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 마르케스 자서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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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는 하루 중 아무 시각에나 나를 데리고 바나나 회사의 풍성한 매점으로 물건을 사러 갔다. 거기서 나는 도미를 생전 처음 보았고, 처음으로 만져 본 얼음이 차갑다는 사실을 알고는 몸을 벌벌 떨었다.-131쪽

그제야 비로소 나는 벨기에 출신 노인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을 각색한 레비스 마일스톤 감독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보고 난 뒤, 자신의 개와 함께 청산칼리를 마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38쪽

"불쌍한 니꼴라시또는 성령강림절 미사에 참석하지 못하겠구먼."-138쪽

마르곳은 마지막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초점 잃은 멍한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 아무 말 없이 자리에만 앉아 있었다. 쉬는 시간조차도 그런 식이었다. 나는 당시만 해도, 마르곳이 텅빈 교실에 홀로 앉아 앞치마 호주머니에 감춰 온 집 정원의 흙을 씹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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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11-07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페이지 가량 읽었을 뿐인데 어딘가 숨어 있던 그의 이야기의 원천인 실질적인 경험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자하(紫霞) 2010-11-0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 자서전도 있었군요.
저는 산문 읽고는 그가 좋아졌어요~
근데 품절이라는 표시가...ㅠㅠ

Forgettable. 2010-11-08 03:48   좋아요 0 | URL
어떤 산문이요? 전 소설만.. ㅋㅋㅋㅋㅋ
이 책 사놓길 잘했어요. 하하
뭐랄까, 지금까지 제가 읽은 책들의 내용이 튀어나와서 읽기에 참 즐겁죠. 하지만 그의 작품을 많이 접하지 않는 사람들이 읽기엔 이게 뭔가 싶을 수도 있을듯. 번역상 비문도 많고요.

가넷 2010-11-0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야기꾼...ㅎㅎ

Forgettable. 2010-11-08 03:48   좋아요 0 | URL
정말요. ㅋㅋ 읽으면서 타고났다는 생각밖에 안들더군요.

기웃 2010-11-0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교보에서는 품절이 아니더군요. 평소 자선전보다는 평전을 더 좋아해서 생각지 않은 책인데, 마지막 발췌한 부분에서 단순한 기억의 얼룩이겠지만 마르곳이 왜 집 정원의 흙을 씹어을까? 못내 궁금해지네요. 흙이 아닌 정원에 방점이 찍힌 것 같아 뭔가 미스터리 분위기도 나는 것 같고요. 뽀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면 사서 읽어 봐야겠습니다...^^

-점점 쌓여져 가는 책들 때문에 책 읽기가 즐거움이 아닌 의무감이나 괴로움이 되는 11월이네요. 그래도 마르케스라 마음이 당기긴 하네요. 말씀해 주시길 바랄뿐..^^


Forgettable. 2010-11-08 03:59   좋아요 0 | URL
음..

첫번째 문장은 [백년 동안의 고독]의 첫문장, 두번째 문장은 [콜레라시대의 사랑]의 첫부분, 세번째 문장은 어느 단편의 첫문장, 언급하신 마지막 부분은 아마란타(흙먹던 애가 아마란타 맞죠?ㅋㅋ 기억이 가물가물 ㅋㅋ)의 어린시절을 상기하게 하는 부분이라서 발췌해 둔거에요.

그 아이가 집을 떠나와서 적응 못하고 말도 안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데, 알고보니 계속 흙을 먹고 있었어요. 저 부분을 읽을 때 이 아이가 떠오른거죠. 이 경험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거구나! 하고요. 이 두가지 이야기 모두 아이가 흙을 씹는 행동은 그리움, 외로움, 절망과 관련이 있는데, 정원에 방점이 찍혔다면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정원'의 흙을 먹는 행동에서 보여져서가 아닐까요.

저도 한 때는 그렇게 책을 쌓아두고 의무감으로 읽곤 했었어요. 하지만 한국 책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지금은 아까워서 못읽고 있습니다. ㅋㅋㅋㅋ

기웃 2010-11-08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마란타 하니 생각이 나네요. 결국 처녀성을 간직하게 되는 질투의 화신 아마란타. 지금 생각해 보니 우르슬라의 분신적 인물인 것 같기도 하고요. 돼지꼬리 저주 때문에 남편과의 관계에 저항하다 끝내 모두들의 우두머리/어머니가 되는 우르슬라에 비해 자기 저주?에 빠져 가족들의 보모가 되는 아마란타. 만약 아마란타가 가정을 이루었다면 우르슬라처럼 되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아, 지금 문득 든 생각인 데 흙을 먹던 아이는 친구가 죽자 우르슬라 부부에게 맡겨진 레베카 아닌가요?. 호세 아르카디오와 격한 사랑을 나누다 그가 죽자 진흙으로 온 집을 밀랍한 레베카?. 아니가요..?? 아무튼 흥미로운 얘기들이 정말 많지요..ㅎㅎ 첫번째 발췌한 부분은 소설 첫 부분에 나오는 아우렐리아노의 경험과 유사하고.. 어디 어디라고 말씀하시니 이 책이 마르케스를 이해하는 데 정말 중요한 책인 것 같네요.

Forgettable. 2010-11-08 12:38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억 확실한게 아니라서 책 정말 찾아보고 댓글 남기고 싶었는데, 책이 없어서.. ㅠㅠ 전 도대체 기억하고 있는게 뭘까요??!! ㅋㅋㅋ 레베카였군요. 그 꼬꼬마 아기가 나중에 꿀섹스를 하던 그 레베카였다니!
꿈같고, 환상같은 모든 이야기들에 작가의 기억과 경험이 녹아있다는 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아마란타와 우르슬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연관지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쓰신 걸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둘은 완전히 다른 캐릭터같지만 본질적으로는 깊게 연결되어 있었군요. 그러고보면 아마란타가 끝까지 처녀성을 간직하는 건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거에요.

오늘부터 여기는 섬머타임 해지되서 한시간을 더 번 기분이에요. 원래 시간은 9시 반인데, 8시 반이니까.. 기분이 좋기도 하고 ㅋㅋ 이런 기분 얼마 지속 안될테니 오늘은 책을 읽으며 번 시간을 써야겠습니다. ㅋㅋㅋ

가넷 2010-11-12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샀습니다.ㅋㅋ; 오래 전부터 살까 싶었는데... 당일배송이라서 오늘 오겠네요. 당장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그럼 도대체 왜 지르는 건지 모르겠다는;;; 계속 마음에 드는 책을 보면 지금 당장 안 사면 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해야되나요... 그렇더라구요,ㅠ)...;

Forgettable. 2010-11-15 13:00   좋아요 0 | URL
오 사셨군요!!! ㅋㅋㅋㅋ
아니, 도서관에 책이 널렸는데 왜 자꾸 책을 사시는 겁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긴. 근데 아무리 도서관에 책이 많아도 내 책이 아니니깐. 저도 그 맘 알아요. ㅠㅠㅠㅠ 특히나 이 책은 알라딘에선 품절이기까지 하니.. 자서전인데도 소설같고 재미있으니 틈틈히 읽고 얘기해요~~ ^^
 
American Rust (Hardcover, Deckle Edge)
Philipp Meyer / Spiegel & Grau / 2009년 2월
절판


Isaac's motherr was dead five years but he didn't stopped thinking about her.- 쪽

His glory days already past, a dozen empty beer cans at his feet.- 쪽

This is what it will be like being on the road, prioritizing the small comforts -simple life. Back to nature. You get tired of it you can always buy a bus ticket. Except then it won't mean anything -you could just buy another ticket and come back. The kid is not afraid. More to see this way -detour to Texas, the Mcdornald Observatory, David Mountains, nine meter telescope, Hobby Eberly. Try to imagine the stars through that -no diffrent than being up there. - 쪽

You aren't at the bottom but you aren't exactly at the surface, either.- 쪽

You are doing fine, he thought. Snap out of it.- 쪽

Wherever you go, you still wake up and see the same face in the mirror.-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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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10-09-20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와 닿는 말이 많아요. 그래도 마음에 확 들어버리는 건 역시 발밑에 뒹구는 12개의 맥주캔!

Forgettable. 2010-09-21 10:18   좋아요 0 | URL
그쵸? 이 책 정말 좋아요. 마음에 확 드는 문장이 진짜 많아요. ㅋㅋ 발밑에 뒹구는 맥주캔에서 저도 진짜 확 ㅋㅋㅋㅋㅋ

라로 2010-09-2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아요???아우,,,,책 그만 욕심 내야 하는뎅~~ㅜㅜ

저는 잘 지내고 왔는데 많이 외로왔어요??? 어제 읽은 책에서 애드먼튼이 나와서 저 혼자 막 반가와 했는데~~.^^;;

Forgettable. 2010-09-30 16:46   좋아요 0 | URL
네... 저 공공연하게 미국소설 싫어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원어로 읽어서 좋은건지 필립 마이어가 좋은건지 이 책 정말 좋아요..

저 요즘 한창 외로운데 어떻게 아셨어요?
어느 책에 에드먼튼이 나와요? 저도 좀 보게 :)

라로 2010-10-01 04:07   좋아요 0 | URL
[100인의 책마을]이라는 책에서도 나왔고 또 뭐드라>>ㅎㅎㅎ
100인의 책마을은 제가 읽던거 보내드릴까요??

Forgettable. 2010-10-04 10:34   좋아요 0 | URL
제가 나중에 한국가면 주세요. ^^ 배송비 너무 많이 들어요!!!
에드먼튼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하긴 해요.

2010-09-29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ljh 2010-09-30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래-_-

Forgettable. 2010-09-30 16:48   좋아요 0 | URL
너 영어공부 하라규 ㅋㅋ
 
여왕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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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하거나 잔인하지 않아서 읽기 편하고, 역시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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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어스맨 - A Serious M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A Serious Man.  

제목 부터가 심상치 않다. 심각한 표정의 남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 뭔가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있다. 왜 나한테만 안좋은 일들이 생기는 걸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남자에게 형이 울며 말한다. 너는 가정도 있고, 일도 있고, 모든 걸 다 갖고 있어. 하지만 신은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 심지어 카드도 내마음대로 못해. 남자는 이에 감화받아 카누를 싣고 형을 캐나다로 보내는 여행을 떠난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절대 받으려고 하지 않았었던 현금 뇌물을 형에게 노잣돈으로 건내며 남자는 현실과 타협하고 애물단지였던 형과 화해하며 새로운 인생을 다짐한다. 카누의 노를 저으며 강을 건너는 형. 그 때 '빵' 총소리가 나며 형이 총에 맞아 죽고, 저 쪽에 사냥을 좋아하는 이웃이 총을 들고 겨냥하며  외친다. 'There is another Jew!!' 

그렇다.  

꿈이었다. 

꿈에서 깨자 어둡고 허름한 모텔의 옆 침대에서는 형이 여전히 쓸쓸한 등을 보이며 앉아 있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인생은 고통이며 치유와 화해, 통합, 그로인한 성장 어쩌고 저쩌고는 뻥이라고 외치며 낄낄거린다. 결코 웃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웃을 수밖에 만드는 코엔형제의 능력. 진화된 슬랩스틱 코메디라고나 할까. 잘만든 영화는 관객을 치유해주어야해. 라고 자못 심각한 주름을 지으며 영화 이야기랍시고 해대는 내 뒷통수를 후려친다. 그런거 다 뻥이야!  

남자는 그가 계속해서 말하듯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점점 꼬여만 가는 일과 사랑과 믿음과 우정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조언자랍시고 랍비를 3명이나 만나보지만 일은 점점 더 꼬여만 간다. (심지어 첫번째 랍비는 하워드(빅뱅이론의)였다. 얼굴만 봐도 웃겨.) 하지만 끝이 없어보이던 심각했던 문제들은 하나씩 풀려가고 마침내 모든 일이 잘 해결된 것 같은 시점에서 또 다른 시련이 닥쳐오는데...... 

단순히 인생사 새옹지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가? 아니다. 그 어떤 일도 해결되지 않았다. 단지 고통의 연속일 뿐인 인생사에서 뽕맞고 고통을 잠시 잊었을 뿐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다. 그를 보며 웃을 일만도 아닌건 나의 인생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째 잘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다. 어쩌다가 주워먹는 뽕맞고 자란 당근 하나에 시도 때도 없이 후려치는 채찍질도 당연하게 감내한다. 정말? 미안하게도 정말이다. 이렇게 슬픈 사실을 이렇게 웃기게 얘기해주는 거 보면 정말 천재는 타고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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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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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들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전쟁에 길들여진 말들은 소리를 내야 할 때와 내지 않아야 할 때를 구분한다. 풀이 무성한 초원에서 자라난 말들은 달릴 수 있을 만큼 달렸고,, 달릴 수 없을 때에도 달렸다. 말들을 달리다가 엎어지거나 창에 찔려 무릎이 꺾였다. 피보다 먼저 거품이 솟아나왔다. 맹렬하게 뛰던 심장이 관성을 놓지 못한 채 여전히 가쁘게 뛰었다.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혹은 끊어진 뒤에도, 말의 몸에서는 아지랑이처럼 김이 피어올랐다.

 
   

첫 문장의 주어는 어느 영웅도, 어느 패자도 아닌 '말'이었다. 말이 쓰러지는 모습은 마치 목련이 지는 것처럼 덜컥하는 아픔을 자아낸다. 말의 최후를 이처럼 꽉 차게 묘사한 글도, 영화도, 그림도, 사진도 난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처음부터 녹록치 않은 독서가 될 것임을 직감했고, 고되던 독서를 겨우 마쳤다. 

내게 인내심은 쥐뿔만큼도 없다. 

여행은 길어야 한두달, 시험을 보면 벼락치기, 다이어트를 하면 한달 내에 10키로 감량, 인간관계의 지속 여부도 첫 만남에서 결정, 하물며 서재에 쓰는 글도 길어야 3시간이면 마친다. 무수한 충고에도 퇴고 따위 고려해본 적도 없다. 허나 타고난 성정에 반하는 것을 원하는 습성 때문인지, 이 오랜 기다림의 서사가 나를 무척이나 흔들었다.

   
 

 섭정왕이 세자의 어깨를 잡았다.
"나는 벗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합니다. 언젠가는 적이 될 것이나, 그것을 기다려야 하는것 또한 운명인 것입니다. 나와 세자가 그런 자리에 있습니다."
"그날을위해 8년을 기다렸습니다."
"......."
"대왕은 나의 적입니다." 

섭정왕의 입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나 미소가 사라진 뒤에 남은 것이 싸늘함이 아니라, 그렇게 보아도 된다면, 그것이 그리움이었다. 8년전 세자를 볼모로 호송하는 적장이었던 도르곤... 그가 조선의 벌판에서 새우던 밤을 기억하는 것이다.

 
   

자그마치 10년이다.  

기억력마저도 인내심 없이 사라져버리는 나는 이 10년의 세월을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렸다. 어느 누구에겐들 이 10년이 쉬웠을까. 사방이 적이었고, 언제나 죽음을 곁에 두고도 기다림을 알아 보좌에 오르게 된 도르곤에게도, 뜻은 달랐으나 언제나 세자의 옆에 서서 고독을 나누며 언젠가 꼭 올 세자의 시대를 기다리던 봉림에게도, 죽을 수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어서 살던 흔에게도, 온갖 무간지옥을 살면서도 그래도 살아야겠다던 만상에게도. 사연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마는 그래도. 그래도. 작가 김인숙이 풀어내는 이야기 속, 심양에 살던 조선인들의 사연이, 그들의 세월이 나는 참 아팠다.

그들 모두에게 기다림은 쉽지 않았지만, 기다림 끝에 얻은 영광도, 좌절도 모두 허망하다.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기다림은 그 끝이 허망하더라도 기다린 그 세월 때문에라도 영광이 되고, 빛나는 패배가 되고, 또다른 시작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과도하게 나뭇가지를 흔들어서 벚꽃잎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보다 무심하게 바람을 일으키는 나비 날개짓처럼 글을 쓴다. 그 바람에 읽는 내 마음이 울린다. 정돈된 문장 속에는 세자 저하의 몸 속에, 막금의 몸 속에, 흔의 몸 속에 가득찬 울음처럼 삐져나오려고 기를 쓰는 슬픔이 가득 차있다. 억지로 애국심을 조장하지 않고, 조선의 역사에 대한 사랑을 불러 일으킨다. 조선의 역사에 환멸 빼고는 무지밖에 없었던 내게 사랑과, 알고자 하는 욕심과, 다정함을 불러 일으킨다. 

빤한 신파에도 울음을 터뜨리는 나는, 계속해서 울음을 삼키고, 고인 눈물을 말리며 책을 읽었다. 그것이 [소현]에 대한 예의라 생각하며.  

비루하고 오만했던 나는 역겨운 조선의 역사를, 한심한 한국 현대문학의 현실을, 앞으로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나를 비웃기 위해 지금껏 이 소설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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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4-26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현, 궁금했는데~ 뽀님 리뷰 보니까 꼭 봐야할 거 같은 생각이 불끈!
첫 문장은 마치 김훈이 쓴 거 같아요. 남한산성에 이어지는 소현처럼...

Forgettable. 2010-04-2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다른 어떤 분은 김훈의 첫문장이랑 비교해두셨더라구요.
전 김훈 별로 안좋아하는데, 은근히 비슷한 문체인 것 같은데도 나름의 독특한 맛이 좋아서 이 책은 참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