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친구는 원래 이렇게 단순한가? 아니면 나를 약 올리려고 일부러 단순한 척하는 건가. 내가 하는 모든 말은 그가 온몸에 두르고 있는 무신경함이란 갑주에 부딪쳐 그대로 퉁겨져 나왔다. 나는 종일 긴장한사람처럼 스스로가 몹시 지쳐 있음을 느꼈다. - P80
"그만해. 그만하라고." 학생과 소년들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지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척추결핵 소년들과 건강한 청년 사이는 심술궂은 냉담함으로 채워졌다. 학생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고 소년들과 공통의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누워 있는 소년들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 P88
나와 동생은 골짜기 아래쪽 우거진 덤불을 베어 내고 땅을 살짝 파서 만든 임시 화장터에서, 기름 냄새와 연기 냄새가 나는 보드라운 재를 나뭇가지로 헤쳤다. - P90
나와 동생은, 딱딱한 껍질과 두꺼운 과육으로 단단히 싸인 조그만 씨앗이었다. 너무 연하고 물러서, 조금이라도 바깥바람에 노출되면 금방 벗겨져 나갈 얇은 속껍질에 감싸인 푸른 씨앗이었다. - P95
우리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마을 젊은이들의 부재와 가끔씩 집배원이 가져다주는 전사 통지서에 지나지 않았다. - P95
"어떻게 할 거야? 저놈." 내가 용기를 내서 물어보았다. "읍내의 지시가 올 때까지 우리가 기른다." "길러?"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동물처럼?" "저놈은 짐승이나 마찬가지야" 하고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몸에서 소 냄새가 진동을 한다." - P104
읍사무소와 주재소에서는 검둥이 군인 포로를 처리할 방법이 없다, 현청에 보고하고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검둥이 군인을 보호할 책임은 마을에 있는 것이라는 게 서기의 주장이었다. 이장은 마을은 검둥이 군인을 수용할 능력이 없다고 펄쩍 뛰었다. - P119
냄비 위로 이마를 기울인 검둥이 군인의 굵은목덜미의 세심한 움직임이며 근육의 갑작스러운 긴장과 이완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가 착하고 온순한 동물같이 느껴졌다. - P121
검둥이 군인이 가축처럼 온순하다는 생각은 공기처럼 아이들 어른들 할 것 없이 온 마을 사람들의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 P125
우리가 얼마나 이 검둥이 군인을 사랑했는지, 그 아득하게 빛나는 여름의 오후 물에 젖은 무거운 살갗 위에서 빛나던 태양, 돌길 위로 떨어지던 진한 그림자, 아이들과 검둥이 군인의 냄새, 기쁨으로 갈라져 나오던 목소리, 그 모든 것의 충만함과 율동을 내가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랴? - P133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계시처럼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언청이와의 피 튀기는 주먹질, 달밤의 새 후리기, 썰매 타기, 새끼 들개, 그 모든 것들은 아이들을 위한 거다. 그런 세계는 더 이상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가 되어 버렸다. - P146
나는 갑작스러운 죽음, 죽은 자의 표정, 때론 슬픈표정이고 때론 웃는 표정인 그런 것들에 급속하게 익숙해져 갔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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