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여,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라 - <교사여, 일어나라> 실천편
최윤식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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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성경에서 말하는 한 사람의 중요성을 증명해주는 아주 감동적인 실화를 들었다.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라는 섬 이야기인데, 증도는 90%의 복음화율을 자랑하는 섬이라고 한다. 이 섬은 섬 특유의 미신도, 투전판도, 놀음도 없고, 굿당이나 점집도 하나 존재하지 않고, 주말이면 모든 식당이 문을 닫는다고 한다. 섬 인구 2,200명 거의 전부가 주일에 교회 갈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이 섬의 이 놀라운 복음화는 목사님도 선교사님도 아닌 한 여인의 헌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한다.


17세에 증도로 시집을 왔으나, 신랑 얼굴 한 번 못보고 혼례를 치른 첫날밤부터 소박을 맞고, 20년간 남편에게 버림받은 생과부가 되어 모진 시집살이를 했던 문준경이라는 여인이 우연히 집을 찾아온 전도 부인에게 전도를 받고, 경성성서학원에 입학 후, 전도 부인이 되었다. 문준경은 고향 신안으로 내려와 섬들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1년에 아홉 켤레나 구무신을 바꿔 신으면서 이웃의 궃은 일을 도맡아가며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김준곤 목사님, 이만신 목사님, 정태기 목사님, 신복윤 목사님, 이봉성 목사님이 바로 이분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문준경 전도사 나이 59세에 6.25전쟁 중 공산당원에게 체포되어 총탄을 맞고 숨졌는데, 그녀의 장례식에는 당시 가장 큰 장례였던 김구 선생의 장례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였다고 한다.

<교사여,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라>는 예수님의 한 사람 철학에 주목하며,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에 헌신하도록 우리를 부르는 '부르심'이다. 이 부름은 특히 사람을 세우는 최전선에 서 있는 '교사'를 향한 것이고, 또한 '교사'로의 부름이기도 하다. 관리하는 목회가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뜨끔하다.

모든 교회가 청년과 청소년 부서의 위기를 겪고 있다. 기독교 미래학자이기도 한 최윤식 저자는 교회 학교 현실을 이렇게 보고한다. "
한국 교회 교육 현장에 시작된 '미래 충격'(Future Shock : 미래가 급속히 도래함으로써 일어나는 현기증 나는 방향 감각의 상실 현상)이 시작되었다. 대도시의 대형 교회를 제외하고는 청년대학부가 전멸하다시피 했고, 각 지역의 청소년 부서들은 존립을 위협 받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상태로 한 10년만 더 지나면 마지막 보류인 어린이 부서까지 완전히 무너져 더 이상 회생의 발판을 마련하기 힘든 지경에 이를 것이다"(14). 그러나 이러한 보고는 열두 정탐꾼처럼 듣는 사람을 두려움과 패배의식에 빠뜨리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현실을 직시하고 무장시킨 후, 문제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도록 하는 영적인 선전포고이다. 하나님께 비전을 받고, 비전을 품은 사람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어떠한 일에 헌신해야 하는지, 우리가 차지해야 하는 그 '산'을 가르쳐준다.

<교사여, 일어나라>의 '실천편'으로 나온 <교사여, 하나님을 세우라!>는 당위적인 외침에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이론과 방침으로 교사를 무장시켜 준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교사는 학생과 수직 개념의 관계가 아니라, '코칭'을 하는 '코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대그룹(산상 수훈) - 소그릅(12제자) - 개인 코칭(디베랴 바닷가 베드로)"으로 이어지는 '교회 교육의 3대 핵심 사역 고리'에서부터 교사가 왜 '비전 코치'가 되어야 하며, 또 될 수 있는지 그 방안을 세세하게 가르쳐준다.

얼마 전,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기독교 안티 카페에 들어가본 적이 있다. 젊은이들의 덧글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신을 '사탄' 취급하고, 교회에 가면 생소한 언어와 의식으로 소통하는 그들만의(!) 문화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비난이 많았다. 그러나 <교사여,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라!>를 읽으며 희망을 발견한다. 그들에게 '생명'과 '진정한 이상'(비전)과 '감동'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교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지고 복음이 이 땅을 정복해가리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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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의 장소 - 오스왈드 챔버스의 그리스도가 이끄는 삶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 3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스데반 황 엮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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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분, 전능자의 그늘 아래!

 

토기장이의 <오스왈드 챔버스> 고전시리즈는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한절 한절 말씀이 생생하다. '번역'이 오스왈드 챔버스님의 마음과 생각과 영적 깊이를 그대로 훤히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간결하고 명확한 단어와 어휘로 표현되는 영적 통찰력, 그리고 뜨거운 사랑과 냉철한 지성을 담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곧장 인도한다. 복잡하게 돌아가지 않고 직선으로 곧장 그렇게 오직 예수님께로만 향하는 길을 내주신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놓이는 이 벅찬 감격과 감사와 감동! 예수님을 만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인가 보다. 나도 소문을 내고 있지만, 주변에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에 대한 소문이 벌써 왕성하다.

'이미' 구원받았지만, 시,공간을 가진 3차원 세계에서 '아직'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날마다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전진하지만, 자주 좌절을 경험하고, 낙심하고, 쓰러진다. 물리적인 환경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기까기 걸리는 시간의 제약은 때로 3차원의 세계를 초월하는 영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을 흔들기도 한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도움의 장소>는 방황하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영을 사로잡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하게 고정시켜 준다. 영적인 진리가 3차원의 제약을 뚫고 침투해 들어올 때, 우리 영혼 가운데 충만히 임하는 그 평강은 맛본 자만이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완벽한 자유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선생이 아니라, 구주로 만나고 영접하기를 원한다. <산상수훈>에서도 가장 핵심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 예수님의 내 구세주가 되실 때, 바로 그 관계 안에서 비로소 영적인 진리가 내 삶에 실질적으로 역사하며, 나를 위해 일하시고,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나타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은 실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 변화는 주님의 십자가와 성령의 임재를 통해 내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우리에게 늘 이런 질문을 하신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모방이나 노력을 통해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될 때 우리도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된다. 이는 거룩을 향한 단순한 열망이나 동경이 아니라, 이는 거룩을 '얻는' 문제이다. 주님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모방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18).  이 선포 속에 담긴 영적인 진리는 모든 죄의 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모든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이 주는 속박으로부터도 우리를 자유롭게 놓아주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준다. 진정한 쉼, 바로 그 안식을 주는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가르침은 잠언처럼 시와 같은 운율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마음에 새기기에 좋다. <’영혼을 향한 열정’이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과 경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영적인 큰 승리를 지난 직후에는 '방심의 영역'이 찾아든다. / 상처를 향기로 만드시는 하나님 / 우리는 너무나 행복하고 안전하고 만족하다 보니 예수님의 삶을 특징지었던 '순복'을 잃어가고 있다. / 인생에는 세 가지의 근본적인 것이 있으며 그 밑바탕에는 고통이 있다. 자연적인 고통, 거듭남의 고통, 거룩의 고통이다. / 기독교의 핵심은 '일'이 아니라 '관계'이다. / 제자의 삶에서 모든 작전과 계획은 하나님이 하신다.> 이것은 따로 메모해 놓은 문장들 중 몇 가지인데 예리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이 빛나는 문장력에서 영혼을 흥분시키는 힘이 느껴진다.

<도움의 장소>는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을 강하게 무장시켜준다. 책을 덮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해지라"는 외침이 깊은 곳에서 터저나온다. 나의 도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의 도움은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나는 그 전능자의 그늘 아래 있다!" 이 위대한 고백은 모든 소란으로부터 나를 지키며, 형용할 수 없는 평강과 자유로 충만하게 한다. 이 위대한 선포는 유한한 세상의 모든 헛된 이상을 태워버리며, 삶의 가장 높은 이상으로 나를 채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해지리라!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_ 시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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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지음 / 두란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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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간혹 거리나 지하철 안에서 이렇게 전도하는 분들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
분명히 맞는 말씀인데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관심하고 냉냉한,
또 때로는 불쾌한 시선이 느껴지면 내가 오히려 민망하고 괜히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좀더 세련된 전도전략이 필요하다는 논의와는 별도로,
"구원받으세요"라는 외침이 왜 그렇게 추상적으로 들리는지,
거리에 지나는 사람들과 겉돌아도 한참 걸돌아 보이는 그 '구원'이라는 단어가
세상 한가운데서 들려질 때는 내게도 한참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꽤 오래 전에 읽었던 김세윤 교수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작고 파란색 표지의 책이 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얼마나 유쾌하게 해주었던지
오래 그리워하다 만난 친구처럼 그렇게 반갑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이미 학부와 대학원까지 '신학' 과정을 다 마쳤을 때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씨름하며 학위 과정을 마쳤지만, 
신학적으로 논의가 되는 '구원론'이 내 삶에 실질적인 구원의 생명력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계시의 빛이 되지는 못했다.
경험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지만, 
실제 삶에서는 구원의 생명력을 '누리고' 사는 실패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때 나의 영혼에 하나님의 강력한 계시의 빛이 되어준 것이 바로 이 책,
<구원이란 무엇인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구원,
그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나의 영혼 가운데로, 
삶의 한 가운데로 직접 침투하여 들어오는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김세윤 교수님은 복음을 올바로, 포괄적으로, 그리고 실존과 연결하여
명쾌하게 설명해주신다.

"구원(redemption)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12).
 
이 첫 문장에서부터 "감기에 걸리듯, 우리가 죽음에 '걸려' 있다"는 설명이
얼마나 선명하고 확연하게 마음에 와닿던지,
마음은 흥분되기 시작했고 나는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는 우리가 구원받아야 하는 이유에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영적 상황과 
놀라운 구원 사건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대속적 죽음에 대한 성경적 해석과 적용, 
나아가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예정과 지키심까지 
성경에 기초한 탁월한 신학적 메시지를 쉽고 간결하고 명쾌하게 풀어준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비로서 내가 얻은 '구원'의 놀라운 비밀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구원의 은혜'를 목숨 걸고 지켰고, 증거했다.
불 같은 시험 속에서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생활과 생명을 포기할지라도 말이다.

요즘 우리는 너무나 풍요롭고 편안한, 그리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 세련되고 고상하고 지적인 신앙인이 되어가면서,
오히려 '구원'의 은혜에 무관심하고, 
구원의 원형적인 의미가 신앙인들 사이에서 희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영광의 주가 아닌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셔서
곧장 십자가를 향해 가신 주님.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를 밝히 가르쳐주시기 전에 따르는 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단 한 가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이 내 삶의 구세주 되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김세윤 교수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는 
구세주 예수님과 만나는 또다른 생명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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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눈물 - 한니발보다 잔인하고, 식스센스보다 극적인 반전
라파엘 카르데티 지음, 박명숙 옮김 / 예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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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는 제목에 있다!


이 책은 여러 모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킨다. <장미의 이름>이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이라면, <마키아벨리의 눈물>은 도시 내지 국가로 확장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이다.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한 의문의 살인자"는 잔혹할 수 있는 모든 살인 수법을 동원하여 보란 듯이 살인을 저지른다. 살해의 유일한 일관성은 신체 부위의 적출이다. 이것은 그의 범행이 살인행위 자체보다 연출에 목적이 있음을 나타낸다. 일종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살인자, 그래서 더 섬짓하다.

살인 사건을 추척하는 주인공은 우리에게 <군주론>으로 유명한 '마키아벨리'이다. 이제 갓 스무 살 청년이 된 마키아벨리.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시절의 마키아벨리와 실제로 극단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했던 도미니쿠스회 수사 사보나롤라, 피렌체에서 종신 최고행정관에 선출되었던 소데리니 등이 소설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처럼 역사적인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쓰여진 소설은 문학적 미학 외에도 역사와 실존 인물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작가의 시각이 '이야기'(story)에 '의도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 지식이 독서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더구나 이 책처럼 '미스테리 소설'을 읽을 때는 역사적 배경 지식이 작가가 설치해놓은 트랩이나 설정을 간파하고, 작가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는 강력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자체 이야기만으로도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소설의 장점이지만, 역사적 배경을 가진 미스테리 소설을 직접 추적하며 읽고 싶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마키아벨리의 눈물> 배경이 되는 "1498년 당시 피렌체는 50년간 4대에 걸쳐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가가 실권하여 추방당한 후 피렌체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프랑스, 로마교회, 신성로마제국 간의 세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언제 꺼질지 모르고 흔들리는 풍전등화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380). 

작가는 이러한 시절을 보내는 청년 마키아벨리의 '눈물'을 보여준다. 사악한 정치가로 기억되는 그의 이미지와 '눈물'은 이율배반적이다. 그의 눈물은 "목적만 정당하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키아벨리즘' 탄생의 양분이기도 하고, 또 그 '마키아벨리즘'의 원뜻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눈물은 끊임없는 외세의 위협과 국내 정치의 혼란 속에서 하나의 군주 아래 통합된 강력한 이탈리아 건설을 열망했던 마키아벨리의 꿈과 닿아 있다. 실제로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마키아벨리의 눈물을 훌륭하게 연기한다면 아마도 관객은 역사적인 '악인'에게 깊은 연민과 동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역사적인 증언에 의하면,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악한 이미지와는 달리, 자신의 영혼보다도 피렌체를 사랑했으며, 너그럽고 정열적이며 기본적으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마키아벨리의 눈물>은 15세기 피렌체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반영하며 권력의 속성과 비밀을 노출시키고 있다. 소설적 재미를 느끼기에도 충분한 미스테리이지만, 권력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오늘의 우리 상황에 대입하며 읽어도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한가지, '식스센스보다 극적인 반전'이라는 문구에는 크게 현혹되지 않는 것이 좋다. 나처럼 '극적인 반전'을 너무 염두에 둔 나머지 추리력을 총동원하여 작가보다 앞서 상상하고 결말을 예상하느라, 정작 '반적'에 맞닥뜨렸을 때는 오히려 '허무'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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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
정채봉 지음 / 이미지앤노블(코리아하우스콘텐츠)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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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생이여!


어떤 책은 읽을 때, 책 속에 내가 푹 잠기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 있다.
내 마음 안에 책이 잠기는 것인지, 내가 책 안에 잠기는 것인지 모를 그 강렬한 느낌.
정채봉님의 <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 이 책과 내가 서로 안에 그렇게 퐁당 잠긴다.

'나'라는 한 글자를 참 좋아했던 아버지를 기억하며,
정채봉의 따님이 "아버지가 남긴 글 중 오래도록 맑게 빛나는 글 몇 점을 가려 뽑은 것"이
바로 이 책, 정채봉 선집 <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이다.

시처럼 리듬이 있고, 곱고 맑은 소박한 언어로 쓰여진 이야기들이 어여뻐서 첫눈에 반했고, 
한 말씀 한 말씀이 지혜로워 깊이 호흡하며 읽었다.
지혜의 깊이가 깊으면서도 강요하지 않는 순한 글들이고,
언제고 반복해서 읽어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소중한 가르침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들은 '설교' 시간에 자주 듣던 말씀이여서 어리둥절 하기도 했다.
출처가 있는 유명한 예화는 제외하고, 출처가 없는 것 중에도 꽤나 유명한 글이 많다.
회자 되는 이야기를 모아 들려주신 것일까? 직접 지으신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느끼며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다 보면, 
느닷없이 '11월에'라는 글과 만나게 된다.
고운 이야기들 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는 정채봉님 자신의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 병원을 찾는 선생님의 불안한 이야기.
CT 촬영을 해보자는 의사의 말에 딸 '리태'를 불러 데이트를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리태야, 아빠하고 헤어져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지?"(73)
내 가슴에 덜컥 내려 앉는다.

그리고 입원을 하고, 아빠는 수술실을 향하고, 딸은 슬리퍼 두 짝을 들고 아빠를 따르고,
희미한 정신과 또렷하게 들리는 말소리, 중환자실, 마우스피스, 무서운 꿈,
다시 얻은 한 살, 진통제 주사, 병실, 책을 읽어주는 딸과 나누는 대화.

"아빠, 오늘이 일요일인데 생각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랑 같이 목욕 가고,
백화점 식품부에 가서 이것저것 일주일치 먹을 것을 한 아름씩 사왔잖아.
그리고 점심에는 회에 맥주 마시고 아빠는 흔들의자에, 
나는 소파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꾸벅꾸벅 졸던 것 말이야.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나도 알겠어."
나는 주스를 마시며 대꾸했다. 
"언젠가는 또 이런 말을 할 때도 있을걸. 밖에는 눈보가 치는데 
따뜻한 병실에 앉아서 아빠한테 책 읽어 주다 말고 지루해서 하품하고 
오렌지 주스 마시던 그때가 행복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노라고 말이야."(91)


내 마음은 생각을 멈추고, 표현하기 어려운 빛나는 눈물로 가득찬다.
명치 끝이 아프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다시 이어지는 어여쁘고 지혜로운 이야기들.
그런데 선생님이 "엄마......"를 부른다.
일찍 돌아가시어 기억에 없는 엄마를...
정채봉 선생님을 키워주신 할머니, 할머니의 삶, 
단숨에 숨 한번 거두어 버리면 말 것을 군대 간 손자의 얼굴 한번 더 보고 가시겠다고
큰 고통을 며칠이나 더 참고 견디다 가신 할머니.
그리고 네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신, '나를 버린' 아버지. 
자식의 학비 타령도 외면하신, '아버지, 당신 두고 보자'를 되뇌이게 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처음으로 면회를 오셨는데 철책으로 근무로 가버린 아들.
일본에서 삶을 마치신 아버지를 10년 간 외면하다, 그 유해를 고향으로 모셔오던 날.
맨 마지막 이야기 '한 인디언 추장의 메시지'까지.
책을 다 읽고도 나는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어른들에게 잃어버린 동심을 찾아주는 데 힘쓰던 2001년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맑은 영혼을 간직한 채 하늘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까지,
너무 아름다워서 시리도록 눈부시고 슬프다.

정채봉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귀하고 귀한 지혜는 생명의 환희, 인생의 아름다움이다.
한순간도 정성껏 살라 하시는 듯 하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19), 하시는 이 소박하고 청량한 한마디가 어찌나 정다운지 
눈물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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