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전쟁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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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라!"

"폐하!"

"묻으면 될 것이 아니냐, 태우고, 묻고 없애면 될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 해서 될 일이 아니옵니다."

"천하의 주인은 나다. 내일의 주인은 내 아들이다. 옛 귀신 따위가 무어 두려우라." 선비는 고개를 저었다.

 

「글자 전쟁」中 87p.

 

외국 소설들이 점령한 서점가에 쭉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김진명 작가의 '글자 전쟁'.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팩션의 대가이자 허구라는 장치로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작가로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받고 있다. 한반도 핵 문제나 중국에서 왜곡하려는 고구려 문제 등 뚜렷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소설들로 늘 뜨거운 관심을 받는 작가이기에 이번에도 역시 많은 기대를 했다.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 박사가 중국의 세계적 문호 임어당을 만났을 때,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우리 한국 까지 문제가 많다"라고 농담을 하자, 임어당이 놀라며 "한자는 당신네 동이족이 만든 문자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하는 핀잔을 들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한자의 주인은 누구인가' '한자는 정말 우리 글자일까' 하는 의문에서 소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국상어른, 그러나 사람이 어찌 글자를 만들어내겠습니까?"

"그럼 글자를 짐승이 만든 것이냐?"

"제 말은 글자란 수천 년, 수만 년 세월을 두고 흘러온 것일진대 어떻게 모르는 글자를 단번에 만들어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글자 전쟁」中 179p.

 

이름 있는 국제무기중개상인 주인공 태민은 무기 중개 과정에서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될 위기에 처하게 되고, 궁지에 몰린 그는 중국으로 도피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알게된 남자 전준우에게서 USB를 하나 받게 되고, 그날 밤 그가 살해당하게 되었음을 알게된다. '중국의 치명적인 약점'이 담겨있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정체불명의 USB를 열게되고, 그 속에서 역사속에 숨겨진 거대한 비밀과 마주하게 된다.

흔히들 전쟁이라고 한다면 검과 활로 이뤄진 피가 낭자한 그러한 전쟁을 가장 먼저 떠올릴텐데, 어쩌면 글자를 없애 정신적으로 종속시키고자 한 글자전쟁이 더 큰 위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자 속에 숨겨진 우리의 역사라는 내용도 흥미진지했고, 소설속에 또다른 소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무척이나 흥미로워 마지막장을 덮는 순간까지 단숨에 읽어내려가게 만들었던 책이었다.

 

"아니, 어째서 한국말이 그대로 중국 자전의 발음기호가 되어 있는 거죠?"

"어째서 그렇겠나?"

"설마 ...... 한자는 지금의 중국인들이 만든 게 아니라는 뜻입니까?"

"아직 여기에 대해 확고부동한 이론은 없어. 하지만 어떤 글자가 있으면 그 글자는 가장 정확하게 발음하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가 있을 수밖에. 나는 이 문제를 자네에게 숙제로 내주고 싶네. 자네는 수재이니 뭔가 성과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보다 주요한 건 자네는 한국인이야, 한국말의 수수께끼는 한국인이 푸는 게 맞아. 다음에 다시 한 번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아주 기쁠 거야."

 

「글자 전쟁」中 291p.

 

중국와 일본의 역사 침탈, 왜곡에 대해 대응하고, 동아시아 역사 및 독도와 관련해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해 2006년 탄생한 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 한 해 예산만 20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되고 있는 재단인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재단인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비난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없애버리면 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 바로 역사란 지켜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지 아닐까.

사실 역사란 학교 다닐 때 수업시간에 배우는게 다였던 지라 크게 관심도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물론 역사를 모른다고 해서 앞으로 살아갈 삶의 질이 떨어지거나, 또 역사를 잘 안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닐 것이기에....'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신채호 선생의 말을 다 지킬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수많은 조상의 숨결이 깃들어져 있는 이 나라 이 땅을 최소한 지켜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기나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그가 시작한 글자전쟁을 수행해 진실을 밝히고 은자를 되찾아오는 것이 그의 진정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소설을 완성하는 것을 아마도 요하문명을 일으키고 은나라를 건국한 동이가 남긴 숙제로 여겼으리라. 그리하여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중국에 들어와 안 보이는 글자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리라.

 

「글자 전쟁」中 3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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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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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의 비상을 갈망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가족이라는 덫에 더 깊이 파묻고 산다. 가볍게 여행하기를 꿈꾸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한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은 걸 축적하고 산다. 다른 사람 탓이 아니다. 순전히 자기 자신 탓이다. 누구나 탈출을 바라지만 의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경력, 집, 갖고, 빚.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발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안전을,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제공하니까. 선택은 좁아지지만 안정을 준다. 누구나 가정이 지워주는 짐 때문에 막다른 길에 다다르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 짐을 떠안는다.

 

「빅 픽처」中 117p.

 

지금 현재 자신의 삶에 100% 만족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내가 원하던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분명 만족한 삶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만약 내가 가보지 않은 길, 그 다른 길을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늘 있는 법! 100% 만족이란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가 해보지 못했던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게 열광하기도 하고,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타인들을 동경하기도 하는 걸테지.. 하지만 의도치 않게 타인의 삶을 살게 된다면?

 

불과 15분 전만 해도 나는 모범적인 미국 시민이었다. 근면하고, 경제활동도 잘하고, 아이도 키우고, 대출금도 잘 갚고, 자동차도 두 대나 몰고, 소비활동에도 적극적이고, 신용카드도 골드 카드를 쓰고, 최고의 수입을 자랑하는 변호사였다. 그런데 이제......

이제...... 완전히 끝장났다. 그렇게 되기까지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병을 잡은 지 단 5초 만에 모두 끝나 버렸다. 어떻게 이리 간단하게 끝날 수 있을까? 살인자. 내가?

 

「빅 픽처」中 145p.

 

'빅 픽처'의 주인공 벤 브래드포드는 탄탄한 앞날이 보장되어있는 뉴욕 월가의 잘나가는 변호사로 사랑스러운 두 아이의 아빠, 베스의 남편이기도 하다. 안정된 수입에 뉴욕 중상류층들이 모여사는 고급 주택에 거주하는 누가 보든 겉모습만 보면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 될만한 인물이다. 하지만 한때 사진작가의 꿈을 꾸었던 그는 아버지의 반대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서 자신의 꿈을 접고 변호사의 길에 접고 변호사가 되었던, 그래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부럽지 않은 삶일 것 같았지만, 언제부턴가 아내와의 관계가 뒤틀렸고, 부부관계가 원만해지기를 애썼지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아내 베스가 이웃집 사진작가 게리와의 외도를 목격하게 되고, 그집을 찾아갔던 벤은 우발적으로 게리를 살해하게 된다. 벤은 완벽한 범죄를 위해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게리의 삶을 살기로 한다.

 

'물질적 안정'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가짜일 뿐이고, 언젠가 새롭게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등에 짊어진 건 그 물질적 안정의 누더기 뿐이라는 걸.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소멸을 눈가림하기 위해 물질을 축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축적해놓은 게 안정되고 영원하다고 믿도록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결국 인생의 문은 닫힌다. 언젠가는 그 모든 걸 두고 홀연히 떠나야 한다.

 

「빅 픽처」中 251p.

 

책을 읽고 나서 처음엔 살짝 이해가 되지 않았던 책 표지가 공감되었다. 어쩔 수 없이 게리의 이름으로 살게된 벤. 벤 이라는 이름의 삶을 살아갈 땐 이루지 못했던 사진작가의 꿈을 게리의 이름으로 게리의 삶으로 살게되면서 그 꿈을 펼치게 된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늘 불안해해야하고, 거짓으로 시작된 삶은 또다른 거짓말을 낳게 되고 그 거짓된 삶들은 실타래처럼 얽혀버리게 된다. 어쩌면 변호사 벤으로서는 고가의 카메라와 장비들을 사들이는 호사로운 삶에 만족해야했겠지만, 게리로서 살아가는 순간은 자신이 갈 수 없었던 사진작가의 꿈을 이룬것이니 잠시나마 행복한 삶이었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자신이 벤인지 게리인지도 모를 삶을 살게 되어서 슬픈 삶이라고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소설의 끝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고민된다.

 

소설이 출간되고 수많은 독자들의 열광에 힘입어 얼마지나지 않아 영화로도 개봉되었다고 한다. 미국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개봉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점은 있지만.. 원작을 읽고 난 관객들은 책과 다른 결말에 그다지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고는 하지만 영화에서 두 갈래의 삶을 살게 된 벤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는 하다.

 

당신은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만약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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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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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달이 두 개 떠 있었다. 작은 달과 큰 달. 그것이 나란히 하늘에 떠 있다. 큰 쪽이 평소에 늘 보던 달이다. 보름달에 가깝고 노랗다. 하지만 그 곁에 또 하나, 다른 달이 있다. 눈에 익지 않은 모양의 달이다. 약간 일그러졌고 색깔도 엷은 이끼가 낀 것처럼 초록빛을 띠고 있다. 그것이 그녀의 시선에 포착한 것이다.

 

「1Q84_1」中 418p.

 

지난 10년간 최다 판매 작가 1위에 오른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그에겐 수많은 작품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최고라고 생각되는 작품을 꼽으라면 출간 되기도 전에 예약만으로도 매진사태를 불러일으켰던 1Q84가 아닐까 싶다. 한때 허세책의 대명사로 꼽히며 수많은 SNS에 설정샷 사진들로도 많이 등장했었던 책이기도 하다. 물론 그 열풍에 힘입어 나도 그때 1Q84를 읽었었는데, 그 당시 읽을 땐 그냥 유명하다기에 아무 생각없이 읽는 흉내만 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만난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쩌면 나이가 들고, 그때와는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오래전 내가 읽은 하루키와 다르게 다가왔던 것 같다.

 

아오마메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기묘한 일이 주위에서 연달아 일어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세계가 자기 멋대로 나아가고 있다. 내가 눈을 감고 있을 때만 다들 움직이는 게임처럼. 그렇다면 하늘에 달이 두 개 나란히 떠 있어도 그다지 기묘한 일이 아닌지 모른다. 언젠가 내 의식이 푹 잠든 동안에 그것이 우주 어딘가에서 홀연히 찾아와, 달의 먼 친척의 사촌 같은 얼굴을 하고 그대로 지구 인력권에 머무르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1Q84_1」中 449p.

 

책은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입시학원의 수학강사로 일하고 소설가 지망생이던 덴고는 '공기번데기'라는 소설의 고스트라이터로 글을 쓰게 되었고, 단숨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 또 다른 주인공인 아오마메는 헬스클럽 매니저로 일하면서 약간의? 정당한 살인을 저지르는 있는 인물이다. 어떤한 연관도 없어보이는 서로 다른 두 주인공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다가 우연히 1Q84라는 현실과는 약간 다른.. 달이 두개인 세계로 발을 디디게 된다.

 

1,2 권에 이어 3권으로 넘어와선, 아오마메와 덴고의 거리가 좁혀졌고, 그럴수록 인물들 간의 관계 또한 한층 더 복잡해지고, 읽을수록 과연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을까? 그래서 두 사람은 달이 두개인 1Q84라는 세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하는 의문들... 특히나 3권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다음엔 왜 4권은 출간하지 않는가.. 아오마메와 덴고는 진짜 1Q84란 세계를 벗어났는가.. 그 이후에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 하는 수많은 의문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된다.

 

과거를 바꿔 써봤자 그리 큰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고 덴고는 실감한다. 시간이라는건 인위적인 변경은 모조리 취소시켜버릴 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미 가해진 수정에 다시금 새로운 수정을 덧칠하여 흐름을 원래대로 고쳐갈 게 틀림없다. 다소의 세세한 사실이 변경되는 일은 있다 해도, 결국 덴고라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덴고일 수밖에 없다.

덴고가 해야 할 일은 아마도 현재라는 교차로에 서서 과거를 성실히 응시하고, 그 과거를 바꿔 쓸 수 있는 미래를 차곡차곡 써나가는 것이리라.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1Q84_2」中 113p.

 

아직도 베스트셀러 순위에 머무르고 있는 1Q84 이 책의 힘은 과연 무엇일까? 3권이나 되는 두툼한 분량에, 긴박한 스릴감으로 잠못들게 만드는 그런 소설도 아닌 것이.. 읽으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하루키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그의 작품세계. 사실은 다 읽고 나서 곱씹어봐도 아주 약간만 알겠고 ㅋㅋ아직도 '공기번데기'속에 등장하는 리틀피플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도 어렵고 이해도 잘 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1Q84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책도 출판되었을까..이런 그의 작품이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숨은 의미들을 생각하고 해석해보는 재미는 분명히 있다. 깊어가는 가을.. 쉽게 술술 익히는 책은 아니지만.. 하루키의 문장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지금.. 당신의 하늘에는 몇개의 달이 떠 있습니까?!! 보이는게 전부는 아닙니다...

 

"정말 기묘한 세계로군. 어디까지 가설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지, 그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져. 이봐 덴고, 자네는 소설가로서 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겠나?"

"바늘로 찌르면 붉은 피가 나는 곳이 현실세계예요."덴고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이곳은 현실세계네." 고마쓰는 말했다.

 

「1Q84_3」中 4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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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이장미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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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해라, 이제 너도 어른이라는 것을. 어른이라는 것은 바로 어린 시절 그토록 부모에게 받고자 했던 그것을 스스로에게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애정이든 배려든 혹은 음식이든.

사랑한다. 이 불공평하고 힘겨운 인생에서 그래도 우리가 이 불공평과 힘겨움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며. 오늘도 좋은 밤.

 

「딸에게 주는 레시피」中 30p.

 

얼마전 TV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해외의 한국인들에게 따뜻한 밥상을 배달하는 내용을 방송했었다. 4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후 사연의 주인공 어머니가 직접 전수한 요리비법으로 전달된 요리. 머나 먼 이국땅에서 맛보던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음식의 맛을 본 주인공이나 그 방송을 보던 시청자나 모두의 코끝을 찡하게 했었다. 비록 타국땅에서 다른이의 손을 빌어 먹게 된 음식이지만, 그 요리에 담긴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그 맛 그대로였지 않았나 싶다.

 

아직까지 늘 엄마의 따뜻한 밥상을 먹고 있는 행운의 나이지만, 나중에 나에게도 언젠가 엄마의 손맛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요즘들어 엄마가 가끔 나에게 이런저런 요리 레시피를 알려주시곤 하는데, 사실 아직은 철이 덜 든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엄마의 손맛을, 손길을 느끼고 싶다.

 

가을이 깊어간다.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날들이 남아 있을지, 네게 얼마나 많은 날들이 남아 있을지 우리는 사실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지.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거. 이 순간을 우물우물 보내면 인생이 그렇게 허망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거.

 

「딸에게 주는 레시피」中 75p.

 

어쩌면 엄마들의 마음은 다 같은걸까?! 아직까지는 엄마들 입장에서 품안에 어린 자식이라고 느꼈질 테지만... 어느새 훌쩍 커버린.. 그래서 이제는 힘들때나 위로가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도와주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알려줘야 할때라는 걸... 그러한 엄마들의 마음을 공지영이 한권의 책 속에 담았다. 지금껏 자라오면서 느꼈던 힘이 되는 엄마의 이야기들을 엄마표 음식에 담아, 늘 기억할 수 있도록 전하고 있다.  

 

사실 그녀가 알려주는 요리 레시피들은 요리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단순하다. 10분 정도면 해먹을 수 있는 너무도 쉬운 요리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이 요리 레시피들에도 엄마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엄마표 요리들이 생각났을 땐 그만큼 힘들었다거나 위로가 필요했다는 날일텐데, 수많은 다른 요리책들이 전해주는 그런 멋진 요리들을 해먹기엔 준비하는 것도 또 요리를 하는 것도 너무 지치고 힘들것이다. 그럴 때 아주 간단하게 엄마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레시피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덜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채워내지 못한다. 엄마가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손에 가득 든 은을 버려야 금을 얻을 수 있고 금을 버려야 다이아몬드를 얻는다. 삶은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주려고 손을 내미는데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손이 없을지도 몰라.

 

「딸에게 주는 레시피」中 231p.

 

다른 책들과 달리 훌륭한 기교를 부리고 맛깔나게 쓰지 않아도 평범하면서도 소소한 이야기들이 더 와닿을 수 있었던 것은 책 속에 담긴 레시피 하나하나에 엄마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 공지영보다 엄마 공지영으로 다가와서 더 친근했던 것 같기도 하고, 또 우리 엄마가 딸인 나에게 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더 진심으로 다가왔다.

 

요리 재료들을 하나하나 진열하고 오븐을 예열하고 셋팅해야하는 유명한 요리법들이 아니더라도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는 나의 엄마만의 엄마표 레시피! 가끔 위로가, 힘이 필요할 때 마다 꺼내놓고 엄마표 음식을 만들게 된다면 그때마다 인생의 선배로, 그리고 나의 엄마로서 나에게 들려주고팠던, 또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들도 함께 그 요리와 함께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위녕, 엄마가 말해준 먹거리는 네 "영혼의 집"인 육체의 원소야. 집을 사랑하는 사람이 집 안에 독극물이나 해로운 것을 들이지 않듯이 네 영혼의 집인 육체에도 좋은 것만을 주어야 한다. 사실 어쩔 수 없이 해로운 것을 먹을 때에는 그것이 없을 때를 생각하며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엄마가 네게 주고 싶은 모든 것이야. 지금, 여기, 너 자신 그리고 사랑하며 감사하기.

 

「딸에게 주는 레시피」中 3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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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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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가 죽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오베는 하루에 두 번, 라디에이터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며 집 전체를 점검했다. 그녀가 온도를 몰래 올렸을까봐.

 

「오베라는 남자」中 55p.

 

얼마전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화제가 되었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통해서 접했던 스웨덴 작가의 소설.  거기에 힘입어 이어서 또 출간된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가 눈길을 끈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쓰기전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던 작가는 늘 짧게만 써야했던 기사대신 자신이 원하는 만큼 길게 글을 쓰고싶어서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그의 첫 소설이 전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으니..엄청난 대박 소설을 쓴 그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책을 봤을 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보이는.. 뭔가 잔뜩 화가난 표정의 책 표지에 그려진 오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같이 인상을 써야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저렇게 인상을 써야하나 하는 궁금증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가 마지막즈음엔 책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한장한장을 넘겼던 감동이 가득한 책이다. 

 

그는 거의 밤새도록 깨어 있었다. 어떻게 죽을지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분명히 해두기위해 도면에다 표까지 그렸다. 각 방법의 장단점을 신중히 재어본 끝에, 그는 자기가 오늘 쓸 방법이 별로 좋지 않은 대안들 중 최선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오베라는 남자」中 139p.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흑백같은 남자. 59세. 스웨덴에 거주하고 있는 오베라는 남자가 있는데, 그는 시종일관 무뚝뚝하고 서툴어보이고 고집스럽고 함부로 다가갈 수도 없는 남자다. 키보드가 없다는 아이패드에 분노하고 무엇이든 발길질로 상태를 확인하는 너무도 까칠하기에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런 이웃이기도 하다. 그런 오베에게 빛이 되어줬던 컬러풀한 그의 아내 소냐. 하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오베는 곧 그녀의 곁으로 따라가기로 계획을 하게 된다. 그의 소원은 단 한가지. 그저 평화롭게 죽고픈... 그런데 그가 자살하려고 할 때마다 누군가 나타나 방해를 한다. 이웃집에 이사온 이상한 가족들이나 성가신 고양이에 의해서 말이다.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하려는 오베와 의도치않게 그를 방해하게 되는 훼방꾼들의 유쾌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인생이 이리 될 줄은 몰랐다. 열심히 일해서 모기지도 갚고 세금도 내고 의무도 다했다. 결혼도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자고, 서로 그렇게 동의하지 않았던가? 오베는 그랬다고 분명히 기억한다. 그녀가 먼저 죽는 쪽이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이 얘기하던 건 그의 죽음이었다. 그게 빌어먹을 이치에 맞지 않은가 말이다. 응? 안 그런가?

 

「오베라는 남자」中 145p.

 

최근에 읽은 책중에서 가장 쉽게 술술 읽혔던 책이 아닌가 싶다. 사실 특별할 것 없을 수 있는.. 무뚝뚝한 남자 오베의 이야기이지만 그 모습조차도 너무도 유쾌했기에 읽는 내내 깔깔 거리며 책장을 넘겼고, 그러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선 생각지도 않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던... 매사 원리원칙주의자인 오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겐 눈엣가시로 눈살을 찌푸리게 할지도 모르지만, 다 읽고 나면 그런 오베의 행동이 다 이해가 되고 또 다 옳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외모와는 달리, 그가 시종일관 까칠하게 하던 행동과는 달리 너무도 사랑스러워졌던 오베. 책을 권해주던 지인이 다 읽고 나면 오베앓이를 할 지도 모른다고.. 그 말이 딱 맞아 떨어진다.

 

아직 오베를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 꼭 추천해주고픈.. 읽고나면 왜 이제야 오베를 만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다. 곧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두번째 소설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오베만큼 매력적이고 사랑스런 캐릭터가 또 등장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나는 벌써 그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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