 슈샤쿠의 <숙적>
숙적,이라 함은 라이벌과 원수의 중간쯤 되는 어감의 단어로 이해되는데 분명 두 명 이상의 인물이 있을 터. 보통은 두 명이 이상적인 숙적의 포맷이고...
일본 잘나가던 시대(어떤시대인지 기억안남)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가
전국의 패권을 장악하고 심심해서(?) 명나라를 정벌하겠다! 조선은 길을 비켜라!, 조총 앞세워 불쌍한 조선나라에 쳐들어온 그 전쟁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수하의 두 장수가 엔도 슈샤쿠 <숙적>의 숙적 되시겠다.
두 장수의 이름은 고니시 유키나와와 가토 기요마시.
상인 출신의 고니시 유키나와는 전국시대 사무라이의 전형이라 할 수는 없는 무역과 정세를 잘 살피는 책략가 스타일의 장수인데 반해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이다.
스토리는 제목 그대로 두 라이벌의 운명적 대결을 그린다. 7년 간의 임진왜란이 끝나고 또다시 벌어지는 전국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서 동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가담한 가토 기요마사와 서군 미쓰나리측에 가담한 고니시 유키나와의 마지막 전국 대결에서 동군이 승리함으로써 가토의 승리로 귀결되는 일본 전국시대 숙적의 이야기.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또 다른 이야기. 이 소설의 주인공 고니시 유키나와의 종교관과 신앙에 대한 엔도 슈샤쿠의 메세지가 어쩌면 엔도 슈샤쿠가 전하려는 진짜 의도일지도..
카톨릭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와의 내적 고민과 갈등은 엔도 슈샤쿠의 대표작<침묵>을 떠올리게 했다. 꿈꿔왔던 영주가 되었지만 천주교를 버리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표면적 배교를 하는 고니시 유키나와는 그 뒤로 면종복배의 자세로 주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하고 암살에 이른다.(소설에선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모습과는 너무나 판이한 임진왜란. 일본인의 시선에서 본 그 전쟁의 다른 해석은 이 책을 읽는 한국 독자에게 당혹감도 들게 하지만 종종 등장하는 익숙한 지명과 이름(이순신,거북선!!)도 반갑고.. 이순신은 일본인들도 신으로 추앙한다고 한다. 뭐든 신으로 모시는 일본 사람들이긴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와의 군대는 질서가 있고 민간인에 피해를 주지 않았으며, 도망가는 조선군이 오히려 민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을 버렸다는 내용은 거슬렸지만, 사실 나는 임진왜란에 대하여 잘 모르니 그럴수도 있었겠구나(하긴 근저에도 이승만이 서울 버리고 혼자 도망갔으니) 하고 다른 시각으로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왜적이 평화로운 조선땅에 이유없이 침입하여 전 국토를 불바다로 만들고 이땅의 백성을 도륙한 전쟁, 선량한 도공과 그외 쓸만한 것들 다 훔쳐간 슬픈 역사이자 불멸의 장수 이순신이 거북선 이끌고 이 나라 이 땅 구해낸 그 전쟁에 대한 세계사적 이해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은 못하였지만 엔도 슈샤쿠가 사용한 자료와 그 자료들에 대한 고증은 비록 일본의 것이긴 하나 그런(일본측 자료라는) 정황을 이해한다면 수긍할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을 제외하고는 내가 반박할 역사적 정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탐탁찮아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김시덕의 <그들이 본 임진왜란>이라는 책도 사기는 했는데 아직 보진 않았고 ㅎㅎ
작중 주인공이자 역사적 실재 인물 고니시 유키나와에 대한 미화는 당연항 것이리라. 그 점을 감안해서 볼때 고니시 유키나와라는 인물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끝까지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그 땅의 기리시탄(크리스찬)들을 위해 노력한 전국 시대의 한 장수. 영웅이 되고자했으나 믿음을 버릴수는 없었던 고니시 유키나와는 마지막 전국 전투에서 패하게 되나 할복을 하지 않는다. 전투에 패한 장수가 할복자살을 못하는 것은 최후의 명예를 버리는 것과 같지만 자살을 할 수 없는 크리스찬인 그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오래 전 어디선가 본 (신문이라 기억한다)기사인데 임진왜란 당시 부대 깃발이 십자가였던 부대가 있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게 고니시 유키나와의 부대를 말한 것이였구나, 어쩌면 고니시 유키나와는 동아시아의 십자군이었던 걸까?
소설 한 편이 많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다. 엔도 슈샤쿠의 <숙적>이 그렇다.
운명적 라이벌에 대하여.
일본 전국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임진왜란을 보는 일본인의 시선에 디하여.
기독교인의 신앙과 믿음에 대하여.
그리고 한국인으로써 그들의 시선을 보는 불편함은 한국 독자들만의 특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