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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테마는 뭘까요?
타임머신을 타고 환상적인 시간여행을 할 수도 있고 사람보다 더 똑똑한 로봇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역시 가장 신나는 건 우주선을 타고 낯선 외계로 나가 기기묘묘한 외계인들을 만나보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이제껏 여러 SF영화나 소설들을 통해 수많은 외계인들을 접해왔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거의 대부분은 서양에서 수입된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외계인이나 외계 사회를 묘사해보려는 시도는 서양문화권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지요.
그래서 근대 이후의 서구문학사를 살펴보면 외계인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심심찮게 눈에 뜨이는데, 이들의 묘사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외계인관(觀)의 변천사는 우리 인류가 어떻게 ‘바깥 우주(outer space)’를 인식해왔는지 알아보는 데 적잖은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서구 문학사에서 17,18세기경부터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등장한 외계인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외계인의 옷을 입은 지구인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의 행동이나 말도 역시 우리 인간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죠. 그러다가 지구상의 생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태적 특징, 지구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의식세계와는 전혀 다른 외계인이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입니다. 외계의 환경과 외계의 생물들을 과학적으로 추측하고 상상해보는 일은 당시 라마르크와 다윈 등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된 진화론에 힘입은 바가 컸지요.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외계인의 묘사는 먼저 프랑스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까밀 플라마리온의 논픽션 <현실 세계와 상상의 세계(1864)>는 외계인의 개념을 사실상 최초로 대중화시킨 저작으로 꼽히며, J. H. 로스니의 <무한의 항해자들(1925)>에서는 인간과 외계인의 사랑이 등장하기에 이릅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여섯 개의 눈이 달리고 다리가 셋인 화성인과 연애를 한답니다.

당시의 프랑스 작가들이 외계인을 묘사하는 태도는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호와 호기심이 섞인 따뜻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라마르크나 베르그송 같은 프랑스의 진화론적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외계인의 개념을 통해 인간 자신을 인식하는 새로운 접근방법들을 개척하려 했던 것이죠.
한편 다윈의 진화론 중에서도 적자생존설(適者生存說)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영국에서는 외계인들 역시 인간의 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SF의 고전인 H. G. 웰즈의 <우주전쟁(1898)>은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르는 화성인(사진 위 왼쪽)을 등장시켜 그 뒤 적대적인 외계인상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 작품은 나중에 미국에서 오손 웰즈가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하여 방송하는 과정에서 청취자들이 실제 상황으로 착각, 한바탕 대소동을 일으켰던 기념비적인 에피소드로 더욱 더 유명해졌지요.

지구인 영웅을 위한 조연으로 나서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이른바 ‘펄프 매거진(pulp magazine)’으로 불리는 싸구려 대중잡지들이 전성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잡지들을 통해 수없이 많은 SF작품들이 발표되었는데, 외계인은 통속적인 ‘우주 활극(space opera)’의 조연으로 전락하여 지구인 영웅 만들기에 일조하는 역할이 대부분이었지요. 191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의 연작소설 <화성>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지구인 주인공이 화성에 가서 화성인들을 거느리고 다른 화성인 악당들을 무찌르며 화성의 공주와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사진 오른쪽)입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E. E. 스미스의 <렌즈맨> 시리즈는 천사와 악마의 고전적인 선-악 대비 구도를 대립되는 두 외계 종족으로 형상화시켜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역시 지구인들이 주인공 영웅으로 등장하고 외계인들은 모두 조연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이 ‘외계인’이란 개념 자체를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게 각인시킨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20세기 초에 서양에서 대중적으로 정착된 외계인 개념은, 그 뒤로 전 세계의 SF작가들이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더욱 더 깊은 차원으로 탐구해 들어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영상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외계인의 생생한 묘사는 책에서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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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미래를 창조한다
위의 사례는 SF작가의 과학적 상상력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남들과 똑같은 조건 하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만을 가지고 SF작가는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셈입니다. 이렇게 되면 SF는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차원이 아니라 미래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미래를 예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직접 창조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SF작가 자신이 예언가가 아닌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남은 일은 SF작가의 창조물을 누군가 현실 세계에서 보고 그대로 만들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지요.

세계 최초의 산업용 로봇 제조회사는 1962년에 미국 코네티컷 주에 설립된 ‘유니메이션’사입니다. 당시 제너럴 모터스 자동차 공장에 설치된 세계 최초의 산업용 로봇이 바로 이 회사 제품이었지요. 오늘날 전 세계의 산업용 로봇 시장을 형성하고 로봇공학의 물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데 이 회사가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은 두말할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사장 조셉 엥겔버거는, 대학생 시절에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단편 「나는 로봇(I, Robot)」을 읽고 로봇의 가능성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970년대 들어서 일본 회사들이 이 분야에 대거 진출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미국 산업용 로봇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점유율이 크게 높아졌는데, 당시의 일본 기술자들은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 로봇을 보고 자란 세대였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의 ‘아톰’이 미국의 아시모프 로봇(사진 오른쪽)을 밀어낸 셈이라고나 할까요?

어쨌거나 SF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한다는 점을 잘 유념하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SF를 쓸 때 혹시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SF의 과학적 상상력이 먼저 시대를 앞서가면, 나중에 현실에서 누군가가 그걸 보고 실제로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까요. 이러한 무제한의 과학적 상상력이야말로 SF의 가장 소중한 원천입니다.

SF의 공공의 적(?)
이제 SF작가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은 때때로 과학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창조적인 영역에까지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겠지요? 게다가 그런 과감한 상상력이 과학자들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SF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설정들을 두고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어 버리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를 쓴 아서 클라크는 세계적인 SF작가이자 미래학자이기도 한데, 그는 뛰어난 과학자들조차도 때로는 완고한 보수성을 고집하여 오히려 과학기술 발달에 장애가 될 때도 있음을 지적한 바 있지요.
예를 들어서 기관차나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 학자들은 ‘시속 30km만 넘어가면 사람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질식하고 말 것이다’라고 엄숙하게 선언했다고 합니다. 또 20세기 초반까지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확신에 차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발명하려는 ‘바보 같은 사람들’을 비웃으며 하는 말들이었지요.
당시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사이먼 뉴컴은 대표적인 비행기 불가론자였는데, 그의 생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트 형제가 시험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그러자 뉴컴은 ‘비행사 한 명 정도의 무게 이상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고 하지요.
우주여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꽉 막힌 과학자들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영국 왕립 천문대장을 맡았던 리처드 울리 박사는 ‘우주여행이란 허튼소리’라고 코웃음을 쳤던 인물인데, 바로 그 다음 해에 소련에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사진 아래 왼쪽-기념우표)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서 클라크는 이상과 같은 예들을 들면서 ‘저명한,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과학자가 어떤 것이 가능하다, 라고 말했다면 그건 거의 옳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라는 상당히 시니컬한 발언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면서 ‘아주 발달된 과학기술은 마술과 구별이 안 된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지요.

우리는 SF영화 등을 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장면들이 이러저러해서 과학적으로 엉터리다, 불가능하다, 라는 얘기를 접할 때가 많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SF적 설정을 이용해서 학습 효과를 얻으려는 교육적 수단의 한 방법일 뿐이지, 결코 SF 자체의 좋고 나쁨을 따지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SF는 SF대로 그 상상력을 마음껏 즐기고, 그와는 별도로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는 또 그것대로 재미있게 따져보며 토론하면 되겠지요.

과학기술을 넘어서는 SF
SF가 창조하는 것은 사실 과학기술적 미래상뿐만이 아닙니다. SF에는 과학기술적 미래상이나 아이디어의 참신성 못지않게 문명 비판적 맥락도 작품 전반에 깔려 있거든요.
앞에서 예로 든, 원폭을 예언한 단편 「데드라인」의 경우에도 소설 속에서는 전쟁 당사국들이 결국 원폭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언합니다. 원폭의 위력이 너무나도 대단해서 인류에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데드라인」 이전에도 이미 핵무기나 원자력을 상세하게 묘사한 SF소설은 여럿 있었습니다. 핵무기가 전 세계에 대량 확산되면서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은 일찍이 1941년에 어떤 SF작가가 예언한 바 있고, 그보다 앞선 1940년에는 원자력 발전소의 노동자 문제를 다룬 작품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이런 SF들을 보면서 과학기술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차원을 넘어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까지 일찍부터 주목했다면, 그 이후의 반핵 문제나 핵오염 등과 관련된 사회 문제도 일찍부터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SF는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 및 문화 양쪽 영역에서 모두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마이너 영역이었습니다. 그나마 인문학자들이 이런 쪽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의 원폭 충격 이후의 일이며, 그것도 과학 그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려 한 것일 뿐 SF의 문명비판 기능에까지 적극적인 관심이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SF가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본령 못지않게 문명 반성의 실제적 매뉴얼일 수도 있다는 점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여러 작품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지요. 그 결과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주저 <미래쇼크 Future Shock (197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역사 과목은 가르치면서 왜 ‘미래학’ 과목은 없는가? 우리가 지금 로마의 사회 제도나 봉건시대 장원의 대두를 탐구하듯이 왜 미래의 가능성과 개연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과목은 없는가?
...SF를 문학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미래 사회학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예측의 습관을 길러내는 정신확장력으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어린이들은 SF를 읽으면서 우주선과 타임머신에 관해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어른이 되어 부딪치게 될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윤리적 문제의 정글 속을 상상력을 발휘해 탐험해 보도록 이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SF는 ‘미래의 나’를 위해 읽혀져야만 한다.”
어때요? 이제는 우리도 학교에서 SF를 정식 교과목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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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와 미래 예측
이전에 저는 ‘다가올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해야만 훌륭한 SF인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어떠어떠한 과학기술이 이미 어느 SF에 일찍이 등장한 적이 있다면서 그 선견지명에 감탄하는 경우가 많지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들입니다.

1726년에 발표된 <걸리버 여행기>는 작가인 조나단 스위프트가 당시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쓴 것이지만 SF의 시조로 꼽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는 반중력장치가 등장하죠. 바로 하늘에 떠 있는 나라 라퓨타(사진 아래 왼쪽)가 이 원리를 쓰고 있습니다.
1911년에 나온 ‘장르SF'의 시조 <랄프124C41+>에서 작가 휴고 건즈백은 TV전화, 형광조명, 신소재, 자기녹음테이프, 마이크로필름, 스텐레스스틸, 전송신문, 태양전지, 자동판매기 등 수많은 과학문명의 이기들을 미리 선보인 바 있습니다.
또 1916년에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달세계 도착!>에서 현대의 우주선과 같은 방식의 달 여행을 묘사했으며, 액체연료로켓과 우주복, 그리고 우주온실까지 등장시켰습니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에드워드 스미스의 <우주선 종달새호(1928)>에는 초광속우주선과 반물질까지 도입됩니다.
또 1941년에 로버트 하인라인은 <메두셀라의 아이들>에서 요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유전공학이라든가 장수유전자로 노화를 방지하는 설정 등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에는 알프레드 앨튼 반 보오트가 <머나 먼 센타우르스>에서 인공동면에 의한 장거리 우주여행을 등장시켰죠.
아서 클라크는 1957년에 <해저목장>에서 해저개발, 고래목축, 해저주택, 플랑크톤 증식기법 등을 선보였고, 1968년에는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에서 태양계의 외행성 탐사와 인공지능 컴퓨터를, 그리고 1978년에는 <낙원의 샘>에서 우주 엘리베이터를 자세히 묘사했지요.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에드워드 스미스의 <우주선 종달새호(1928)>에는 초광속우주선과 반물질까지 도입됩니다.
또 1941년에 로버트 하인라인은 <메두셀라의 아이들>에서 요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유전공학이라든가 장수유전자로 노화를 방지하는 설정 등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에는 알프레드 앨튼 반 보오트가 <머나 먼 센타우르스>에서 인공동면에 의한 장거리 우주여행을 등장시켰죠.
아서 클라크는 1957년에 <해저목장>에서 해저개발, 고래목축, 해저주택, 플랑크톤 증식기법 등을 선보였고, 1968년에는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에서 태양계의 외행성 탐사와 인공지능 컴퓨터를, 그리고 1978년에는 <낙원의 샘>에서 우주 엘리베이터를 자세히 묘사했지요.
그런가 하면 오늘날의 인터넷이나 3차원 가상현실, 아바타 등은 1984년에 윌리엄 깁슨이 <뉴로맨서>(사진 아래 오른쪽)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그 구체적인 양상들을 그려보였습니다. 그런데 깁슨은 당시에 개인용 PC를 전혀 다룰 줄 몰랐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예들 중에서는 이미 현실로 나타난 것도 있고, 아직 불가능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반중력이나 초광속 우주선, 인공동면 같은 것은 여전히 SF에서만 접할 수 있죠. 그중에는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초광속우주선처럼.
과연 이런 SF들은 다가올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보고 미리 예측을 한 걸까요? 아니면, 혹시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는 없을까요? SF가 예측을 한 게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SF를 보고 거기에 나오는 신기한 것들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입니다.

원자폭탄을 예언했던 SF
잠시 흥미로운 역사의 비화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어느 날, 미국 FBI 수사관들이 뉴욕에 있는 한 작은 잡지사에 들이닥쳤습니다. 잡지의 이름은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Astounding Science Fiction)>. 그들의 혐의는 국가기밀 누설이었지요. 당시 미군(혹시 ‘미국’은 아닐까요?)에서 극비리에 개발 중이던 가공할 신무기가 그 잡지의 한 단편소설에 생생하게 묘사됐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작품은 클리브 카트밀이란 작가가 쓴 「데드라인(Deadline)」(사진 왼쪽)이란 SF였고, 이 단편에서 묘사된 신무기란 다름 아닌 원자폭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정부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을 끌어모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극비리에 원자폭탄을 개발하던 중이었지요. 그리고 그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언론매체에 그와 관련된 일체의 정보공개를 막았고, 심지어 과학 잡지에서 학술적인 주제가 되는 일도 교묘하게 방해했습니다.
그런데 SF잡지만큼은 아무런 통제나 공작도 취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발간되던 SF잡지들은 대부분 유치한 그림의 표지와 싸구려 종이, 말초적인 오락소설 등으로 채워져 점잖은 대접을 못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치한 SF작가나 독자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 결과 당시 핵무기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논의했던 사람들은 SF잡지와 그 독자들뿐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FBI의 취조 결과 밝혀진 정보의 출처는 다름 아닌 공공도서관이었습니다. 작가는 그곳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물리학 이론서만을 참고했을 뿐, 나머지는 오로지 작가의 과학적 상상력만으로 채워나간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 아니 SF작가의 상상력에 기인한 필연적 우연이었던 셈이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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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란 무엇인가?

SF의 시조(始祖) -- 토마스 모어, 메리 셸리, 휴고 건즈백
그러면 SF는 과연 무엇일까요? 언뜻 생각하면 쉬운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들면 이 문제는 꽤나 어렵습니다. 그저 우주선이나 외계인이 나온다고 해서 다 SF라고 할 수는 없거든요.
과연 SF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한 가지 방법으로, 먼저 'SF의 시조'들을 알아봅시다. SF문학의 시초를 누구의 어느 작품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 장르를 보는 관점이 각각 구체적인 차별성을 지니며 드러나게 되거든요. SF의 시조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SF를 ‘합리적인 가상소설의 범주’로 생각할 경우, 1516년에 토마스 모어가 발표한 「유토피아」가 '최초의 과학소설'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집필 당시의 환경을 고려할 때 매우 과학적인 형식논리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진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말하는 '가상소설'이란 ‘시공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배경과 이야기를 채택하는 작품’을 의미하지요. 이것은 대중적인 장르소설로서의 SF가 아닌 주류문학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기법입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비롯하여 남미 작가인 마르케스나 보르헤스, 그리고 오웰이나 헉슬리 등이 이 계열의 주요 작가입니다.

두 번째로, 현대 SF소설의 형식을 완벽하게 배태하고 있는 작품으로, 1818년에 발표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듭니다. 산업혁명 이후 발달한 과학기술 이론을 반영하여 내용 묘사에 사실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은유나 풍자, 수사 역시 빼어나게 구사한 걸작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나 브라이언 올디스 등 많은 사람들이 이 관점을 지지하고 있지요.


세 번째는, 오늘날 추리소설 등과 함께 대중적인 장르로 자리 잡은 SF, 즉 '장르 SF'의 시조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1911년 미국의 휴고 건즈백이 자신의 잡지에 연재하기 시작한 「랄프 124C41+」라는 소설(사진오른쪽, 사진은 소설에 들어간 삽화)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처음부터 발달하는 과학기술의 미래상을 일반 대중들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집필하고 상업적으로 출간한 것이며, '사이언티픽션(scientifiction)'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낸 것도 건즈백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SF문학상인 '휴고상(Hugo Award)'은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지요.



휴고 건즈백은 1926년에는 세계 최초의 SF 전문잡지인 <<어메이징 스토리(Amazing Stories)>>를 창간했는데, 이에 대해 독자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이자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여러 가지 SF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이른바 '펄프 매거진(잡지들의 종이 질이 나빠서 이런 별명이 붙었습니다)'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크게 인기를 끈 것이 이른바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불리는 우주 활극물로서, 이런 소설들의 기본 틀은 근육질의 미남 주인공이 우주를 누비고 다니며 미녀를 보호하고 모험과 로맨스를 펼치는 영웅담입니다. <스타워즈>야말로 바로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의 전통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작품이지요.

(사진 위는 펄프SF잡지들 )


뉴 웨이브 SF--‘innner space’에 대한 관심

현대 SF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또 한 가지 열쇠는 '뉴 웨이브 SF'라는 것입니다. 기존의 SF가 '바깥 우주(outer space)'를 탐색하는 것이었다면, 뉴 웨이브는 인간의 의식적인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안쪽 우주(innner space)'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뉴 웨이브SF는 사회의 구조적인 부조리나 인간의 내면세계, 심리 등을 SF적인 기법으로 새롭게 접근, 해석하려 시도했던 흐름으로서, 1960년대를 전후하여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활발하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난해하고 실험적인 성격이 강해서 기존의 SF 독자들에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요. 그래서 결국은 뉴 웨이브 SF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뚜렷한 작품도 없이 몇몇 작가들만이 주목을 받다가 흐지부지 SF의 주류에 편입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현대 SF문학이 질적으로 성숙된 면모를 갖추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SF를 'Speculative Fiction', 즉 사색(思索)소설, 추론(推論)소설, 또는 사고(思考)소설이라는 새로운 풀이로 보게 된 것도 바로 그 시기부터입니다. 좀 어렵지요?

그래도 SF는 단순히 과학기술의 계몽 수단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고유의 정서를 가진 하나의 예술 장르라는 사실만 새기면 됩니다. 다음에는 SF와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해 재미있는 사례들을 들어가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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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청소년을 위한 인터넷 사이트 글틴에 SF 평론가 박상준님이 쓰신글을 갈무리하여 올리는 글입니다.(이하 SF 문학의 세계는 모두 박상준님이 쓰신 글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과학적 합리성으로 무장한 상상력, SF

정지용이 자신의 책 「문학독본」(1948) 맨 앞에 붙였던 짤막한 서시가 있습니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

저는 SF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분기점은 바로 이 시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감상이라면 ‘삶에서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정도로 은유적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요.
그러나 SF독자들은 그에 더해서 ‘별똥별’이라는 구체적 물체에도 묘한 이끌림을 느낄 것입니다. 별똥별이 떨어진 곳을 정말로 찾아가 보고픈 생각도 들고, 혹시 그 별똥별에 무엇인가 담겨있지는 않을지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치지요. 그러면서 어느새 별똥별이 떨어진 곳보다는 별똥별이 온 곳, 즉 우주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SF든 판타지든 공히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SF독자들은 ‘마법’ 대신 ‘과학’을 택합니다. 설령 마법처럼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어떤 일이든지 상상은 자유지만 실제 구현 과정에서는 과학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도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경계가 모호해지지만(<스타워즈>는 SF가 아니라 판타지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론 불가능한 초광속비행이라든가 운동역학 법칙, 에너지 보존 법칙 등을 무시한 묘사들이 숱하게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SF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은 최소한의 과학적 형식논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이감‘을 주는 우주의 광경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장면)

그렇다면 SF팬들이 별똥별을 보고, 또는 우주를 보며 느끼는 그 특별한 정서는 과연 무엇일까요?
서양에서는 흔히 그것을 ‘경이감(sense of wonder)’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접해보지 못한 뭔가 낯설고 놀라운 대상, 그리고 그 존재로 인해 연상되는 온갖 미지의 가능성들. 우리는 이런 느낌을 시각적인 이미지에서 얻을 수도 있고(예를 들어 토성의 달 표면에서 토성이 지평선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토성과 그 거대한 테두리가 하늘을 가득 채우며 서서히 올라오는 모습은 아마 태양계 최고의 장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또 책에서는 활자매체 특유의 상상력 자극 작용에 의해 더더욱 증폭된 경이감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뭔가 허전하지요? 경이감은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SF팬들만의 독특한 정서를 명확하고도 핵심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까요?

시공간에 대한 인류적인 시야
<로마클럽>이라는 전 세계 여러 분야 학자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들은 일찍이 1970년대 초반에 인류 문명의 미래를 암울하게 진단한 보고서 「성장의 한계」를 내놓았지요. 인류 미래에 대한 그 불길한 시나리오들, 즉 자원고갈, 인구폭발, 환경오염 등의 내용은 대단한 충격을 주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변화가 당시의 예상보다는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상태입니다.

어쨌거나 그 보고서의 도입부에는 흥미로운 도표가 하나 자리 잡고 있는데, 사람들이 시공간적으로 얼마나 멀리, 또 미래를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를 인류통계학적으로 나타낸 ‘인간의 시야’라는 그림입니다. 그 그래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공간적으로는 자기 마을, 자기 도시, 자기 나라 이상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간적으로도 1년 뒤, 10년 뒤가 제일 많고 백년 이후 후손들까지 고려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요. 인류 대다수는 원점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이들은 그야말로 자기 입에 풀칠하느라 바쁜, 일터와 집만을 오가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삶의 시야에 갇혀 지냅니다. (물론 그런 삶을 살면서도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은 있지요.) 또는 기껏해야 자기 가족만 생각하며 1년 이상을 내다보지 못하는 삶의 시야를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보고서는 그래프 상에서 원점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들, 즉 시간적으로는 몇 세대 이후의 후손들까지 생각하고 공간적으로는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와 그 밖의 우주까지 아울러 사유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람직한 미래의 인류상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우주 속의 지구라는 천체’ 위에서 문명을 영위하고 있는, ‘인류의 시야’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시야야말로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SF팬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아서 클라크(사진 왼쪽)는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등을 쓴 세계적인 SF작가이자 미래학자인데, 1969년에 아폴로 우주선이 처음 달에 착륙하던 날 실황중계의 해설자 역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말한 바에 따르면, 인류 최초로 달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히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방송국 한 구석에서 어떤 직원이 스포츠 채널을 열심히 시청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인간의 달착륙 장면이 특별히 관심을 끄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물론 여기서 그 직원의 개인적 취향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은 이렇듯 다양한 개성과 정서의 소유자들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례라서 인용하는 것뿐이지요. 마찬가지로 SF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SF 팬의 입장에서는 우리 인류가 어서 우주로 진출하기를 간절히 바라겠지만, 사실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의 특정한 한 시기에만 달로 몇 번 왕복여행을 했을 뿐, 그 이후에는 오히려 퇴보해 버렸습니다. SF팬들의 입장에서는 꽤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인류 전체가 전부 다 SF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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