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말이다. 혼자가 되면 말이다. 자꾸 괴팍해진단 말이다.
쇼핑을 해보고, 친구를 조금 사귀어보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해보고, 맛있는 걸 사먹어봐도 점점 괴팍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나봐. 심지어 난 이제서야 괴팍한 노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까지 왔다. 혼자서 외롭게 늙어왔던 거지.
[샤바케]라는 소설에 보면 아주 맛없는 과자를 만드는 청년이 등장한다. 이 청년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맛없는 만주때문에 매일같이 구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은 과자를 만드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어떻게해서라도 맛있는 과자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런 때에 욕은 욕대로 하면서도 과자를 사가는 한 노인이 있다.
사건은 노인의 죽음으로 인해 이 과자 만드는 청년이 범인으로 오해를 받고, 어쩌고..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맛없는 과자를 만드는 청년과 노인과의 관계. 청년은 아무리 독설을 퍼붓더라도 자신의 만주를 사가는 노인에게 정이 들게 되고 외로운 노인 역시 청년과의 대화를 위해 만주를 자꾸만 사간다. 맛없는 만주였지만 그 만주를 만드는 청년은 정말로 만주에 애정이 있던, 맛있는 만주를 만들려고 노력하던 청년이었으니까. 이 청년과 대화를 하는 시간만큼은 그 노인에게도 독설이 미안하게 느껴졌을 거다. 괴팍한 자신이 이런 따뜻한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을테고 그래서 자꾸만 찾아갔을테지.
괴팍한 노인의 살인사건 이후, 노인의 죽음을 진정으로 마음아파했던 사람은 유산에 눈먼 자식들이 아닌 맛없는 과자를 만드는 청년이었다.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만주를 사갔던 사람은 노인뿐이었으니까. 아마도 노인이 샀던 것은 만주 뿐만이 아니었겠지만, 청년은 그래도 노인의 빈자리에 상실감을 느낀다. 결핍된 사람들의 따듯하고도 마음 아픈 이야기.
시간강사의 자살이 요즘 인터넷 뉴스의 화두로 떠올랐는데 난 냉소를 감출 수 없는 내 자신에 실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것은 시간강사에 대한 대학의, 대한민국 사회의 처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의 문제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사실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의 고뇌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아니 그랬어야 했다. 시간강사에 대한 부당한 처우는 대학 새내기들 조차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안되지 않던가. 내가 봐왔던 젊은 교수들은 부티가 좔좔 흐르는 도련님이었거나, 적어도 부잣집 딸래미를 마누라로 두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울의 오로라를 두르고 있던 한 교수, 그러나 그 이면에 숨은 지칭, 시간 강사는 수업 뒷풀이 자리의 술값을 학생들 앞에서 걱정하고 있었고, 우리는 아 저 사람 저러다 자살하면 어쩌지, 라고 그를 걱정했었다.
만주를 못만들면 자기가 잘 만들 수 있는 과자를 만들면 된다. 아니면 아예 접고 다른 것을 찾아보던지. 독설을 퍼붓는 괴팍한 노인과의 소통에 의지해서는 이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앞선 이야기가 아름다운 건 배경이 에도시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떻게든 살 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 밥벌이의 굴레가 오히려 내 목을 죄더라도 그래도 헛된 희망보다는 덜 죄인다.
타인의 약속에, 사회의 관대함에, 미래의 불확실함에 헛된 희망을 걸어서는 안된다.
라고 과자도 맛있게 못만들면서 괴팍하기까지한 한 청년이 다시금 다짐한다.
(최근 고독에서 비롯된 나의 괴팍함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 '괴팍'이란 단어와 '노인'이라는 단어와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다가, [샤바케]의 떠올려보다가 갑자기 시간강사의 자살이란 사건이 문득 시공간을 찢고 나타나더니만은, 희망에 좌절하다가, 맛없는 과자 사진을 발견해내곤 행복해한다는 것이 이 페이퍼의 전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