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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90년대 후반, 문화비평가라는 직함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전에 문화비평이라는 장르가 탄생했다. 문화비평이란 작업이 영미권의 특수한 환경에서 숙성된 문화'비평'이었던 반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문화'라는 대상을 비평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어렵게 태동한 문화비평은, 그야말로 대상에 매몰되는, 그래서 문화를 다루는 비평작업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문화비평가라는 직업은, 그 전까지 자유기고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들의 새로운 직함이 되었다.
2.
그래도 그렇게 문화비평의 황금기가 있었다는 것이, 지금과 같이 문화의 영역이 더 이상 생산을 멈춘 불모지의 시대보다 나았다는 생각이다. 당시만 해도 문화현상에 대한 다양한 비판적 담론이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의 생산자-향유자-비평가라는 삼각의 구도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디워'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문화에 대한 향유자와 비평가의 취향 차이는 서로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비판적 문화비평은 소란속에 거세되었다. 그렇게 남은 영역은, 향유자의 손해보지 않는 상업적 선택을 도와주는 문화상품에 대한 소핑호스트들과 문화적 소란을 인용하여 사회, 경제, 정치영역의 엄숙함에 '똥침'을 날리고자 하는 '문화 전사'만이 남았다.
3.
그런 점에서 이택광 교수가 내놓은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자음과 모음)은 어쩌면, 불모지가 된 우리의 문화비평이라는 척박한 토양에서 끈기있게 피워낸 성과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문화비평가란 뿌리에서 문제를 본다는 의미에서 '급진적 비평가'(11쪽)이며, 문화비평은 문화라는 형식을 통해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문화비평이라는 장르 자체가 곧 정치적인 것(13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화비평이야말로 일상에 파묻혀 있는 불편한 정치성을 발굴해서 제 몫을 찾아주게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글쓰기'(15쪽)라고 평가한다.
저자의 문화비평은 대개 신문지면을 통해서 공개되었으는데, 그런 특징을 반영하듯 100개의 꼭지에 달하는 글들은 3~4쪽의 짧은 내용이다. 하지만 기고된 글이 그렇듯 길이와 상관이없이 각각의 글이 수미일관하고, 완결된 논지의 형태를 지니고 있느니 가볍게 볼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표제들을 죽 읽어보면, 10년 상간의 일들이 기억의 뒤편에서 톡톡 튀어나오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4.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맘에 드는 글을 '강준만을 위하여'와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 그리고 '마빡이,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이다. 나는 각각에서 저자의 태도, 방법, 입장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준만을 위하여'에서 저자는, '움직이는 진정성'에 대해 언급한다. 90년대 자유주의의 급진성을 보여주었던 강준만이 끝끝내 자신이 지켜왔던 자유주의에 의해 무시되는 현실에서, 진정성이 위기에 처한 현실을 읽어 낸다. 하지만, 저자는 강준만이 주목한 진정성을 '인물에 매몰됨으로써,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진정성의 범주로만 인물을 봄으로써 강준만은 윤리적 차원을 떠나서 작동하는 구조적 지형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88쪽)고 말한다. 저자가 말한 강준만의 동맹 중 장졸에 불과했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저자의 지적은 정확하다. 강준만이 '인물과 사상'에 주목했다면, 이택광은 '구조와 문화'에 주목하는 것이고 나름대로 강준만의 자장 속에서 '반인간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는 어떻게 대중이 익수한 주제에서 점점 낯선 주제로 오버랩핑해가는지 보여주는 글이다. '보이지 않는자', '몫이 없는자'로서 신세경이 처한 위치, 그리고 달성할 수 없는 욕망이 어떻게 비극으로 달려가는지를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라는 문화적 키워드로 직조해낸다.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발언권이 없는 이들을 계속해서 침묵케 하는 통치이고 "이 통치의 기술은 신세경과 송두율 교수, 그리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외부자로 만들어버리는 현실의 논리 그 자체인 것"(196쪽 )이다. 아마도 송두율과 쌍용자동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신세경을 알고 있었다면, 저자가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역으로 송두율과 쌍용자동차를 알고 있지만 신세경을 모르는 이는, 왜 당시 대중들이 신세경이라는 극중 인물에 대해 몰입했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저자는 상이한 문화적 주체들이 '공진화'하고 있는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일종의 '감정의 공시성'을 짚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마빡이,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은 벤야민이 인용한 역사의 천사처럼 뒤돌아 있는 저자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에 따르면, 개그의 한 형식으로 마빡이는 새로울 것이 없는'재 브랜드화'의 성과이다. 하지만, 과거와 다르게 마빡이의 개그를 보고 웃는 것은 어쩌구니 없는 행위에 대한 웃음이 아니라 '조롱'이라고 분석한다. 우리를 웃기는 것은 이렇게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노동의 구조에 대처하지 못하는 출연자의 무기력이기 때문에 그 웃음은 "조롱"(263쪽)이다. 참 가슴아픈 분석인데, 신경제니 혁신이니 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소위 근대적 노동행위가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분석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창조성이라는 새로운 축적 패러다임을 위한 노력의 반작용으로서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아마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겪는 변화가 대개 이런 식의 토대를 무너뜨려가면서 집을 짓는 어쩌구니 없는 행위라는 조소가 아닐까.
5.
이 책을 읽다보면 참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평론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다른 장르처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인물의 인용으로 기를 죽이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좀 하면 대강이라도 알 수 있는 사회이슈로 풀어내는 글을 통해서 보지못했던 것을 보게끔 해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 "그것이 문화비평이다"라고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