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나는 그와의 결혼으로 내가 지닌 문제와 내가 가진 가능성으로부터 동시에 도망치고자 했다. 나의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보니, 그 중 나를 더 아프게 한 건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이었다.

안정을 추구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성장하지 못했다. 독에 갇힌 나무처럼 가지를 마음껏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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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닌 사람이란것을 깨달았을 때도 틀어질 것임을 느꼈을 때도 내가 더 참아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노력조차 후에 최선을 위한 과정이었음을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채찍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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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처럼 사라지고 싶었지 공중에도 골짜기가 있어서, 눈이 내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하얗게 사라지고 싶었지

눈은 쌓여서

한 나흘쯤,

그리고 흘러간다 목소리처럼, 그곳에도 공터가 있어서 털모자를 쓰고 꼭 한사람이 지날 만큼 비질을 하겠지 하얗게 목소리가 쌓이면, 마주 오면 비켜서며 웃어 보일 수 있을 만큼 쓸고

서로 목소리를 뭉쳐 던지며 차가워, 아파도 좋겠다 목소리를 굴려 사람을 만들면,

그는 따뜻할까 차가울까

그러나 사라지겠지 목소리 사이를 걷는다고 믿을 때 이미 목소리는 없고, 서로 비켜서고 있다고 믿을 때 빙긋, 웃어 보인다고 믿을 때 모자에서 속절없이 빠져버린 털처럼 아득히 흩날리며 비질이 공중을 쓸고 간다 목소리를 굴려 만든 사람이 있다고 믿을 때……

주저앉고 말겠지 두리번거리며

눈사람처럼

제발 울지는 말자, 네 눈물이 시간을 흘러가게 만든다 두갈래로 만든다

뺨으로 만든다

네 말이 차가워서 아팠던 날이 좋았네

봄이 오고

목소리처럼, 사라지고 싶었지 계절의 골짜기마다 따뜻한 노래는 있고,

노래가 노래하는 사람을 지우려고 하얗게 태우는 목소리처럼,

한 나흘쯤 머물다

고요로부터 고요에까지 공중의 텅 빈 골짜기를 잠깐 날리던 눈발처럼 아침 공터에서 먼저 녹은 자신의 몸속으로 서서히 익사하는 눈사람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고 싶었지

그러나 그건 참 멀다, 고개 들면 당인리발전소 커다란 굴뚝 위로 솟아올라 그대로 멈춰버린 수증기처럼 목소리가 사라진 노래처럼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신용목>"목소리가 사라진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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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다정하게 말했지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안다 걷다가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우리가 걷고 지쳐 버리면, 지쳐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면,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보았다고 믿어 버리고, 믿는 김에 신앙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지 우리는 이 거리를 끝없이 헤매게 될 거야 저것을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고 사람이라 믿으며 그것들을 하염없이 부르고 이 거리에 오직 두 사람만 있다는 것, 영원한 행인인 두 사람이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오래된 소설 같고 흔한 영화 같은, 우리는 그러한 낡은 것에 마음을 기대며, 우리 자신에게 위안을 얻으며,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 너는 손을 내밀고 있다 그것은 잡아 달라는 뜻인 것 같다 손이 있으니 손을 잡고 어깨가 있으니 그것을 끌어안고 너는 나의 뺨을 만지다 나의 뺨에 흐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겠지 이 거리는 추워 추워서 자꾸 입에서 흰 김이 나와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느낌을 한없이 소중한 것으로 간직할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소박한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 것이고, 우리는 추위와 빈곤에 맞서는 숭고한 순례자가 되어 사랑을 할 거야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야 그것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놀라워서, 위대하고 장엄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이걸 정말 원했다고 믿겠지 그리고 신적인 예감과 황홀함을 느끼며 그것을 견디며 끝도 없이 이 거리를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그러다 우리가 잠시 지쳐 주저앉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거기에 담긴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아 버리겠지 그래도 우리는 걸을 거야 추운 겨울 서울의 밤거리를 자꾸만 걸을 거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그냥 막 걸을 거야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아직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나는 너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이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된 일인지 우리는 모른다

 

'황인찬-종로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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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중략)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 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김소연 '그래서中'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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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견뎌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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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빙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게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게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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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닮지 않은 각자가 단지 떠내려가는 순간이 겹쳤을 뿐

너와 나는 안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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