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생이라는 이 징글징글한 생일파티에 초대되어 문 앞에서 하나씩 받은 고깔모자를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언젠가 그녀가 말했다. 고깔모자에는 차곡차곡 지나간 시간이 쌓이고 있으며 우리 각자의 현재 좌표는 뒤집어놓은 고깔모자의 꼭짓점이라는 거였다. 현재가 늘 괴로운 건 과거로 가득 찬 고깔모자의 꼭짓점에 집중되는 하중 때문이었다. 나는 고깔모자 인생론이 꽤 그럴듯하다고 그녀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버린 그때, 그녀와의 과거로 가득찬 고깔모자의 꼭짓점에서 나는 압사할 지경이었다.

 

'노재희-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시간의 속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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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가끔 내 인생의 목표가 오로지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용히 닳아가는 것.

어쩔 수 없이 필요한 학습교재를 제외하곤 나는 신문도 책도 읽지 않는다. 영화를 안 본 지도 아주 오래되었다. 뇌 속에 새로운 것을 단 한톨도 집어넣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퍼내고 또 퍼내고 싶다. 쩍쩍 갈라진 밑바닥이 다 드러날 때까지.

돌이켜보면 지난 삶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받는 과정이었다. 비효율적인 인생이다. 절망스럽지는 않다. 대부분의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세상에는 기어이 무엇인가가 되고자 안간힘 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시간은 늘 체력장 오래달리기 같았다. 눈을 감고 뛰다보면, 저 앞에 도무지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속도로 달리던 아이가 어느 순간 내 뒤로 처져 있는 거다. 늙어간다는 건 따라잡을 아이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아무도 없어진다는 거겠지. 앞만 보고 뛰는 일도 뒤를 돌아보는 일도 두려울 것이다. 그러면 좀 쓸쓸할 것 같기도 하다.

 

'정이현-안녕, 내 모든 것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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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하면 하는 만큼, 슬픔도 깊어진다.

 만날 때마다 하나, 또 하나 품고 있던 희망을 지워 가는 그 느낌은 얼룩처럼 마음에 남아 있었다. 더구나 무의식적으로 전기 스위치를 끄는 것이 아니라, 촛불을 하나 하나 불어 끄는 것처럼, 보다 의식적으로 지워 나가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은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될 뿐이다.

 

앞으로도 너의 인생 가득가득 좋은 일이 있기를.

이제는 낮잠 잘 때 너의 손을 잡아 줄 수 없고, 아이스커피에 우유와 꿀을 듬뿍 넣어 휘휘 저어 마실 수도 없겠지.

넌 나의 무엇이었을까?

앞으로도 너의 인생 가득가득 좋은 일이 있기를. 밤하늘에 총총한 별처럼, 아침 햇살처럼, 예쁜 폭포수처럼 풍요롭게 쏟아지기를.

 

'요시모토 바나나-사우스포인트의 연인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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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떠나지. 말아요. 단. 하루라도. 왜냐하면.

왜냐

하면. 하루는. 길고.

나는. 당신을.

기다릴. 테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돌아가버린 다음이에요.

-우리는 오래전부터 서로.... 서로 잘 알고 있잖아요. 당신의 눈빛,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 모두 나에게 얼마나 가깝고도 친근한 것인데.

그건 모두 끝난 일이에요, 끝났다구요.

-세상에 이렇게 끝나버릴 수는 없어. 그러지 말고 문을 좀 열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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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무슨 암시라도 되는 양 어떻게든 거머쥐고 싶어지는 생의 한순간이 불현듯 찾아오기라도 하면 나는 얼굴도 모르는 네게 뭐라고 하지? 해골처럼 검게 뚫려 있는 네 두 눈을 보며. 그저 네 빈집에 들어갔다가 잠깐 장미 창을 보고 나왔다고 하나? 하지만 그건 너무 늦은 뒤잖아.

 

'윤대녕-장미 창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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