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어, 이 모든 게 어떤 미친 짓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나는 떠벌이고, 미소 짓고, 변명하고, 애원하고, 간절하고, 진지하고, 걷고, 뛰고, 인파를 헤치고, 먹고, 굶고, 목마르고, 계단을 오르고,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고, 명함을 받고, 화장실에서 루주를 바르고, 눈을 맞추고,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고, 결의에 차고, 기다리고, 메모를 남기고,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사과하고, 감사하고, 수없이 네 이름을 말하고, 휴대폰 배터리를 바꿔 끼우고, 계단을 내려가고, 시계를 보고, 걷고, 간판을 읽고, 발뒤꿈치가 벗겨지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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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길이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 몰랐다. 안개가 너무 짙었고, 구름이 너무 두꺼웠기 때문에. 그 길에서 내 삶이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 짙은 안개와 구름 속에 어떤 길들이 어떤 방향으로 흩어져 있을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길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리고 그 자리에 동그마니 웅크려 살 수도 있었다. 그것 또한 삶의 한 가지 길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안개 속으로, 구름 속으로 발을 내딛고 말았다. 그래서 아주 많은 길을 흘러다니고 떠다니게 되었다. 잘한 일이었는가?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아도 길들은 어디에나 있었으니까. 그 길들은 내가 밟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인생이 그렇듯 길도 때로 행복했고 때로 쓸쓸했다. 행복했던 시간들이 더 많았는지 아니면 쓸쓸했던 시간이 더 많았는지, 계산할 능력은 나에게 아직 없다. 아직 더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아직 더 많은 길이 남아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지나온 길을 더듬으면 자꾸 발목이 서늘해진다. 발목에 바람이 분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길을 다닌 것인지도 모른다.  

#2.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떠나는 길에 비해 아주 짧다.길들이 둘둘 말려 내 안으로 들어오는 까닭에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아주 짧다.길의 상대성 원리,
떠나는 길은 언제나 멀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가깝다.
길들이 내게 데려다 준 풍경들, 그리고 사람들.인생이 그렇듯 길도 때로 행복했고 때로 쓸쓸했다.행복했던 시간들이 더 많았는지 아니면 쓸쓸했던 시간들이 더 많았는지,계산할 능력은 나에게 아직 없다.아직 더 살아야 하니까.그리고 아직 더 많은 길이 남아 있을 테니까.그런데 이상하다.지나온 길을 더듬으면 자꾸 발목이 서늘해진다.발목에 바람이 분다.시간이 흐른 것이다.어쩌면 너무 많은 길을 다닌 것인지도 모른다.시간은 흐르고 추억은 남는다.모든 이의 인생이 적용되는 법칙.두 번째 파리로부터 어느 새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고,
첫 번째 파리로부터는 3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시간은 흐르고 삶은 변하지만, 추억은 그 시간 그 공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나는 추억을 붙들려 헤매고 있었다.어리석음.부질없음.쓸쓸함.......... 

#3. 시간은 흐르고 꽃은 시든다.추억은 정말로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아니면 추억도 시드는가?
그럼에도 그 평화는 깨지지 않았다.평화가 크고 깊으면 슬픔이 된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다시 그 자리에 서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그때, 거기'의 기억들이 내게도 이미 두껍게 쌓여 있었으므로.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약속은 농담이다.'만약에'라고 시작하는 모든 진술은 거짓말이다.또는 최소한 거짓말이 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나는 약속했다.'만약에'를 감추고 그저 '너를 다시 만나면'이라고만 말했다.땅도 변해 있고 자신도 변해 있는데, 오로지 기억만이 변하지 않고 남아 옛날을 회상하는 것.그 슬픔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바젤행 기차에서 그들의 편지를 다시 읽으며 울었다.편지를 접으며 생각했다.이제부터는 기차를 놓치며 살 거라고.기차를 놓쳐야 사람을, 운명을, 인생을 만날 수 있다고.기차를 놓치면 나도 며칠은 서커스의 소년이 될 수 있다고.여전히 기차를 놓치지 못한다.3분 뒤면 또 오는 지하철에도 뛰어오른다.옷자락이 자동문에 찝히는데도.7월. 기차를 놓치는 꿈.그래서 서커스의 소년이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꿈.한여름 밤의 꿈.

#4. 점점 더 내 기억은 한심해진다.기억이 한심해지면 쓸쓸함이 튼튼해지는 법인가.
거짓말처럼 기억나지 않는다.내가 그 때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보냈는지.다시 자전거를 타고 그곳으로 가면 그 이야기들이 돌아와 줄까.어림없는 소리다.풍경이 잊혀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사람들의 얼굴이 희미해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달아나 버렸다.그 낯선 곳에서 나를 에워쌌던 쓸쓸함들. 
길들이기.내 마음 속에 얇게, 그리고 단단하게 말려 있는 길들을 조용히 잠재우기.떠나는 기쁨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내 발목을 꽉 붙들어 매기.어디로 가든 마찬가지가 아니었느냐.내 깊은 속에 차곡차곡 접어 멀고 험한 길들 들여놓기.
길들이 나를 길들였다.이제는 너무 길이 잘 들어 길들에게서 도망가지 못한다.그래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아무리 차곡차곡 잘 접어서 깊이 들여 놓아도 또 때가 오면 구시렁대기 시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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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보는 것은 늘 전면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과거에 의해, 과거에 의지하여 과거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삶에 있어서 뒤가 없는 앞이란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과거가 없는 인간은 늘 실종 상태임을 의미한다. 사람이란 가끔 과거라는 보금자리에 들어가 휴식을 취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게는 단 한순간도 휴식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늘 시간의 줄에 매달려 살 수밖에 없었다. 과거 없이 산다고 해서 뭐 큰 지장은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살다보면 때로 음주운전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불심검문이라도 받게 되면 그때 내가 무면허라는 걸 문득 깨닫는 심정 이해하실는지. 과거란 그렇듯 자신에 관한 일종의 면허증과도 같은 것이리라.

 문제는 외면할 과거가 나에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에 속해 있으려면 나는 남들보다 두배의 속도를 내야 한다. 때로는 가속도가 필요하다. 무면허니까 캄캄한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꿈속에서도 미친 듯이 질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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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오래 목마를 수 있어 그늘진 심장을 가진 선인장으로 지내왔고, 매우 아름다워 일찍 시드는 장미조차도 경멸해왔지만, 기왕이면 장미보다는 선인장이 되길 원했다는 쓸쓸한 자랑으로, 사막에서도 우물 따위엔 기대고 싶지 않았다는 괴로운 혼잣말로 나를 유기(遺棄)한다.

이응준-그 침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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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외도 

육중한 분량의 몇 페이지만 찢어내고, 안심하고
해보자
세상 루머가 일시에 용서되는 순간을 낡은
이 팔다리로 어디 해보자
햇빛이 이맛살의 근육을 때리고 지나가도
정신차리지 말자
 
아침, 언덕에서 마악 내려오면
간밤의 빗줄기로, 상가의 셔터가
새것처럼 반짝거리나,
시효보다 빠르게 녹슬게 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음을
굳이
말로 하지 말자 등교하는 아이들의
도시락과 신주머니에 들어 있는 깨끗한 영혼도
쳐다보지 말자 끊임없는 식욕처럼 끊임없는
소화불량, 24시간 편의점에서 소화제를 사 들고
근처 카페의 아침 커피 한 잔 같은
짧고 개운한 후회도 하지 말자 그의 인생을,
그의 또 다른 인생인 나를
내 한 페이지의 인생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도, 자판기에서 백 원짜리 티슈를 꺼내 들 듯
쉽게 쓰고 쉽게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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