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을 떠올리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 하나 아버지에게 충고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동을 거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젊은 연인에게 푹 빠져 있던 아버지를 제자리로 돌려놓지는 못하더라도 그토록 처참한 결과를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 P86

그런데 가는 도중에 누군가 뒤에서 아버지 머리를 내리쳐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인적이 드문 길이라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을뿐더러 아버지가 쓰러진 뒤에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줄알고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P88

"이러니저러니 해도 솜씨와 기술이 있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아버지는 이 오른손이 있는 한 밥은 굶지 않아.",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믿음직하다고 느끼곤 했다.
그런데 그 오른손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 P92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 나는 원망에 가득 차서 밤마다 이불 속에서 울었다.
그러다가 문득 저주의 편지가 떠올랐다. 내게 배달된 23통의 엽서. ‘殺’이라고 적힌 23명의 저주가 담긴 엽서. - P94

그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 처지를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숨기기는커녕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험담하는 일도 없어진다. 나와 이야기 나누는 걸 꺼리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집안의 치부를 재미있고 우스꽝스럽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철저히 우리 반의 어릿광대로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 P98

남자가 웃는 얼굴로 집 안쪽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한 후 걸음을 옮기자 문 안쪽에서 팔이 나와 문을 닫았다. 핑크색 스웨터를 입은 팔이었다. 나는 그것이 엄마 팔이라고 확신했다. 동시에 관두자는 생각이 가슴속에 번져 나갔다. 이제 엄마 곁에 내가 머물자리 따위는 없었다. - P107

‘무시‘라는 형태의 따돌림은 내게 육체적 고통은 주지 않았지만 정신에는 착실하게 상처를 입혀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의논할 상대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아파트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고, 산양 얼굴을 한 담임은 나와 엮이는 걸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P117

다만 내가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의지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어디 맘대로 해 봐. 여차하면 다 죽여 버릴 테니까.‘
살인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 아닐까 싶다. 나는 매일 살인을 상상했다.
단순한 몽상이 아니었다. 내게는 살인의 수단이 있었다. 책상서랍에 감춰 둔 그것, 바로 승홍이었다. - P122

가토 녀석들을 죽인다는 데 양심의 가책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살인을 실행하는 건 나 자신이 망가져도 좋으니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극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았다. - P123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살인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살인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동경하는 건 분명한 동기가 있고 살인의지가 지속적이며 냉철하게 실행에 옮기는 유형의 살인이었다. 브랭빌리에르 후작 부인이 바로 그랬다.
살인의 유혹은 강렬했지만 실행하려면 동기가 있어야 했다. 동기 없는 살인은 진정한 살인이 아니라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 P124

근처에 주차되어 있는 경트럭 뒤에 몸을 숨기고 있으려니 구라모치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위를 살피다가 화분 밑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돌아오는 내 머릿속에는 이미 살인 계획이 완성되어 있었다. - P134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구라모치를 죽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누군가를 독살한다는 계획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내 안에 살인 자체를 즐기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끈질기게 잠복할 수 있었다. - P135

구라모치에게 독이 든 붕어빵을 주지 않은 이유는 그가 저주의 편지 건에 대해 사과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독특한 화술에 말려들어 살의를 잃고 말았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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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안 그랬어요. 어머님 음식에 독을 넣는 짓 따위 죽어도 못해요. 아까 당신도 말했잖아요. 내가 그동안 부엌에 들어간 적도 별로 없다고요.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님 식사를 준비했던 사람뿐이에요."
흥분한 탓인지 얘기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 P52

살인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된 건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독약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독약을 사용하는 장면을 꿈꿨다. 나라면 이렇게 하겠어, 아니야, 이런 방법도 있잖아, 하는 식으로. 다만 그때 내게는 독약을 먹이고 싶은 상대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기분을 알고 싶었다. - P58

엄마가 정말로 할머니에게 독을 먹였는지를 판단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거기에 비소 같은 독극물을 엄마가 무슨 수로 손에 넣었을까 하는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는 장면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소금과 설탕, 조미료 등을 버리는 장면이다. 왜그랬을까. 그것들이 진짜 설탕과 소금 같은 것들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것들과는 다른 ‘하얀 가루‘였을까. - P60

부모님은 내게 하나의 선택을 강요했다. 아버지와 엄마 중 한쪽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미 이혼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 P61

아버지와 살기로 결정했다고 하자 엄마는 낙담이라기보다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냈다.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았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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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란 오목이다. 그것 역시 구라모치의 속살거림에 의해 눈뜨게 된 놀이였다. 물론 그러기 전에도 오목을 두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라모치는 내게 오목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 P25

어른들은 술이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의아했던 건 웃고 떠드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도 웃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아버지마저 어딘가 모르게 안도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역시 어른들은 시체라는 게 망가진 기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거라고 생각했다. - P35

사람이 죽는다는 건 별게 아니다.
그것이 할머니 죽음에 대한 내 감상이었다. - P35

"그럼 미네코가 큰어머니를 살해한 거나 마찬가지네요."
누군가 내뱉은 이 한마디에 모두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이,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은 지나치지."
이번에는 누군가 주의를 줬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왠지 즐기는 듯한 느낌이 묻어 있었다. - P37

"실은 그렇습니다. 음식에 매일 조금씩 비소를 넣어 먹이는 바람에 다지마 씨네 할머니가 죽었다, 이게 현재 나돌고 있는 소문의 내용입니다." - P45

"비소인가 뭔가 하는 독이 있나 보려고 뒤진 거잖아요. 형사 얘기를 듣고 내가 정말로 그런 짓을 한 거 아닌가 싶어서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라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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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말이지, 치과는 죽음과 무관하기 때문이야. 충치로 사람이 죽는 경우는 상상하기 힘들잖니. 하지만 중병에 걸린 환자의 배를 갈라 병든 부분을 잘라 내는 엄청난 수술을 한다고 치자. 환자가 살아나면 다행이지만,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의사의 심정이 얼마나 괴롭겠니. 그리고 자칫하면 환자의 가족에게 크게 원망을 들을 수도 있고 말이야." - P11

구라모치 오사무와 친해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무렵이다. 그와는 5학년에 올라와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가 내 인생을 바꿔 놓을 존재일 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P18

구라모치와 놀다 보면 용돈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와 노는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함께 있으면 끊임없이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신선함은 집에서 머물 자리가 없던 내게 위로가 되었다. - P22

하여간 우리 집 사람들의 마음은 별채에 누워 있는 할머니를 축으로 왜곡되고 일그러져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왜곡과 일그러짐은 그때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겨울 이른 아침의 일이다.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였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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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맨 처음 의식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1월이 지나고 봄 학기가 갓 시작됐을 무렵이라고 기억한다. 나에게 죽음의 체험을 안겨 준 사람은 할머니였다. 그때는 할머니 나이를 정확히 몰랐지만 후일 부모님에게 들은 바로는 70세였다고 한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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