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첫장을 펼치면 아주 무서운, 피를 흘리는 우부메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이 책은 지난달 다시 출간되었다. 엄청나게 보고 싶었는데,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서는 갖고 싶다고 안달하자마자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서 기뻐서 얼른 구매했다. 각설하고 리뷰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피투성이가 된 채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인 우부메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옮겨보겠다. 

   
 

회임을 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은 자를 그대로 들에 내다 버려, 태내의 아이가 죽지 않고 들판에서 태어나면, 어머니의 혼백이 형태를 이루어 아이를 안고 기르며 밤에 돌아다니는데, 그 아기의 울음을 우부메가 운다고 한다. 그 모습은 허리 아래는 피에 젖어 있고, 힘이 약하다. 

 
  (기이잡담집중)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전승이고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면 여러가지 의미로 전승되고 있는 우부메의 유래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그로 인한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책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사건이 우부메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도록 독자를 세뇌시키는 것이다. 나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은 아주 당연하게도 이 교묘하고 능청스러운 작가의 최면술에 걸려들고 만다. 장의 앞뒤로 나오는 주인공의 꿈도 그 세뇌에 일조했던 것인가 하고 지금에 와서 생각이 될정도로 작가의 최면술은 잘 짜인 그물같다.

[우부메의 여름]에는 한 여인이 20개월째 출산하지 못하는 기이한 사건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난처할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풀어낸다. 나는 괜히 좋아하는 작가인 교고쿠 나츠히코를 걱정하며 "이싸람 이거, 어쩔려고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는거야."라며, 행여나 실망하게 될까봐 발을 동동 굴렀다. 고약하게도 이미 머릿 속에서는 비난할 거리들을 잔뜩 쟁여두었으면서도 말이다. 경외하는 작가에게 실망하는 일은 의외로 짜릿한 일이 아닐까.  

문제는 그보다 더 짜릿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총 632쪽의 책은 사람을 절정까지 안달하게 해두고서는 정확히 469페이지에서부터 설명을 해주기 시작한다. 게다가 내가 은밀하게 숨겨둔 비난의 화살도 마지막 부분까지 가서야 "아, 그거?" 하며 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해 주어서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이 역시나! 하는 통쾌함과 그로 인한 패배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신화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이야기, 귀신이 없이는 이야기의 아귀가 절대 들어맞지 않을 것만 같은 이야기인데 이 작가는 그걸 이성적으로 설명해준다. 설득이 아닌 명쾌한 설명. 나처럼 감성적인 사람은 때때로 이성에 목말라 있을 때가 있는데 교고쿠 나츠히코는 그것을 채워준다. 물론 매우 풍요롭게. 전설 따위 필요없어진다. 영화 [셜록 홈즈]처럼 어설프게 흑마술을 이성으로 구멍 뻥뻥 뚫린 설명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 천재가 노력하면 이런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구나. 

이런 이야기를 장편으로 쓸 수 있는 작가를 등에 업고 있다는 것은 참 든든한 일이다. 책에 등장하는 고서점의 주인인 교고쿠도의 황당한 궤변은 기이하지만 엄청나게 논리적이어서 이 정도라면 리처드 도킨스를 깔 수 있겠다며 나는 그만 의기양양해지고 말았다. 마음과 뇌의 관계, 의식과 잠재의식에 관한 설명, 세상은 나의 안과 밖- 이렇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는 궤변들은 어느새 나의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지금 이순간 모든 기억을 갖고 태어난 것이라면?" 에 대한 질문과 그에 따른 의견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이것은 러셀인가 비트겐슈타인인가 누군가의 논리학을 완전히 자기것으로 만든 사람의 당당한 질문이고 사상인지라 작가의 역량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이 정도로 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끝내 심령적인 부분으로 남겨두는 것도 있어서, 사실 작가의 의도는 과학과 이성이 아니라 심령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는데 바로 남의 기억을 보는 미남 탐정에 관한 설명이 약간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괴이함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오히려 작가가 그렇다고 설명해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며 광신도처럼 믿고, 또 조금이라도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심령적인 부분이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마음을 쓸어내리게 된다.  

이 탐정에 관한 감상은 빠뜨릴 수가 없는데, 극에서 담당하는 정도가 사소한 인물이라도 그 캐릭터가 통통 튀어서 오히려 주인공들보다 더 만나보고 싶어진다. 이 에노키즈라는 탐정은 "뭐가 복잡하다는 건가, 자네는 정말 원숭이로군." 이라던가, "지금부터 올 손님 이름이 뭐랬나, 왜 그 구노인지 야쿠시지인지.."라고 사건 의뢰인의 이름을 3번째로 묻기도 하는 엉뚱하고 귀여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서양도자기인형처럼 생겼단다. 엉뚱한 매력의 귀족집안 미남탐정이라니! 영화에선 내가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아베히로시가 이 역을 맡았다고 한다.

 

한가로운 일요일에 햇빛이 쨍하고 들어오는 침대에 누워서 무겁고 글씨가 작은 책을 읽기 시작해서는 어느덧 해가 져서 어두컴컴해졌는데도 난 이책을 읽고 있었다. 이 작품은 하루와 같아서 아침의 어스름한 빛으로 시작해서 정오의 쨍한 햇빛으로 잠시 밝아졌다가 점차 어두워져서 나중에는 깊은 밤중에 끝나버린다. 책을 덮고나면 새벽의 어스름한 빛이 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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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고쿠도의 장광설은 정말이지 사람 혹하게 만들죠. 어엇 뭐지, 하려다가 어느 순간에 설득당해버리고 말아요. 좀 많이 다르긴 하지만, 그건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으면서도 느꼈어요. 표도르네 집의 요리사 스메르쟈꼬프(이름 외운거 아니라 책 찾은거임. 외우지 못했음)가 표도르와 논쟁하는데서도 그래요. 뭔가 이상한데 듣고 나면 어 정말 그렇군, 하게 되는거에요. 그래서 한번은 회사동료에게 이 말도 안되는 논리가 또 맞는 논리인것 같아서 설득당한다며 이야기해 주었지만 제 이야기로는 전혀 설득이 되질 않더라구요. 장광설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 듯. 각설하고,

우부메의 여름을 보면서 교고쿠도의 장광설을 처음 알게 되어 신선했다면 [망량의 상자]에서는 교고쿠도의 장광설에 마음을 빼앗겨 버려요. 교고쿠도의 장광설 때문에 우부메 시리즈는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재미있는 책이 되어버렸어요!!

Forgettable. 2010-01-17 23:36   좋아요 0 | URL
저 진짜 책 등장인물 이름 못외우는데. ㅋㅋ 스메르쟈꼬프라니 ㄷㄷㄷ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저도 읽어보고 싶은 책인데,ㅎㅎ

저도 그 장광설부분 2번 읽었는데 아직 습득하지 못했어요. 읽은 소설을 또 산 이유는 바로 그 장광설 부분 때문이에요. 생각날때마다 읽어서 제것으로 만들어야겠다며.ㅋㅋㅋ 근데 회사동료랑 그런 책 얘기도 하고 부러워요 ㅠㅠ

[망량의 상자]를 사서 쟁여둔게 이렇게 다행으로 여겨질줄이야! 얼른 봐야겠어요. 이러고 또 언제 읽으려나..( '') 요즘은 왠지 매일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며 술을 마시는 생활을 하고 있는중이라 책은 커녕 하이킥도 못보고 있네염 ㅠㅠ

비로그인 2010-01-16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일본 문학에 아는 바가 단 한개도 없는데.. 제가 관심있어 했던 도킨스, 러셀, 비트겐슈타인이 나오네요~
뭔가 좀 아는척이라도 하면서 인사드려야 되는데 아는 것이 없어 ^^ 그냥 첫 댓글 남깁니다.

늘상 인사 없이 들렸다가 처음으로 들립니다. 앞으로는 자주 노크 없이 들려 흔적 남기겠습니다 ('')..

Forgettable. 2010-01-17 23:39   좋아요 0 | URL
우와 도킨스, 러셀, 비트겐슈타인에 관심있어 하시다니- 철학을 공부하셨나요? 저도 살짝 맛만 본 사람들인데요. 그런 주제에 리뷰에 막 써먹었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일본 문학에 관심이 없으신데, 이런 허접리뷰를 상당히 꼼꼼히 읽어주셨나봐요. 고맙습니다.

써클님이셨죠? 바람결 전에요. ㅎㅎ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

2010-01-17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7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zydevil 2010-01-2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사고 해를 세 번이나 넘겼건만 아직도 읽지 않은 저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멋진 리뷰!!라구요...!!!

Forgettable. 2010-01-22 09:38   좋아요 0 | URL
리뷰가 길어져서 약간 중언부언/횡설수설 한 글이라고 생각하며 반성하고 있었는데 ㅠㅠ
캄사합니당 ㅋㅋ
 
연애 소설 읽는 노인 Mr. Know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케스가 쓴 노인과 바다+그리스인조르바 느낌. 색다르지 않지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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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는속눈썹! 일본마스카라1위] 데자뷰 파이버윅 마스카라
일본(주)엘솔 프로덕트
평점 :
단종


길어져서 투명화장에하면 예쁘나, 볼륨감이 없어서 스모키에는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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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4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5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그린비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후줄근하고 언제나 지쳐보이던 선생님이 있었다. 정교수도 아니고 부교수도 아니고, 시간강사의 이미지에 걸맞는 사람이라 항상 안쓰러워 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BMW를 끌고 다니고, 옷이 모두 명품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안도감이 든 건 왜였을까. 언제나 무기력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휴강도 밥먹듯이 했고, 나 역시 선생님의 목소리가 붕붕 허공에 뜬 것만 같은 수업시간에 졸기 일쑤였지만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고, 수업도 참 좋아했다. 

매 학기 선생님의 수업을 신청했고, 벤야민과 료따르, 아도르노, 라깡의 이름을 수도 없이 들어서 난 그들의 철학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세의 미학, 르네상스의 매너리즘, 해골과 썩은 사과, 시든 장미의 미학,대중문화의 복제에 대한 회의감 등 나의 미학적인 관점은 물론, 인생관도 선생님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밥 한번 함께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이게 판타지의 완성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도서관에서 책등을 쓸며 부유하다가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발견했을 때, 스트레스에 절어 잔뜩 찌푸리고 있던 나는 갑자기 선생님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대충 보니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져왔는데, 문장 하나 하나가 웃기고, 슬프고, 설레이고, 너무 좋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에게서 긍정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부분이 몇몇 엿보이고(이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아샤에 대한 애정, 러시아 말을 못해서 오는 고립감, 러시아의 대단한 추위, 미술관, 영화관, 연극에 대한 감상, 장난감 가게로의 매일같은 출근, 무기력감 등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고,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꼭꼭 씹고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페이퍼도 몇번 썼었는데, 그렇게 쓰다가는 책 한권을 서재에 다 옮겨놓을 것만 같아서 자제했다. 

벤야민의 일생은 왜인지 무력한 지식인의 표상으로 박혀 있는데, [모스크바 일기]는 내가 상상하던 벤야민의 모습과 일치하는 동시에 리뷰 서두에서 언급했던 선생님의 모습과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우울하고 약간 히스테리적이어서 무척 귀여운데다가 지적인 자극을 콕콕 주는 이 사람들. 벤야민의 말대로 우리는 그림이나 책, 영화 등 영감을 주는 대상에 감정이입하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의 담백하고 솔직한 문장들이 눈을 통해 들어와서 가장 알맞는 기억의 문을 찾아 '똑똑' 두들긴다. 대부분 다 읽고 반납했지만 소장할 예정이다.

+ 옮긴이의 말 중 로쟈님의 닉이 언급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 러시아에 대한 자문을 해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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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8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8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하 2009-12-09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당 번역자도 알라딘서재에 둥지(역자명으로 검색하면 나와요. 이미 알고 계시려나?^^;)를 틀고 계실 거에요. 이전에는 페이퍼를 가끔 올리셨는데 지금은 모르겠네요.

무력한 지식인의 매력이라 흠... 많이 삶에 대해 알수록 철저히 알수록 지식인이 되기도 하고 현실의 거대한 모습에 무력해지기도 하는 걸까요.

Forgettable. 2009-12-10 11:1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찾아봤더니 검은 바탕에 흰글씨라 읽기가 힘들;;
이시대는 행동하는 지식인이 필요한 시대이긴 하죠 ㅎㅎ

새벽 2009-12-1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우울한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현실에 너무 짓눌려 버린 사람.
그래도 그 속에서도 참 값진 사유를 많이 해냈으니 대단한 사람이죠..

Forgettable. 2009-12-14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인에게 벤야민 선집중 한권을 선물받아서 얼른 읽어보려구요. ^^

파고세운닥나무 2010-04-0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래 선집 1권 [일방통행로]를 읽고 기대보다 못해 실망 가운데 있었는데요...... 아포리즘은 잘 다가오지 않더라구요. 문학론과 비평이 좀 더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벤야민에 대한 전기를 먼저 접하니 기대감만 잔뜩 생기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의 인생이 드라마틱 하잖아요? 리뷰를 보니 [모스크바 일기]가 또 기대되는데요^^

Forgettable. 2010-04-08 18:08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님 서재에서 벤야민에 대한 실망을 엿보았어요. ㅎㅎㅎ
저는 선집중 2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아주아주아주 천천히 읽고 있는 중인데요 ㅎㅎ
어렵습니다..
전 어려운 책을 손에서 놓은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요. 학생 때 그나마 있던 인내심이 아예 바닥난듯..
어쩌면 읽지도 않아놓고 읽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고요;

[모스크바 일기]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파고세운닥나무님한테는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일방통행로]와 많이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 Inglourious Basterd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를 보기 전 잠시 [2012]의 대단한 예고편을 넋놓고 감상하다가- 
Forgettable: 야, 저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살아서 뭐해; 
H: 으으, 난 살고 싶어. 아플 것 같아. =ㅁ=

 
 

H는 무척 귀엽다.

 

- 유쾌한 살인
너무 귀여워서 대폭소하게된 친구의 말은 굳이 아직 개봉도 안한 [2012]까지 가지 않더라도 [바스터즈]를 보며 바로 공감하게 된다. 정말이지 아플 것 같은 장면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잔인한 영화일게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그 잔인함이 유쾌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개월 전 [적벽대전2]과 [트랜스포머2] 같은 영화들을 보며 '사람 목숨이 우습냐'며 엄청 불쾌해하던 내가 사람 죽이는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릴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런데 정말 웃기고 유쾌하다. 죽을 각오로 나찌의 머릿가죽을 벗겨내는 장면(어떻게 벗기나 궁금했는데, 헉!), 얼굴에 칼 난도질.. 사타구니에 총 난사..... 야구배트로 머리통을 날리기, 대학살, 헉 소리나게 무섭지만 보는게 괴롭지 않다.  

- 화려한 기교
그 이유는 틀에 박히지 않은 촬영기법과 음악선곡에 있었다고 본다. 칼싸움에 포비아가 있는 내가 [킬빌] 원투를 연달아 보며 신나했던 전적으로 보아 난 타란티노의 영화와 코드가 맞는 것 같다. 슬로우하게 총이 난사되는 장면이 조용한 클래식과 함께 흘러가고, 로맨틱한 음악을 배경으로 피를 흩뿌리며 죽는 빨간 드레스의 여주인공, 이런 장면과 음악이 뇌리에 선명이 박혀있다. 물론 마지막 장면을 빼놓을 수는 없지만 여기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예전에 흥미롭게 봤던 [에릭 니체의 젊은 시절]에서도 등장했던 기법인데, 컷을 잠시 멈추고 코믹한 나레이션이 나오는 것도 재미있었고, 광각렌즈의 왜곡된 시각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2인자이자 문화장관인 괴벨스와 그의 통역사와의 섹스신을 찍는 카메라의 시선이 독특해서 기억에 남는다. 눈이 즐겁고 귀가 즐거운데 도덕관이나 역사가 대수일까, 마냥 신나게 때려부시고 죽이자! 

- 탄탄한 연기
타란티노와 브래드피트! 라는 조합은 정말이지 매혹적이지 않을 수가 없지만, 조연들도 정말 대단하다.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다 아는 유명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이번에 칸에서 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크리스토퍼 왈츠의 연기력에는 기립박스라도 쳐주고 싶다. 이 배우가 맡은 한스 란다는 새로운 캐릭터의 지평을 열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던 캐릭터를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이제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생각되는 시대에 타란티노와 크리스토퍼 왈츠는 정말이지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심장을 톡톡톡 건드리며 몸의 곳곳에 숨어있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만 같다.  

브래드피트는 아주 딱 들어맞는 멋쟁이 역할을 맡았다. 여전히 매력적이고, 특히나 게임에서나 들어봤음직한 솔져 액센트는 귀에 짝짝 달라붙는다. 아름다운 복수의 화신 쇼사나의 웃음소리를 잊을 수 없을 것이고, 찌질한 나찌들, 얼굴이 너덜너덜해질때까지 총을 쏘는 Bear Jew, 무지 멋진 달리기를 선보여준 누구,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액센트가 특이하지만 3을 잘못 표시하던 누구, 틸 슈바이거.....♡, 누구, 누구, 누구하나 빼면 안될정도로 촘촘하게 잘 짜여진 영화다.  

이 모든 것이 내새끼마냥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은 뭐니뭐니해도 이야기를 끌어가는 타란티노의 연출력이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쌩뚱맞은 2개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다. 클라이막스에 가서 만나긴 만나는데, 계속해서 독자적으로 펼쳐진다. 그렇다고 물과 기름처럼 따로노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양초를 만들 때 2개의 색깔을 넣어서 염색했을 때처럼 조화롭고 화려하지만 각기의 개성이 살아있는 것만 같다. 지적인 욕구에서부터 미적 욕구, 짐승의 욕구까지도 다 충족시켜준다. 요즘 너무 착하게 사는 것에 사로잡혀 있었던건지. 

올해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신나고 재미있었던 영화였고, 2009년도 이제 2달도 안남았으니 가이 리치의 [셜록 홈즈]가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는 이상 아마도 2009년 나의 영화로 남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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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9-11-09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죽는 건 무섭지 않아요. 고통이 두려울 뿐^^ 유아적이죠 ㅎㅎ
(본편 리뷰는 안읽고 박스 안 예고편 리뷰만 읽었습니다^^; 영화 보고 읽을려구요.)

Forgettable. 2009-11-09 16:57   좋아요 0 | URL
그렇게 생각하는게 유아적인거군요 ^^; 저도 마찬가지로 죽음보단 고통이 무서워요 ㅎㅎ
리뷰는 타란티노 예찬이라 안읽으셔도 무방합니다 ^^

뷰리풀말미잘 2009-11-0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피트.. ㅠ_ㅠ

Forgettable. 2009-11-09 16:58   좋아요 0 | URL
완전 하트 뿅뿅!!!
근데 다른 멋있는 배우들도 엄청 많이 나와서 두각을 나타내진 않아요!

드팀전 2009-11-09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이영화 보고 왔어요.^^ 전 총점 상 그렇게 좋진 않았는데... '폭력은 어디에나'라는 타란티노의 태도가 희극화된 역사적 스크린을 통해-과거 타란티노의 영화들은 역사성이 없잖아요-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과거와 좀 다르더군요. 전체적으로 블랙코미디처럼 웃겼어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관 씬이었는데...실재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남는 폭력이 두 번 변주되는 지점이 인상적이더군요. 하나는 이미 간 두명 즉, 독일의 전쟁 영웅의 살육장면과 텅빈 스크린의 연기 속에 흐릿하게 영사되는 쇼사나의 영상. 폭력이란 것이 그 실체와 분절적일 수도 있어보이고,또 의지 자체가 하나의 폭력적 현상일 수도 있어보이고. 악역을 맡은 독일 장교 아저씨의 위악적 캐릭터가 괜찮더군요

Forgettable. 2009-11-09 17:19   좋아요 0 | URL
아,,+_+ 드팀전님, 이렇게 허접한 리뷰에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ㅎㅎ (영광입니다. 팬이에요!)

이 영화 오늘 보셨군요. 전 타란티노의 영화를 볼 때 딱 두개 기대합니다. 몰라서 지나쳐버리는 과거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와 유쾌함이요. 그래서 영화에 무자비하게 난무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평소에는 폭력적인 영상을 즐겨하지 않는데, 이 영화는 폭력을 폭력으로 생각하지 않게끔 하는 능력이 놀라워서 이 부분에 점수를 후하게 준 것 같습니다. ㅎㅎ
실체가 사라지고 나서도 남는 폭력, 의지 자체가 폭력적 현상일 수도 있다는 점, 몇마디에서 많은 걸 생각하게 됩니다. 또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지만 ^^;

한스 란다는 악역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였어요. 왠지 신나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