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운명 따위가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을 너는 가지고 있느냐고 운명이 내게 묻는다. 그게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어떤 기억을 비로소 견뎌낼 수 있게 되는 일. 지나간 시간을 정독할 마음이 조금쯤 일렁이는 일. 안도와 체념이 뒤섞인 맛의 한숨. 그래서 슬프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이제 답할 수도 있겠다.
세상은 내 편이 아니고
사랑도 내 것이 아니므로
내가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그대의 눈부신 빛 속에서
나는 영영 그림자인 거라고
나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그대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세상도 어찌하지 못했다고
사랑도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언젠가.
나에게는 일어났으나 너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 너에게는 희미했으나 나에게는 또렷했던 일. 나에게는 무거웠으나 너에게는 가벼웠던 일. 너에게는 잊혔으나 나에게는 문신으로 새겨진,
언젠가라는 말처럼 슬픈 말도 흔치 않다. 이미 가버린 과거의 언젠가이든,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의 언젠가이든.
너무 빨리 오거나 너무 늦게 온다. 너무 일찍 사라지거나 너무 오래 남는다.
제시간에 제자리를 지킨 것들도 있었을 텐데, 너무 늦게 깨닫는다.
'황경신-밤 열한 시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