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몽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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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던 책을 밀어두고, 이 책부터 읽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그의 책에 대한 쟁쟁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예지몽>은 영화로도 만들어진 <용의자 X의 헌신> 시리즈 제2탄이라고 소개되는데,
<용의자 X의 헌신>을 아직 읽지 못했지만, 그것이 <예지몽>을 읽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예지몽>이라는 한 제목의 소설일줄 알았는데,
이야기는 다섯 편의 단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에 오컬트와 미스터리의 절묘한 크로스오버"라고 설명되어 있어,
오컬트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사전을 찾아보고 읽었다.
’오컬트’(occult)는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신비적, 초자연적 현상, 
또는 그런 현상을 일으키는 기술"을 칭하는 명사이다.

<예지몽>에 실린 총 다섯 편의 에피소드는 모두 이 신비적으로 초자연적 현상,
즉 오컬트와 관련 되어 있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일본 영화 ’기묘한 이야기’처럼, 그야말로 기묘한 사건이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코는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이 오컬트와 과학을 접목시킨다.
오컬트 사건의 해결 실마리를 과학으로 풀어가는 것이다.
꿈에서 본 미래의 연인을 수년이 흐른 후에 실제로 만나고,
한밤중에 창 밖에 나타난 연인의 모습을 보고 불길한 사건을 직감한 남자 친구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애인의 집에 연락을 취하는데 그 시각 그곳에서 애인이 살해되고,
예지몽을 꾸는 소녀가 등장하기도 한다. 

나는 지금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시며 이 글을 쓴다.
달짝지근한 인스턴트 커피를 즐기는 ’유가와’를 흉내내보는 것이다.
<예지몽>을 너무 단숨에 읽어버려서, 다시 기억을 더듬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컬트 사건이 발생하면, 오컬트 사건에 관심이 많은 형사 ’구사나기’에게 접수된다.
그러면 구사나기는 물리학을 전공한 젊은 조교수인 친구 ’유가와’에게 자문을 구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의 가장 탁월한 점은 바로 ’반전’의 묘미이다.
모든 추리소설이 반전의 묘미를 갖는 것은 당연할 일이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반전에는 탄성을 자아내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추리소설’을 쓰는 법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예지몽>은 도저히 풀 수 없는 트릭, 그 자체가 항상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도록 한다.
문제를 일으킨 신비한 오컬트 현상 그 자체가 과학적 반증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유가와의 추리가 완성될 때마다, 탄탄한 과학적 이론과 발상을 뒤집는 논리력을 갖춘
히가시노 게이고의 천재성에 탄복하게 된다.

조금 장난스럽게 덧붙이자면, 재밌는 것을 하나 발견한 것이 있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 <예지몽>은 자살 사건을 미리 꿈꾸는 소녀가 등장한다.
그런데 책의 꼬리말이 에피소드 제목인 ’예지몽’으로 나오다가 
갑자기 맨 마지막 장(p. 291)에 꼬리말이 ’미래를 아는 아이’로 바뀐다.
편집 과정의 단순한 실수일 수 있는데, 
한밤중에 침대에서 스탠드 켜놓고 읽다가 순간 섬짓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작가이다.
<그녀의 알리바이>의 결말에서 보여지듯이, 
기계적인 정의보다는 따뜻한 인간미도 흐르는 인물이여서 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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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딛고 세상을 향해 뛰어올라라 - 아버지의 인생 수업
송길원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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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님의 [나를 딛고 세상을 향해 뛰어올라라]를 막 읽고 잠을 자려는데,
골목길에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모이는 청년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나가서 말릴 용기는 없고,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그렇게 싸우면서 소리치는 청년의 목소리에 절망이 가득한 것이 전해져왔습니다.
서로 때리고 매를 맞으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내 가슴을 조여오며 답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젊은데, 혈기왕성 팔팔한 때에, 저들은 왜 저렇게 절망하고, 생(生)을 저주하는가.’

저들에게 ’아버지’가 계실까를 생각했습니다.
아니 저들에게 "나를 딛고 세상을 향해 뛰어올라라"고 말씀해주시는 아버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절망하는 청년의 삶에서 ’아버지의 부재’가 느껴지는 것은 
나의 선입견이고, 오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꿈에 대해, 성장에 대해, 도전에 대해, 좌절에 대해,
소통에 대해, 행복에 대해, 사랑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건강한 아버지가 계셨다면,
어쩌면 저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나를 딛고 세상을 향해 뛰어올라라], 제목만으로 가슴 뭉클해지는 책입니다.
책을 읽으며 내내 나의 아버지께,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아버지께 감사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아버지의 인생 수업"입니다.
이 책은 아버지들이 먼저 읽고 배우는 책입니다.
세상은 아버지의 자리를 잃어가며, 고개숙인 아버지가 많아진다고 한탄합니다.
[나를 딛고 세상을 향해 뛰어올라라]는 희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먼저 세상을 향해 뛰어오르라고 힘을 불어넣어줍니다.

사실 저는 패미니즘 성향이 강하고, 가부자적 성차별에 몹시 저항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의 자리를 존귀히 여기는 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유쾌하고, 가장 잘 나가는 우리 아빠가 
어느 날, 사업 실패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을 때,
우리 사남매를 앉혀두고 "내가 사는 이유는 너희들이다.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고생이 되더라도 3년만 참고 기다려달라. 아빠는 너희 때문에 산다"고 하셨을 때,
우리는 한마디 대답도 못하고 울기만 했지만, 환경이 슬퍼서 운 것은 아니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우리의 생활과 형편이 너무 달라졌지만 아무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버텨주시고, 그 자리에 계셔주시는 것이 고마웠습니다.

[나를 딛고 세상을 향해 뛰어올라라]는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 찾아줍니다.
아버지의 꿈이 그대로 우리의 꿈이 되고, 
아버지의 희망이 그대로 우리의 희망이 되고,
아버지의 행복이 그대로 우리의 행복이 됩니다.
환갑을 맞으신 아버지가 이제야 꿈을 찾았다며 새롭게 한의학 공부를 시작하셨을 때,
우리 가족 모두는 황당해했지만, 그렇게 계속 꿈을 꿀 수 있는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꿈 꾸는 아버지가 있어 행복합니다.
바다는 2.8%의 소금 때문에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 [나를 딛고 세상을 향해 뛰어올라라]고 당당하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2.8%의 건강한 아버지만 있어도 세상은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나를 딛고 세상을 향해 뛰어올라라]이 맨 뒤장에 편지 봉투가 붙어 있습니다.
안에 고운 빛깔의 편지지와 함께요!
저는 이 책을 이제 아버지가 되는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합니다.

"악한 부모는 없다. 약한 부모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살아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나를 딛고 세상을 향해 뛰어올라라]를 읽고, 책에서 말하는 단 한 가지 가르침만 붙들어도 
이 땅의 모든 아버지가 다시 세상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아버지를 붙들고 우리도 다시 일어서고 싶습니다!
아버지, 염치없지만 버팀목이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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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신진혜 지음 / 창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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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에 관한 책이 쏟아져나오고 있나보다. 
출판사도 저자도 여럿 검색된다.
내가 읽은 [선덕여왕]은 창해에서 단권으로 펴낸 신진혜 작가의 것이다.
선덕여왕에 관한 많은 신간 중에 내가 읽게 된 책의 저자가 
현재 대학교 한국사화과에 재학 중에 1985년생 작가라는 것을 알고 놀라기도 했지만,
솔직히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이런 실망감은 금새 무색해졌다. 
나는 빠르게 신진혜 작가의 ’선덕여왕’에게 빠져들어갔다.
[선덕여왕]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즉, 선덕여왕이 직접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잊혀진’ 존재였던 ’덕만’공주에 초점이 맞춰진다.
딸이었고, 그것도 차녀였던 덕만공주는 
"만백성의 한숨과 어마마마의 눈물을 싸안고 세상에" 태어났다. 
차녀 덕만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한반도 최초로 여왕이 되는 과정을 재밌게(!) 읽어가며 나는 작가에게 미안했다.
나이가 어린 작가라는 이유로 책을 읽기도 전에 ’초보’ 취급을 하고,
뭔가 미심쩍은 마음으로 책에 대한 권위를 의심한 나의 태도가,
한반도 최초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 ’선덕여왕’이 평생 맞서 싸워야 했던 
바로 그 편협함과 편견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역사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이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대한민국의 영토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아쉬움만으로 당나라와 손을 잡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행히 신진혜 작가의 [선덕여왕]은 역사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국제 정세와 정치적 음모와 같은 이야기보다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 여왕으로서의 고뇌, 
여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사상과 같은 것들에"(p.337)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선덕여왕]은 진중하고 무거운 대하(!) 역사소설이라기보다,
내게 [선덕여왕]은 잘 만들어진 ’트랜디 드라마’처럼 읽힌다.
실제 이름은 좀 촌스럽지만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배려하는 사랑을 하는 ’용춘’은 나의 이상형에 가깝다.
(김춘수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날 때는 용춘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사랑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었던 비향과 선덕여왕의 가혹한 운명 또한 아름답기만 하다.

모란꽃의 그림만 보고도 향기가 없는 것을 알아맞춘 유명한 일화를 읽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보다 내가 더 주목한 것은 선덕여왕의 난적으로 대립구조를 형성하는 
’미실궁주’라는 인물이다.
MBC 드라마에서 고현정 씨가 이 배역을 맡았다고 해서 더 눈이 가진 했지만,
선덕여왕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이다.
선덕여왕이 통일신라의 기반을 놓은 여왕이라면,
미실궁주는 "신라에 여왕이라는 꽃이 피어날 수 있는 옥토"를 가꾼 패기만만한 여장부이다.
여왕의 터를 다졌던 미실궁주도 역사적으로 재조명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평범한 아녀자가 아닌, 제왕의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여인으로서의 소소한 행복을 거두고 ’대의’를 위해서 살아야 했던 선덕여왕.
그녀에게 가장 부러운 점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능력이다.
그녀는 사람을 얻는 데 탁월했다.
누구도 스스로 적으로 만들지 않았고, 스승 원광이 멀리해야 한다면 경계한 ’유신’조차
자신의 충신으로 만드는 비범함이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의 첫째 조건을 보는 듯 하다.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를 만들라고 했던 링컨처럼, 
선덕여왕은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고, 인재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한 제왕이다.

삼국통일이라는 완성을 향한 대망과 탐욕으로 많은 것을 해치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완성보다는 시작에 의미를 두고 터를 닦는 과정에 집중할 줄 알았던
선덕여왕의 통찰력과 리더십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 
재밌게 읽은 [선덕여왕]의 또다른 수확이다.
그 시작에 초점을 맞추어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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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양장본)
데이비드 덴비 지음, 김번.문병훈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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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읽어야 할 책은 많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 아니, 그전에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가져본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읽어야 할 책이 있다고 말한다. ’고전 때문에 고전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다른 말로 바로 [고전과의 만남]이다. 근대와 현대를 지나, ’급변’이라는 말조차도 무색한 세상에서 변화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우리는 매일 적응하기도 급급한데, 매일 신간과 함께 쏟아져나오는 낯선 이론을 섭렵하기도 어려운데, 고전 읽기는 여전히 유효한가, 유효하다면 어째서 그러한가를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아마도, 찬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내가 속한 조직에서 정규교육과정을 신설하는데, 커리큘럼을 구성하는 기획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회의 과정에서 기본 방침에 의견차가 생겨 자연스럽게 두 그룹으로 나눠지면서 논쟁이 붙었다. 한쪽 그룹은 이론과 기초가 되는 학습에 주안점을 두어 철학과 고전어 등과 같은 수업을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편 그룹은 현장에서 바로 활용 가능한 실용적인 수업을 더 많이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다. 나는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을 읽으며,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은 듯 하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의 저자 데이비드 덴비는 영화 평론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하다가 왜 마흔여덟의 나이에 다시 고전읽기 수업을 청강하게 되었는지 책의 머리말에서 아주 길게 설명한다. 그중에서 나의 뒤통수를 한대 후려치는 듯한 그의 고백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미디어가 정보를 주었지만 1990년대의 정보란 덧없고 불안정한 것이 되어버렸다. 정보란 것은 일단 어디든 쓰이게 되면 금방 분해되어, 그 조각들 일부는 가치가 커지지만 나머지는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진다. 그 누구의 정보도 안성맞춤일 수가 없는데, 그것이야말로 지금 미국인들이 불안과 안달로 반쯤 미쳐버린 듯 보이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이다. (...) 금세기 말에, 아니 나아가 이번 천년의 말에 이르러 미디어가 문학의 영역을 통째로 점령하고 문학을 밀어내려 하는 상황에서, 내 역겨움에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들, 즉 향수, 회한, 분노, 심지어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정보를 얻는 것과 정신적 기반의 토대를 다지는 일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낳는 두뇌 활동인 것이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컬럼비아 대학 학부생들을 위해 개설된 교양필수과목인 <현대문명>과 <인문학과 문학>을 청강한 저자의 강의노트 같은 기록이다. 나에게 신선했던 충격은, 목차에 위대한 책의 제목들이 선별되어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재밌게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제외한 나머지 목차는 모두 위대한 책을 저술한 인물의 이름이다. 위대한 책 한 권을 지정하지 않고, 위대한 책을 저술한 인물의 대표작을 읽으며 해석하고 토론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접근과 수업방식이 신선하다.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사람을 지정하여 그의 대표작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에 감탄했다. 그것이 바로 그 한 권의 책을 더욱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내며, 사고의 중심을 추적해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접근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전은 단순히 한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쓴 사람과 그의 사상(이론)과 ’함께’ 읽는 것이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집필 방식에서 두 가지 큰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고전을 읽으면서 저자 자신의 두뇌 속에 일어나는 모든 사고의 과정을 그대로 옮겨놓듯 솔직하게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고 있는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두 번째는, 컬럼비아 대학의 강의 현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생생한 현장감이다. 그들의 수업 중, 유독 나의 흥미를 끈 것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수업 시간이었다. 일단 그 두 권의 책(!)을 모두 정독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이성을 초월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성서를 고전으로 분류했다는 것이 특이했고, 그것을 읽고 어떤 토론이 벌어질 것인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끔 토론하는 모임에 참여하면, 자신의 문제를 객관화시키지 못하고 또 핵심적인 질문에서 빗나간 주제로 토론이 ’수다’의 수준에 머무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또한 어떤 책이든지 읽은 것을 정보로 처리해버리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고 자랑하는데, 그의 인격과 삶에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은 것을 입(정보)으로밖에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독서 그 자체가 사고의 힘을 길러주고,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한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깊은 있는 책읽기와 함께 그것이 사고와 삶 속으로 스며드는 맛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도서목록을 보면, 그중에서 몇 권을 읽었는가를 세어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나는 [고전]도 그렇게 읽었다. 고전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며, 오로지 목록에 오른 책들을 다 읽는 것이 목표였다. 그때를 추억해보면, [좁은 문], [죄와 벌], [인간의 굴레] 등을 읽으면서 왜 이 책들을 훌륭하다고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나는 누가 고전을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보면, 그것을 비밀로 했다. 내 사고의 힘과 인격의 깊이에서 티가 나지 않는 것이 민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어봤다"고 말하는 것을 목표로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어야겠다. 이제야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생긴다.

글이 길어졌다. 방대한 분량을 읽는 동안 생각이 많아서였다고 변명하며,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이 더할 수 없이 즐거웠음을 고백하며 글을 맺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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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와 멘티 - 내 인생의 등대를 찾아 떠나는 여행
로이스 J. 자카리 지음, 장여경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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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mentor)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연합국 중에 소속되어 있던 이타이카 왕국의 왕인 오딧세이가 전쟁에 출전하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가장 믿을만한 친구에게 맡겼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멘토였다. 멘토는 오딧세이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년 동안, 왕자의 친구, 교사,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친구의 아들을 친아들처럼 정성을 다해 훈육하고, 그가 훌륭하게 성장하도록 도왔다. 10년 후에 오딧세이 왕이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다시 돌아왔을 때, 왕의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해있었다. 그 이후로 백성 사이에서 “훌륭하게 제자를 교육시킨 사람”을 가리켜 “멘토”라고 부른 데서 호칭이 유래했다고 한다.

오늘날 스승과 제자의 형태를 또다른 용어로 멘토와 멘티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리더(leader)와 팔로워(follower)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리더와 팔로워가진 조직적인 상하 개념에 비해, 멘토와 멘티는 리더와 팔로워보다는 좀더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에 초점이 있다고 본다. 멘티에게 멘토는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멘티’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배워할 것도 많고 경쟁적인 사회에서 살다보면, 나에게도 ’멘토’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누구나 가질 것이다. 

Sb(smart business)에서 출판한 [멘토와 멘티]가 다른 메토링 책과 다른 점은
멘토링을 ’학습’과 관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성인개발 및 학습 분야의 전문가이면서, 컨설팅 회사 ’리더십 개발 서비스’의 대표이기도 한 로이스 J. 자카리는 [멘토와 멘티]에서 학습강화에 필요한 멘토의 중요 임무와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멘토와 멘티가 학습관계가 되는 것이다. 멘토는 멘티에게 ’가르쳐주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학습관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이론과 책은 처음이다. 다양한 실전 사례와 함께 핵심 정리 및 스스로 점검하고 학습할 수 있는 [연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의 성장을 돕는 1:1 관계나, 그룹 또는 조직이라면 워크북으로 사용해도 유용할 듯 하다. 물론, 조직경영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멘토와 멘티가 학습관계가 되도록 촉진시키고 직접적인 실행 기술을 단계별로 익히도록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멘토에게 또다른 멘토가 되어주는 책이다. 조직경영이론과 리더십 이론에서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 확실하고, 전략적인 접근 방식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동안은 ’멘토’의 개념과 역할이 높은 추상수준에서 설명되었다면, [멘토와 멘티]는 추상수준을 현저하게 낮추고, 실질적인 역할과 목적을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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