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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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말은 너무 진부한가.  

재미있는 이야기는 읽어보고 느껴야 하는 것이므로 스토리에 관한 것은 여기서 잠시 접어두도록 하겠다. 이사람은 정말 이야기꾼이다. 대부분의 일본 소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느끼한 면모도 없지 않으나 이야기에 흠뻑빠지게 만드는 작가로서의 역량은 정말 대단하다. 옛날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쓰잘데기 없는 책이 출판되는 속도만큼이나 빨리 없어지는 시대이니만큼 작가가 정말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이 리뷰에서는 책을 읽으며 눈은 텍스트를 따라가나 딴생각으로 빠지게 되었던 부분을 집중적으로 써보겠다. 얘기했듯이 스토리 자체는 흠을 잡을 수가 없고, 칭찬을 해봐도 그저 무색할 뿐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방대한 자료와 여러 시점에서의 반복적인 서술은 지루하기 보다는 낯선 사건을 바라보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문화의 이해' 과목을 듣고 수많은 매체들을 접해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일본을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고 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아주 조금 알 듯하다. 

내게는 일본인 친구들이 꽤나 많은 편인데, 언제라도 도쿄에 가면 반갑게 나를 맞아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친한 친구도 몇 있다. 그렇지만 그 친구들의 공통적인 일본적인 캐릭터를 이 책을 읽으면서야 이해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 친구들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테다.  

어찌보면 굉장히 쿨한데 속으로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감정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부모님보다는 애인이 중요하고, 그런데 또 어찌보면 부모님에게 너무 의존적이고, 사랑에 빠진다는 걸 쉬쉬하고, 뭐든 가볍게만 생각하려 하고, 가끔 보이는 진지한 모습들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정말 알 수 없는 면모들이 이 책을 보면서 이해가 간다. 

사무라이 정신.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는 이 정신이 그들의 뿌리였던 것이다.  
미루야마 겐지가 그려내는 마초적인 사무라이 정신일 수도 있겠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영웅적인 면모를 존경해 마지 않으며,
아, 칼이든, 가족이든, 천왕이든, 가문이든 간에 믿는 바를 초지일관으로 따르며 자기 일신의 안위는 포기해버리는 이 정신이 그들의 뇌 구석구석 어디엔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 않았으며 우리의 마음 속 어디엔가 꼭 존재하고 있는 선비정신이랑은 아예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이게 웬만한 로맨스보다 더 마음을 친다.
낯선 것에 대한 로망이랄까- 일본인마저 낯설다는 이 새롭게 바라본 사무라이 정신은 이 책 속에서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런말을 하면 좀 이상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쟁이 일상화된 시절을 보낸 군인들, 자신의 목숨을 이미 내어 놓았기 때문에 적의 목숨, 심지어 동료의 목숨이라도 명령이라면 언제든지 끊어버릴 수 있었던 시절을 보낸 일본인들이 한국을 침략해서 강탈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테다. 

우리는 피해자로써 그들의 잔악한 면만을 보고 듣고 배웠지만, 연이은 흉년과 전쟁으로 황폐화된 토지에서 어떻게든 자기 휘하의 백성들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조선 침략을 강행한 쇼군들의 심정은 아마 의를 저버리면서까지 자기 가정을 지키고배불리 먹이고자 했던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이게 애국심을 위협하는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현 일본 정부의 오만함은 나도 싫지만,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지금 한국인의 왜곡된 반일감정에서 약간의 타협점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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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5-0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진짜 아사다 지로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한 레벨, 아니 한 세 레벨 쯤 위에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 '칼에 지다'만큼은 정말 요즘 유행하는 말대로 우월하죠.
이 책을 읽고 울었다는 말씀은 진부한 것이 아니라 솔직하신거죠 ^^ 저는 차마 리뷰도 쓰지 못했네요.
번역도 정말 좋죠? 이 책 읽고 양윤옥씨 블로그 찾아가서 인사드렸다는 -_-;;;

Forgettable. 2009-05-04 12:21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철도원]같은 분위기의 책을 별로 안좋아해서 아사다지로를 그냥 좀 제쳐놨는데, 이 책은 정말 우월해요 ㅋㅋ 그 시대를 온전히 살려낸 것만 같은 역사소설(특히 전기류)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스토리가 탄탄한 책은 정말 리뷰도 쓰기 어렵죠, 그래서 저도 리뷰랍시고 이런 잡생각만 끼적끼적ㅋㅋ

정말 오랜만에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책 읽은 것 같아요- ㅎㅎ

lazydevil 2009-05-0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작품이 신선조에 관한 이야기군요.
외국인 입장에서 볼 때 사무라이 정신은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때론 극우적인 시각으로 남용되는 일본 역사와 문화의 뿌리같은데,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살펴봐야 될 거 같군요^^

Forgettable. 2009-05-04 12:04   좋아요 0 | URL
오 신센구미를 신선조라고 하는거죠-!?
저는 사실 사무라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로망같은게 있었어요. 영화에서 잠깐씩 스치는 검객들이라던가 뭐 배가본드같은 만화나,, 미야모토 무사시는 정말 멋있잖아요 ㅠㅠ 전집도 다 읽었어요 ㅋㅋ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제 로망을 배제하고 사무라이 정신이 아예 새롭게 보여요.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일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더라구요.
 
스켈리톤 키 - The Skeleton Ke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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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서양의 대표적인 공포의 상징인 드라큘라나 피가 흩뿌려지는 미친호러물, 정신병자 살인마 류의 공포물은 공포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지 스토리를 인식하는 도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데, 가끔 너무 감정이입을 하면 피해자들이 너무 아플까봐 그걸 보는게 괴롭고 불쾌한 것이지 가해자들을 딱히 두려워하는 건 아니다. 

이런 내가 서양의 공포물을 보면서 처음으로 아연실색해하면서 '대박'을 백번 외쳤는데, 이게 바로 지금 내가 리뷰를 쓰고 있는 [스켈리톤키]다. 요즘 반전영화물에 빠져있다는 ㅇ오빠에게 추천을 받고 심심풀이로 주말함께보내기 친구로 당첨되었는데 오빠가 자기 인생 1위의 반전영화라고 꼽아도, 그 오빠가 데이빗 핀처의 팬이라고 해도  

'훗, 난 이제 왠만한 반전은 다 예상할 수 있어.' 

라며 코웃음치며 아침나절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건 정말 무섭다. 실로 오래간만에 햇빛 쨍한 대낮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경험이 아닐까 싶다.  

먼저, 
이건 부두교에 대한 이야기이다. 난 사실 부두교에 대해서는 아프리카의 종교인줄 알았는데, 영화 속에서도 설명하듯이 아프리카인이 믿고 있는 종교와는 달리 미국의 남부지방에서 새롭게 변형된 흑마술 부류인 것 같다. 아마 미국 남부지방에 흑인노예들이 많이 유입되어 왔던만큼 그 때 변질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에 대해선 정말 지식이 전무하므로 일단 패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때리고 부수고 찌르고 이런 차원을 넘어서(물론 약간 이런 호러의 성향도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은 영혼에 관련된 내용이다. 따라서 귀신을 무서워하는 나의 두려움 감지선을 자극할 수밖에- 

부두교에 관한 이야기는 브라운신부 전집 2권 [비밀]의 한 에피소드에서, 그리고 [거미여인의 키스]의 한 에피소드에서, CSI의 한 에피소드에서 한 3번 정도 접해본 것 같은데,(퇴마록에서도 나왔었나? 그러고보니 [세븐]에서도?) 그 때는 부두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거니와 깜짝 놀래키는 쇼정도에 불과해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참 무섭다. [거미여인의 키스] 안에서의 에피소드가 가장 비슷한 분위기인 듯 하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예쁜 주인공이 'I don't believe it!' 을 계속해서 외치는 장면이었다. 
아마 속으로는 'I don't wanna believe it!' 이었을거다.

나는 워낙에 미신을 잘 믿기도 하고, 상상 속의 세계를 좋아하고, 그래서 정신적으로 허약한 애니까 주인공이 이해가 가더라.
믿고 싶지 않아도 눈 앞에서 빤히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부정해버릴 수 있을까,
주인공은 솔직하고, 동정심도 많고, 어느 정도는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던 인생의 룰이 있었던 것 뿐인데
그로 인해서 나쁜 사람들의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영화가 무서운 건 부두교의 미스테리한 의식과 영혼에 대한 이야기여서일 수도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성정을 가진 주인공이 꼼짝없이 당하고, 그게 나한테 일어난 일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걸 보면 나는 정말 젊음에 집착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조금만 더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서라면 남은 상관없다는 지조라면,
내가 남을 희생양으로 삼지는 않을 지언정 적어도 희생양이 되는 경우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 영화를 보고 나서 부두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되살아나서 한 번 찾아볼까 생각했으나,
연예인에게 중독될까봐서 TV도 잘 보지 않는 나이기에 관심은 접어두었다. 

++ 그냥 뭐 사소한 장면, 스토리 이런거 쓸래야 쓸 수가 없다. 스포의 씨앗이 될까봐-
근데 나는 왜 책이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 이름을 다 까먹는걸까?
실제로 생활하면서는 얼굴이나 이름을 잘 잊어먹지 않아서 날 잊어버린 사람에게 약간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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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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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전에 르 클레지오의 소설을 읽으면서, 지루하고, 묘사 투성이에, 프랑스 특유의 멋부림이 들어있는 것 같아서 내스타일이 아니라고 단정지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이 르 클레지오의 책이 맞았는지 싶기도 하고 가물가물이다.  

'추억에 질식사하겠다' 

라는 구절이 있는 책이었는데 이 구절을 빼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제목도,작가도, 내용도- 뭔가 항해를 했었는데... 

지금은 좀 지겨워져서 안가지만 한때 자주가던 블로그주인이 헤세와 마르케스의 팬이어서 책 스타일좀 비슷한가 했는데 그분이 르 클레지오의 광팬이어서 궁금해서 [황금물고기]를 고르게 됐다. 내가 기억하던 그 '르 클레지오'가 아니길 바라며- 

책을 처음 펴들었을 때의 느낌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중반부에는 황석영의 [바리데기] 정도였다. 문장도 아름답고 심장떨리는 구절들이 많아서 내가 생각했던 책이 르 클레지오의 책이 아니었나봐- 라고 생각했으나, 중반부부터 힘이 급속도로 떨어져간다. 난 다시 생각한다. 역시 르 클레지오의 책이었군. 

* 라일라는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길래 모든 남자들의 욕망이 되는걸까? 

그녀는 모든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다. 강간 한번, 강간미수 몇번, 성추행 및 성희롱 일주일에 한번꼴 -_- [아름답다]라는 영화의 주인공의 모티브가 그녀였을까, 아니면 뿌리없는 흑인에게 인격을 부여하지 않던 그 당시의 문화였을까. 맹목적으로 그녀만 보면 달겨드는 남정네들을 보며 난 이렇게 마초같은 소설이 있나 싶었다. 

* 방랑 

언제 한 번 그녀가 주체적이었던 적이 있을까.
항상 누군가에게 끌려서, 혹은 누군가가 떠나야 하니까, 아니면 도망치듯 이리저리 떠돈다. 그렇게 떠밀리듯 살다가 결국 아주 나중에서야 고향이라고 하는데를 찾아서 엄마같은 할머니를 만나며 평화를 찾는다고 한다. 
뭐 주인공을 위한 주인공 캐릭터라고 해야 하나.

현대인들이 모두 이런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이런 비참한 삶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놨다고 해서,
이 작품이 훌륭하여 노벨상까지 받았다면
난 반댈세. 

난 보통 노벨상 받은 작가들에게 어느 정도의 신뢰를 느끼는데 이건 좀 아니다 싶다. 

비참한 삶은 있는 그대로 비참하게, 혹은 그 나름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게 예술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비참한 삶을 있는대로 비꼬아서 더욱 더더더더 비참하게, 혹은 왜곡된 미로 비틀어버리는 것은 예술가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작가의 권한으로 라일라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데까지 망가뜨려놓고 또 그걸 아름답게 한껏 포장할려고 애를 쓴다.
진실된 눈을 가장한 허풍이고, 가식이다.
어느 누구든 라일라의 성정을 가진 이에게 실제로 라일라의 인생을 살아보라고 해 보아라. 그녀는 그 삶을 견디기엔 너무 나약했고, 난 성장기가 아니라 한 인생의 체념기를 읽는 듯 했다. 잔인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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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4-13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씨의 말에 따르면 황금은 단단하지 않다고 합니다.
따라서 제목하나는 기가막히게 잘 지은 것이죠-

이상 순도 백프로 황금으로 된 장신구를 접해보지 못한 빈민의 오류 정정이었습니다.

위에서 뭔가 항해를 하는 소설은 [우연]이다.
우연히 서점탐험하다가 발견, 엄청 궁금해했었는데 발견해서 다행이다ㅋㅋㅋ
그러고보면 이사람 밀항에 로망있나..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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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은 봄밤에 사랑스러운 쉴라가 나오는 [한아이]를 보시며 마음이 따뜻해지셨다지만,
난 바람 쌩쌩부는 꽃샘추위 봄밤에 덜덜 떨면서 [다섯째 아이]를 읽으며 시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가족이데올로기의 허상 이라고,
이런 비평이 더 허구이다. 결국 가족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있었던 해리엇이 아니었다면 악마(?)같은 벤이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또 가족이데올로기로 한정짓기엔 작가가 노리는 범위가 너무 크다. 그게 뭔진 아직 잘 모르겠지만..

며칠 전 게릴라 극장에서 이오네스크의 [코뿔소]를 보았다.
코뿔소로 변해가는 주위 사람들을 지켜보며 나도 언젠가는 코뿔소로 변하지 않을까, 그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의 공포는 점차 내가 혼자 남게되지 않을까의 공포로 변질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코뿔소의 집단에 속하길 원하게 된다. 내가 너무나도 모르던, 그래서 폄하하던 코뿔소의 세계. 

베랑제는 애인마저 코뿔소가 되어버린 사실에 분노하다가, 차라리 나도 코뿔소가 되고싶다고 울부짖다가, 결국엔 저항하기로 한다. 
베랑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나약한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나약하던 베랑제가 저항을 한다? 얼핏 아이러니해볼 수도 있겠지만 베랑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항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다섯째 아이]의 해리엇이 어쩔 수 없이 벤을 돌보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너무도 나약해서 코뿔소가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코뿔소를 죽일수도, 내가 죽을 수도 없다.  

차라리 그 아이가 차에 치어 죽기를 바라면서, 그런 자신에게 죄책감과 증오심을 쟁여가면서 해리엇은 계속해서 아이를 지켜본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끔찍해하고, 아이가 언젠가는 떠나길 바라며, 아이가 망친 내 결혼생활이 돌아올 수 있을까란 희망을 놓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아이의 곁에 있는다.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가족을 우선으로 하고, 내 집단을 우선으로 하는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반항일까? 아니면 정상적인 집단에 속해있다는 안도감을 비판하는 것? 우리는 너무나도 집단 속에 안주한다. '공감'의 힘이 바로 그것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 속에 내가 속해 있다. 내 편이다. 내 의견에 공감해주지 않는다면, 일단 공공의 적이다. 그래서 '너의 잘못이다' 라고 단정지어버리고 관계를 지속하지 않는다.  

해리엇은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을 버려버리는 과정을 통해 점차 좌절한다. 분노하고, 우울해하고, 때론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지만 점점 그 집단의 이기적인 폭력에 잠식당한다.

   
  해리엇은 떠나면서 교장이 어떤식으로 자신을 지켜보는지 보았다. 말하지 않은 불편함과 공포마저 담은 그 길고 불안한 검열의 눈 - 그것이 또 다른 대화요, 진짜 대화였다.  
   

그렇다고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개인주의에 대한 찬양일까- 이건 또 아닌데,, 뭐 하나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말자는 것이겠다. 초간단-

어쨌든 난 자신을 '불쌍한 벤'이라고 말하는 악의 근원을 차마 악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었고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 아이가 느끼는 외로운 공포가 너무 안쓰럽고, 그 공포를 이해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엄마 해리엇의 노력도 대견했다.
작가는 인간에 대한 증오를 책 속 깊숙히 숨겨두었지만, 난 오히려 내 맘 속 깊숙히 숨겨두었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엄마에게 이 얘기를 해주었다. 엄마는, 그럼 애를 많이 낳지 말라는건가- 라고 갸우뚱하며 설거지를 하러 가신다. 머리 속을 좀 정리해보고자 이야길 시작했는데, 계속 혼란스러워하던 난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렇게 단순한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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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 브라운 신부 전집 1
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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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브라운 신부'가 나오는 추리소설 어쩌고 하길래, 약간 어두침침하고 퀘퀘한 지하실 느낌의 소설을 상상했었다. 기회되면 한번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는데, 중고샵에서 운 좋게 1권 [결백]을 발견하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오 그런데 이게 왠일, 예기치 않던 폭격 맞은 기분이다. 
사실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한 편씩 읽어나갈 뿐이었고, 시리즈를 쌔삥 책으로 모두 다 소장해야겠다는 다짐이 점차 확고해졌을 뿐이다.  

유려한 문체에, 작고 통통하고 못생겨서 거의 존재감이 없다고 거듭거듭 강조되지만 진짜 완전 엄청 멋진 브라운 신부와 괴도루팡을 연상시키는 변절한 범죄자 플랑보. 어디서 이런 멋진 상상력이 나오는지 사건 하나하나가 환상적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고인 단편을 뽑아보자면, 정말 눈물을 머금고 나머지를 떨구어 내야 하지만,, 플랑보가 가장 아름다운 범죄였다고 인정한 [날아다니는 별들] 에피소드와 [사라딘 공작의 죄악] 에피소드였다.
인간 본연의 성질을 꿰뚫는 브라운 신부의 예리한 시선이 빛을 발하고 범죄자들은 그 빛 아래 나체로 드러나지만 혹자는 당당히 그 사악함을 내뿜어 브라운신부를 아찔하게 하는 반면, 혹자는 회개한다. 인간이 참 나약하고 지저분하단걸 여실히 보여주면서도 그를 다 포옹해주는 작가의 사랑이 엿보인다.  

   
 

 플랑보, 그리고 이런 생활을 그만뒀으면 하네. 자네에게는 아직 젊음과 명예와 재치가 있지 않나. 그것들을 이런 일에 모두 소진할 생각일랑은 말게. 인간은 선한 일에 있어서는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네만, 나쁜 일에는 그 수준을 유지할 수가 없다네. 점점 더 내리막길을 향해 내달릴 뿐이지.(....)
자네의 내리막길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네. 자네, 비열한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었지?(....) 이건 시작일 뿐이지. 자네는 죽기 전에 이보다 더한 비열한 짓을 하고 말 거란 말일세.

 
 

[날아다니는 별들] 中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건, 소설 안에는 어느 이론서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가 담겨있다. 특히 좋은 소설 안에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중한 문장이 담겨있고, 난 그 문장과 감동을 남기고 간 선대의 작가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인간의 삶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부정확하고, 비틀려있으며 항상 변수를 염두해 두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중심을 꿰뚫고 있는 모든 것의 근원은 있기 마련인데, 나는 소설을 읽으며 그 근원을 찾아내는 탐험을 해왔다. 책 한 권을 읽으며 한 가닥이라도 잡아내면 그 독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데, 난 [결백]을 읽으며 여러 실마리를 찾아낸 듯 하여 자꾸 읽기를 멈춰야 했다. 

우리는 옛사람을 넘어설 수는 없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보다 못할 수도 없잖아??
라는 누군가의 자신만만함이 [결백]에서도 엿보인다. 이 사람. 월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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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9-20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 읽고갑니다. 저도 우연히 중고샵에서 1권 "결백"을 발견하고 엄청나게 빠져들었었죠. 비슷하네요ㅋㅋㅋㅋㅋ

Forgettable. 2011-09-20 09:58   좋아요 0 | URL
정말 멋지죠 이 책? 5권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는데 얼마 전 한권씩 다시 읽었었어요. ^^
다시 읽어도 그 감동은 여전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