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밖의 과거 > 발췌

서문

사실 이 이야기는 역사라고 불러야 하지만 필자가 기억에만 의지해 쓴 것이므로 엄밀히 말해 역사라고 할 수 없다.
과거의 일이라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과거에 발생한 것도 아니고, 현재에 발생한 것도 아니며, 미래에 발생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P11

서기 1453년 5월, 마술사의 죽음
생각에 잠겼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앞에 쌓여 있는 성 방어지도를 밀어놓은 뒤 자줏빛 가운을 단단히 여미고 조용히 기다렸다. - P13

황제가 성배를 가리켰다.
"그걸 어떻게 꺼냈느냐?"
헬레나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그녀가 정말 마술을 부릴 수 있다고 해도 황제 앞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겁에 질린 눈빛으로 황제를 쳐다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녀가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말했다.
"그곳이 제게는…… 제게는………… 모두 열려 있습니다." - P17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프란체스의 고성이 허공을 울렸다.
"나리, 제가… 제가 그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곳이라니?"
헬레나는 여전히 반쯤 감은 눈으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마치 어른이잡아끄는데도 마음에 드는 장난감 앞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 같았다. - P28

탑 2층에서 여자 마법사가 칼에 찔린 채 벽에 박혀 죽었다. 그녀는 인류역사상 하나뿐인 진정한 마법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기 약 10시간 전에 짧은 마법의 시대도 끝이 났다. 마법의 시대는 고차원 파편이 처음 지구에 닿은 서기 1453년 5월 3일 16시에 시작되었고, 파편이 지구를 완전히 떠난 서기 1453년 5월 28일 21시에 끝났다. 25일 하고 5시간이었다. 그 후 세상은 정상 궤도로 되돌아갔다. - P30

나이 많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녀의 엄마도 컴퓨터와 인터넷에 능숙하지 못했고 하드디스크를 포맷해도 데이터를 쉽게 복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양둥은 순전히 호기심으로 엄마가 삭제한 일부 파일을 복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 몰래 저지른 일이었다. 용량이 큰 파일들을 며칠에 걸쳐 읽은 뒤 엄마와 삼체 세계의 비밀을 알게되었다. - P33

엄마의 컴퓨터에서 본 정보에 의하면 우주에는 생명체가 적지 않다. 아니, 우주는 생명체로 꽉 차 있다.
그렇다면 우주는 생명체로 인해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그 변화가 얼마만큼 진행되었을까? - P38

닥터 장이 아니라 유명한 종양 전문가인 부원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윈텐밍은 그를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돈만 있으면 병을 고칠 수 있는 희망이 있는지.
나이가 지긋한 부원장은 컴퓨터로 윈톈밍의 차트를 찾아본 뒤 가만히고개를 저었다. 그의 암세포가 폐부터 온몸으로 전이되어 수술이 불가능하고 항암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 P50

청신에게 별을 선물할 것이다.
인 H - P52

스타 프로젝트가 처음 제안되었을 때는 UN이 태양계 밖의 일부 항성과 그 부속 행성의 소유권을 경매로 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 국가, 기업, 사회단체, 개인 누구나 경매에 참여할 수 있고 판매 대금은 UN이 태양계 공동 방위 체계에 대한 기초 연구에 사용하기로 했다. - P54

조금 전부터 유리벽 바깥이 술렁이더니 윈텐밍이 사망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안락실 문이 꽈당 열리며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안락 진행인이었다. 그가 병상 앞으로 달려가 자동주사기의 전원을 깠다. - P70

유리벽 바깥에 서 있는 한 사람이 윈톈밍의 세상을 밝혀주었다. 청신이었다. - P71

하지만 청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텐밍, 너 알아? 안락사법은 널 위해 통과됐어." - P71

"PIA가 삼체 함대를 향해 탐사정을 발사할 계획입니다."
모두 어리둥절해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 P78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지자가 유령처럼 주변을 떠다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4광년 밖 세계에 있는 ‘회의 참석자들도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만 그걸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날 때면 공포감과 함께 자신이 아주 작은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 P89

청신이 말했다.
"사람을 영하 200도 이하 초저온으로 급속 냉동시켜 발사하면 생명유지 시스템이나 가열 시스템이 필요 없어요. 1인용 우주선만 있으면 되니까 아주 가볍게 만들 수 있겠죠. 여기에 사람의 체중을 합쳐도 110킬로그램이면 충분할 거예요. 그 사람이 인간에게는 사망 상태지만 삼체인에게도 그럴까요?" - P94

눈부신 배경을 뒤로하고 서 있는 웨이드는 마치 검은 유령 같았다. 두 눈동자에서 나오는 서늘한 빛만 가물거리며 반짝였다.
그가 말했다.
"뇌만 보냅시다." - P99

웨이드가 말했다.
"삼체인이 초저온으로 냉동된 인체를 부활시킬 수 있다면 인간의 뇌도부활시킬 수 있을 겁니다. 부활시킨 뇌를 외부와 연결시켜 교류할 수도 있겠죠. 양자를 2차원으로 펼쳐 표면에 회로를 식각할 수 있는 문명에겐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뇌만 있어도 온전한 육체가 있는 사람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 사람의 의식, 정신, 기억, 특히 그의 전략이 모두 들어 있으니까요.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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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샤오밍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무너졌어요. 단결심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도시 전체가 통제를 잃고혼란에 빠졌어요."
그는 방금 지하 도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 P600

함대가 전멸하는 광경이 담긴 영상이 20천문단위 밖에서 세 시간 만에 지구에 도착했을 때 인류는 절망한 아이들 같았고, 세계는 악몽에 사로잡힌 유치원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고 모든 것이 통제 불능상태가 되었다. - P602

장베이하이는 다섯 함장들 너머 세 층으로 공중에 떠 있는 병사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동지들, 내가 자네들을 이 오래된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지금 모두가한뜻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닥친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고 앞으로 닥칠 미래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동지들,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 P603

장베이하이가 둥팡옌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 그의 눈빛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던 반석은 사라지고 이제 남은 건 해쓱한 공허함과 무거운 비애뿐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는 비정하고 냉혹하며 신중하지만 과감하며 강인한 남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과거의 무게에 짓눌려 허리가 굽어버린 초췌한 사람이었다. 그를 보며 둥팡옌쉬는 지금껏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연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 P611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인가?"
둥팡옌쉬의 목소리가 휑뎅그렁한 백색 공간에 메아리쳤다. 깊이 잠든사람이 가끔씩 하는 잠꼬대 같았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부가 죽거나 다 같이 죽거나. - P624

자연선택호가 마지막으로 지구로 전송한 영상 속에서 장베이하이는 1초 만에 모든 것을 파악했던 것 같다. 200여 년 동안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며 마음이 무쇠처럼 단련된 그였지만 마지막 결단을 내리기 전 그는 주저했다. 영혼의 전율을 억누르려 애를 썼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있던 한모금의 유약함이 그를 죽이고 자연선택호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 한 달간 계속된 어두운 대치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상대보다 몇 초늦었다. - P631

"그럼 그렇지!"
태양계 양쪽 끝에서 어둠의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뤄지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스창을 내버려둔 채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한달음에 마을을 가로질러 드넓은 화베이 사막 앞에 우뚝 멈추었다.
그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내가 맞았어! 내가 맞았다고!" - P635

가까이 다가오는 스창을 보며 뤄지가 말했다.
"다스 내 손에 인류를 승리로 이끌 열쇠가 있어요!"
"뭐? 낄낄..…….…."
스창의 비웃음이 뤄지의 흥분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믿지 못하겠죠. 이해해요." - P635

"물방울이 뭘 하러 오는지 알아요? 그놈의 임무는 연합 함대를 섬멸시키는 것도 아니고 지구를 공격하러 오는 것도 아니에요. 바로 나를 죽이러 오는 거예요. 그놈을 만났을 때 다스가 내 곁에 있는 건 바라지 않아요." - P636

시장이 스창의 어깨 너머에 있는 뤄지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반갑게손을 내밀었다.
"오, 뤄지 박사, 안녕하세요! 200년 전에 당신의 팬이었답니다. 면벽자 네 명 중에 당신이 제일 면벽자다웠지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뒤이어 그가 내뱉은 한마디는 뤄지와 스창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박사는 내가 이틀 동안 만난 네 번째 구세주예요. 아직 수십 명이 밖에서 더 기다리고 있지요. 하지만 난 더 이상 그들을 만날 기운이 없군요. " - P641

물방울이 태양을 향해 간헐적으로 강한 전자기파를 발사하고 있었다.
전자기파의 강도가 태양이 확대시킬 수 있는 임계치를 뛰어넘어 모든 대역의 주파수를 차지해버렸다. - P653

하인스가 뤄지를 향해 깍듯한 말투로 말했다.
"뤄지 박사, 방금 전 내가 UN 면벽 프로젝트 위원회의 연락관으로 임명받았어요. UN 면벽 프로젝트 위원회를 대신해 박사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UN의 면벽 프로젝트가 재개되었으며 당신이 유일한 면벽자로 지명되었습니다." - P657

모두의 시선이 뤄지에게로 쏠렸다. 뤄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가능성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제 저주가 효과를 발휘했나요?"
하인스와 조너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스가 말했다.
"항성 187J3X1이 파괴됐어요."
"언제요?"
"51년 전이에요. 1년 전에 관측됐는데 그 정보가 오늘 오후에 발견됐답니다. 지금까지 그 항성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 P658

"다스, 무슨 생각 해요?"
스창은 아까부터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놀라운 마술 쇼를 보고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이런 젠장! 환장하겠군!"
"왜요? 내가 정의의 천사라는 걸 못 믿겠어요?"
"때려죽여도 못 믿어."
"그럼 은하계 문명의 대변인이라는 건요?"
"천사보다는 낫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것도 못 믿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우주에 정의와 도덕이 존재한다는 걸 못 믿어요?"
"나도 몰라."
"다스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말했잖아. 모르겠다고 환장하겠다니까!"
"그렇다면 다스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이성적인 사람이에요." - P661

"맞아요. 우주 문명에 두 가지 공리가 있어요. 첫째, 생존은 문명의 첫번째 필요 조건이다. 둘째, 문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되지만 우주의 물질 총량은 불변한다." - P662

진정한 우주 문명 안에서는 다른 종족 간의 생물학적 차이가 ‘문‘, 아니 ‘계‘를 넘을 수 있어요. 문화적인 차이는 상상도 할 수 없죠. 게다가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의심의 사슬을 끊을 방법이 거의 없어요. - P667

"우주는 암흑의 숲이에요. 모든 문명이 총을 든 사냥꾼이죠. 그들이 유령처럼 숲속을 누비고 있어요. 길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살며시 치우고발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숨소리조차 낮추고・・・・・・ . 조심해야 해요. 숲속에곳곳에 사냥꾼들이 숨어 있으니까요. - P669

하지만 설원 프로젝트는 본격적으로 개시되지 않았다.
지구 세계와 함대 세계 모두 설원 프로젝트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중이 면벽자에게 바라는 것은 세상을 구원할 전략이지 고작 적의 도착을 알릴 수 있는 계획 따위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면벽자의 생각이 아니라 UN과 태양계 함대 협의회가 그의 권위에 기대어 추진하는 계획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 P679

사람들은 그가 하루 빨리 가족을 만나기 위해 큰 의미도 없는 일에 매달린다고 생각했다. 전 인류가 고대하는 인류 구원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뤄지는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항성급 출력으로 저주를 발사할 수 없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누누이 말했다. - P681

찬 비가 부슬부슬 흩날리는 가을 오후, 신생활 5촌의 주민 대표회가 한가지 결정을 내렸다. 뤄지를 마을에서 추방하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주민들의 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 P682

"내려주십시오."
남자가 다시 말했다. 뤄지는 그의 눈빛에 담긴 무언의 말을 읽었다.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건 당신 잘못이 아니지만 세상에 희망을 주었다가 다시 갈기갈기 찢어버린 건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야 - P686

뤄지는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겨우 추슬러 묘비에 의지해 일어났다. 그는 한 손으로 진흙범벅이 된 젖은 옷과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매만진 뒤 주머니에서 금속성의 기다란 물체를 꺼냈다. 가득 충전해놓은 권총이었다.
뤄지는 희푸르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지구 문명과 삼체 문명의 마지막 결전을 시작했다. - P690

"이제 내 심장의 박동을 정지시킬 것이다. 이 방아쇠를 당기는 동시에나는 두 세계의 역사에 가장 큰 죄인으로 남을 것이다. 두 문명에 깊은 사과를 전한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지자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을 안다. 너희들은 인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무언은 가장 큰 경멸이다. 우리는 지난 200년 동안 경멸당해 왔다. 원한다면 계속 침묵해도 좋다. 30초의 시간을 주겠다." - P692

"마지막 조건이다. 삼체함대가 오르트구름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 P694

당신은 두 달 동안 혼자 집에 틀어박혀 원자 폭탄에 장착한 이온 엔진을 원격 조정해서 그것들의 위치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우리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당신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무의미한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원자 폭탄들의 간격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 P698

나는 200년 전 지구로 경고를 보낸 감청원이다.

좡옌이 새된 소리로 외쳤다.
"어머나! 아직 살아 있다고요?"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다. 나는 오랫동안 탈수 상태에 있었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탈수 상태에서도 늙어버렸다. 그래도 내가 바라던 미래를 보았으니 더없이 행복하다.

뤄지가 말했다.
"존경스럽군요." - P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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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부인은 함께 오지 않았나요? 지원 부대의 가족들도 동면할 수 있었다고 들었어요."
"같이 오지 않았소. 날 보내기 싫어했지. 잘 알겠지만 그때는 미래가 어둡고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무책임하다고 날 원망하더군. 아이 엄마가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어요. 그리곤 바로 다음 날 지원 부대에 출발 명령이 떨어졌지. 가족과 작별 인사도 못 하고 왔어요. 추운 겨울밤에 가방 하나 둘러메고 집을 떠났소…………. 아마 날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 P519

탐측기의 목표는 태양계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머물러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 P529

이노우에가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둥팡옌쉬의 나지막한 탄식에 말허리가 잘렸다.
"오, 마이 갓! (Oh, my god!)"
두 부함장의 눈길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이 가닿은 곳은 장베이하이 앞에 떠 있는 조작 창이었다. 그 조작 창 위에 우주전함 자연선택호의 현재 상태가 나타나 있었다. 전함은 이미 무인 원격 조종 상태로 설정되어 있었고 4급 가속 상태로 돌입하기 전 승선원들이 심해 상태에 있는지 확인하는 단계를 생략한 뒤였다. 전함과 외부의 통신이 이미 차단되었고 전함이 최고 추진 단계로 돌입하기 위한 거의 모든 설정이 끝나 있었다. 이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연선택호는 최대 가속도로 우주 지도상에 설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 P531

장베이하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두 부함장이 아니라 둥팡옌쉬였다. 둥팡은 그의 눈빛을 보며 우주군의 휘장을 떠올렸다. 별과 검이 그 속에 모두 들어 있었다.
"둥팡, 내가 말했지. 당신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용서해달라고. 시간이 많지 않군." - P533

아시아 함대 총사령부는 그제야 이 믿기 힘든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연선택호가 도주하고 있었다!
유럽과 북미 함대가 아시아 함대에 강력한 항의와 경고를 보냈다. 처음에는 아시아 함대가 단독으로 삼체 탐측기를 저지하기 위해 전함을 출동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자연선택호의 비행 방향을 보고 그게 아님을 알았다. 자연선택호는 삼체 함대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P535

자연선택호의 속력을 광속의 100분의 1까지 끌어올리느라 핵융합 연료가 절반 넘게 소모되었다. 이제 자력으로는 태양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연선택호가 영원히 외우주를 떠도는 외로운 조각배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 P536

함대 사령관 반역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베이하이: 이탈하기는 했지만 반역은 아니지.
함대 사령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베이하이: 이 전쟁에서 인류는 반드시 패배한다. 나는 지구의 항성 간 우주선을 보존해 인류 문명의 씨앗이자 희망을 지키려는 것이다. - P537

정부는 일단 신중한 입장이었다. 정부대변인은 삼체 세계가 협상을 원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며 성급한 추측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사이에 UN과 태양계 함대 협의회가 긴급 정상 회담을 열고 협상 절차와 조건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 P543

함대 세계가 아시아, 유럽, 북미 세 함대의 항성급 전함 2,015대를 총동원해 연합 함대를 구설하고 한꺼번에 출격시키기로 결의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해왕성 궤도를 넘어온 삼체 탐측기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 P545

뤄지가 물었다.
"야스키 게이코 씨는요?"
"UN 본부에 있던 그 명상실 기억해요? 거기가 황폐해져서 지금은 관객들이나 가끔씩 찾아가지요………. 거기에 있던 철광석도 기억나요? 게이코가 그 위에서 할복자살을 했어요."
"아…………"
"죽기 전에 날 저주했죠. 나더러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 거라고 했어요. 나의 패배주의는 멘털 스탬프 때문에 절대로 흔들릴 수 없지만 인류는 승리했으니 말예요. 그녀 말이 맞았어요.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요. - P548

탐측기의 크기는 길이 3.5미터로 예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딩이도 처음 받은 인상은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수은 방울 같다는 것이었다. 탐측기는 아름다운 물방울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앞부분은 매끈하게 둥글었고 꼬리 부분은 뾰족했으며 표면은 거울처럼 반지르르한 반사경으로 되어 있었다. - P554

딩이가 다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우리가 탐사를 떠난 뒤 이 우주선, 그러니까 이 양자호가 심해 상태로들어갈 수 있소?"
장교들은 어안이 벙벙한 듯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함장이 물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딩이가 다시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함대의 빛을 받아 그의 백발이 더욱 하얗게 반짝였다. 그가 처음 양자호에 탑승할 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정말로 아인슈타인과 비슷해 보였다.
"음………. 어쨌든 그렇게 해도 큰 손해는 없는 거지? ………내 예감이 안좋아." - P560

물방울이 자폭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의 또 한 가지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군사용 탐측기라면 적에게 포획당했을 때 자폭해야 한다. 자폭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것이 삼체 세계가 인류에게 보낸 선물이며, 삼체 문명이 인류가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보낸 평화의 메시지라는 추측이 정확하다는 의미다.
세계가 또 다시 환호했다. - P564

"1000만 배로!"
대분자도 보일 만큼 확대 배율을 높였지만 현미경 창에 나타나는 것은여전히 반지르르한 반사 표면뿐이었다. 티끌만한 흠조차 없을 뿐 아니라 밝기도 육안으로 보이는 주위의 표면과 차이가 없었다. - P574

합 함대의 100만 명이 그 뜻을 곱씹었다. 그때 딩이가 불쑥 외쳤다.
"피해!"
두 글자의 낮은 외침 뒤에 그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찢어질 듯한목소리로 외쳤다.
"바보 놈들아! 빨—리—피—해!"
시쯔가 당황해서 물었다.
"어디로요?"
딩이보다 몇 초 늦었지만 중령도 상황을 파악했다. 그도 딩이처럼 절망적으로 외쳤다.
"함대 함대! 흩어져!"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였다. 강력한 전파 방해가 나타나 당랑호에서 송출되는 영상이 일그러져 사라졌고 함대는 중령의 마지막 외침을 듣지 못했다. - P578

물방울은 인류의 물리학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운동 방식으로 누구의 주의도 끌지 않은 채 제3우주속도의 두 배 속도로 인피니트호를 향해 날아갔다.
물방울은 인피니트호의 3분의 1쯤 되는 곳을 측면으로 뚫고 들어가 그대로 관통했다. 그림자처럼 아무런 저항력도 받지 않고 가뿐히 선체를 뚫었다. - P580

함대의 지휘관들은 이미 충격과 전율에 휩싸여 판단력을 상실한 뒤였다. 과거 200년 동안의 우주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고 갖가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모두 예상했지만 눈앞에서 전함 100대가 폭죽처럼 1분 만에 모두 폭발해버린 이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P583

이로써 인류가 보유한 우주 군대가 완전히 섬멸되었다.
물방울은 양자호와 청동시대호가 도주한 방향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가속했지만 곧 추격을 포기했다. 두 목표물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양자호와 청동시대호가 이 재앙에서 살아남은 생존 전함이었다. - P596

둥팡옌쉬가 마지막으로 장베이하이에게 경례를 했다.
"아시아 함대 소속 자연선택호입니다! 선배님께서 인류의 항성급 전함다섯 대를 지켜주셨습니다. 이 다섯 대는 현재 인류가 가진 우주 함대 전체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저희는 선배님의 지휘에 따를 것입니다!"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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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지가 동면에서 깨어났다. - P425

"몇 년 늦게? 그럼 적응하기가 더 힘들지 않겠어요?"
"아니죠. 아직 전시라서 사회의 관심이 우리에게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어요. 몇 십 년 뒤에 평화 협상이 타결되면 태평성세가 찾아오겠죠."
"평화 협상? 누구와?"
"누구겠어요? 당연히 삼체 세계지."
슝원의 마지막 말에 뤄지는 깜짝 놀랐다. - P430

얼마 후 회진 의사가 찾아와 몸 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뤄지가 의사의 질문에 다 대답하고는 면벽 프로젝트를 아느냐고 묻자 의사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물론 알죠. 우스운 옛날 일이잖아요."
"면벽자들은 다 어떻게 됐어요?"
"아마 한 명은 자살했고 또 한 명은 돌에 맞아 죽었을 거예요. 어차피 200년 가까이 지난 아주 옛날 얘긴걸요." - P435

"하지만 그때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게 있습니다. 지금은 강대국이없죠. 세계 모든 국가가 쇠퇴했으니까요."
"모든 국가라고요? 그럼 국가 대신 누가 강해졌습니까?"
"국가가 아닌 실체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함대죠."
뤄지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조너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주 함대가 독립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함대는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독립된 존재죠. 국가와 마찬가지로 UN 회원으로 가입했고요. - P446

"지금 이 시간부터 면벽 프로젝트는 종료되며 UN 면벽법도 폐기됩니다. 나는 태양계 함대 협의회를 대표해 빌 하인스와 뤄지에게 UN 면벽법에 의해 당신들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권과 관련 법률에 대한 면책 특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통보합니다. 당신들은 각자 자국으로 돌아가 평범한 국민의 신분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 P451

게이코가 몸을 돌려 하인스에게 말했다.
"면벽자 빌 하인스, 내가 당신의 파벽자입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하인스는 등 뒤에서 들린 그녀의 한마디에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 P455

멘털 스탬프는 사고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얻어진 게 아니야. 당신은 처음부터 그걸 만들려고 했던 거야. 그게 연구의 최종 목표야. - P456

"후회하지 않는 게 아니라 후회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나도 멘털 스탬프로 신념을 주입받았으니까요. 내가 사용한 명제는 ‘내가 면벽 프로젝트중에 하는 모든 행동은 옳다‘라는 것이었습니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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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구약성서를 다양한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수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을 통해 구약성서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이해해왔다. 구약성서는 고대의 문헌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한 민족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 책의 본문들의 배후에는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회적 배경이 전제되어 있는데, 바로 그러한 배경을 통해 본문이 형성되고 그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 P34

현재 많은학자들은 구약성서의 대부분의 본문들이 역사적 실재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학자들 대부분은 구약성서 내러티브 전승의 많은 부분을 포로기 이후 유대공동체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로 생각한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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